2006년 11월 13일 오전 7시 50분 수정. '정'훈 교수님으로 알고 있다가 교수님의 발견으로 수정. - 죄송합니다 (__), 성을 바꾸다니 .... 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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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흥미로운 강의였다. 예술과 자본 사이를 넘나들며 그 속에서 고뇌해야만 하는 ‘배고픈 예술인’의 처지를 너무 격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배부르지도 않게 잘 묘사해 줌으로써 ‘공연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를 높여주는 명쾌한, 근래에 보기 드문 강의였다.

특히 예상외의 이야기였던 ‘오페라’에 대한 발언은 논란을 일으킬 수도 있으나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 이는 나의 무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 부분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연기라는 것은 사실 개인적인 인식의 틀에서 이해하기를, ‘타고 나는 것’과 ‘갈고 닦아 지는 것’이 잘 융합되어야 멋진 연기자가 되는 것이라는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벗어날 수 없었는데 그 ‘연기’의 틀에 ‘오페라’를 집어 넣지 못한 것은 나의 오페라에 대한 편견이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제기해 보았다.

초중고 음악 교과서를 통틀어 보아도 뮤지컬 곡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오페라 나비부인’에 나온 음악이라는, 스쳐 들은 지식들로 채워진 학창시절의 음악시간이 풍성할 수 없었던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음이라.

그렇게 고상하고 왠지 ‘음악스러운’ 오페라는 ‘연기’와 무관하다는 선입견이 뇌리에 박혀 있었다. 사실 뮤지컬에는 연기자들이 나타나지만 오페라에서는 그런 연기자를 ‘딴따라’ 취급한다는 사회적 통념도 일조를 했다. 그러나 전훈 교수의 오페라가 재미없는 이유에 첫 번째로 꼽은 ‘연기가 안 된다’는 분명 내게 혁신적인 개념으로 자리매김 한다.

오페라도, 뮤지컬도 둘 다 ‘극’이다. 극이라는 요소는 성대를 울려 나오는 음성만이 컨텐츠가 아니며, 무대장치를 비롯한 모든 면에서 ‘시각’을 다룬다. 그런 모습의 ‘공연 예술’에서 연기가 빠진다면. 사랑의 아리아를 부르는 사람의 얼굴에 사랑이 피어 오르지 아니한다면. 정말 재미없는 ‘공연’ 아니겠는가?

한 때는 중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나오는 곡들만 익히 들어도 왠만한 오페라는 즐겁게 감상할 수 있을 거라는 편견 아닌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중 앞에 보여주는 ‘공연 예술’이라는 것은. 더군다나 창작 뮤지컬도 아닌 몇 백 년을 내려오는 ‘고정된 컨텐츠’를 공연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속에서 분명 다른 형태의 발전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난타’든 ‘점프’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변형된 공연이니까 말이다.

전통에 변화를 ‘강요’하는 자본은 패악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전통을 외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짊어져야 하는 의무가 아니던가?

수많은 컨텐츠 속에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건 제한되어 있다.

Posted by 함장

2006/11/12 23:36 2006/11/12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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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글은 조선일보 출판국장의 강의라 개인적으로 보이콧 했으며, 수강 내용과 상관없이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생각을 매주 적어내는 보고서이기 때문에 같이 수강하는 학우의 자세한 필기내용을 선독 후, 기술한다.

강의 내용은 참 훌륭했으나, 현실과 참 괴리가 있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부동산 대책에 대한 기획 기사를 쓰는 기자가 ‘몇 십억’을 가지고 직접 거래를 해 본 경험이 없어서 ‘이성’과 ‘과학’이 있는 ‘기사적 상상’으로 기획을 한다는. 예를 들어 강남의 집값이 비싼 이유가 ‘이효리가 강남에 살아서?’라는 상상보다 매매 차익이 어떻느니 투기 자본의 흐름이 어떻느니 하며 ‘과학적이고도 이성적인 사고’를 통한 ‘기사적 상상’이 쏟아내는 기획 기사가 더 합당하다는 얘기는 일견 옳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그런 ‘이성’과 ‘과학’ 따윈 상관없는 우주적 상상력의 극치와 왜곡을 넘나들지 아니하던가? ‘조선일보’라는 간판으로 인한 색안경을 억지로 벗고 보려 하더라도 이런 예시는 수강생의 헛웃음만 짓게 할 뿐이다. 아니 조선일보가 언제부터 그러셨나?

