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 - 20대는 죄가 없다.

일본의 2008년도 2분기에 시작된 드라마 중에 '판도라'라는 것이 있다.

한 국립대 의대 연구원이 '모든 종류의 암'을 치료하는 약을 개발해버리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루는 듯 - 아직 1회까지 밖에 안 나왔지만 이미 1회에 약을 개발했다 - 하다.

감히 건방지게 말하지만, 왜 제목이 '판도라'인지 벌써 깨달은 분들은 그나마 세상 돌아가는 꼴을 어느 정도 보시는 분들이고, 도무지 '왜' 제목이 판도라인지 아직도 감이 안 오시는 분들은 순진하게 세상 사시는 분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가 '사회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면, 아니 적어도 영국이나 유럽의 일부 국가처럼 무상 의료가 진작부터 지원되는 나라였다면 위의 '모든 종류의 암'을 치료하는 약의 개발이 그토록 무서운 '판도라의 상자'가 되진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 대한민국과 일본은 그 빌어먹을 '자본주의' 사회에 충실하다 못 해 사람 목숨을 돈으로 따져야 하는 - 일본도 우리도, 암 치료비 때문에 집의 재정이 풍비박산 나며, 이로 인해 돈이냐 목숨이냐를 따져야 하는 더러운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 슬픈 나라가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TV시리즈에서처럼 '모든 종류의 암'을 치료하는 약이 실제로 개발되어버리면 일본은 절대절명절체절명의 위협을 받게된다. 일본의 생명 또는 질병 관련 보험 중 '암'과 관련된 상품은 무너져 버리고 보험의 기능이 무너짐과 동시에 금융권의 악재가 온다. 이와 더불어 '암'으로 인해 죽어나가야 할 예상치의 인구가 급작스레 '살아가기' 시작하고 이 인구는 고스란히 최고령 인구가 즐비한 일본사회에 더더욱 무거운 짐으로 나타나 버리며, 이는 사회의 공멸로 이어지게 된다. 더군다나 이런 일이 일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 세계에서 '암'으로 돈을 벌어먹고 있는 모든 산업에 위해가 가해진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그 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기득권'이다.

그러나 이런 사태가 올 수 있을까?

자본주의 국가에서 대의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빌어 기득권이 해낼 수 있는 만행은 인간이 얼마나 '금권'에 타락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약'이 개발되면 손해를 보게 되는 제약사와 병원, 금융권은 연합을 해서라도 후생성을 비롯한 관료들에게 로비를 하여 약이 '절대'로 출시되지 못하도록, 혹은 '출시하더라도 전 재산을 털지 않으면 안되도록' 가격을 조정하게 된다. 이로 인해 '충격'은 완화되고 결국엔 가진 자들의 배를 불릴 지언정, 진정한 '암의 정복'은 결국 '한 과학자의 인간승리'가 아닌 '금권의 승리'로 둔갑할 것이다.



이는 신약 개발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엄청나고도 급격한 변화는 언제나 '기득권'을 위협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변화는 새로운 '기득권'을 낳게 된다. 그리고 인간이 언제나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에 '욕심'은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버리기 어렵다. 그리고 그 중심은 언제나 기득권의 회유와 협박, 달콤한 유혹에 시달릴 것이다.



또 다시 실망 뿐인 - 이재오를 무너뜨린 문국현 케이스 제외 - 선거가 끝났다. 기득권은 밤낮 안 가리고 국민을 농락했고 국민은 또 다시 무장해제 당하고 멍청히 투표를 하지 않았다. 정치 혐오감이든 나발이든 중요치 않다. 지금의 20대를 만든 것은 지금의 4~50대 부모와 그들이 즐겨보던 조중동이며, 대입 외에 다른 꿈을 꾸지 못하게 한, 기득권이 만들어 둔 시스템일 뿐이다.

20대는 벌 받을 일이 없다.

