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와 인간의 존엄

우선 영상 두 개.



본 사람도 많겠지만. 위의 영상은 EBS의 지식채널-e 에 나온 '광우병' 관련 영상이다.

난 광우병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1980년대의 '영국'을 이야기 하려 한다.

위의 영상들의 시초는 모두 영국의 1980년대다. 물론 '미친 공장'의 경우 1970년대부터 시작된 소의 사료 이야기지만 그 배경에는 역시 '인간'과 관련된 정부의 정책이 있다.

영국은 1970년대 - 1973년과 1979년 - 오일쇼크를 두 번 겪었다. 그 중 두 번째 오일쇼크 덕에 정권이 '철의 여인' 대처에게로 넘어갔다. 물론 이 배경에는 숙련 노동자들이 중산층으로 넘어가면서 '변절'하는 등의 여러가지 사건이 많지만 어쨌든 '경제 위기' 덕분에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복지 따위 집어 치우고 닥치는대로 '민영화'를 시켜버린 대처가 수상이 되어버린 거다.

대처는 이 때부터 1990년 퇴임때까지. 12년을 영국의 수상으로서 온갖 '암울한 일'을 벌였다. 이후에 '토니 블레어' 총리 시대때 대처가 벌여놓은 '경제 호황'을 누렸다고, 경제가 발전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대처 덕분에 영국은 빈부 및 지역 격차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고, 영국의 근본적인 경제 문제의 근본은 건드리지도 못 했다.

어떤가?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과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경제 발전 시키겠다고 국민을 현혹시켜 당선 되어 놓고 근본적인 문제는 건드리지도 않은 채 '닥치고 민영화'? 더불어 그 뿐인가? '최소의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기 위해 '사람'이라는 최대의 가치를 가볍게 다루는 이 '정권'에게 저런 과거의 영국이 걸었던 길이 뻔히 보이지 않는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 V for Vendetta의 원작인 만화는 저런 '대처리즘'의 배경에서 만들어졌다. 동시대를 살던 만화가가 '대처' 때문에 암울한 시대를 한탄하기 위해 만든 거다.

권위주의 정부.

시장 논리를 내세우며 기본적인 '인권' 마저 '국가'라는 명목으로 가볍게 여기고, 무시해 버리는 정부.

더 할 말이 없다.


'사람'을 위해, '더불어 같이 살아가야 할 사람'을 위해.
우리 조금만 더 '함께' 생각하면 안 될까?

복지를 줄이고, 민영화를 시키고, 빈부 격차를 넓히고......

그렇게 살아남아서 아름다운 세상이라 말하고 싶은가?

약육강식의 세상이 '본능'이 아니라 저 빨간 털 원숭이처럼 '함께' 살아야 하는 게 인간 아닌가?

Posted by 함장

2008/06/03 16:10 2008/06/03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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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 단상

어버이날 지나고 내려가기엔 애매한 연휴라 지난 주에 미리 고향에 들렸다.

생활비만 드려왔지 변변한 선물 한 번 해드린 적이 - 물론 부모님 생일 때도 - 없어서 이번에는 맥북 판 돈도 좀 있겠다, 무언가 해드려야겠다 생각했다.

교외로 나가 봉성에 있는 숯불 돼지고기 식당에 들러 저녁을 먹었다. 1인분이 500g 인데다가 만원 밖에 안 한다. 더군다나 미리 구워서 나온다. 정말 싸고 맛 좋다.

다시 시내로 차를 몰고 나가면서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영주에 거 마사이 족 신발 파는 데 있냐?"
"오거리에서 가고파 극장 가다가 우측에 있어요."

유명하긴 유명한가 보다. 중소도시에도 하나 있으니.

아버지는 모터싸이클만 내리 10년 넘게 타셨던 이후로 무릎에 바람이 들어서 사다리 - 아직도 사다리 오르내리는 간판장이시니 - 타면 아프시다 하시고,
어머니는 한번 다치신 이후로 걷기만 하셔도 무릎이 아프시다 하시니 늘상 마음에 걸리던 게 이거였다.

