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이 글의 시작은 앞 글의 ‘bum’ 님이 남긴 코멘트 중, ‘왠지 모를 서글픔에 우는 애에게는 사탕을 주지만, 사탕을 얻기 위해 우는 애에게는 싸대기를 날려야 합니다.’라는 ‘비열한 비유’에 대한 분노로부터 시작함을 명시한다.
예전에 내 글에서 ‘나는 자유주의자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가끔 자본에 대한 내 얘기나 노동자에 대한 내 시각을 보면서 ‘네가 왜 자유주의자냐?, 사회주의자지’ 혹은, ‘자유 시장경제를 규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네가 왜 자유주의자냐?’라는 이야기를 던지는 분이 있다. 이 분들은 ‘자유주의’의 뜻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듯 한데, 내가 얘기하는 ‘자유주의’는 모든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적인 개념이 강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성격이 강한 개념이다. 여기서 두 가지 오해를 사게 되는 것인데, ‘개인’이라는 단어 때문에 ‘사회주의’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생각되기도 쉽고, 공동체의 속박으로부터도 벗어나려는 성향이 짙기 때문에 공화적인 개념과도 맞서게 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렇다. 오해다. ‘개인의 권리’, ‘시민의 권리’를 존중하기 때문에 자유 시장경제 체제의 ‘자본의 횡포’와 그 ‘자본’이 로비를 할 수 있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규제’를 선택하는 것이 자유주의자고, 그런 노동자 개개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공화국을 이룩하기 위해 ‘연대하여’ 싸우는 것이 자유주의자다. 같은 ‘자유’라는 단어가 들어간다고 ‘자유 시장경제의 신봉자’가 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이건 내 정치적인 정체성이고, ‘경제적인 정체성’을 꼽으라면 당연히 ‘수정 자본주의자’가 된다. 자본주의의 폐해가 어떤 것인지 인지하고 깨달아갈수록 나는 내가 믿는 ‘자유주의’를 위해 자본주의에 지속적인 수정을 가하는, 그러니까 지속적인 규제를 가하는 게 당연하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게 내가 ‘사람답게’ 남아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이니까 말이다.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앞 글에서와 같이 내 경계의 대상은 ‘대기업이 가진 자본’이다. 물론 단어만으로 보면 웃긴 얘기이기도 한데 – 사실 대기업의 순수 자기 자본은 적다. 기업가의 돈은 금융기관에서 빌려오는 게 더 많으니까 – 이때 대기업이 ‘가진’이라는 표현은 그들이 융통할 수 있는 자본을 의미한다. 고로 대기업이 자본의 횡포를 부리는 것을 욕하는 것이지 대기업의 ‘노동자’들을 싸잡아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도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일례를 들어보자.
‘모든 기업가는 노동자의 적이다’라는 얘기를 누가 한다고 치자. 그럼 기업에 들어가 일하는 노동자는 노동의 배신자인가? 아니면 적과의 동침인가? ‘모든 기업가는 노동자의 적’이라는 명제는 성립할 수 없는 거다. 노동과 대치되는 개념은 ‘경영’도 ‘기업’도 아닌 ‘자본’ 그 자체이다. 그렇다고 자본을 혐오할 수 있는가? 어림없는 소리다. 우리 – 가계 - 는 일신상의 이유로 은행을 이용하여 저축을 하거나 주식회사의 유상증자 증권이나 신주가 발행되는 것을 구매한다. 그 돈을 금융권이 중개하여 기업이 빌려가거나, 자본금으로 확충하는 거다. 이거 중학교 때 배우지 않는가?
바로 이거다. 노동자들이 모아준, 바로 그 ‘자본’이 노동자를 몰아세우는 경지에 이르는 게 자본주의다. 그렇기에 늘 자본은 무섭다고 내가 씨부리는 거고, 오로지 자본이 경계 대상이다. 자본은 양날의 검과 같다. 기업가가 혹은 경영자가 ‘잘’ 쓰면, 부와 명예, 더불어 시너지 효과까지도 창출한다. 반면 ‘잘못’ 쓰면, 경영자와 ‘주주’들의 ‘금전적인 부분’에서는 이득이 될지도 모르지만 꽤 여러 면에서 타격을 입힌다.