기득권이 만든 기본적인 교육 시스템조차 파괴시키지 못한 이 사회의 중년들이 이 사태를 고스란히 책임져야 할 것이다.

20대는 분명 책임이 없다.

열 아홉부터 종이 쪼가리 도장 찍을 권한 준다고, 대가리에 똥이 들었는지 글로벌하게 원대한 꿈이 들었는지 따지면 뭐 할 것인가? 그 속에 뭔가 채울만한 그런 기반조차 주지 않은 채 바라는 게 너무 많다. 이들은 그저 이제부터 당신들의 '개발독재' 때처럼, 그렇게 허리 졸라 살면 그만이다. 서로 시기하고 경쟁하고 물어 뜯고 살면 된다. 30대들, 자신들도 그런 기반 없이 이 사회를 버텨왔다고 이들에게 '우리는 그랬어'라면서 저항의 삶을 강요할 텐가? 자신들이 읽어오던 '빨간 책'이, 맑시즘이 사회에서 퇴출되고 있는 동안, 당신들이 '밥벌이'에 바빠 신경쓸 겨를이 없던 동안, 이들이 권력에 의해 '취업에만' 힘쓰는 불쌍한 자본주의의 기계가 되어가는 동안.

20대를 비난하지 말자. 이들은 그런 사춘기를 보내고, 남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비극에 놓였다.

이제 고민은 오히려 중년, 당신들의 것이다. 애새끼들은 서른이 넘어도 취업하지 '않은' 채로 집에서 돈 달라 보챌 거고, 의료보험 민영화되어 늙어가는 몸이 아파도 병원은 커녕 약도 못 사고, 연금이고 나발이고 수급액은 줄어들어 결국 피폐한 노년이 될 테니 말이다.

결국 모든 것은 '기득권'이 원하는 방향대로 흐른다. 가끔 변수가 생겨봤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기득권은 '돈'을 가지고 '사람'을 농락한다.

그에 대항할 수 있는, 현실의 유일한 방법인 '대의 민주주의'조차도 결국 '돈'과 '권력'에 농락당하면 끝이다.

슬슬 땅값 오르던 노원구에 노회찬이 아닌 '한나라당 홍정욱'이 됐다.

유시민을 두 번이나 당선시킨 덕양구 갑에 재개발 시기로 슬슬 땅값이 오르더니 심상정이 아닌 '한나라당 손범규'가 됐다.



판도라의 상자에 '희망'이 남았다고 하던가?

그 희망이 의지로 발현되어 결국 우리는 나설 것이다.

투표고 나발이고 언제나 물러나 무임승차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내 아버지 세대의 무지렁이처럼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결국 짱돌을 손에 쥐고 금권에 타락한 정권에 맞서고 피터지는 사람들이 없는 한 신의 '약'은 일반 국민의 손에 오지 않는다.

내 학창시절을 386, 486 선생들의 아래에서 보냈던 걸 감사해하며.

p.s 시위장에서 자주 봅시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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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0 13:44 2008/04/10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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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의 작은 의미

영화 '화려한 휴가'는 영화적 요소로만 이야기하자면 좀 많이 모자라다 못해 실망스러운 면도 자주 보인다.

그러나 감정 이입이 되어 펑펑 운 사람들과 '5.18'을 팔아먹는 상업주의 영화라 혹평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민감한 소재임엔 틀림없다.

난 사실 이 영화를 많이 봐주기 보다 차라리 5.18 다큐멘터리를 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영화화'했다는 것이 더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쉬운 방법이긴 하나 - 이 나라는 이미 한 영화에 천만 인구가 들러붙은 적이 있지 않은가? - 그 참혹한 진상을 사실 그대로 전하는 게 더 필요해 보여서다.



왜냐고?



30~40대의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이 영화를 '젊은 사람들'이 보고 과거를 기억해줬으면 한다는 건데. 이건 정말 어렵다.