'뭐 한 켤레 돈 십만원 하그찌'

가격은 묻지 마시고 마음에 드는 색깔이나 고르시라고 얘기했다.

이것 저것 신어보시고 걸어도 다녀 보시더니 끝내 주인장에게 가격을 물으신다.

"한 켤레에 이십구만칠천원입니다."

내심 놀란 건 나다.

'뭔 신발이 왤케 비싸?'

어머니나 아버지나 묵묵히 신발만 물끄러미 바라보신다.

"아 가격 신경쓰지 마시고 색깔이나 마음에 드는 거 고르시라니께네?"

아버지는 신발 안을 들여다 보면서 'Made in China'랑 'Made in Vietnam'만 용케 찾아내신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핑크색을, 아버지는 그냥 무난한 회색을 고르시고, 결국 두 분 다 한 켤레씩 구입해서 매장을 나왔다.



두 분 평생 3천원 뺀 30만원짜리 신발은 처음 신어 보신 게다.

형 장가갈 때 형수네서 혼수로 해오는 물품도 서민답게 예의만 갖췄지 비싼 거 아니 원하셨던 분들이시다.

물론 나도 30만원짜리 신발은 커녕 신사화도 제일 좋은 게 군용 에스콰이어 보급 단화가 고작이었다.

그런면에서 이건 일종의 사치였다. 일상에서 신을 신발도 아니고 - 사실 저 마사이 족 신발은 걷기 운동 외에는 좀 불편해 보인다 - 산책하시고 걷기 운동 하실 때 신으시라고 사드린 '레저용 신발'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사거리 신호등에 걸려 멈췄을 때 어머니가 얘기를 꺼내셨다.

"엄마가 너들 메이커 있는 옷도 한 번 못 입혀보고 키우면서 얼마나 미안했는지 아나?"
"아이고 엄마, 다른 애들한테 밑보이지 말라꼬 맨날 깨끗하게 옷 입힐라꼬 고생한 거 내 모르는가? 말이사 바른 말이지, 메이커 한 번 못 입어보고 크는 바람에 나는 '메이커'가 뭔지도 모른 채 컸잖는가?"
"그렇나? 엄마도 똑같데이, 엄마도 뭐 메이커를 써 봤어야 메이커를 살 줄 알쟤."

한바탕 차 안이 웃음으로 가득했다.

사실 그러고 보니 내가 '나이키'라는 상표를 인지하기 시작한 건 중학교 들어가고 나서였다. 농구화가 몇 만원 한다는 사실도 내겐 충격이었는데, 우리 엄마는 농구화처럼 생긴 신발을 5천원에 난전에서 구해 오셨기 때문이다.

신발 뿐이던가, 난전표 티셔츠, 난전표 잠바....



집에 돌아와서 참외 하나 깎아 먹고 어머니는 새 신발을 신고 동네 운동을 나가셨다.

그리고 들어오시다가 지퍼가 다 나가 떨어진 내 신발을 보셨다.

"아는 다 떨어진 신발 신기고, 부모란 게 30만원짜리 신발을 사 신네 그려"
"거 2만원짜리 신발 쫌만 신으면 다 닳두만, 올라가서 새로 사 신을 끄여"



오늘도 수업 시간에 '브랜드 충성도'니 뭐니 하면서 떠들어 대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지금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건지, 아니면 이 엿 같은 상황을 무시하고 관조하는 건지, 아니면 어느 새 적응하고 사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여자들끼리 모임에 '명품' 하나 정도 꿰 차고 나가야 쫌 있어 보이는 사회.

남자들 패션에 '명품' 하나 쯤 걸쳐야 '패션 감각'이나 '센스'가 있어 보이는 사회.