각설하고. 창의와 공부의 공통점 중 하나는 끊임없는 탐구심에 근거한다는 데 무척 공감을 하게 된다. 사물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거나 현상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면 이유 하나를 알아내기 위해 덤벼드는 그 열의야 말로 창의에의 욕구와 진리 탐구에의 욕구로 점철된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된다는 것, 김종래씨처럼 오로지 징기스칸 하나 만을 지독하게 파내려 가면서 얻어내는 소득이란 이루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어느 한 분야에서 상성을 이룬 사람은 다른 분야의 이치도 자연스레 깨닫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수동적이냐 능동적이냐라는 고리타분한 이분법의 인간형 속에서 늘 창의적인 사람은 ‘능동적’인 사고를 발휘하는 사람으로 몰아져 왔고, 설령 그 경계가 모호하더라도 ‘창의’라는 것은 가만히 있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그 이분법은 줄곧 주류 이론으로 자리잡아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잠재 가능성은 ‘수동과 능동’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인프라’, 즉 기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보급형 디카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서점에서는 그런 디카들로 찍은 사진을 어떻게 ‘예쁘게’ 만드는 가를 가르치는 책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그런 잔기술은 결코 ‘빛과 구도’가 만들어내는 ‘창의적 이미지’를 따라 잡기 어렵다. 이는 카메라 렌즈의 조리개와, 셔터 스피드, 노출 등의 기본이 이루어내는 하모니이니까 말이다.

창의의 기본은 원리의 깊은 이해에 있을 거라 생각된다.

Posted by 함장

2006/11/12 23:35 2006/11/12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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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홍보 기획과 전략이라는 것은 곧 그 기업이 상품화하고 있는 것을 얼마나 예쁘게 포장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한 기업의 ‘이미지’라는 것을 어떻게 포장하고 널리 알릴지, 혹은 숨길지에 대한 고찰도 해야 한다. 여기에는 어디까지를 진실로 할지, 그리고 어디까지를 거짓으로 할지도 포함이 된다.

법이라는 테두리는 늘 최소를 준수하려 노력하기에, 그 법이란 것을 교묘히 피해가는 것은 발상의 전환에서 가져오는, 악마와 하는 거래와도 동일하다. 지식층이 목에 힘줄을 내 튕기며 ‘공중파’라는 매스 미디어의 영향력에 제지를 가하려 여론 운동을 펴는 이유는 그 파급의 힘이 가진 횡포가 무섭기 때문이고, 그것을 이겨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일반 대중의 지식 기반에 대한 우려도 섞여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광고를 통해서 기업의 홍보를 맡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뒤에 서 있는 ‘자본’을 이용하고, 또 그에 과대포장을 해서 일반인에게 지속적인 노출을 하면서 이미지를 ‘세뇌’시키려 드는 것이고, 그로 인해 일어날 일상의 피폐를 막기 위해서 전파를 통해 일어나는, 혹은 신문 지면을 통해 일어나는 ‘광고’라는 것에 대한 ‘규제’를 행하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팬택 계열은 SKY라는 브랜드를 가진 휴대폰 제조업체를 인수하고, 업계에서 이미지 강화를 위해 ‘MUST HAVE’라는 강압적 카피를 통해 사람들에게 ‘세뇌’를 시도했으나 ‘뉴욕과 동남아’라는 시대적 트렌드를 아무런 생각 없이 – 혹은 노이즈 마케팅을 노렸을지도 모르지만 – ‘공중파’에 노출시킨 죄값을 달게 받아야 한다.

물론 우리 모두 이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공중파’를 통하는 TV 개그 프로에서는 ‘동남아’사람들을 희화화 함으로써 국민 전반에게 구시대적 산물인 ‘문화 차별론자’들을 일깨워 냈으며, 교과서에서 ‘인권’과 ‘평등’을 배운 사람들의 허위 의식 속에 깊숙이 박힌 ‘코카서스-유럽인종 우월 주의’를 이젠 아주 당당히 ‘광고’에 쓸 수 있도록 허용한 죄가 더 크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하인이다. 자본을 포장하고, 자본의 더러움을 감추며, 자본의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대한민국 국민 정서에 대단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천민 자본주의’의 물꼬를 연일 터뜨리고 있는, 그리고 그것을 부추기고 있는 ‘광고’들을 보면 볼수록, 과연 그런 ‘광고’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자본의 하위에 있는 사람인지, 기업의 하위에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만민의 상위에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돈’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노출시켜야 하는 거대 ‘기업 광고’는 자신들이 소비자에게서 취해가는 득만큼의 ‘윤리적 책임’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짧은 기억 주기를 가지고 있는 대중에게 나쁜 이미지는 ‘돈’을 통해 쉽게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분명 지성인들은 그 감시의 눈초리를 쉬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Posted by 함장

