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 - 20대는 죄가 없다.

일본의 2008년도 2분기에 시작된 드라마 중에 '판도라'라는 것이 있다.

한 국립대 의대 연구원이 '모든 종류의 암'을 치료하는 약을 개발해버리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루는 듯 - 아직 1회까지 밖에 안 나왔지만 이미 1회에 약을 개발했다 - 하다.

감히 건방지게 말하지만, 왜 제목이 '판도라'인지 벌써 깨달은 분들은 그나마 세상 돌아가는 꼴을 어느 정도 보시는 분들이고, 도무지 '왜' 제목이 판도라인지 아직도 감이 안 오시는 분들은 순진하게 세상 사시는 분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가 '사회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면, 아니 적어도 영국이나 유럽의 일부 국가처럼 무상 의료가 진작부터 지원되는 나라였다면 위의 '모든 종류의 암'을 치료하는 약의 개발이 그토록 무서운 '판도라의 상자'가 되진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 대한민국과 일본은 그 빌어먹을 '자본주의' 사회에 충실하다 못 해 사람 목숨을 돈으로 따져야 하는 - 일본도 우리도, 암 치료비 때문에 집의 재정이 풍비박산 나며, 이로 인해 돈이냐 목숨이냐를 따져야 하는 더러운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 슬픈 나라가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TV시리즈에서처럼 '모든 종류의 암'을 치료하는 약이 실제로 개발되어버리면 일본은 절대절명절체절명의 위협을 받게된다. 일본의 생명 또는 질병 관련 보험 중 '암'과 관련된 상품은 무너져 버리고 보험의 기능이 무너짐과 동시에 금융권의 악재가 온다. 이와 더불어 '암'으로 인해 죽어나가야 할 예상치의 인구가 급작스레 '살아가기' 시작하고 이 인구는 고스란히 최고령 인구가 즐비한 일본사회에 더더욱 무거운 짐으로 나타나 버리며, 이는 사회의 공멸로 이어지게 된다. 더군다나 이런 일이 일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 세계에서 '암'으로 돈을 벌어먹고 있는 모든 산업에 위해가 가해진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그 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기득권'이다.

그러나 이런 사태가 올 수 있을까?

자본주의 국가에서 대의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빌어 기득권이 해낼 수 있는 만행은 인간이 얼마나 '금권'에 타락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약'이 개발되면 손해를 보게 되는 제약사와 병원, 금융권은 연합을 해서라도 후생성을 비롯한 관료들에게 로비를 하여 약이 '절대'로 출시되지 못하도록, 혹은 '출시하더라도 전 재산을 털지 않으면 안되도록' 가격을 조정하게 된다. 이로 인해 '충격'은 완화되고 결국엔 가진 자들의 배를 불릴 지언정, 진정한 '암의 정복'은 결국 '한 과학자의 인간승리'가 아닌 '금권의 승리'로 둔갑할 것이다.



이는 신약 개발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엄청나고도 급격한 변화는 언제나 '기득권'을 위협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변화는 새로운 '기득권'을 낳게 된다. 그리고 인간이 언제나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에 '욕심'은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버리기 어렵다. 그리고 그 중심은 언제나 기득권의 회유와 협박, 달콤한 유혹에 시달릴 것이다.



또 다시 실망 뿐인 - 이재오를 무너뜨린 문국현 케이스 제외 - 선거가 끝났다. 기득권은 밤낮 안 가리고 국민을 농락했고 국민은 또 다시 무장해제 당하고 멍청히 투표를 하지 않았다. 정치 혐오감이든 나발이든 중요치 않다. 지금의 20대를 만든 것은 지금의 4~50대 부모와 그들이 즐겨보던 조중동이며, 대입 외에 다른 꿈을 꾸지 못하게 한, 기득권이 만들어 둔 시스템일 뿐이다.

20대는 벌 받을 일이 없다.

기득권이 만든 기본적인 교육 시스템조차 파괴시키지 못한 이 사회의 중년들이 이 사태를 고스란히 책임져야 할 것이다.

20대는 분명 책임이 없다.

열 아홉부터 종이 쪼가리 도장 찍을 권한 준다고, 대가리에 똥이 들었는지 글로벌하게 원대한 꿈이 들었는지 따지면 뭐 할 것인가? 그 속에 뭔가 채울만한 그런 기반조차 주지 않은 채 바라는 게 너무 많다. 이들은 그저 이제부터 당신들의 '개발독재' 때처럼, 그렇게 허리 졸라 살면 그만이다. 서로 시기하고 경쟁하고 물어 뜯고 살면 된다. 30대들, 자신들도 그런 기반 없이 이 사회를 버텨왔다고 이들에게 '우리는 그랬어'라면서 저항의 삶을 강요할 텐가? 자신들이 읽어오던 '빨간 책'이, 맑시즘이 사회에서 퇴출되고 있는 동안, 당신들이 '밥벌이'에 바빠 신경쓸 겨를이 없던 동안, 이들이 권력에 의해 '취업에만' 힘쓰는 불쌍한 자본주의의 기계가 되어가는 동안.

20대를 비난하지 말자. 이들은 그런 사춘기를 보내고, 남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비극에 놓였다.

이제 고민은 오히려 중년, 당신들의 것이다. 애새끼들은 서른이 넘어도 취업하지 '않은' 채로 집에서 돈 달라 보챌 거고, 의료보험 민영화되어 늙어가는 몸이 아파도 병원은 커녕 약도 못 사고, 연금이고 나발이고 수급액은 줄어들어 결국 피폐한 노년이 될 테니 말이다.

결국 모든 것은 '기득권'이 원하는 방향대로 흐른다. 가끔 변수가 생겨봤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기득권은 '돈'을 가지고 '사람'을 농락한다.

그에 대항할 수 있는, 현실의 유일한 방법인 '대의 민주주의'조차도 결국 '돈'과 '권력'에 농락당하면 끝이다.

슬슬 땅값 오르던 노원구에 노회찬이 아닌 '한나라당 홍정욱'이 됐다.

유시민을 두 번이나 당선시킨 덕양구 갑에 재개발 시기로 슬슬 땅값이 오르더니 심상정이 아닌 '한나라당 손범규'가 됐다.