생각없이 사는 건 죄가 아닌데. 그 생각없이 사는 '덕'을 보는 권력자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만인'에게 피해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 못 하고, 심지어 복지 정책과 공산주의 정책을 구분 못 하는 '젊은이' 들에게 이 영화를 보고 얻은 감상은 뭘까?

'전두환이 나쁜 놈인데, 거 대학생들은 김대중이 부추겨서 데모한 겨. 맞을 짓 했지'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주유소에서 기름 넣으려면 김대중 만세 세 번 외쳐야해'

내가 이런 이야기를 20대, 심지어 10대의 '서울' 아이들이 영화를 본 후에 나오면서 뇌까리는 것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안하지만 이제 더 이상 우리네 대학에서는 학력 인플레로 인한 바보들은 늘어났을 지언정, 자신이 뭔 삽질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보다,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는 길로 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아해들이 더 많아졌다.

이 아해들은 5.18에 어떤 일이 이 나라에서 벌어졌는지,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아니. 알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왜' 중요한지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 아해들이 '생각이 없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무엇이' 더 중요한지 철학적 사고의 결과물로 그 둘을 비교할 줄 모른다.

'데모'가 얼마나 '나쁜 걸'로 인식이 되었는지, 헌법에서 보장하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눈 뜨고 퍼렇게 살아 있어도, 데모는 나쁘다고 생각하나보다.

하긴 이랜드 사태로 인한 '기업'의 손실이 막대함을 이야기하며 '불법 투쟁'이라는 단어를 붙여 생존권을 가볍게 무시하는 저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세상엔 아직도. 5.16이 혁명이라 주장하는 '미친 새끼들'과, 5.18이 빨갱이들의 난동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라 굳게 믿고, 그 믿음을 '복음'처럼 - 이 땅을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굽어 살피사 - 전파하는 '개새끼들'이 많다.

그렇기에 '상업주의 영화'든 뭐든.

광주의 '참상'을 좀 더 많은 '無知人'에게 알릴 수 있는 방식이라면 분명 '화려한 휴가'가 가진 의미로 충분하다.



그러나 넘쳐나는 영화평과, 그 시절에 대한 회고도 중요하지만.

저 위에 언급한 쓰레기 생각들을 어떻게 까부수느냐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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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31 04:34 2007/07/31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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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 대한 단상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미디어작문 수업 중 과제.
자유로운 주제, 자유로운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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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7월에 개봉한다. 5.18을 배경으로 광주에서 벌어진, 군부독재의 민중 탄압 사건을 극화해서 만든 영화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이 땅에 ‘자유’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화두에서 5.18은 빼 놓을 수 없는 이야기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자유’의 개념과 ‘반공’의 개념을 헷갈려하는 사람이 많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가지는 철학 자체가 ‘자유’와 정반대되는 개념이 아닐진데, 그 ‘자유’를 제한하려는 요소 때문에 싸잡아서 비난한다. 그러나 더 웃긴 것은 ‘자유’에 대한 교육을 하면서 이 자유가 타인에게 방해가 될 경우 ‘방종’으로 치달을 수 있다며 자유의 ‘제제’가 가능하다는 선을 먼저 그어둔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 교육인가?

자유라는 것이 가진 광범위한 의미와 그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타인의 피해라는, 마찬가지로 광범위한 의미는 분명 ‘자유’가 가지는 한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종족이 사회를 구성하면서 생기는, 서로의 마찰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이 한계는 분명히 어떤 형태로든 ‘제한’을 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제한’이라는 것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야만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정당화라는 단어를 쓰는 것도 두렵다. 자유에 대한 제한이 ‘정당화’된다는 논리는 어떤 면에서든 악용될 우려가 있다. 인간이 만드는 시스템의 한계는 늘 그 악용과 선용(善用) 사이에서 저울질을 한다. 분명 ‘사회적 합의’라는 토를 달았음에도, 이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모두가 알고 있는 숙제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이 가진 ‘사상’에 대한 제제를 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사유는 자유로워야 하며, 이에 대한 방해는 불가능하다. 이는 좀 더 확장하여 이야기하자면 그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한 방해도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보장이 필요하다. 외적인 강압이나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폭력에 의해 생각을 꺾게 만든다면, 이는 인간이 가져야 하는 원천적인 ‘자유’를 빼앗는 것이다.