2006/10/30 09:09 2006/10/3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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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티브 단평 – 임영근

1930년대 경제 대 공황이 생긴 이유는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서 이루어진 결과인데, 현대사회에서는 사실 소비자의 ‘Needs’로 인해 공급이 이루어진다기 보다 기업의 ‘자본’이 시장을 형성하고 그 시장에 편입된 소비자에게 자신들이 생산한 것을 공급하기 때문에 과거에 이루어졌던 ‘과대 공급’이 가져오는 실패는 드물다. 그런데도 자본들이 불나방처럼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뛰어드는 이유는 ‘고부가 가치’라는 허울 좋은 로또 때문인지도 모른다.

FTA로 인해 스크린 쿼터가 축소되는, 그리고 몇몇 사람들에 의해 ‘영화는 문화가 아니라 산업’이라고 부추겨지며, 한국 영화도 경쟁력이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과연 이 사람들이 영화 산업의 자본 구도를 알고나 하는 소리인가 의구심이 들 때도 많다. 연간 30,000편이 넘는 시나리오가 충무로에 공급되고 그 중 100편 정도가 간택되어 제작이 되며, 그 100편의 총 제작비는 3,000억 원 정도인 국내 시장. 100편이 3,000억 원을 죄다 말아먹고 100편 중 6편 정도만 손익분기를 넘어 2,500억 원 정도의 수익을 벌어들인다. 잘하면 400억이 남는 장사. 잘못되면 1 원 한푼 안 남는 시장.

3,000억 원이면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한 편 제작비다. 세계를 시장으로 하는 산업과 국내 기반을 잡고도 늘 적자만 내는 – 물론 헐리우드 영화 산업도 늘 적자이다. 영화뿐만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하나의 소스로 여러 부가 가치를 팔아 먹지 않는 한 적자로 유지될 뿐이다 – 시장에게 개방을 내어 준다면 이는 자본에 농락될 뿐, 미래는 없다.

반면, 영화 <가문의 부활>을 제작한 태원엔터테인먼트 대표가 ‘오락영화의 존재 필요’를 역설하며 국내 평단에 대한 불만을 서슴없이 토로했는데, 이런 상황을 보면 영화산업의 수익구조가 가진 의의를 돌이켜 볼 필요도 있다. 온 국민 중 복권을 즐기는 국민이 한 건당 1,000원이 들어가는 로또를 사서 매주 어떤 국민에게 확률적으로 몰아주는 시스템과, 온 국민 중 영화를 즐기는 국민이 한 영화 당 7,000원이 되는 – 물론 이 중 3,000원은 극장이 먹고, 1,000원은 영화진흥기금과 세금으로 나가며, 3,000원이 제작사에 떨어져 일반적으로 그 수익은 투자사와 제작사가 6:4 정도로 나눈다 – 극장 표를 사서 재미 있을지, 어떨 지 확인 조차 안된 영화에 비용을 던지는 것은 ‘도박’과 다름없다. 그나마 로또는 천문학적인 확률이라도 존재하지만, 영화를 보고 느끼는 만족감과 ‘7,000’원에 대한 기회 비용의 비교로 얻어지는 결과들은 예측하기 어렵다.

쟝르의 다양성이 존재해야 한다는 핑계로 ‘저질’영화를 양산해내는 시스템을 ‘문화 보호’라는 명목으로 지켜야 할지, 아니면 자본의 논리로 시장 경쟁을 시켜야 할지는 여전히 논쟁 거리다. 하지만 이런 취약한 구조의 영화 산업을 너무 서둘러 개방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 중요한 것은 ‘자유’라는 이름의 뒤에 숨어있는 ‘지배 자본력’의 존재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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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매주, A4 한 장씩. 날로 먹는 근영 ㅡ.,ㅡ

Posted by 함장

2006/10/16 11:03 2006/10/1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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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라는 것은 결국 ‘가진 자’들이 원하는 것을 어떻게 포장하느냐가 관건이다. TV를 비롯한 모든 매체에 들어가는 모든 광고는 결국 광고주를 비롯한 ‘돈’이 있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권력이며, 행여 메이저 매체를 통한 접근이 아니더라도 광고라는 것이 가진 목적과 그걸 성사시키는 수단에는 위험한 부담이 따르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런 ‘가진 자’들을 위한 광고가 과연 ‘사실’을 기반으로 한 이성적인 접근인가, 아니면 뜬구름 잡는 감성적 접근인가에 대한 진위 여부이다. 따분할지언정 사실만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소비자를 비롯한 광고의 대상에게 가장 유효 적절한 모습일지라도 ‘가진 자’들은 그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무언가 좀 더 솔깃하고, 무언가 좀 더 끌어당김이 큰 ‘무엇’을 원한다. 그리고 광고업자와 카피라이터는 그것에 맞출 수 있는, 그리고 맞추어야만 하는 위치에 놓인다.