판도라의 상자에 '희망'이 남았다고 하던가?

그 희망이 의지로 발현되어 결국 우리는 나설 것이다.

투표고 나발이고 언제나 물러나 무임승차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내 아버지 세대의 무지렁이처럼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결국 짱돌을 손에 쥐고 금권에 타락한 정권에 맞서고 피터지는 사람들이 없는 한 신의 '약'은 일반 국민의 손에 오지 않는다.

내 학창시절을 386, 486 선생들의 아래에서 보냈던 걸 감사해하며.

p.s 시위장에서 자주 봅시다 여러분.

Posted by 함장

2008/04/10 13:44 2008/04/10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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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의 작은 의미

영화 '화려한 휴가'는 영화적 요소로만 이야기하자면 좀 많이 모자라다 못해 실망스러운 면도 자주 보인다.

그러나 감정 이입이 되어 펑펑 운 사람들과 '5.18'을 팔아먹는 상업주의 영화라 혹평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민감한 소재임엔 틀림없다.

난 사실 이 영화를 많이 봐주기 보다 차라리 5.18 다큐멘터리를 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영화화'했다는 것이 더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쉬운 방법이긴 하나 - 이 나라는 이미 한 영화에 천만 인구가 들러붙은 적이 있지 않은가? - 그 참혹한 진상을 사실 그대로 전하는 게 더 필요해 보여서다.



왜냐고?



30~40대의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이 영화를 '젊은 사람들'이 보고 과거를 기억해줬으면 한다는 건데. 이건 정말 어렵다.

생각없이 사는 건 죄가 아닌데. 그 생각없이 사는 '덕'을 보는 권력자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만인'에게 피해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 못 하고, 심지어 복지 정책과 공산주의 정책을 구분 못 하는 '젊은이' 들에게 이 영화를 보고 얻은 감상은 뭘까?

'전두환이 나쁜 놈인데, 거 대학생들은 김대중이 부추겨서 데모한 겨. 맞을 짓 했지'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주유소에서 기름 넣으려면 김대중 만세 세 번 외쳐야해'

내가 이런 이야기를 20대, 심지어 10대의 '서울' 아이들이 영화를 본 후에 나오면서 뇌까리는 것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안하지만 이제 더 이상 우리네 대학에서는 학력 인플레로 인한 바보들은 늘어났을 지언정, 자신이 뭔 삽질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보다,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는 길로 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아해들이 더 많아졌다.

이 아해들은 5.18에 어떤 일이 이 나라에서 벌어졌는지,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아니. 알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왜' 중요한지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 아해들이 '생각이 없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무엇이' 더 중요한지 철학적 사고의 결과물로 그 둘을 비교할 줄 모른다.

'데모'가 얼마나 '나쁜 걸'로 인식이 되었는지, 헌법에서 보장하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눈 뜨고 퍼렇게 살아 있어도, 데모는 나쁘다고 생각하나보다.

하긴 이랜드 사태로 인한 '기업'의 손실이 막대함을 이야기하며 '불법 투쟁'이라는 단어를 붙여 생존권을 가볍게 무시하는 저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세상엔 아직도. 5.16이 혁명이라 주장하는 '미친 새끼들'과, 5.18이 빨갱이들의 난동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라 굳게 믿고, 그 믿음을 '복음'처럼 - 이 땅을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굽어 살피사 - 전파하는 '개새끼들'이 많다.

그렇기에 '상업주의 영화'든 뭐든.

광주의 '참상'을 좀 더 많은 '無知人'에게 알릴 수 있는 방식이라면 분명 '화려한 휴가'가 가진 의미로 충분하다.



그러나 넘쳐나는 영화평과, 그 시절에 대한 회고도 중요하지만.

저 위에 언급한 쓰레기 생각들을 어떻게 까부수느냐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Posted by 함장

2007/07/31 04:34 2007/07/31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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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 대한 단상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미디어작문 수업 중 과제.
자유로운 주제, 자유로운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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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7월에 개봉한다. 5.18을 배경으로 광주에서 벌어진, 군부독재의 민중 탄압 사건을 극화해서 만든 영화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이 땅에 ‘자유’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화두에서 5.18은 빼 놓을 수 없는 이야기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자유’의 개념과 ‘반공’의 개념을 헷갈려하는 사람이 많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가지는 철학 자체가 ‘자유’와 정반대되는 개념이 아닐진데, 그 ‘자유’를 제한하려는 요소 때문에 싸잡아서 비난한다. 그러나 더 웃긴 것은 ‘자유’에 대한 교육을 하면서 이 자유가 타인에게 방해가 될 경우 ‘방종’으로 치달을 수 있다며 자유의 ‘제제’가 가능하다는 선을 먼저 그어둔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 교육인가?

자유라는 것이 가진 광범위한 의미와 그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타인의 피해라는, 마찬가지로 광범위한 의미는 분명 ‘자유’가 가지는 한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종족이 사회를 구성하면서 생기는, 서로의 마찰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이 한계는 분명히 어떤 형태로든 ‘제한’을 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제한’이라는 것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야만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정당화라는 단어를 쓰는 것도 두렵다. 자유에 대한 제한이 ‘정당화’된다는 논리는 어떤 면에서든 악용될 우려가 있다. 인간이 만드는 시스템의 한계는 늘 그 악용과 선용(善用) 사이에서 저울질을 한다. 분명 ‘사회적 합의’라는 토를 달았음에도, 이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모두가 알고 있는 숙제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이 가진 ‘사상’에 대한 제제를 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사유는 자유로워야 하며, 이에 대한 방해는 불가능하다. 이는 좀 더 확장하여 이야기하자면 그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한 방해도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보장이 필요하다. 외적인 강압이나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폭력에 의해 생각을 꺾게 만든다면, 이는 인간이 가져야 하는 원천적인 ‘자유’를 빼앗는 것이다.