그나마 위안인 것은 내가 '부모님께 명품 하나 장만해 드려야지'라는 마음이 아니라 부모님 무릎 아프시고 허리 아프실까 부담 좀 줄여 드리려 '기능'으로 신발을 골랐다는 점일 게다. 그렇기에 사실 지불 능력이 있어서 '뭔 신발이 이리 비싸' 생각은 했어도 '돈 아깝다'는 생각 따윈 들지도 않았다.

평생 보세는 커녕 시장 난전에 널린 옷 가지나 사 입어 오던 가족.

1년 내내 쇠고기는 커녕 돼지고기 한 번 먹을까 말까 했던 가족.



난 서울 사는 고모네가 우리 가족 올라올 때마다 돼지고기를 구워 주길래 되게 잘 사는 줄 알았다. 물론 우리 집 보다야 잘 살았지만.

서울 와서 벼래 별 짓 다 하면서 부모님 생활비까지 챙겨도 1년은 커녕 1주일에 몇 번씩 고기를 먹게 되는 상황을 보면서 기가 막혔다.



왜 우리나라는 '지방'에서 우리 부모님 모시고, 1주일에 한 번 외식도 하고, 고기도 구워먹으면서 여유있게 살기 어려운 걸까?

아니, 왜 그렇게 사는 방법을 억지로라도 막는 걸까?



기회비용이라는 게 있어서, 내가 아직 고향에 살았더라면. 아직까지도 취업은 커녕 공사판에서 노가다나 뛰고 있었을 게다.

서울로 올라와 돈은 조금 더 벌었을 지언정.

부모님께 뭐 제대로 해드린 것 하나 없다.

지방 어딜 가나 듣는 이야기.

'누구네 아는 서울 가서 돈 잘 벌고 있댜'

도대체 누가 자식키워 서울, 뉴욕 보내려 뒷바라지만 하는 세상을 만든 건가?



기회비용이고 나발이고.

난 우리 부모가 반평생 고생하시며 날 키워주신만큼, 조금 더 편안한 노후를 보내시도록 내가 노력하고 싶다.

그저 1년에 몇 번 고향에 내려가는 게 아닌.

고향에서도 어렵지 않게 취업해, 부모님 옆에서 돌봐드리며 월급 받아 가족이 즐겁게 웃으며 살면 그 보다 더 나은 삶이 어디 있겠는가?



무한 경쟁이니, 시장 원리니.

그토록 자기 가치를 높이는 것과 그 돈으로 명품을 비롯해 자기 치장을 하는 것과.

가족끼리 작은 차에 모여 앉아 웃으며 저녁 나들이 할 수 있는 삶과.

어느 것을 택하겠는가?

극단적인 선택이라고? 마음은 후자가 그립지만 현실은 전자가 아니냐고?

씨바 '민주주의' 사회라면 후자를 이룰 수 있게 대다수가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닌가?



비싼 신발을 온천이나 - 내 고향 영주에는 시에서 관리하는 온천이 있다. 목욕탕 정도로 싸다 - 공공장소에 두면 사람들이 가져갈까봐 고민하는 어머니께 결국 한 마디 했다.

"아 잃어버리면 또 사면 되잖는가?"
"그럼 아깝잖냐?"
"아 뭐가 그리 아까운가, 원래부터 없던 건데, 생겨서 잠깐이라도 즐거웠으면 됐지 비싸든 싸든 다 똑같이 발에 신고 다니는 건데, 잃어버렸다고, 누가 훔쳐갔다고 발만 동동 구르면 내 속만 타지 훔쳐간 놈 속이 타는가? 거 엄마가 불공을 그리 들였으면 법정 스님 '무소유' 정도는 생각해야되잖는가?"
"그래도 아들이 사준 건데 아깝지."
"아 거참 아들이 또 사준다니께네?"



자본주의를 치장하는 것은 욕심에 대한 허용이고.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는 방법은 과욕에 대한 제제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생각있는 사람들의 연대다.

