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벌써 수 십편의 에세이를 남겨왔듯이, 살아가면서 내가 느끼고 생각했던 무수한 감정들을 글로 남기는 것은 분명 내 삶에 대한 태도를 타인에게 이해시키기 위함이었다. 삶에 있어 본질적으로 하나의 결단을 내리기 위해 수많은 이해관계와 그 속에 숨겨진 진정성, 의의, 명분 따위를 논리적으로, 감성적으로 설득시키기위해 나 자신을 타자화하고, 수많은 질문과 해답을 던지며 고뇌하는 모습이 글에 고스란히 남을 경우 뿌듯한 수필이 되는 거다.

사람은 늘 세월이 흐를수록 보수화된다. 내가 원치 않아도 어느 새 생각은 굳고, 감수성은 더뎌지며, 심드렁한 이야기로 삶의 편린을 채워나갈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을 타파하고 버텨내기 위해 우리는 늘 새로운 것에 익숙할 수 없는 감정을 포용력으로 대처하려 하고, 관용의 자세라는 미명하에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수필의 소재가 일상다반사 되어버린 우리네의 보수적 모습에 대한 냉소나 혐오였다면, 장영희 교수의 소재는 어느 새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한 보수화의 모습을 주변 사람들의 눈을 통해 깨어나가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소아마비를 딛고 일어서 주변의 차별섞인 시선에도 꿋꿋이 일어나 싸워온 전사 같은 모습이 글 속에 녹아 있음에도, 그 무엇도 확실한 것이 없는 삶의 진행과 그 사이 사이 자신과 타인이 느낀 하나의 ‘정체성’에 대한 괴리감을 찾아내고, 그에 대한 ‘변명’을 늘어 놓아, 결국 자신이 취하는 태도에 합리적인 명분을 얹는 이야기들로 채워진 이야기들은 내 삶의 그것과 무척 닮아있다.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 삶을 대하는 태도를 갖고 있고, 이에 입각해서 자신의 행동을 구체화하고 논리적으로 그 행동에 대해 언제든 ‘변명’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버릇이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이유따위 상관없이 ‘그냥‘이라는 한 마디로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해 이해를 거부하기도 하지만, 서로의 소통을 통해 인간으로서 공존한다는 기본 취지에 동의하는 사람들이라면 저마다 그런 ‘변명거리‘를 준비하며 타인을 대한다.

이는 곧 신념과 연결되어 자신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방향성을 긋기도 한다. 장영희 교수의 이야기에 묻어나는 이 ‘변명‘들은 결국 자신이 스무살의 감성에서 ‘옳다고 믿어온’ 신념들이 미처 자신이 깨닫지도 못한 시간 사이에 ‘보수화‘되고, 잊혀져가고 있던 사실들에 대한 깨달음을 일상 속에서 발견하며 즐거워하는 내용이다. 처음에 그 마음을 잊지 않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을 통해 자신이 ‘잊었던 신념’을 환기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깨어있는 것이리라.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도, 여전히 자신의 직업인 교수직을 잃을까 두려워해야하고, 하루 5분 샤워를 할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쫓겨 살면서도 주변 인물의 지나치는 말 하나에서 자신이 ‘잊고 있던’ 가치를 되새기는 모습. 그것이야 말로 정말 ‘깨어있는 지성인‘이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 아닐까?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마음먹은 사람이 세파에 꺾이고 찌들어도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감성을, 지성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가는 게 아닐까?

‘살아가는 사람‘이 아름답기 위해, 삶을 대하는 태도. 그건 분명 생각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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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함장

2007/11/05 09:44 2007/11/05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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