범법자를 가두어 육체적인 ‘자유’를 빼앗아 제제를 가하는 것에는 모두 동의하여도, 비전향 장기수나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의 육체적 제제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심야에 자동차가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무단횡단을 하는 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규칙을 어겨도 ‘지금 상황에 그건 따를 필요가 없어’라는 생각의 자유를 실제 의사로 표현한 것이다. 자기 양심의 의무냐 합리적 선택이냐에 대한 평가는 스스로 내리는 ‘자유’가 있고, 이에 대한 법적용도 탄력적이길 기대하는 것이다.

언제나 따르는 이야기,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원칙에는 우리 모두 동의한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데도 책임이 필요하다. 더불어 그 표현을 받아들이는 수용자도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관으로 비판하여 받아들일 책임이 따른다.

우리 나라에서 심심하면 ‘사회적 통합’을 운운하는 분들이 걱정하는 것과 달리 그런 생각의 자유가 표현된다고 해서 사회는 선동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많고, 그런 사람들이 어우러져 ‘우리’를 이루기 때문이다.

타인이 나와 같길 바라지 말고, 자신의 가치관이 타인과 같길 바라지 말자.

대신에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자신의 자유로 스스로를 구속하자.

Posted by 함장

2007/05/21 14:15 2007/05/2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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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가로 찾은 삶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미디어작문 3차과제
2,000자 잊지 못할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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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

그런 글귀를 보면서 나도 이런 읊조림을 했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유행가였다’라고.

어린 시절 자라던 환경으로 인해서 TV를 보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물론 부모님이 TV를 보지 말도록 통제한 것은 아니었지만, 집이 두 채로 나뉜 상태에 부모님이 주무시는 곳에 TV가 있었거니와, 항상 해가 질 때까지 놀다가 집에 들어온 나로서는 그 흔한 어린이용 만화 영화도 볼 시간이 없었다. 그런 환경에 익숙한 탓에 라디오를 끼고 살던지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온갖 유행가들은 꿰어찰 정도가 되었다.

사실 꽤 많은 노래가 내 삶의 태도를 결정짓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지쳐있는 내게 용기를 준 것도 유행가이거니와, 우울한 어린 날의 감성을 순화시켜 준 것도 유행가였다. 그 어떤 친우의 따뜻한 말이나, 가족의 위대한 포근함 따위와도 비교되지 않는. 내 안의 고요하고도 부드럽게 강한 힘을 쌓아 준 것이 바로 그런 철학들이리라.

그렇게 학창시절, 줄기차게 유행가를 옆에 끼고 살아오던 내가 사관학교를 들어가면서 음악과 멀어지게 되었다. 당연히 훈련기간 동안 가까워진 것은 ‘멸공의 횃불’과 같은 군가였고 그런 노래는 내게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만들기엔 너무도 괴리감이 가득한 곡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훈련 기간 중. 외부와 연락이 단절된지도 어언 한달. 석식 후 과업에 카톨릭 군종 장교가 조그만 포터블 카셋트 레코더를 들고 들어와, 우리가 입대한 후에 사회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곡이라며 노래를 틀어줬다. 당시에 처음 데뷔한 GOD라는 그룹도 생소했거니와, ‘어머님께’라는 제목과 달리 울려퍼지는 ‘랩’은 약간 어울리지 않는 듯 하였다. 그런데도, 이등병의 편지를 들으면서도 담담했던 내가,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라는 노랫말에 눈물이 핑 돌아버렸다. 역시 유행가의 힘이란. 그 어떤 시보다도 더 뛰어난 음악적 여운이 있지 않던가?

그 때, 잊혀졌던 내 어린 날의 유행가를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출과 외박이 금지된 시절에는 주말마다 보급받은 노트북을 들고 전산실의 인터넷 접속 가능지역을 찾아가서 mp3를 검색했다. 당시엔 소리바다도 없었고, 음악서비스 같은 것도 없었거니와, 인터넷 쇼핑몰에서 CD를 구매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토요일 저녁에는 사관학교 안에 있던 호국사라는 절을 찾았다. 그곳에는 케이블TV가 연결되어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KMTV에 나오는 뮤직비디오 보기를 즐겨했다. 어린 날의 군생활에서 무료함을 깰 수 있었던 것은 지식을 찾는 독서도 아니었고, 공부는 더욱 더 아니었으며, 무언가 현재의 불만족스런 삶을 뒤바꿔 줄 수 있는 하나의 커다란 ‘충격’이 필요했던 거다.

당시에 사관학교에서는 인트라넷 보급이 시작되고 있었다. 생도들을 위해서 전산과장이 게시판을 하나 내 주었고, 나는 그 곳에서 ‘제다이’라는 닉네임으로 내가 선곡한 mp3파일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곡에 얽힌 내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적어 내려가고 있었고, 이런 ‘사이버 활동’은 생도들 사이에서 격론을 끌어내기도 했다.

공공재인 ‘서버’에 mp3를 거의 도배하다시피 올리고 있는 나의 행동이 고깝게 느껴지는 생도들은 너무 하는 게 아니냐며 당장 중단할 것을 촉구했고, 어떤 생도들은 어차피 글도 잘 올라오지 않는 게시판에 음악이야기 좀 올리는 것이 어떻냐며 두둔했다. 더불어 전산과장인 중령이 전산학 수업 중에 내 선배들에게 접속 아이피를 이야기 해주며 서버에 쓸데없는 mp3를 올려 용량을 차지하게 한 괘씸한 ‘제다이’를 잡아 족치라고 성토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여러 파란만장한 일을 겪은 후에, 나는 사관학교 자퇴를 결심했다. 결심을 확정짓게 해준 것도 다름아닌 이현우라는 가수의 ‘슬픈 전쟁’이라는 노래였다. 난 미치도록 이 노래를 읊조리며 내가 하고픈 일이 무엇인지 고뇌했고, 결국 그 노래의 가사처럼. ‘자유’를 택했다.

내가 자퇴하던 그날. 통로를 걷고 있던 뒤에서 한 선배가 날 불러 세웠다.

‘어이 제다이!, 네가 하던 일은 이제 내가 맡아서 계속 하마!’

그때, 떠나던 날 보면서 안타까워하던 이보다. 그렇게 환하게 배웅해주던 그 선배를 잊을 수가 없다.