Posted by 함장

2008/05/06 21:13 2008/05/06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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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의 상자 - 20대는 죄가 없다.

일본의 2008년도 2분기에 시작된 드라마 중에 '판도라'라는 것이 있다.

한 국립대 의대 연구원이 '모든 종류의 암'을 치료하는 약을 개발해버리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루는 듯 - 아직 1회까지 밖에 안 나왔지만 이미 1회에 약을 개발했다 - 하다.

감히 건방지게 말하지만, 왜 제목이 '판도라'인지 벌써 깨달은 분들은 그나마 세상 돌아가는 꼴을 어느 정도 보시는 분들이고, 도무지 '왜' 제목이 판도라인지 아직도 감이 안 오시는 분들은 순진하게 세상 사시는 분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가 '사회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면, 아니 적어도 영국이나 유럽의 일부 국가처럼 무상 의료가 진작부터 지원되는 나라였다면 위의 '모든 종류의 암'을 치료하는 약의 개발이 그토록 무서운 '판도라의 상자'가 되진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 대한민국과 일본은 그 빌어먹을 '자본주의' 사회에 충실하다 못 해 사람 목숨을 돈으로 따져야 하는 - 일본도 우리도, 암 치료비 때문에 집의 재정이 풍비박산 나며, 이로 인해 돈이냐 목숨이냐를 따져야 하는 더러운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 슬픈 나라가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TV시리즈에서처럼 '모든 종류의 암'을 치료하는 약이 실제로 개발되어버리면 일본은 절대절명절체절명의 위협을 받게된다. 일본의 생명 또는 질병 관련 보험 중 '암'과 관련된 상품은 무너져 버리고 보험의 기능이 무너짐과 동시에 금융권의 악재가 온다. 이와 더불어 '암'으로 인해 죽어나가야 할 예상치의 인구가 급작스레 '살아가기' 시작하고 이 인구는 고스란히 최고령 인구가 즐비한 일본사회에 더더욱 무거운 짐으로 나타나 버리며, 이는 사회의 공멸로 이어지게 된다. 더군다나 이런 일이 일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 세계에서 '암'으로 돈을 벌어먹고 있는 모든 산업에 위해가 가해진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그 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기득권'이다.

그러나 이런 사태가 올 수 있을까?

자본주의 국가에서 대의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빌어 기득권이 해낼 수 있는 만행은 인간이 얼마나 '금권'에 타락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약'이 개발되면 손해를 보게 되는 제약사와 병원, 금융권은 연합을 해서라도 후생성을 비롯한 관료들에게 로비를 하여 약이 '절대'로 출시되지 못하도록, 혹은 '출시하더라도 전 재산을 털지 않으면 안되도록' 가격을 조정하게 된다. 이로 인해 '충격'은 완화되고 결국엔 가진 자들의 배를 불릴 지언정, 진정한 '암의 정복'은 결국 '한 과학자의 인간승리'가 아닌 '금권의 승리'로 둔갑할 것이다.



이는 신약 개발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엄청나고도 급격한 변화는 언제나 '기득권'을 위협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변화는 새로운 '기득권'을 낳게 된다. 그리고 인간이 언제나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에 '욕심'은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버리기 어렵다. 그리고 그 중심은 언제나 기득권의 회유와 협박, 달콤한 유혹에 시달릴 것이다.



또 다시 실망 뿐인 - 이재오를 무너뜨린 문국현 케이스 제외 - 선거가 끝났다. 기득권은 밤낮 안 가리고 국민을 농락했고 국민은 또 다시 무장해제 당하고 멍청히 투표를 하지 않았다. 정치 혐오감이든 나발이든 중요치 않다. 지금의 20대를 만든 것은 지금의 4~50대 부모와 그들이 즐겨보던 조중동이며, 대입 외에 다른 꿈을 꾸지 못하게 한, 기득권이 만들어 둔 시스템일 뿐이다.

