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첫 여성 위원장에 장혜옥 선생님이 당선되었다.

내가 이 분을 처음 뵌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 당시 내가 살던 경북 영주에서는 남녀공학이 없었는데, 경북 도립 도서관 내부에 '영주 학생 독서회'라는 연합 써클은 그나마 종교 동아리 제외하고 유일하게 '남녀' 학생이 어우러져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동네였다.

문학은 커녕, 가난에 쳐박혀 어릴 적 흔하디 흔한 세계소년소녀문학전집 한권 읽어 본 적이 없는 나는 그저 '여학생'을 볼 수 있다는, 엄밀히 말하자면 '짝사랑'하던 소녀의 소식을 들을 수 있겠다는 희망하나에 세익스피어 4대 명작의 이름을 달달 외워가며 동아리 '입문식'을 치루었다.

그 동아리는 각 학교로부터 나름의 '인정'을 받기 위해 '지도교사'라는 직함의 선생님을 모셔야 했는데, 마침 그 때, 지도교사로 계셨던 분이 바로 장혜옥 선생님이셨다.

1년이 좀 넘게 선생님과 매주 주말에 만나게 된 것은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다. 비록 동문들의 '분란'으로 동아리가 지금은 붕괴되어버렸지만, 그 곳에는 내가 고등학교 국어시간에도, 문학시간에도, 국사시간에도, 역사시간에도, 윤리시간에도 배우지 못했던 이야기들과 생각들이 넘쳐났다.

고만고만한 또래들의 고만고만한 생각들이 오고가고, 여기저기 잡다한 논술서적의 코멘트들을 읽고와서 퍼나르는 얄팍한 지식의 광고효과와 나같이 잘난 척의 극치를 달리며 무조건 나만 옳은 지 알고 사는 무대뽀 고집불통의 무식한 논리 전개는 지루한 독서 토론의 장을 획일화 시키고 편향화 시키며 서로 물고 뜯을 것처럼 싸우는 전쟁터로 만들기도 했다.

그런 조무래기들의 토론을 늘 끝까지 지켜보시며, 토요일 오후 황금같은 휴식의 시간을 모두 할애하여 생각을 들어주신 후에 총평을 잊지 않으시던.

그런 선생님이셨다.


어느 날, 토요일 오후, 동아리 방에 선생님과 나만 먼저 도착하여 있을 때. 선생님께서 내게 건넨 한마디.

'영준아, 넌 말야, 뭐랄까..... 현학적인 것 같아'

독서량도 거의 없고, 배운 것도 별로 없으며, 그저 잘난척으로 일관하던 내게 상처 받으랴 걱정하시며 조심스레 건네신 그 한마디.

물론, 아직도 배운 게 별로 없어, 여전히 글에는 현학적인 단어들로 도배 되어있고, 가르치려하는 태도는 많이 고치지 못했지만.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도록 늘 경계하게 만드는 그 한마디 가르침이 지금 나를 있게 했다.


전교조에 대한 그 어떤 비난이 있더라도 전교조를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이런 분이 내부에 계시기에. 자정능력을 믿기에.

그렇기에 지지하고, 지켜본다.

너무나 반가운 소식에, 과거를 추억해 본다.


p.s 내 예전 여자친구와 결혼 약속을 잡으며, 장혜옥 선생님을 주례 선생님으로 모시려 했었다. '사상 첫 여성 주례 선생님'으로 말이다. 물론 우리가 아는 선에서의 '첫' 여성 주례셨겠지만. 그녀도 이 소식을 반가워할지는 모르겠다. 교사가 되었는데 전교조에 가입했는지는 모르겠다.

Posted by 함장

2006/03/31 14:58 2006/03/31 14:58
Response
No Trackback , 30 Comments
RSS :
http://harmjang.com/rss/response/486


블로그 이미지

수정 자본주의자의 삶

- 함장

Archives

Authors

  1. 함장

Calendar

«   2010/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Site Stats

Total hits:
1887336
Today:
196
Yesterday:
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