난 그렇게, 유행가를 통해 자유를 찾아 세상에 다시 나왔다.

Posted by 함장

2007/04/28 19:15 2007/04/28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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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참 '적'을 많이 만든 사람입니다.

정치적 '주적'을 두는 이유에서도 밝혔지만. 생각이 달라서 '적'이 아니라 원칙을 어겨서 '적'으로 간주해도, 그 놈의 피아구분에 대한 시각은 '노빠이자 유빠인 사람'의 틀을 벗어나기 어렵더군요.

사람 사는 게 그런가 봅니다.

부동산의 원칙은 불로소득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나라의 땅 덩어리가 좁기 때문에.
거래로 인해 소득을 내는 대상은 안 됩니다.

이게 정책 잘못일까요?

아니면 국민 대다수가 저 원칙을 무시하기 때문일까요?

정책이 시원찮아서 국민이 무시하는 걸까요?

대답은 뻔하죠.

그리고 이렇게 되면 국민 대다수를 적으로 놓고 덤벼야 하는 상황이 옵니다. 재밌죠? 민주주의 국가인데.




전 아직도 노빠이자 유빱니다. 정책을 펼치는데, 내가 던졌던 표. 그 원칙은 안 져버렸거든요. 실망이요? 일 없음다.


땅값이 올랐든, 집값이 올랐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 그리고 그 중 하나인 제게 돌아옵니다. 표에 대한 후회요? 2002년으로 돌아가도 다시 노무현 찍을 걸요?




대학 다니면서, 취업난에 대해 정부를 욕하는 대학생과, 그러면서도 묵묵히 토익책'만' 붙잡고, 공무원 시험 준비, 고시생들을 바라보면 할말을 잃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공무원 사관학교'라는 대학의 카피는 대학인가 학원인가 의심합니다.



우리는 이런 나라에 살고 있어요.

가진 자든, 못 가진 자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조금'을 '공화'를 위해 내 놓을 생각을 못하는 천민자본주의자들로 가득찬 나라.



가끔은 국민 대다수와 맞짱 뜨고 싶은 충동이 불끈 솟습니다.

물론 평화적으로 말이죠.



피아 구분은 '나와 다름'이 아니라. '자유 민주 공화국'의 원칙에 어긋나는 사람들과 구분하는 겁니다.

자신이 '자본의 논리'와, '시장 경제의 원칙'을 마치 복음과 같이 전파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속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그 보호를 위한 '자유 민주 공화' 헌법의 의미를 무색케 하는 논리를 간파하지 못 한다면.

적이 될 수밖에 없죠.

Posted by 함장

2006/11/27 20:03 2006/11/2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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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가두려는 남성의 시선

월드컵부터 이어져 오는 이야기를 한데 묶는 이유는 별반 다른 게 아니라 그 때부터 줄곧 써오고 싶던 이야기를 이제야 풀 시간이 됐기 때문이다. 그만큼, 게을러지고, 나태해지고, 글 하나 쓰는데 예전 만큼의 노력을 기울이기 어렵다는 얘기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시작하자.

사실 유흥문화는 자본주의가 '심화'될 수록 거침없이 번진다. 여성부가 아무리 떠들어도 사창은 줄지 않을 거고, 홍대의 클럽 문화는 더욱 메이저화 될 게다. 사창과 클럽 문화를 한 개 문장에 섞는 의도를 묻는다면 과감하게 얘기할 수 있는 건데 그곳은 '욕망의 배설'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사창을 인권 시각으로 바라보면 '유흥'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흥주점을 비롯하여, 성의 노골적 상품화를 넘어선 '사창'이라는 문화는 '유흥'에서 떠날 수 없는 범위라는 현실을 외면하긴 어렵다.

라스베가스, 마이애미, 지중해의 테네리페 섬. 그 속에 숨어있는 '클럽문화'가 우리네 홍대에서 추구하는 '클럽'의 지향점이 되고 있다는 것은 그런 '유흥업소'가 숭고한 정신의 '자유'를 느끼기 위한 '폐쇄'된 구조인 점을 감안해야만 한다.

격리된 공간에서의 자유. 그것이야 말로, 사창과 클럽이 가지는 공통점. 곧 타인에게 침해받지 않는 욕망의 배설구라는 점이다.

우리는 왜 이런 구조의 열악한 환경이, 한 쪽은 '인권을 유린하는 남성 중심의 사악한 지역'이며, 한쪽은 '문화공간'으로서 각광받고, 젊은이들의 해방을 위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하는 곳으로 인식되는지. 한 번쯤 궁금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저 사창은 '돈'으로 '사람'을 사기 때문에 '악'인가?

그저 클럽은 '리듬'에 몸을 맞기고 자유롭게 즐길 수 있기에 '선'인가?

'선악'구분을 하기에 너무나 동 떨어진 환경인가?



월드컵에서 이루어진 몇 가지, '여성'의 클럽이나 나이트에서나 볼 수 있는 '복장'이 야외로 튀어나왔을 때, 일부 언론을 비롯하여 집단적인 린치를 보면서 왜 우리는 그토록 '타인의 복장'이 자신의 시선에 맞지 않음에 화가나는 사람들이 많은지. 의아해 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의 패션감각이 당신들의 '생존'을 위협했는가?



스타벅스 논쟁에서 벌어지는 위협감은 계속 이어진다. 왜 그토록 '사람'을 자신들의 '구속력'하에 두고 싶어 안달이던가?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클럽에서의 '짝짓기'는 늘어나고, 성도 개방되고, 더욱더 삶은 '가벼워'진다. 이건 슬픈일일 수도, 그저 그런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세상이 바삐 바뀌어가는 지금.

왜 아직도 '타인의 비 위협적인 삶'에 간섭하려 드는가?

Posted by 함장

2006/08/16 17:34 2006/08/16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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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어디에 서 있는가?

수업 중의 하나가 후문에 있는 관계로, 요즘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외대역에서 내려서 걸어올라 온다 - 경희대 후문과 외대 후문이 직선거리로 200미터 정도 밖에 안 된다 - 외대 정문 우측에 붙어 있는 대자보. 총학의 대자보 같은데, 문구가 어처구니 없다.