크리에이티브를 동원하여 멋진 ‘예술 광고’를 만들든, 그 무엇을 하든 결국 그것은 ‘상업적 광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공익 광고’라는 허울 아래는 보험회사의 로비와, 한국담배인삼공사와 보건복지부간의 묘한 갈등감이 녹을 수 밖에 없다.

가장 좋은 광고란 무엇일까? 자연스러운 방송이 가장 좋은 방송이듯, 자연스러운 광고가 가장 좋은 것일까? 사람들에게 짜증날 정도로 각인시키기 위해 ‘살균 세탁 하셨나요~ 하우젠’을 강요하는 것이 좋은 효과를 낸다고 ‘좋은 광고’라는, 자본의 척도로 잴 수 있는 것이 ‘좋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는 걸까?

국내 굴지의 그룹은 상속세를 안 내려 온갖 편법 불법을 자행하고도 TV에서는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문구를 통해서 이미지를 달리하고, 소비자들은 자연스럽게 신문 사회면의 ‘그룹’과 TV광고 속의 ‘그룹’을 나누어서 관리한다. 과연 이런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부여하는 광고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이겨내야 하는 사회적 부조리일 뿐이라고 치부하고 살아가기엔 너무 안일한 이야기가 아닐까?

광고 산업계를 보면서 어느 카피라이터는 기발한 문구 하나, 혹은 평범한 문구 하나로 그 ‘창의적’ 기재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회자되고, 어떤 광고회사는 제대로 된 광고주 하나를 옆에 끼고 희희낙락하면서 사람들 마음속에 선입견을 심어가고 있다. 이는 ‘돈’의 성공이자, 매체의 횡포이며, 공화국 구성원을 쉽게 무시하는 무지불식간에 일어나는 비극이다.

크리에이티브라는 것이, 그저 ‘효과를 극대화 시키는 창의’일 뿐이라면, 그 안에 심어져야 할, ‘매체’를 통한 세뇌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다면. 그건 참을 수 없는 ‘창의’가 아닐까?

광고의 뒤에는 늘 ‘돈’이 있다.

Posted by 함장

2006/10/09 11:13 2006/10/0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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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티브 단평 – 이창태 CP

하늘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면, 창조라는 것은 그저 발견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창조라는 것이 내 머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공개되고 인정을 받으려면 대중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창조라는 것은 그 누구의 이해도 얻지 못할 것이다. 대중성이라는 것이 상식과 이해, 기호, 가치관등이 공통분모로 작용되어 작용될 텐데 공감할 수 없는 정서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도배가 된다면 아무리 창의적인 컨텐츠가 도출된다 하더라도 각광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방송이란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좋다. 꾸밈없이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공감과 함께 부드러운 감정 이입을 이끌어낼 수 있다. 물론 세트를 꾸미고, 연기를 꾸미고 하는 것이 기본 바탕이 된다 할지라도 세트가 컨텐츠에 어울리고, 연기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은 보는 이들에게 얼마나 편안하고 재미남을 선사하던가?

사실 지루한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송보다도 작가가 구성하여 내러티브를 이끌어내는 능력에 사람들이 더 잘 공감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히 꾸밈이고 우리의 일상과 상당히 다른, 작가적 상상력이나 연출가의 사상과 맞닿아 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문제는 작가나 PD가 보여주기 위해 추구하는 방향이 대중성과 얼마나 맞아떨어져 있는 가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중성이란 것은 유희를 추구하는, 자극을 추구하는 대중을 말함이 아니라 뜬금없는 이야기에 분노하기 보다, 아귀가 잘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에 흥미를 돋우며 빠져드는 대중을 말한다.

방송이란 것은 제한된 시간 안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창의적이라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한 영화의 시작점에서 단 1분간의 영상편집으로 이야기의 프롤로그를 가볍게 관객에게 마스터하는 감독이 뛰어난 찬사를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창의적인 구성을 써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 하느냐. 바로 거기에 크리에이티브가 있고, 대중성을 포함한 사회를 이해하는 힘도 들어있다.