범법자를 가두어 육체적인 ‘자유’를 빼앗아 제제를 가하는 것에는 모두 동의하여도, 비전향 장기수나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의 육체적 제제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심야에 자동차가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무단횡단을 하는 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규칙을 어겨도 ‘지금 상황에 그건 따를 필요가 없어’라는 생각의 자유를 실제 의사로 표현한 것이다. 자기 양심의 의무냐 합리적 선택이냐에 대한 평가는 스스로 내리는 ‘자유’가 있고, 이에 대한 법적용도 탄력적이길 기대하는 것이다.

언제나 따르는 이야기,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원칙에는 우리 모두 동의한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데도 책임이 필요하다. 더불어 그 표현을 받아들이는 수용자도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관으로 비판하여 받아들일 책임이 따른다.

우리 나라에서 심심하면 ‘사회적 통합’을 운운하는 분들이 걱정하는 것과 달리 그런 생각의 자유가 표현된다고 해서 사회는 선동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많고, 그런 사람들이 어우러져 ‘우리’를 이루기 때문이다.

타인이 나와 같길 바라지 말고, 자신의 가치관이 타인과 같길 바라지 말자.

대신에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자신의 자유로 스스로를 구속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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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1 14:15 2007/05/2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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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가로 찾은 삶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미디어작문 3차과제
2,000자 잊지 못할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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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

그런 글귀를 보면서 나도 이런 읊조림을 했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유행가였다’라고.

어린 시절 자라던 환경으로 인해서 TV를 보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물론 부모님이 TV를 보지 말도록 통제한 것은 아니었지만, 집이 두 채로 나뉜 상태에 부모님이 주무시는 곳에 TV가 있었거니와, 항상 해가 질 때까지 놀다가 집에 들어온 나로서는 그 흔한 어린이용 만화 영화도 볼 시간이 없었다. 그런 환경에 익숙한 탓에 라디오를 끼고 살던지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온갖 유행가들은 꿰어찰 정도가 되었다.

사실 꽤 많은 노래가 내 삶의 태도를 결정짓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지쳐있는 내게 용기를 준 것도 유행가이거니와, 우울한 어린 날의 감성을 순화시켜 준 것도 유행가였다. 그 어떤 친우의 따뜻한 말이나, 가족의 위대한 포근함 따위와도 비교되지 않는. 내 안의 고요하고도 부드럽게 강한 힘을 쌓아 준 것이 바로 그런 철학들이리라.

그렇게 학창시절, 줄기차게 유행가를 옆에 끼고 살아오던 내가 사관학교를 들어가면서 음악과 멀어지게 되었다. 당연히 훈련기간 동안 가까워진 것은 ‘멸공의 횃불’과 같은 군가였고 그런 노래는 내게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만들기엔 너무도 괴리감이 가득한 곡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훈련 기간 중. 외부와 연락이 단절된지도 어언 한달. 석식 후 과업에 카톨릭 군종 장교가 조그만 포터블 카셋트 레코더를 들고 들어와, 우리가 입대한 후에 사회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곡이라며 노래를 틀어줬다. 당시에 처음 데뷔한 GOD라는 그룹도 생소했거니와, ‘어머님께’라는 제목과 달리 울려퍼지는 ‘랩’은 약간 어울리지 않는 듯 하였다. 그런데도, 이등병의 편지를 들으면서도 담담했던 내가,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라는 노랫말에 눈물이 핑 돌아버렸다. 역시 유행가의 힘이란. 그 어떤 시보다도 더 뛰어난 음악적 여운이 있지 않던가?