' 학습권 침해하는 교직원 노조 파업을 규탄한다'

문장이 완벽하진 않지만 - 하도 어처구니가 없길래 - 학습권 침해라는 단어와 현재 투쟁 중인 외대 교직원 노조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 그리고 그 '파업'을 비판하는 문장임에는 틀림없다.

이런 씨발.

몇 주 전에 자유기업원 원장의 강연이 있다는 현수막을 봤을 때, 이 동네도 총학 회장이 전경련 장학생인가 했더니만, 아주 지랄을 하는구나.



솔직히 아젠다 세팅이라는 게 참 무서운 거다. 블로그를 시작했을 때, 하노아란 사람과 두호리란 사람의 글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정치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아젠다를 설정하고, 그 설정을 얼마나 '원칙없이' 받아 들이는가를 볼 때마다 씁쓸했다.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이유로 '무시'해 줄 수는 있지만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옳다'라고 주장하며 발발뜨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들이 '볼테르'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고나 있는가 궁금하다.

나라면 도리어 그런 사람들 - 주체 세력 - 이 주장하는 이야기는 개무시해버리겠지만, 그로 인해 부화뇌동 하는 사람들 때문에라도 목에 핏대 세워가며 논리성과, 정치적 당위성, 윤리적 우위성을 점해줄 수밖에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프랑스에서 '극우파' 장 마리 르펜이 인기를 끄니까, 많은 프랑스 지성인들이 '공화국'을 지키자며 뛰쳐나온 이야기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녀 사냥? 극우나 극좌의 발언을 '차단'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권력구도가 그 '극'을 달리는 발언들에 힘을 얹어주고, 폭주를 막지 못 한다면,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뛰어들어 막아야만한다. 온갖 독설이 난무하고,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는 '비난하지 말라'는 소리도 무시해가면서.

용납할 수 없는 것에 다양성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외대 내부를 거치면 뿌듯한 일이 더 많다. 건물에는 '고려대 조합원'들이 보낸 응원 현수막도 붙어있고, 새로 생긴 잔디공원 주위에는 각 단대별로 총학의 '파업 파괴 공작'을 규탄하는 서명 운동도 벌이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왜 이런 '삽질'을 해야 하냐는 거다.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도 대다수가 취업을 한 후에나 깨닫는 사회. 심지어 이 마저도 깨닫지 못하는 사회.

혹자는 그 동안 '운동권'이 교내 정치 권력을 잡다가 '극우 세력'이 정치 권력을 잡은 거라 해석을 하기도 하지만. 너무 어처구니 없지 않은가? 그래도 꼴에 '대학' 아니던가?

대학에 진보 세력만 있으라고 주장하는 거냐 묻는다면, 다시금 '배움의 길'에 대해 돌이키라고 생각해 보고 싶다.



'자유 시장 경제'를 그토록 외치면서, 모든 사람들이 개개인의 '이기적인' 합리성을 추구하면 시장이 조화롭다고 얘기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이 '노동자'라는 것을 버림과 동시에, 기업의 입장을 이해하고, 재단의 입장을 이해하고, 가진 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순간.

시장의 권력 구도는 독점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 '보수'인가, '멍청한 것'인가?



어처구니 없는 총학의 태도에 항거하는 외대생과, 경영대와 총학만 홀랑 빠진 채 등록금 투쟁을 하는 경희대생과.

그 외 모든, 전경련 장학생들이 총학생회를 구성한 대학 학우 여러분들의 건투를 빈다.

당신들만이 아젠다 세팅을 바꿀 힘이다.

Posted by 함장

2006/05/02 14:23 2006/05/02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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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글의 시작은 앞 글의 ‘bum’ 님이 남긴 코멘트 중, ‘왠지 모를 서글픔에 우는 애에게는 사탕을 주지만, 사탕을 얻기 위해 우는 애에게는 싸대기를 날려야 합니다.’라는 비열한 비유에 대한 분노로부터 시작함을 명시한다.


예전에 내 글에서 나는 자유주의자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가끔 자본에 대한 내 얘기나 노동자에 대한 내 시각을 보면서 네가 왜 자유주의자냐?, 사회주의자지혹은, ‘자유 시장경제를 규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네가 왜 자유주의자냐?’라는 이야기를 던지는 분이 있다. 이 분들은 자유주의의 뜻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듯 한데, 내가 얘기하는 자유주의는 모든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적인 개념이 강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성격이 강한 개념이다. 여기서 두 가지 오해를 사게 되는 것인데, ‘개인이라는 단어 때문에 사회주의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생각되기도 쉽고, 공동체의 속박으로부터도 벗어나려는 성향이 짙기 때문에 공화적인 개념과도 맞서게 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렇다. 오해다. ‘개인의 권리’, ‘시민의 권리를 존중하기 때문에 자유 시장경제 체제의 자본의 횡포와 그 자본이 로비를 할 수 있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규제를 선택하는 것이 자유주의자고, 그런 노동자 개개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공화국을 이룩하기 위해 연대하여싸우는 것이 자유주의자다. 같은 자유라는 단어가 들어간다고 자유 시장경제의 신봉자가 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이건 내 정치적인 정체성이고, ‘경제적인 정체성을 꼽으라면 당연히 수정 자본주의자가 된다. 자본주의의 폐해가 어떤 것인지 인지하고 깨달아갈수록 나는 내가 믿는 자유주의를 위해 자본주의에 지속적인 수정을 가하는, 그러니까 지속적인 규제를 가하는 게 당연하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게 내가 사람답게남아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이니까 말이다.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앞 글에서와 같이 내 경계의 대상은 대기업이 가진 자본이다. 물론 단어만으로 보면 웃긴 얘기이기도 한데 사실 대기업의 순수 자기 자본은 적다. 기업가의 돈은 금융기관에서 빌려오는 게 더 많으니까 이때 대기업이 가진이라는 표현은 그들이 융통할 수 있는 자본을 의미한다. 고로 대기업이 자본의 횡포를 부리는 것을 욕하는 것이지 대기업의 노동자들을 싸잡아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도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일례를 들어보자.


