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다시피, 혹은 모르시는 바와 같이.

장장 10개월의 구직기간, 8개월의 대리운전 생활을 거치고 취업을 했습니다.

고생이랄 것도 전혀 없는 기간이었으며, 확실히 제 지난 14년 삶 중에 가장 안 바쁘고 여우로우며, 스트레스 또한 거의 없는 한 때였습니다.

비정규직이라는 아르바이트를 대체하는 허울 좋은 단어가 생겨난지도 벌써 몇 해가 지났습니다. 노동 착취가 갈수록 심해지고, 자본에 대한 두려움조차 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우리의 갈 길은 멀고도 험난하기만 합니다.

14년 전, 중학교 3학년 시절에는 어려운 가정형편에 '공군기술고등학교' 진학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담임부터 시작해서 3학년 담임 모두 뜯어 말렸습니다만. 고등학교 3년 학비나 생활비가 들지 않고, 공군 기술 하사관으로 갈 수 있으니 미래도 결정되고.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론 이런 머리가 당시의 제 머리에서 나왔을 리 없습니다. 육군 전차부대 하사관을 지내신 제 아버지의 선택이었습니다. 전역하지만 않으셨다면 당시보다 훨씬 '잘' 살 수 있으셨기에. 자식들에게는 그런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으셨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최선의 선택을 자식에게 부탁하셨던 겁니다.

결국은 교장선생님의 허가 도장까지 받아낸 공군기술고등학교 지원서를 찢어버린 것은 제 손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까지 제가 무엇이 될지 몰랐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랐으며, 제 미래를 그렇게 1달여의 고민으로 결정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제가 선택한 인문계 진학은 예상대로 어려운 생활이 되었습니다. 집을 떠나와 시작한 독서실 자취 생활은 '먹고 살기' 위해 '돈'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절감케 하는 하루 하루였습니다. 당시 시급 1,700원으로 모은 한달 알바비 십몇만원은 독서실비 5만원과 아침, 점심으로 먹는 캡틴 매운탕, 크림빵, 우유 값으로 대부분 들어갔으니까요. 그나마 그 어린 마음에도 '호프' 집에서는 일하지 않겠다는 - 물론 요즘은 미성년이 일하긴 불가능합니다만 당시 사회 통념상 불문율로 허용 되었고, 제 얼굴이 이미 그 당시엔 지금과 맞먹;;; - 의지로 더 많이 돈 벌 수 있는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제 어머니께서 어릴 때부터 옷은 칼같이 세탁해서 좋은 옷은 못 입혀도 늘 단정하게 입히셨습니다. 어디가서 가난한 집 아들이라고 욕 안 먹게 하시려고 늘 깨끗하게 씻기시고, 옷이라도 깔끔하게 입혀야 한다는 의지셨더랬지요. 그래서 비록 고등학교 3년 동안 혼자 살면서도 교복은 세 벌을 물려받아 한 벌을 이틀동안 입고 빨면서 깔끔을 떨었습니다. 덕분에 한창 땀 흘리며 농구도 하고 축구도 해야 할 나이였음에도 교복 입은 채로는 땀 내는 일을 잘 안 했습니다. 더군다나 하루에 두 끼니를 컵라면에 빵우유로 때우는 제게 일터에서 땀내는 것 외에 다른 쪽 소모는 허기만 지울 뿐이었습니다. 한창 먹을 나이였으니까요.

뭐 대충 이런 전략이 잘 먹혔는지 제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은 다들 제가 그토록 가난한 환경에서 공부한 걸 모르고 계셨습니다. 요즘 와서야 술 마시며 옛날 얘기하다가 이런 얘길 하면 '그렇게 가난했었나?' 하시면서 그 때 못 도와주신 걸 아쉬워 합니다만, 저야 선생님들 도움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덕분에 이렇게 선생님들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만.