그 때, 잊혀졌던 내 어린 날의 유행가를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출과 외박이 금지된 시절에는 주말마다 보급받은 노트북을 들고 전산실의 인터넷 접속 가능지역을 찾아가서 mp3를 검색했다. 당시엔 소리바다도 없었고, 음악서비스 같은 것도 없었거니와, 인터넷 쇼핑몰에서 CD를 구매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토요일 저녁에는 사관학교 안에 있던 호국사라는 절을 찾았다. 그곳에는 케이블TV가 연결되어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KMTV에 나오는 뮤직비디오 보기를 즐겨했다. 어린 날의 군생활에서 무료함을 깰 수 있었던 것은 지식을 찾는 독서도 아니었고, 공부는 더욱 더 아니었으며, 무언가 현재의 불만족스런 삶을 뒤바꿔 줄 수 있는 하나의 커다란 ‘충격’이 필요했던 거다.

당시에 사관학교에서는 인트라넷 보급이 시작되고 있었다. 생도들을 위해서 전산과장이 게시판을 하나 내 주었고, 나는 그 곳에서 ‘제다이’라는 닉네임으로 내가 선곡한 mp3파일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곡에 얽힌 내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적어 내려가고 있었고, 이런 ‘사이버 활동’은 생도들 사이에서 격론을 끌어내기도 했다.

공공재인 ‘서버’에 mp3를 거의 도배하다시피 올리고 있는 나의 행동이 고깝게 느껴지는 생도들은 너무 하는 게 아니냐며 당장 중단할 것을 촉구했고, 어떤 생도들은 어차피 글도 잘 올라오지 않는 게시판에 음악이야기 좀 올리는 것이 어떻냐며 두둔했다. 더불어 전산과장인 중령이 전산학 수업 중에 내 선배들에게 접속 아이피를 이야기 해주며 서버에 쓸데없는 mp3를 올려 용량을 차지하게 한 괘씸한 ‘제다이’를 잡아 족치라고 성토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여러 파란만장한 일을 겪은 후에, 나는 사관학교 자퇴를 결심했다. 결심을 확정짓게 해준 것도 다름아닌 이현우라는 가수의 ‘슬픈 전쟁’이라는 노래였다. 난 미치도록 이 노래를 읊조리며 내가 하고픈 일이 무엇인지 고뇌했고, 결국 그 노래의 가사처럼. ‘자유’를 택했다.

내가 자퇴하던 그날. 통로를 걷고 있던 뒤에서 한 선배가 날 불러 세웠다.

‘어이 제다이!, 네가 하던 일은 이제 내가 맡아서 계속 하마!’

그때, 떠나던 날 보면서 안타까워하던 이보다. 그렇게 환하게 배웅해주던 그 선배를 잊을 수가 없다.

난 그렇게, 유행가를 통해 자유를 찾아 세상에 다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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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함장

2007/04/28 19:15 2007/04/28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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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참 '적'을 많이 만든 사람입니다.

정치적 '주적'을 두는 이유에서도 밝혔지만. 생각이 달라서 '적'이 아니라 원칙을 어겨서 '적'으로 간주해도, 그 놈의 피아구분에 대한 시각은 '노빠이자 유빠인 사람'의 틀을 벗어나기 어렵더군요.

사람 사는 게 그런가 봅니다.

부동산의 원칙은 불로소득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나라의 땅 덩어리가 좁기 때문에.
거래로 인해 소득을 내는 대상은 안 됩니다.

이게 정책 잘못일까요?

아니면 국민 대다수가 저 원칙을 무시하기 때문일까요?

정책이 시원찮아서 국민이 무시하는 걸까요?

대답은 뻔하죠.

그리고 이렇게 되면 국민 대다수를 적으로 놓고 덤벼야 하는 상황이 옵니다. 재밌죠? 민주주의 국가인데.