20대는 벌 받을 일이 없다.

기득권이 만든 기본적인 교육 시스템조차 파괴시키지 못한 이 사회의 중년들이 이 사태를 고스란히 책임져야 할 것이다.

20대는 분명 책임이 없다.

열 아홉부터 종이 쪼가리 도장 찍을 권한 준다고, 대가리에 똥이 들었는지 글로벌하게 원대한 꿈이 들었는지 따지면 뭐 할 것인가? 그 속에 뭔가 채울만한 그런 기반조차 주지 않은 채 바라는 게 너무 많다. 이들은 그저 이제부터 당신들의 '개발독재' 때처럼, 그렇게 허리 졸라 살면 그만이다. 서로 시기하고 경쟁하고 물어 뜯고 살면 된다. 30대들, 자신들도 그런 기반 없이 이 사회를 버텨왔다고 이들에게 '우리는 그랬어'라면서 저항의 삶을 강요할 텐가? 자신들이 읽어오던 '빨간 책'이, 맑시즘이 사회에서 퇴출되고 있는 동안, 당신들이 '밥벌이'에 바빠 신경쓸 겨를이 없던 동안, 이들이 권력에 의해 '취업에만' 힘쓰는 불쌍한 자본주의의 기계가 되어가는 동안.

20대를 비난하지 말자. 이들은 그런 사춘기를 보내고, 남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비극에 놓였다.

이제 고민은 오히려 중년, 당신들의 것이다. 애새끼들은 서른이 넘어도 취업하지 '않은' 채로 집에서 돈 달라 보챌 거고, 의료보험 민영화되어 늙어가는 몸이 아파도 병원은 커녕 약도 못 사고, 연금이고 나발이고 수급액은 줄어들어 결국 피폐한 노년이 될 테니 말이다.

결국 모든 것은 '기득권'이 원하는 방향대로 흐른다. 가끔 변수가 생겨봤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기득권은 '돈'을 가지고 '사람'을 농락한다.

그에 대항할 수 있는, 현실의 유일한 방법인 '대의 민주주의'조차도 결국 '돈'과 '권력'에 농락당하면 끝이다.

슬슬 땅값 오르던 노원구에 노회찬이 아닌 '한나라당 홍정욱'이 됐다.

유시민을 두 번이나 당선시킨 덕양구 갑에 재개발 시기로 슬슬 땅값이 오르더니 심상정이 아닌 '한나라당 손범규'가 됐다.



판도라의 상자에 '희망'이 남았다고 하던가?

그 희망이 의지로 발현되어 결국 우리는 나설 것이다.

투표고 나발이고 언제나 물러나 무임승차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내 아버지 세대의 무지렁이처럼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결국 짱돌을 손에 쥐고 금권에 타락한 정권에 맞서고 피터지는 사람들이 없는 한 신의 '약'은 일반 국민의 손에 오지 않는다.

내 학창시절을 386, 486 선생들의 아래에서 보냈던 걸 감사해하며.

p.s 시위장에서 자주 봅시다 여러분.

Posted by 함장

2008/04/10 13:44 2008/04/10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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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Inc.와 포드주의(Fordism)

올해 7월 Apple Inc.는 iPhone을 내어 놓으면서 정직원과 1년 이상된 파트타임 직원에게 이를 선물했다. 근대에 들어서 한 회사의 '생산물'이 그것의 생산에 개입한 노동자가 아무런 추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소유'하게되는, 조금 혁신적인 사건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이는 처음이 아니다. Apple Inc.는 2005년도에도 iPod shuffle을 전 직원에게 선물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고려해보면 실상은 이와 다르다. 사실 iPhone이든 iPod shuffle이든 분명히 각인된 정보로는 디자인은 캘리포니아의 Apple Inc.에서, 제조 자체는 중국에서 이루어졌고, 중국의 하청업체 노동자는 iPhone을 받지 못하며, 물론 iPhone의 부품인 칩셋을 제공한 소니와 삼성 등등의 기업 노동자도 iPhone을 받을 수 없다.