모든 기업가는 노동자의 적이다라는 얘기를 누가 한다고 치자. 그럼 기업에 들어가 일하는 노동자는 노동의 배신자인가? 아니면 적과의 동침인가? ‘모든 기업가는 노동자의 적이라는 명제는 성립할 수 없는 거다. 노동과 대치되는 개념은 경영기업도 아닌 자본그 자체이다. 그렇다고 자본을 혐오할 수 있는가? 어림없는 소리다. 우리 가계 - 는 일신상의 이유로 은행을 이용하여 저축을 하거나 주식회사의 유상증자 증권이나 신주가 발행되는 것을 구매한다. 그 돈을 금융권이 중개하여 기업이 빌려가거나, 자본금으로 확충하는 거다. 이거 중학교 때 배우지 않는가?


바로 이거다. 노동자들이 모아준, 바로 그 자본이 노동자를 몰아세우는 경지에 이르는 게 자본주의다. 그렇기에 늘 자본은 무섭다고 내가 씨부리는 거고, 오로지 자본이 경계 대상이다. 자본은 양날의 검과 같다. 기업가가 혹은 경영자가 쓰면, 부와 명예, 더불어 시너지 효과까지도 창출한다. 반면 잘못쓰면, 경영자와 주주들의 금전적인 부분에서는 이득이 될지도 모르지만 꽤 여러 면에서 타격을 입힌다.


문제는 노동자들은 이 자본을 대어줄 수만 있을 뿐, 경영자나 기업가처럼 운용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자본에 대한 두려움으로 생겨나는 공격대상은 자연스레 잘못쓰는 경영인 금융권 포함 - 이나 기업가가 될 수 밖에 없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삼성 공화국을 우려하며 삼성 욕을 해대면 삼성이라는 그룹의 계열사 직원 전체가 그런 기사나 글들을 보면서 짜증내기 쉽다. 자신이 일하는 터전이며, 실제로 삼성 내부에서 바라보면 왜 이렇게까지 욕을 먹나?’ 싶을 정도로 괴리감을 느끼는 분도 많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런 면은 서로가 인지하는 노동자에 대한 존재 본질을 다르게 느끼기 때문이다. 삼성 욕을 하는 사람들은 삼성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욕할 입장이 못 된다. 반대로 삼성 노동자도 무 노조경영신화 과연 이게 신화인가 하는 의문과 더불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지만 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왜 우리 회사 욕하고 지랄이야


당신네 회사가 자본의 횡포를 부리면 욕을 바가지로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노동자인 당신들을 욕하는 것은 아니다. 툭 까놓고 얘기해서, 자본 운영은 주주나, 경영진, 혹은 컨설턴트나 기획팀에서 경영 마인드에 입각해 저지른 일이지,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고용된 당신들이 결정한 일은 아니거니와 당신네 회사에서 비 윤리적인 자본 운용을 했다면 당신들 스스로도 자신의 일터에 대한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어 갈등하고 고민하게 될 노동자일 뿐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최근에 화물연대 파업과 함께 벌어진 삼성 광주전자 이야기. 이 환장할 노릇의 이야기에 삼성이 끼어들어가는 이유는 뭘까? 삼성의 주장은 이렇다 극동 컨테이너와 계약한 사람들의 일이니 자신들이 개입할 수 없다고 언론에 얘기했다. 일단 사실 관계는 그러하니 믿어주자. 극동 컨테이너의 이야기는 더더욱 기가 찬다.


운송료는 협상을 통해 조정할 수 있지만, 단체협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씨바, 헌법에서 보장하는 노동 3권 중에 단체교섭권도 가볍게 개무시하는 센스라니, 어이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 여러분이 노동자인데, ‘밥그릇 싸움이라고 얘기하면서 양비론이나, 심지어 위에서 얘기한 대로, ‘삼성의 주장이 일리가 있네라며, 극동 컨테이너나쁘다고 코멘트를 날린다면 곤란하다. 심지어 어떤 분은 운송업자라는 얘기를 들며, 화물 수송 기사는 자기 차량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 것이니 노동자로 보는 것에 무리가 있지 않냐고 얘기를 한다. 어찌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노동자가 화물 수송이라는 사업을 하면서 화물차라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묻자. 내가 번역 일을 하는데, 노트북이 필요해서 할부로 노트북을 구매하고, 번역 일을 얻어서 하고 있다. 그러면 나는 번역 노동자인가, ‘번역 사업가인가? 개인택시를 모는 사람은 택시를 소유하고 있는데, 그럼 이 사람은 자영업자인가 노동자인가?


화물 운송 시스템이 예전에는 업체가 차량을 소유하고, 기사만 고용해서 수송을 하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요즘은 기사가 자신의 차량을 구매하여 업체와 계약을 맺고 운송을 한다. 물론 택배의 경우 회사 차량을 쓰지만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화물연대에 가입한 사람들 대부분의 경우 그러하다. 문제는 이 화물차값이 장난 아니라는 점이다. 더불어 이걸 일시불로 구매할 능력이 되는 사람은 그 돈으로 장사하지 화물차 운송 안 한다.


업체가 자신들의 유지비용을 아끼기 위해 노동자에게 밥벌이 물품의 부담을 지운 것이고, 대형 화물차량 운전 능력이 있는 기사들은 기술을 넘어서서 차량이라는 생존수단까지 구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시 지불 능력이 될 턱이 없기에, 무조건 할부 구매를 한다. 그러나 이 직종은 화물 운송’. 1년에 수 만 킬로미터는 기본이다. 차량 유지 보수와 수리는 기본이며 노후화 현상도 몇 배나 빠르다. 할부금을 다 갚고, 숨 좀 돌리자 싶으면 새 차를 또 구비해야 한다. 환장할 노릇이지.


할부 넣으랴, ‘화물 운송이란 직업 덕분에 보험료는 좀 비싸던가. 그런 그들이 대형 화주인 삼성에게 운송료 5,000원 인상을 요구했다. 결과는 51명 전원 해고.