문제는 노동자들은 이 자본을 대어줄 수만 있을 뿐, 경영자나 기업가처럼 운용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자본에 대한 두려움으로 생겨나는 공격대상은 자연스레 ‘잘못’ 쓰는 경영인 – 금융권 포함 - 이나 기업가가 될 수 밖에 없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삼성 공화국을 우려하며 삼성 욕을 해대면 삼성이라는 그룹의 계열사 직원 전체가 그런 기사나 글들을 보면서 ‘짜증’내기 쉽다. 자신이 일하는 터전이며, 실제로 삼성 내부에서 바라보면 ‘왜 이렇게까지 욕을 먹나?’ 싶을 정도로 괴리감을 느끼는 분도 많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런 면은 서로가 인지하는 ‘노동자에 대한 존재 본질’을 다르게 느끼기 때문이다. 삼성 욕을 하는 사람들은 ‘삼성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욕할 입장이 못 된다. 반대로 삼성 노동자도 ‘무 노조’ 경영신화 – 과연 이게 신화인가 하는 의문과 더불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지만 – 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왜 우리 회사 욕하고 지랄이야’
당신네 회사가 ‘자본의 횡포’를 부리면 욕을 바가지로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노동자인 당신들을 욕하는 것은 아니다. 툭 까놓고 얘기해서, 그 ‘자본 운영’은 주주나, 경영진, 혹은 컨설턴트나 기획팀에서 ‘경영 마인드’에 입각해 저지른 일이지,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고용된 당신들이 결정한 일은 아니거니와 당신네 회사에서 ‘비 윤리적인 자본 운용’을 했다면 당신들 스스로도 자신의 일터에 대한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어 갈등하고 고민하게 될 노동자일 뿐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최근에 화물연대 파업과 함께 벌어진 삼성 광주전자 이야기. 이 환장할 노릇의 이야기에 ‘삼성’이 끼어들어가는 이유는 뭘까? 삼성의 주장은 이렇다 ‘극동 컨테이너’와 계약한 사람들의 일이니 자신들이 ‘개입’할 수 없다고 언론에 얘기했다. 일단 사실 관계는 그러하니 믿어주자. 극동 컨테이너의 이야기는 더더욱 기가 찬다.
‘운송료는 협상을 통해 조정할 수 있지만, 단체협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씨바, 헌법에서 보장하는 노동 3권 중에 단체교섭권도 가볍게 개무시하는 센스라니, 어이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 여러분이 노동자인데, ‘밥그릇 싸움’이라고 얘기하면서 양비론이나, 심지어 위에서 얘기한 대로, ‘삼성의 주장이 일리가 있네’라며, 극동 컨테이너‘만’ 나쁘다고 코멘트를 날린다면 곤란하다. 심지어 어떤 분은 ‘운송업자’라는 얘기를 들며, 화물 수송 기사는 자기 차량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 것이니 ‘노동자’로 보는 것에 무리가 있지 않냐고 얘기를 한다. 어찌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노동자’가 화물 수송이라는 ‘사업’을 하면서 ‘화물차’라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묻자. 내가 번역 일을 하는데, 노트북이 필요해서 할부로 노트북을 구매하고, 번역 일을 얻어서 하고 있다. 그러면 나는 ‘번역 노동자’인가, ‘번역 사업가’인가? 개인택시를 모는 사람은 택시를 ‘소유’하고 있는데, 그럼 이 사람은 ‘자영업자’인가 ‘노동자’인가?
화물 운송 시스템이 예전에는 ‘업체’가 차량을 소유하고, 기사만 고용해서 수송을 하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요즘은 기사가 자신의 차량을 ‘구매’하여 업체와 계약을 맺고 운송을 한다. 물론 택배의 경우 회사 차량을 쓰지만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화물연대’에 가입한 사람들 대부분의 경우 그러하다. 문제는 이 ‘화물차’ 값이 장난 아니라는 점이다. 더불어 이걸 일시불로 구매할 능력이 되는 사람은 그 돈으로 ‘장사’하지 화물차 운송 안 한다.
업체가 자신들의 ‘유지비용’을 아끼기 위해 노동자에게 밥벌이 물품의 부담을 지운 것이고, 대형 화물차량 운전 능력이 있는 기사들은 기술을 넘어서서 차량이라는 생존수단까지 구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시 지불 능력이 될 턱이 없기에, 무조건 할부 구매를 한다. 그러나 이 직종은 ‘화물 운송’. 1년에 수 만 킬로미터는 기본이다. 차량 유지 보수와 수리는 기본이며 노후화 현상도 몇 배나 빠르다. 할부금을 다 갚고, 숨 좀 돌리자 싶으면 새 차를 또 구비해야 한다. 환장할 노릇이지.
할부 넣으랴, ‘화물 운송’이란 직업 덕분에 보험료는 좀 비싸던가. 그런 그들이 대형 화주인 ‘삼성’에게 운송료 5,000원 인상을 요구했다. 결과는 51명 전원 해고.