어쨌든 IMF는 저를 또 다시 '군대의 길'로 이끕니다. 경기가 안 좋다고 개나 소나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거랑 똑같은 것이죠. 성적이 좋아도 서울에 방은 커녕, 학비도 댈 수 없는 상황에서 사관학교 지원은 당연한 선택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저는 비로소 '체념'이란 걸 배웠습니다. 뭐든 안 되면 들이대면서 부러질 때까지 싸우던 제가 드디어 자본에 굴복한 첫 경험이었습니다.

나중에 배워서 안 것이지만 전 당시에 '인지부조화' 과정을 겪고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 해군사관학교를 선택하면 90% 이상이 평생 해군 일을 합니다 - 길에서 그나마 '잠수함 함장'이란 꿈을 만들고, 그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라 스스로 주지시키며 맞대응 한 것이죠.

그래도 마지막 반항(?)은 했습니다. 이미 IMF 때문에 어쩔 수 없이 3사관학교에 진학해 생도 과정을 밟던 형과 울고 불며 말싸움을 하며 가족들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내가 지금 젤 싫은 게 뭔지 알아? 사관학교를 가야 한다는 거야!" 하면서 철부지 고3 티를 낸 것이죠.

지금도 가끔 그 때 왜 웃으면서 가족들에게 잘 된 거라고 하지 못 했을까라고 돌이켜봅니다만, 뭐 어쩌겠습니까. 남자들 군대 가기 싫은 거랑 똑같은 거죠 뭐.

사관학교에서 2학년 때 자퇴를 결심하면서 그 때 제 삶의 방향을 정했습니다.

"최소한 부모님과 내가 먹고 사는 것만 유지하면서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한다."

군생활은 선배들과 후배들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잘했음에도 그 자체가 갖는 구조적 열악함을 이해하면서 제가 노닐 물이 아니라는 게 확신이 섰기에. 더 치열하더라도 즐겁게 하고픈 일을 해보자며 뛰쳐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많이 착각하는 데 세상에 '자신이 원하는 일'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덤벼들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시스템과 그저 수동적으로만 받아들여야하는 '폐쇄적 구조'의 사회는 분명 다른 겁니다.

저는 사관학교를 나온 이후에도 제가 '무엇'을 하면서 먹고 살지, 제 '목표'가 무엇인지 정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을 해도 잘 할 수 있다는 마음은 '어떤 걸 하면 특출나게 잘 할지' 모른다는 것과 같으니까요. 고졸 학력으로 3개월 계약직을 전전하면서, 함께 일한 직원들이 일 잘한다고 인정해주고, 퇴사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연락을 해주어도 '고졸은 고졸일 뿐'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깨는 것이 절대 불가능한 벽이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세상엔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졸, 심지어 중졸로도 세상엔 뛰어난 일을 해낸 제 또래(?)가 몇 명 있습니다. 하지만 그 히스토리에 감춰진 '가진 자본력의 차이'는 그리 중요하게 부각되지 않습니다. 그저 그들이 열정이 있었고, 꿈이 있었으며, 그 꿈을 향해 '굶어가며' 달려들어 성공했다는 이야기 뿐입니다.

씨바, 저런 성공스토리를 볼 때마다 '대단하다'고 느끼는 것보다 '언론에서 또 지랄하네'라고 느낄 수 있는 건 역시 살아온 배경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의 열정도, 꿈도, 노력도 모두 존중합니다만 그들의 성공을 '돈 버는 사람들'로 포장해버리는, 그리고 그것을 '성공의 궁극'으로 만들어버리는 사회 또한 이제 서서히 '편견을 깨는 것이 절대 불가능한 벽'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사관학교를 그만둔 지 9년, 서울에 올라온 지 8년, 대학에 다시 들어간지 5년.

대학 졸업학기부터 구직을 하면서 대리운전을 시작한 이유는 '제가 원하는 직종에 정규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습니다. 7학기까지 계속 비정규직으로 일을 해왔습니다만, 이런 목표로 인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또 다시 덤벼든 것입니다.