이걸 극동 컨테이너만의 문제로 보라는 사람은 자신이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바보인 건가? 이런 노동 환경에서도 화물 운송업자라는 이유로, ‘화물 연대는 인정할 수 없으며, 노동자가 아니니까 단체 교섭권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한 예를 더 들어보자. 평택 농민들의 농토가 미군 기지로 주어지고 이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지만, 농민들은 보상금액이 적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한다. 그리고 노동자들과 연대해 시위에 들어간다. 이 방송을 접한 택시기사 왈,


개새끼들 보상금이 적으니까 지랄을 하네


이 냥반아. 국가가 당신의 개인택시 면허를 실 거래가도 아니고, 당신네가 관청에 신고하는 값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얘기하는데, 개인택시 면허는 거래가 가능하다 - 보다 약간 많은 금액에 박탈해 가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토지 보상에서 농토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농토는 생산수단의 하나이며, 생업의 터전인데, 이를 일반 토지 보상하듯이 돈 줘버렸다고 끝나면, 평생을 논일, 밭일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살던 곳 마저 내팽개치고 또 다른 농토를 찾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리고 농민들의 시위에 민주노총부터 시작하여, 대학생들까지 왜 시민단체들이 더 설치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 노동3권에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주는 이유는 도대체 어디로 먹어버린 건가? 한 개인의 노동자, 그리고 위와 같은 51명의 화물 운송 노동자가 자본권력에 휘둘려서 가볍게 자신들의 터전을 잃는 것을 보면서도 이런 연대가 불경스럽게 보이는가?


과거의 학생 시위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었다면, 지금의 학생 시위는 자본 만능의 사회에서 스스로 노동자임을 자각해 나가는 과정이자, 미래의 노동자로서 현재의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자본을 경계하는 행위이다. 폭력시위엔 누구나 동의하지 않지만, ‘폭력을 내세워 시위의 본질과, ‘주도세력이 따로 있다는 식의 언론발림에 놀아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쯤하고, 이제 bum 님 같이 되도 않는 시장의 신봉자들이 주장하는 대한민국의 기업들이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보자.


시장시장 그대로내버려 두려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정보의 공정성정보 공개의 투명성이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시장은 왜곡된다. 내버려 두면 잘 돌아가야 한다는 이론으로 인해 내버려 두면 정보의 공정성정보공개의 투명성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선 그 자본이 정보의 루트를 통제해 버린다. 그에 대한 규제 하나 없이 시장이 돌아갈 거라 믿는다면 그건 맹목적인 믿음이지 사회적 합리성을 갖춘 믿음이 아니다.


국산품 애용이 웃기는 소리라는 점은 동의한다. 문제는 이 말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기업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결부시켜 우리나라 일류 브랜드 들이 과연 영화만큼의 정부 보호를 받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해주려 한다.


한마디로 죠낸 보호를 받아 쳐먹었다


태준이 포항제철에 있을 때, 제철 기계를 수입해 들어오면서 박통에게 달려가 세금을 비롯한 이러저러한 감면을 요구했다. 물론 거기엔 정치적 로비 자금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유는 철강은 국가 기간 산업이다! 이를 들여오는데 기업이 돈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 놀라워라 이토록 애국을 위한 뛰어난 정신을 봤나! 덕분에 그 포철이 냈어야 할 세금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됐다. 대우는 또 어떠했던가? 세계 경영 한답시고 이 돈, 저 돈 죄다 끌어서 내리 쏟더니 홀랑 망했다. 그거 살리는 공적 자금. 다 국민이 냈다.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안 간다고? 박통 때, 먹고 살 일은 수출뿐이라면서 기업 키워준다고 온갖 정부 돈과 금융권 돈을 연결해줘서 기업을 보호, 육성해준 나라가 우리나라란 말이다. 내수 시장에서 고가로 팔아먹어 외수시장에서 본 손해 돌려 막고, 이것저것 잡다한 돈 된다 싶은 거 죄다 건드렸다가 말아먹어도 어차피 자기 자본 별로 안 들이고 국민이 저금했던 금융권 돈 끌어다 썼을 뿐이니, 회사 하나만 포기하고 자기 자본금만 날리면 채권자들이 알아서 회사 정리하고, 자신들은 부채 걱정 날려버리는 거다.


그 짓을 정경유착을 통해 정부가 그토록 도와줬는데, 지금의 일류 브랜드인 삼성, LG가 시장경제로 살아남았다는 주장은 어처구니 없지 않은가? 국산품 애용으로 삼성을 키운 게 아니라 정부와 기업이 국내 대기업 제품밖에 구경할 수 없는 형태의 시장을 구축해 버려서 그들이 우리 를 빨아먹을 수 있었던 거다.


정부가 도와 준 것이 이해가 안 간다고? 물론 정부는 중소기업을 도와준 적은 없다. 대기업 키우기에 급급해 중소기업에 대한 규제는 상상을 초월했는데, 기업하나 열기 위해서 정부에 허가를 받고 찍어야 하는 도장 횟수가 900회가 넘었다. 이는 역으로 대기업을 보호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거다.


더불어 FTA와 시장 개방 이야기. 전 세계의 경제 블록화와 더불어 시장 개방을 하면 득을 보는 이들과 실을 보는 이들의 구분을 해보라. 그 동안, 정부 덕에, 국가 권력 덕에, 국민 덕에 이득을 계속 보아온 이들이 이제 해외 각지에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해외를 나가려 하니 자꾸 국내시장 개방하라는 압박이 들어온다.


어차피 자기들 제품은 국내시장 선점했고, 자신들과 상관없는 분야인 스크린 코타부터 농업에 이르는 분야까지 개방해버리라고 정치권과 합의를 봤다.


기업인들과 상관없는 분야는 개나 줘버리라는 식으로 버려두고 자신들 잇속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게 자본을 대주고, ‘세금을 대 주었던 노동자이자, 국민들이 분노를 느껴야 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세상 풍파를 겪어야 어른이 된다는 이 비열한 비유로 일관된 bum 님의 글을 보면서 분노가 치민 것은 어처구니 없는 주장의 연속 때문이 아니라 결국 마지막 한 귀절이었다.


, 님이 말씀하신 기업과 경영자와 노동자에 대한 부분은 많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공감한다는 건가?