더군다나 경영관련 서적 좀 넘겨본 사람들은 1만7천여명이 넘는 Apple Inc. 직원 전원이 iPhone을 갖게 되어 이로 인해 생겨나는 부가적인 요소들에 대해 여러 항목들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노동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시대다. 농작물을 생산하는 농토 단위면적당 생산량의 경제성이 양모를 생산하는 목초지 단위면적당 생산량의 경제성보다 떨어지면서, 농노는 '예속'관계에 있으면서 생산수단이던 토지를 버리고, '살기 위해' 도시를 찾아 공장으로 들어갔다.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 매우 잘 묘사해둔 '분업'은 결국 이렇게 공장을 찾아 들어간 노동자들이 자기 힘으로 만든 '생산품'에서조차 '소외'되게 만든다. 대장장이가 철을 녹여 못을 만들 줄 알아 이를 소유하고 거래하던 시대를 지나 대장장이 여럿이서 쇠를 녹이고, 못의 머리를 만들고, 몸통을 만들고, 이를 다시 결합하는 작업을 나누어서 하는 시대도 지나 아예 이 생산품을 소유는 커녕 대리로 '돈'을 받아가며 만들어주는 시대가 온 것이다.

생산 수단으로부터 '타의로 인해 자유롭게 된' 노동자, 자기 노동으로 생산품을 만들어도 그게 '내 것'이 안 되는 노동자.

나는 Apple Inc.의 사건을 그 괴리감의 중간 쯤 놓인 혁신적인 사건이라 보는 거다.
생산에 관련된 모든 노동자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제조사'에 있으면서 '제조품'을 가질 수 있고, 잉여 생산품을 '내다 파는' 그런 원시적인 개념으로 말이다.



Fordism이라는 것이 있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면 포드주의라 할 수 있겠다. 자본주의 경제 철학 중 하나인 이 사상은 단어에서 알 수 있듯, Ford Motor Company의 창설자인 Ford가 생각해 낸 것이다.

세계 경제 공황의 파급으로 인해 Ford Motor Company는 생산된 차량의 재고만 쌓이고 팔리질 않았다. 이로 인해 Ford가 내어 놓은 정책은 노동자의 임금을 인상하는 방안이었다. 경기가 경색되어 소비자가 지갑을 열지 않으면 결국 생산품이 팔리지 않아 생산도 줄어들고 전체 부가 감소하는 악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결심한 정책이었다.

물론 모든 노동자가 임금이 오른다고 Ford 자동차를 사는 건 아니다. 하지만 Ford Motor Company의 노동자는 오른 임금으로 인해 어느 정도 소비의 여유가 가능했고, 이로 인해 주변 경기의 경색도 완화시켰다.



대한민국은 재미난 나라이다. 대학생들 대다수가 자신은 '진취적'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가진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하고, 그렇기 때문에 경쟁사회를 당연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하는 듯 하다. 옆 나라 일본과 비교해 보면 그런 태도는 상이하다.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일본은 결국 근래에 인력이 모자라서, 대학 4학년생들은 이미 취업이 대부분 결정되었고 취업설명회도 3학년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취업 희망 직장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회사가 아니라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미는' 온화한 직장 분위기를 선호한다.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복지부동으로 편안히 다닐 수 있는 직장을 의미한다. - 일본에서는 법령으로 정년에 대해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얘기하는 복지 부동은 우리 네의 공무원 인식과 비슷한 이야기로 인식하면 된다 -

차라리 일본 청년의 다수가 더 자기 정체성에 충실하다. 대한민국 청년 다수는 고용 불안에 대해 하나의 정체성이 두 가지 대응을 한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경쟁하면 살아남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선호하는 직장은 철밥통인 공무원'이 되어버리는 웃긴 상황이 오는 거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편의점 알바까지도 사장님 마인드로 경영에 충실하다.