이유는 딴 게 아닙니다. TV에 나오는 중3짜리 애도 '커서 무엇이 되고 싶어요, 무슨 일을 할 꺼예요' 라고 선언할 수 있는데, 저는 세상을 알아갈수록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채로 살아오다가 이제 조금씩 제가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고 심지어 'Career path'라는 걸 대충 그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제 삶의 방향이 이젠 더 물러서지 못 하도록 막아섭니다. '최저 생계를 유지하되 하고 싶은 일을 할 것'. 온갖 사회적 편견이 가득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 '서른의 대졸'. 하고 싶은 일은 인터넷 업계 쪽임에도 너무 늙은 신인이 되어버리는 사회. 그저 두드리는 방법밖에 없으므로 의지가 흔들리지 않기 위해 최저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작은 회사에 정규직으로 들어갔습니다. 원래 대기업은 바라지도 않았고,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곳보다 약간 규모가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기에 그만큼 원서를 쓸 기회도 적었으나. 해오던 일을, 하고 싶던 일을 대졸 신입으로, 정규직으로 이어갈 수 있다는 건 무척 다행인 일입니다.



지방 국립대를 나오고, 지방의 작은 회사에 회계 쪽으로 취업한 지 6개월 된 후배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일터가 싫다고, 비합리적인 회사가 싫다고, 그만두고 싶다고.

아마 여느 선배라면 조금만 참고, 2~3년 경력 쌓고 그 때 옮기던가, 어떻게든 버티면서 인정받으라고 조언해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 그렇게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배가 그 직장을 박차고 나와서 또 다시 대면하게될 학력차별과 사회적 편견들이 만연한 우리 사회를 알고 있음에도. 하기 싫으면 그만두라고, 니가 원하는 직장을 찾으라는 것 밖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전 후배들에게 이런 선배로 남기 위해 지금까지 버텨왔습니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을 '기득권이 권위적으로 내리누르는 사회구조의 하부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건 정말 아니라고 봅니다. 이건 회사나 국가나, 모든 조직체에 당연히 적용되는 생각입니다.

내 지인들에게 당당할 수 있게 살아가는 것. 그거 참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살아가려고 아둥바둥 노력하는 것이, '최저생계 이상의 돈'을 더 많이 벌기위해 아둥바둥 살아가는 것보다 분명히 낫다고 확신합니다.



그토록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아온 30년이 이젠 빚 2천만원 정도에 현금은 거의 없고, 월세보증금 2천만원 정도로 살아가는 또이또이한 인생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할 생각도 없고 그저 재미나게 우리 가족 안 굶고 살아가면 된다는 것을 현실화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직업? 그저 생계를 유지하면 됩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내가 일하고 싶은 조직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면 더 좋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를 이루기 위해 결혼을 포기해야될 것 같은 사회의 '또 다른 편견'이 찾아옵니다만 뭐 어떻습니까?

우리에겐 서로 자신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그리고 그런 삶이 우리를 더 나은 길로 이끈다는 믿음을 주는 '지인'들이 있잖습니까? 이런 유대감으로도 우린 충분히 세상의 편견을 바꿀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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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합격 소식은 지난 달 제주도 놀러갔을 때 들었습니다만, 지난 주 신입사원 OJT 교육을 받고 나서 입사를 완벽하게 마음 먹었습니다. 회사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보수적이라서 좀 심하다 싶으면 과감하게 접고 다시 또 10개월간 대리운전 생활을 하면서 구직할 생각이었습니다만, 다행히도 외부에서 경력직으로 들어와 일하는 선배 사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타 계열사와 완전히 다른 분위기라는 것을 깨닿고 '또 다른 편견'을 깨게 되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그들의 이야기도 '인지부조화'를 최소화하기 위해 합리화한 과정의 일부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니까요.

어느 회사 면접을 가든 다른 신입사원 면접자들이 제게 놀란 것은 '긴장 없는 태연함'이었습니다. 피식 웃을 수밖에 없지요. 제 친구들 말처럼 저런 10~20대를 보내면 왠만한 상황에선 탱자탱자입니다. ㅋㅋ

어쨌거나 마스크나 어법 때문에 어딜가나 신입사원 취급받긴 어렵습니다만. 신입은 신입일 뿐인 겁니다.