이걸 극동 컨테이너만의 문제로 보라는 사람은 자신이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바보인 건가? 이런 ‘노동 환경’에서도 화물 운송‘업자’라는 이유로, ‘화물 연대’는 인정할 수 없으며, 노동자가 아니니까 ‘단체 교섭권’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한 예를 더 들어보자. 평택 농민들의 농토가 미군 기지로 주어지고 이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지만, 농민들은 보상금액이 적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한다. 그리고 노동자들과 연대해 시위에 들어간다. 이 방송을 접한 택시기사 왈,
‘개새끼들 보상금이 적으니까 지랄을 하네’
이 냥반아. 국가가 당신의 개인택시 면허를 실 거래가도 아니고, 당신네가 관청에 신고하는 값 –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얘기하는데, 개인택시 면허는 거래가 가능하다 - 보다 약간 많은 금액에 박탈해 가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토지 보상에서 ‘농토’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농토는 생산수단의 하나이며, 생업의 터전인데, 이를 일반 토지 보상하듯이 돈 줘버렸다고 끝나면, 평생을 ‘논일, 밭일’ 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살던 곳 마저 내팽개치고 또 다른 농토를 찾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리고 농민들의 시위에 민주노총부터 시작하여, 대학생들까지 왜 시민단체들이 더 설치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 노동3권에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주는 이유는 도대체 어디로 먹어버린 건가? 한 개인의 노동자, 그리고 위와 같은 51명의 화물 운송 노동자가 ‘자본’과 ‘권력’에 휘둘려서 가볍게 자신들의 터전을 잃는 것을 보면서도 이런 ‘연대’가 불경스럽게 보이는가?
과거의 학생 시위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었다면, 지금의 학생 시위는 자본 만능의 사회에서 스스로 노동자임을 자각해 나가는 과정이자, 미래의 노동자로서 현재의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자본을 경계하는 행위이다. 폭력시위엔 누구나 동의하지 않지만, ‘폭력’을 내세워 시위의 본질과, ‘주도세력’이 따로 있다는 식의 언론발림에 놀아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쯤하고, 이제 bum 님 같이 되도 않는 ‘시장의 신봉자’들이 주장하는 ‘대한민국의 기업’들이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보자.
‘시장’을 ‘시장 그대로’ 내버려 두려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정보의 공정성’과 ‘정보 공개의 투명성’이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시장은 왜곡된다. 내버려 두면 잘 돌아가야 한다는 이론으로 인해 내버려 두면 ‘정보의 공정성’과 ‘정보공개의 투명성’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선 그 ‘자본’이 정보의 루트를 통제해 버린다. 그에 대한 규제 하나 없이 시장이 ‘잘’ 돌아갈 거라 믿는다면 그건 맹목적인 믿음이지 사회적 합리성을 갖춘 믿음이 아니다.
국산품 애용이 웃기는 소리라는 점은 동의한다. 문제는 이 말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기업’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결부시켜 ‘우리나라 일류 브랜드 들이 과연 영화만큼의 정부 보호를 받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해주려 한다.
한마디로 ‘죠낸 보호를 받아 쳐먹었다’
박태준이 포항제철에 있을 때, 제철 기계를 수입해 들어오면서 박통에게 달려가 세금을 비롯한 이러저러한 감면을 요구했다. 물론 거기엔 정치적 로비 자금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유는 ‘철강은 국가 기간 산업이다! 이를 들여오는데 기업이 돈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오, 놀라워라 이토록 애국을 위한 뛰어난 정신을 봤나! 덕분에 그 포철이 냈어야 할 세금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됐다. 대우는 또 어떠했던가? 세계 경영 한답시고 이 돈, 저 돈 죄다 끌어서 내리 쏟더니 홀랑 망했다. 그거 살리는 공적 자금. 다 국민이 냈다.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안 간다고? 박통 때, 먹고 살 일은 수출뿐이라면서 기업 키워준다고 온갖 정부 돈과 금융권 돈을 연결해줘서 ‘기업을 보호, 육성’ 해준 나라가 우리나라란 말이다. 내수 시장에서 고가로 팔아먹어 외수시장에서 본 손해 돌려 막고, 이것저것 잡다한 돈 된다 싶은 거 죄다 건드렸다가 말아먹어도 어차피 자기 자본 별로 안 들이고 국민이 저금했던 금융권 돈 끌어다 썼을 뿐이니, 회사 하나만 포기하고 자기 자본금만 날리면 채권자들이 알아서 회사 정리하고, 자신들은 부채 걱정 날려버리는 거다.
그 짓을 정경유착을 통해 정부가 그토록 도와줬는데, 지금의 일류 브랜드인 삼성, LG가 시장경제로 살아남았다는 주장은 어처구니 없지 않은가? 국산품 애용으로 삼성을 키운 게 아니라 정부와 기업이 국내 대기업 제품밖에 구경할 수 없는 형태의 시장을 구축해 버려서 그들이 우리 ‘피’를 빨아먹을 수 있었던 거다.