국내에서 국민 돈 받아먹고 잘 큰 뒤에, 이젠 국내 자기들 사업 분야 외의 시장을 내어주고 그를 발판 삼아 글로벌한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세계시장을 무대로 하는 기업들의 케이스와 국내 시장으로 한정된 영화 산업쌀 농업시장 케이스를 같은 시장 경제로 놓고 보는 시각의 차이가 다름인가 틀림인가?


며칠 전 KT&G 경영권 분쟁처럼, 우리나라 금융권은 비교적 우리나라 경영진들에게 우호적 지분으로 손을 들어준다. 일종의 국산품 애용인 셈이다. 기업은 외세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외국의 자본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면 박수를 받고, ‘노동자는 외국의 자본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면 시대에 뒤떨어지는가?




모든 건 밥그릇 싸움 맞다. 중요한 건 밥을 더 담을 수 있냐 덜 담을 수 있냐가 아니라, 밥을 담을 수 있냐. 밥 그릇을 뺏기면 이마저도 불가능해진다.


시장이 정하는 가격, 시장이 정하는 권력구도가 가장 이상적인 것은 동의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정보의 효율성이 채워지지 않는 한. 시장은 자본에 의해 쉽게 왜곡된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을 형성하고 확장하는 것은 소비자의 needs’보다, 자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자본이 두려운 줄 알고, 기업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이, 세계 시장에 수출할 수도 없는 품목의 국내 시장을, 송두리째 자본에게 안겨줄 수 있는 시장에 시장 논리를 주장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익히 보아오던 기업가의 태도아니던가? 정부와 국민으로부터 받을 것 다 받아먹은 주제에, ‘규제를 말라고? ‘시장에 맡기라고?


보건, 환경, 안전, 노무와 같은 것을 시장에 맡기란 말인가?




다시금 말하지만, ‘경영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나, ‘기업가가 적이 아니다. ‘자본은 더더욱 적이 아니라 경계의 대상일 뿐이다.


허나 자신이 노동자이면서, ‘한국 기업가의 시장 논리를 내세우는 모습을 보고, 그 표리부동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는 사람은 나의 적이다. 내 정치적 이상향을 세우는 대척점에 놓인 사람이며, 연대해가다가도 뒤통수 맞기에 딱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언젠가 노동자의 입장을 머리에서 가슴까지 이해하는 날이 오길 바라는 이유는.


아직도 이 사회에서 스스로노동자임을 자각하고 같이 연대해서나갈 사람이 턱없이 부족해서인지도 모른다.


적이기에 분노하고, 같은 계급의 노동자이기에 애처로우며, 같은 사람이기에 희망을 가진다.


그래, 사람만이 희망이다.

Posted by 함장

2006/03/17 07:32 2006/03/17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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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in 자본주의 without 자유 & 평등

주말에 바람도 쐴겸, 동호회 겨울 MT에 참석하기 위해 Vex 님과 강촌으로 달렸다.
Vex 님의 차에서, 간만에 귀에 걸리는 노래를 만났다.
사실 싸이(PSY)라는 가수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싫어하는 것이 아니다)는 그가 생긴 것이 그저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간간이 괜찮은 곡을 내뱉는 모습을 보면, 음악성은 내 얇은 지식으로 도통 모르겠고, 기특한 가수임엔 틀림없다.

아버지라는 곡을 반복해 들으면서, 달리는 차 안에서 '흥겨워 하던' 우리 모습은 노래가 즐거워서가 아니었다. 인터넷 업종에서, 과장 좀 하자면 1년 365일 야근으로 보내는 Vex 님. 조또 가진 것도 없으니 취업 해보겠다고 대학으로 다시 뛰쳐들어간 미친 나.

국가가 담당하는 최저 기초생활보조금이 턱없이 모자란 우리 사회.

우리네 아버지는 자본주의가 뭔지도 몰랐고, 이 죨라 골때린 사회가 왜 이렇게 미친 파시스트들로 가득 차 있는지 파악할 지식기반도 없다.

자유라는 단어가 반공을 의미하는 몰지각한 사회에서,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자본'으로부터의 자유와 평등을 철학적으로 고찰할 시간을 갖기엔 너무나 숨가쁘게 '돈'을 모아와야 했다.

권력에 맛들인 미친 국가체제가 부추긴 '생존'을 위한 경쟁. 국가의 틀 안에서 보호해야 될 것이 무참히 짓밟히고, 국가 공권력에 사람이 죽어나가도.

그저 관심이 있는 건, 우리네 가족이 굶지 않는 것.

그렇게 살아온 내 아버지가, 국가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이, 자신이 살고 계신 고향의 경기가 그토록 나쁜 것이 다 노무현 때문이라고, 노무현이 나쁜 놈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에 무어라 답해 드릴 수 있을까?

마르크스 자본론을 권해드릴까?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권해드릴까?

맨큐의 경제학을 권해드릴까?



우리나라는 결국, 내 삶이 종결될 때까지, 서북유럽의 사민주의 국가나, 프랑스 수준의 국민 복지를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 슬프겠냐만은, 부모의 그릇된 권위나, 국가의 그릇된 권위에 항거하는 'Rock의 정신'이 담긴 곡보다.

뒤틀어진 사회를 보면서, NEXT의 노랫말처럼,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다 때려치고 싶어도, 가족들 얼굴보기 미안해 꼬랑지를 내리게 되는 이 시대 '가장'들의 더러운 기분.

그 기분을 이해할 수 밖에 없어서.

'아버지, 그게 그렇게 되어선 안 됩니다'며 일일이 조목조목 따지기 괴로워서.

평생 그렇게 이 악물고 살아오신 삶을 존경하여.

그렇게 밖에 사실 수 없었던 삶이 너무도 가엾고 슬퍼서.

그래서, 웃으며, 환호하며,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숨죽여 울 수 밖에 없었다.



삐뚤어진 내 나라여.

슬퍼도 외면하고, 벗어날 길이 없기에.

사랑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그렇기에 너의 변화를 철저히 끌어내려는 것 아니겠는가?

Posted by 함장

2005/12/14 15:24 2005/12/1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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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자본주의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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