전 아직도 노빠이자 유빱니다. 정책을 펼치는데, 내가 던졌던 표. 그 원칙은 안 져버렸거든요. 실망이요? 일 없음다.


땅값이 올랐든, 집값이 올랐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 그리고 그 중 하나인 제게 돌아옵니다. 표에 대한 후회요? 2002년으로 돌아가도 다시 노무현 찍을 걸요?




대학 다니면서, 취업난에 대해 정부를 욕하는 대학생과, 그러면서도 묵묵히 토익책'만' 붙잡고, 공무원 시험 준비, 고시생들을 바라보면 할말을 잃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공무원 사관학교'라는 대학의 카피는 대학인가 학원인가 의심합니다.



우리는 이런 나라에 살고 있어요.

가진 자든, 못 가진 자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조금'을 '공화'를 위해 내 놓을 생각을 못하는 천민자본주의자들로 가득찬 나라.



가끔은 국민 대다수와 맞짱 뜨고 싶은 충동이 불끈 솟습니다.

물론 평화적으로 말이죠.



피아 구분은 '나와 다름'이 아니라. '자유 민주 공화국'의 원칙에 어긋나는 사람들과 구분하는 겁니다.

자신이 '자본의 논리'와, '시장 경제의 원칙'을 마치 복음과 같이 전파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속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그 보호를 위한 '자유 민주 공화' 헌법의 의미를 무색케 하는 논리를 간파하지 못 한다면.

적이 될 수밖에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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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함장

2006/11/27 20:03 2006/11/2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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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가두려는 남성의 시선

월드컵부터 이어져 오는 이야기를 한데 묶는 이유는 별반 다른 게 아니라 그 때부터 줄곧 써오고 싶던 이야기를 이제야 풀 시간이 됐기 때문이다. 그만큼, 게을러지고, 나태해지고, 글 하나 쓰는데 예전 만큼의 노력을 기울이기 어렵다는 얘기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시작하자.

사실 유흥문화는 자본주의가 '심화'될 수록 거침없이 번진다. 여성부가 아무리 떠들어도 사창은 줄지 않을 거고, 홍대의 클럽 문화는 더욱 메이저화 될 게다. 사창과 클럽 문화를 한 개 문장에 섞는 의도를 묻는다면 과감하게 얘기할 수 있는 건데 그곳은 '욕망의 배설'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사창을 인권 시각으로 바라보면 '유흥'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흥주점을 비롯하여, 성의 노골적 상품화를 넘어선 '사창'이라는 문화는 '유흥'에서 떠날 수 없는 범위라는 현실을 외면하긴 어렵다.

라스베가스, 마이애미, 지중해의 테네리페 섬. 그 속에 숨어있는 '클럽문화'가 우리네 홍대에서 추구하는 '클럽'의 지향점이 되고 있다는 것은 그런 '유흥업소'가 숭고한 정신의 '자유'를 느끼기 위한 '폐쇄'된 구조인 점을 감안해야만 한다.

격리된 공간에서의 자유. 그것이야 말로, 사창과 클럽이 가지는 공통점. 곧 타인에게 침해받지 않는 욕망의 배설구라는 점이다.

우리는 왜 이런 구조의 열악한 환경이, 한 쪽은 '인권을 유린하는 남성 중심의 사악한 지역'이며, 한쪽은 '문화공간'으로서 각광받고, 젊은이들의 해방을 위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하는 곳으로 인식되는지. 한 번쯤 궁금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저 사창은 '돈'으로 '사람'을 사기 때문에 '악'인가?

그저 클럽은 '리듬'에 몸을 맞기고 자유롭게 즐길 수 있기에 '선'인가?

'선악'구분을 하기에 너무나 동 떨어진 환경인가?



월드컵에서 이루어진 몇 가지, '여성'의 클럽이나 나이트에서나 볼 수 있는 '복장'이 야외로 튀어나왔을 때, 일부 언론을 비롯하여 집단적인 린치를 보면서 왜 우리는 그토록 '타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