7월말까지 연수원으로 들어가서 인터넷이 두절됩니다. 다들 즐거운 휴가철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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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우 님께서 이어주신 '편견타파 릴레이'가 있었습니다만, 이 글로 대체를 하되 릴레이를 이어가진 않겠습니다. 릴레이를 시작하시고 이어오신 분들의 의향이 무척 훌륭하고 좋으며, 존중합니다만. 역시 글이란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에, 스스로 바통을 이어받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낳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세상의 많은 편견이 타파되길 바라며.

Posted by 함장

2009/07/19 18:10 2009/07/1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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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등학교 시절 학교 앞 도서 대여점에서 가장 불티나게 인기 있었던 밀리터리 소설은 단연 '데프콘' 시리즈였다. 이 좁디 좁고 외세의 침략만 받아온 나라가 중국과 맞짱뜨고, 일본과 맞짱뜨고. 나중엔 미국 본토까지 진격한다.

김구 선생을 근대의 민족 최고 지도자로 생각하던, '민족주의자'이던 내게 그 소설들은 질풍노도 청년의 심장을 4기통 모터바이크 엔진 피스톤 뛰듯 뛰게 만들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데프콘 시리즈를 쓴 사람 중 김경진 氏와 진병관 氏는 '동해'라는 잠수함 전투 소설을 써내었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 해군의 '저력'이 어디서 나와야 하는지 국민들에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난 보일러도 안 들어오는 자취용 독서실 TV방에서 담요 위에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50년만에 정권 교체를 이루는 역사적 사건을 목격했다.

그리고 이전 정권이 만들어낸 IMF위기 덕분에 더욱 더 추운 겨울을 보내며 고3을 맞이했다.



진로 따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수능 400점 만점을 맞아 국립대를 들어가 4년 장학금을 받는다 하더라도 주거비와 생활비가 감당이 안 된다. 그 IMF 시기에 어디에 담보를 잡히고 어디에 돈을 빌려서 '대학 따위'를 간단 말인가.

수능 모의고사 수학을 80점 만점에 평균 45점을 유지하는 실력으로 경찰대 시험을 봤다가 떨어졌다. 1차 시험 통과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거다.

덕분에 내 고3 여름은 얇은 수학 문제집 2권과 낮잠으로 가득 채웠다. 독하게 공부하기엔 허연 여백의 검은 글씨가 너무도 눈을 아프게 하여 감는 것이 좋았다.

그나마 수학의 정석 집합 부분처럼 때만 태우지 않고 2권을 끝까지 잘 푼 덕분에. 수능에서는 67점을 맞는 쾌거를 이룩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높은 점수를 맞고도 담임 선생에게 들은 것은 칭찬도 아니었다.

"사관학교 갈 늠이 점수가 이리 잘 나오면 너보다 낮은 애들이 고생하잖아 임마."

그렇다. 더군다나 5공화국 시절도 아니니 '육사'를 나온다고 좋은 대우 받는 세상도 아니었다.



내가 해군사관학교를 택한 이유는 순전히 위에 언급한 '데프콘' 시리즈와 '동해'라는 밀리터리 소설 때문이었다. 물론 IMF가 아니었다면 난 '사관학교'를 선택할 이유조차도 없었다.

내가 조국의 미래와 안녕, 끓어오르는 애국심으로 사관학교를 택했다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개그다.

내 학창시절의 애국심을 일깨워주는 것은 '애국조회'도 아니었거니와 오히려 성조기를 앞세워 '미국 만세'를 외치는 헐리우드 영화에 내 조국을 투영시켜 얻어낸 '만들어진 애국심'이었다.