정부가 도와 준 것이 이해가 안 간다고? 물론 정부는 ‘중소기업’을 도와준 적은 없다. 대기업 키우기에 급급해 중소기업에 대한 규제는 상상을 초월했는데, 기업하나 열기 위해서 정부에 허가를 받고 찍어야 하는 도장 횟수가 900회가 넘었다. 이는 역으로 ‘대기업’을 보호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거다.
더불어 FTA와 시장 개방 이야기. 전 세계의 경제 블록화와 더불어 시장 개방을 하면 득을 보는 이들과 실을 보는 이들의 구분을 해보라. 그 동안, 정부 덕에, 국가 권력 덕에, 국민 덕에 이득을 계속 보아온 이들이 이제 해외 각지에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해외를 나가려 하니 자꾸 국내시장 개방하라는 압박이 들어온다.
어차피 자기들 제품은 국내시장 선점했고, 자신들과 상관없는 분야인 스크린 코타부터 농업에 이르는 분야까지 개방해버리라고 정치권과 합의를 봤다.
기업인들과 상관없는 분야는 개나 줘버리라는 식으로 버려두고 자신들 잇속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게 ‘자본’을 대주고, ‘세금’을 대 주었던 노동자이자, 국민들이 분노를 느껴야 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세상 풍파를 겪어야 어른이 된다는 이 비열한 비유로 일관된 bum 님의 글을 보면서 분노가 치민 것은 어처구니 없는 주장의 연속 때문이 아니라 결국 마지막 한 귀절이었다.
‘참, 님이 말씀하신 기업과 경영자와 노동자에 대한 부분은 많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공감’한다는 건가?
국내에서 국민 돈 받아먹고 잘 큰 뒤에, 이젠 국내 자기들 사업 분야 외의 시장을 내어주고 그를 발판 삼아 ‘글로벌한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세계시장을 무대로 하는 기업들의 케이스와 국내 시장으로 한정된 ‘영화 산업’과 ‘쌀 농업’시장 케이스를 ‘같은 시장 경제’로 놓고 보는 시각의 차이가 ‘다름’인가 ‘틀림’인가?
며칠 전 KT&G 경영권 분쟁처럼, 우리나라 금융권은 비교적 우리나라 경영진들에게 ‘우호적 지분’으로 손을 들어준다. 일종의 ‘국산품 애용’인 셈이다. 기업은 ‘외세’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외국의 ‘자본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면 박수를 받고, ‘노동자’는 외국의 ‘자본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면 시대에 뒤떨어지는가?
모든 건 밥그릇 싸움 맞다. 중요한 건 밥을 더 담을 수 있냐 덜 담을 수 있냐가 아니라, 밥을 ‘담을 수 있냐’다. 밥 그릇을 뺏기면 이마저도 불가능해진다.
시장이 정하는 가격, 시장이 정하는 권력구도가 가장 ‘이상적’인 것은 동의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정보의 효율성’이 채워지지 않는 한. 시장은 자본에 의해 쉽게 왜곡된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을 형성하고 확장하는 것은 ‘소비자의 needs’보다, 자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자본이 두려운 줄 알고, 기업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이, 세계 시장에 수출할 수도 없는 품목의 국내 시장을, 송두리째 자본에게 안겨줄 수 있는 시장에 ‘시장 논리’를 주장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익히 보아오던 ‘기업가의 태도’ 아니던가? 정부와 국민으로부터 받을 것 다 받아먹은 주제에, ‘규제’를 말라고? ‘시장’에 맡기라고?
보건, 환경, 안전, 노무와 같은 것을 ‘시장’에 맡기란 말인가?
다시금 말하지만, ‘경영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나, ‘기업가’가 적이 아니다. ‘자본’은 더더욱 적이 아니라 ‘경계’의 대상일 뿐이다.
허나 자신이 노동자이면서, ‘한국 기업가의 시장 논리’를 내세우는 모습을 보고, 그 표리부동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는 사람은 나의 적이다. 내 정치적 이상향을 세우는 대척점에 놓인 사람이며, 연대해가다가도 뒤통수 맞기에 딱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언젠가 노동자의 입장을 머리에서 가슴까지 이해하는 날이 오길 바라는 이유는.
아직도 이 사회에서 ‘스스로’ 노동자임을 자각하고 같이 ‘연대해서’ 나갈 사람이 턱없이 부족해서인지도 모른다.
적이기에 분노하고, 같은 계급의 노동자이기에 애처로우며, 같은 사람이기에 희망을 가진다.
그래, 사람만이 희망이다.
Posted by 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