문제는 이미지로 이루어지는 편향성이다. 자본에 종속된 이미지는 대중을 편향되게 만들 수 있고, 오히려 신선한 이야기를 원하는 대중에게 고리타분하고 구태의연한 이야기 속에서 그저 새로운 각도의 이미지적 접근만을 통해 현상을 유지하려 한다.

창의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 창의적인 것이 대중과 가볍게 만난다면. 그것은 사회가 추구하는 공통선에 부합하여야 하는 것은 일견 올바른 시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공통선’의 시각마저 가릴 수 있는 ‘창의적 이미지’들이 방송을 가득 메운다면 칼과 방패까지 빼앗겨 버린 대중에게 다가 설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

우리가 매스미디어 사회에서도 책을 놓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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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수업 시작 1시간 전에 날림으로 쓰는....

그나저나 큰일입니다. 좀 독특한 학생이다 보니 경영학이랑 신문방송 복수전공하는데, 인사하는 사람은 늘어나는데 도무지 알아보기 어렵다는 ㅡ.,ㅡ

쩝. 오빠도 아닌 것이, 아저씨도 아닌 것이, 교수도 아닌 것이, 조교도 아닌 것이, 대학원생도 아닌 것이..... 커흑 ㅠㅠ

Posted by 함장

2006/09/25 11:08 2006/09/25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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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티브 단평 – MBC 박성수PD

Creative 라는 것은 한 사람의 노력에 대한 결과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를 통해 보상을 받기도 하며, 자기만족의 틀을 넘어서서 뛰어난 역량과 함께 비춰지는 산물이다. 애초에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고 하나, 사물이나 현상을 인지하고 그로 인해 학습한 뒤에 얻어지는 창조물들이 사람들 눈에 이채롭게 띄는 이유는 다름아닌 ‘독창성’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박성수 PD의 말대로, 크리에이티브의 출발은 통계를 무시하면서 시작된다. 기업사회에서 통계자료를 뽑아 수치화하고, 그를 토대로 마케팅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시장공략을 내세우는 것은 크리에이티브와 거리가 멀다. 시각적인 유희가 광고 효과를 통해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통계로 따져볼 수 있으나, 곧 그런 ‘유희’를 만들어내는 것은 통계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컨텐츠’라는 것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각 개인에게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존재감을 가진 컨텐츠가 있다. 그 수가 각자 다르다 할지라도, 저마다 가진 ‘특별한’ 경험들을 토대로 기존에 존재했더라도 누구나 생각할 수 없던 독창적인 내용물이 튀어나오니 말이다. 이는 온라인에 있는 여러 블로그들을 돌아봐도 마찬가지로 느낄 수 있는 이야기다. 천외천(天外天)이라 했던 것처럼, 다양한 사고와 함께 뛰어난 깊이의 철학과 상념들이 존재하는 광토(廣土)를 보면 일반적인 사회 통념의 커리큘럼과 동떨어진 사회에서 훨씬 뛰어난 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런 경우가 그저 ‘오감’을 자극하는 종류의 것이라면 예외가 되겠지만 말이다.

역시 중요한 것은 노력이다. 창의적인 사람은 굳이 많이 ‘알아야’할 필요는 없지만, 많이 ‘생각하는’ 사람임엔 틀림없다. 동일한 우유팩을 보고서도 어떤 사람은 재활용 쓰레기 정도로. 어떤 사람은 우유 탄생의 기원과 그 분자 속에 들어있을 소우주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듯, 분명 사고의 확장과 사유의 확대는 독창적이고도 창의적인 컨텐츠를 생각해 내는데 절대적 역할을 한다.

타인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오만이며, 어찌보면 만용이다. 그러나 사회의 관성과 기득권의 관념, 그런 것을 타파하며 ‘아니오’라고 외치고 뛰쳐나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분명 뛰어난 컨텐츠가 되지 않을까?

자본주의 사회라는 일면에서 ‘지적재산권’을 농락하는 ‘태왕사신기’ 따위를 제작하는 외주제작사들이 ‘한국 드라마’가 돈이 된다는 이유로 생겨나고 거대화해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공중파’ 방송이 가진 비기는 박PD 말마따나, ‘실험정신’을 부릴 수 있는 객기가 아닐까?

그의 또 다른 ‘실험정신’을 기대해 본다.

---------------------------------- 수업 시작 한 시간 전 날림으로 타이핑 ㅡ.ㅡ 번역 땜시롱 과제할 시간이 ㅡ.ㅡ

Posted by 함장

2006/09/18 10:58 2006/09/18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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