경찰대 입시에 떨어지자 3개 사관학교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공군은 시력 때문에 제외. 육군과 해군 중에 해군을 선택하게 만든 것이 고작 두 종류의 '밀리터리 소설'이었다. - 고작이란 표현을 썼음에도 난 여전히 '데프콘'과 '동해', '남해'를 쓴 진병관 氏와 김경진 氏의 팬이다. 아마 내가 TV 드라마를 만든다면 이우혁 氏의 '퇴마록'과 함께 위의 소설들을 만들고 싶을 정도니까. -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이 '군대'를 갈 때의 기분이 어땠는지 묻고 싶다. 긴 시간 동안 사회와 단절되어야 하며, 남들이 무언가 '발전'하고 있을 때 자신이 동떨어진 사회에서 기존에 살아오던 사회의 시스템에 '정체'되어야 한다는 걸 인식하는 순간. 그 얼마나 두려웠던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이 '첫 취업'을 할 때의 기분이 어땠는지 묻고 싶다. 아무 데나 공채 자리가 날 때마다 되는 대로 꾸역 꾸역 자기소개서를, 원서를 써 넣진 않았던가? 그러면서 막상 자신이 '찝찝해 하던' 직장에서 덜컥 합격 고지가 들어오고 그리 내키지 않는 직장에서 첫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앞으로 '이 바닥'에서 살아야하는 그 숨막히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지 않은가?



사관학교란 그런 곳이다. 채 고등학교 졸업식도 하기 전에 '가입교'를 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입교와 동시에 4학년의 소위 임관식에 내려올 '국가 원수'를 맞이하려 분열 연습만 하다보면 어느 새 일상 생활은 군인이며, 꽃피는 봄이 와서 학과 수업이 시작 되더라도 취미 생활 수준이 되기 쉽다.

이게 사관학교 문제일까?

육군은 '육사', '3사', '학사장교(OCS)', 'ROTC'까지. 임관 경로가 많다보니 육사 졸업 후 의무 복무 기간 후에 잘릴 것을 대비해서 3학년 정도 되면 다른 자격증 공부하는 애들도 많았었다.

공사야 'Pilot'이 되면 취업 걱정은 안 한다고 봤을 정도였으니 당연히 날라리도 많았겠지만. 내부야 어쨌든 외부인의 시각으로 '날라리'라고 폄하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개방적인 동네였다.

해사는 말 그대로 군대였다. 육사나 공사는 아예 자체 캠퍼스였지만 해사는 출입구 자체도 행정학교와 56전대를 같이 쓰고 있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해사출신 90%이상이 20년 이상 근속을 하는 곳이 바로 해군이었다.

이 모든 '아이들'이 대한민국의 '주입식 교육체제' 속에서 살다가 어느 새 갑자기, 막 성년이 된 나이에. 크게 룰을 어기지만 않으면 평생 직장이 될 법한 자리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 군대를 갔다 온 대한민국 '남성'의 평균 취업 연령은 27~29세가 될 것이다. 이 중에 미래에 대한 고민, 자기 설계 등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믿고 싶다. 나도 이제 어렴풋이 그 속에 들어갈 수 있으려나 속으로 자문할 정도니까.

하지만 사관생도들은 이미 20대 초반에 자신의 미래 직종이 결정되어 버린다. 물론 그 속에서도 병과가 있고 자신이 원하는 걸 지원할 수는 있지만. 지금의 우리 일반인을 돌아보라.



홍세화 선생이 자신의 자녀들을 파리에서 키울 때, 중고등학생인 자녀들이 스스로 지지하는 정당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얘기하였다. 물론 지금 성장한 아이들도 그 때와 '동일한' 사고 과정을 거치면서 논리를 펴진 않겠지만, 어릴 때부터 학습된 논리적이고도 정연한 사고 구조는 훈련될수록 더욱 빠르고 정확해질 수 있다.



나는 늘 살아가면서 '계속 변하기'를 원한다.

어떤 사람들은 '초심'을 잃지 말자고 얘기하는 데 거기에 비춘다면 내 '초심'은 늘 '깨어있는 채로 변하고 또 변하자'가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늘 '처음처럼 나를 지켜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는 것 같다.

당장에 나를 보면 그렇다. 가장 처음에 언급했던 '민족주의자'던 내가 현재는 '민족주의자'들을 혐오하고, 심지어 '국가주의자'들까지도 혐오한다. 그러나 나는 '애국자'다. 내가 가진 경제력으로 이 나라를 벗어나서 이러한 삶을 누리기란 어렵기 때문에 나는 이 나라가 '건전한 방향'으로 잘 되길 바라므로, 나는 애국자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옳다거나 내가 믿는 바가 절대적이라는 생각 자체가 글러먹은 거다. 얼마나 인간의 '이성'에 합치하는가와 같은 '원칙'조차 없는 맹신은 썩을대로 썩은 종교와 무엇이 다르던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대부분 아집이다.



고작  몇 년의 시간 동안 나는 국가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인간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뭔지 고민하는 인간에 이르렀다. 그리고 난 아직 20대다.

내가 해사를 떠날 때 4중대 훈육관님이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어쩌면 사관학교를 나와 줄곧 군에만 있던 훈육관님 자신이야말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고.

어느 해사 동기생의 결혼식 날 만났던 동기는 내가 사관학교를 때려칠 때 같이 때려쳤어야 했다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어떤 해사 동기생은 오늘도 국가의 안녕을 위해 늘 '패기에 찬 이정재'처럼 열심히 살고 있다.

우린 스무 살에 그토록 함께 뒹굴며, 전우애를 외치며 이 나라의 'A few good men'이 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엔 스스로가 가진 직장에 대해 만족하거나 괴로워하는 '똑같은 사람'이 되어 있다.



조선일보에서 2004년에 언급되고 그 뒤에 동아일보에서 근래에 '재탕'을 해먹은 '2004년 육사 가입교 생도 34%가 미국을 주적으로 생각한다'는 칼럼은 내가 봐도 역겹다.

그 가입교 생도들이 현재의 4학년일텐데, 이들이 저 생각을 사관학교 4년의 커리큘럼을 통해 바꾸었으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이는 저 질문에 '잘린 부분'이 '미래의 주적'이든 '현재의 주적'이든 간에 현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가장 안도할 수 있는 부분이다.

더군다나 나랑 내기해도 좋은데 저 생도들이 저 질문에 저렇게 답한 이유는 '전교조' 교사는 커녕 내가 위에 언급한 '데프콘' 때문이라는 게 더 설득력 있다. - 참고로 '데프콘'의 저자이자 '동해', '남해'의 저자인 진병관 氏와 김경진 氏는 해군의 초대로 내 동기들 4학년 원양 실습 때 함께 동행 취재가 허락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모든 건 교육과 사회의 시스템 문제다. 초등교육과 중등교육 과정에서 아이들이 얼마나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지. 이 아이들이 '대학'을 갈지, 아니면 성인이 되면서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지 고민할 수 있는 여건이 없다.

그 뿐인가? 학력 인플레가 만든 '대학=취업학원' 시스템은 이 사회 전체를 갉아 먹으며 대한민국호를 침몰시키고 있다.

그나마 재수에, 삼수, 거기에 해외 어학 연수, 군대, 졸업하면 서른인 대학생이 늘어가는 데도 이 나라의 취업 문제는 해결의 기미가 안 보인다. 경제 인구에 편입되는 것이 늦어질수록 나라는 약체로 굳어져만 간다.



그런 여건에서. 공사 4학년이면 고작 스물 셋, 재수에 삼수를 했다 해도 스물 다섯.

그 나이에 군대와 같은 커리큘럼에서. F-15K가 살인 기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에서 희망을 보는 건 나 뿐인가?

오히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똥인지 된장인지 뭣도 모르고 진보와 보수조차 구분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청년들이 더욱 늘어가는 세상에서.

엉뚱한 데서 튀어나온 희망이 더 우울하게 느껴지는 것도 나 뿐인가?



F-15K가 전쟁을 억제하여 '활인'을 하는 게 아니다.

평화에 대한 의지를 가진 '진정한 정치력'이 '활인'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리고 그 진정한 정치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건 '깨어있는 시민'만이 할 수 있다.



저런 '위대한 생도'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더욱 더 키우지 못 하고 퇴출시킨 꼰대들을 보니 앞으로도 갈 길은 멀다.

Posted by 함장

2008/10/14 08:52 2008/10/14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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