대한민국 대기업 신입사원 연봉 평균은 일본보다 꽤 높다. 이는 정년 보장이 되지 않는 우리나라 현행 법령과 보장이 되는 일본의 차이로 인해 노조가 얻어낸 결과다. 대기업 취업이 희망인 한 경영대 학생의 입에서 이런 얘기가 나온다.

"임금이 높은 이유는 귀족 노조 때문이죠"

이게 바로 우리가 미처 자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현실의 괴리이며, 노동자 따위 안중에도 없게 만드는 언론과 사회 풍토가 만들어내는 비극이다.



'돈'이란 건 돌고 돌아야 전체의 부가 증가한다.

억울하게 '귀족 노조'라 불리는 노동자도 임금을 받으며 이 임금에서 국가에서 요구하는 세금으로 '원천징수'를 당한다. 차라리 온갖 비리와 탈세로 얼룩진 대한민국 대기업의 타락한 모습보다 깨끗하다.

물론 노조도 이권으로 인해 타락할 수 있으며, 노동자도 연말정산에 종교단체에 기부하지도 않은 돈을 기부했다며 익세를 한다.

어쩌면 이마저도 사장님 마인드에 충실한 노동자들이 넘치는 나라여서인지도 모른다.
타인이 나보다 소득이 많아서 행복한 세상이라면 문제가 있다.
그러나 타인이 나보다 소득이 많아서 더 많은 기회와 권력을 가지게 되는 사회라면 그건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다.

Posted by 함장

2007/10/30 10:43 2007/10/3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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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풍경

라페스타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영화 시간이 넉넉하게 남았고, 같이 보기로 한 사람이 아직 퇴근하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커피 하나 사들고, 정발산 역 공원의 벤치에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벧엘교회의 커다란 십자가가 우리를 굽어 살피고 있었고,
공원 한 가운데에는 500원짜리 동전을 넣어 '엘리제를 위하여'와 함께 시속 20km의 드라이빙을 즐길 수 있는 미니 자동차가 모여 있었다.

그러나 공원의 전체를 활주하는 것은 시속 30km를 넘는 속도로 움직이는 미니 모터싸이클이었고, 남녀노소 누구나 그렇게 '폭주'를 뛰고 있었다.

난 그 번잡함을 지나, 공원 중앙을 차지한 채 '번쩍거리며' 세련된 500원짜리 미니 자동차가 아닌, 너무도 오래 되어 이리저리 사고의 흔적들과 몇 번의 페인트 덧칠을 했을지 상상조차 안 가는 외형을 지닌, 오래된 500원짜리 미니 자동차가 모여 있는 곳의 벤치를 찾았다.

노년의 부부가 운영하는 그 미니 자동차는 가지런히 정렬된 채, 아이들을 기다렸다.

남편은 고장난 한 대의 배터리를 빼내고 배선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고,
부인은 하염없이 500원을 넣어가며 아이들의 시선을 뺏으려 노력했다.

영악한 아이들은 몰래 몰래 다가와 혹시나 500원짜리가 튀어 나오지 않을까 반환 레버를 만지작 거리다가 눈이 마주치면 도망가고,
아이를 데리고 지나치는 부모들은 좀 더 '나은' 차를 태우기 위해 다른 곳으로 비껴갔다.



노부부의 벤치에는 출출함을 달래기 위한 미숫가루와 떡 몇 조각이 놓여 있었고,
남편은 자동차가 잘 안 고쳐지는지 짜증을 내며 성질을 부렸다.

부인은 구부정한 허리에 묶인 돈가방의 무게에 더욱 허리가 휘어 보였다.



좁은 나라.

이제 내 어린 날 주머니 100원이 없어 못 타던 미니 자동차는
폼나게 탈 수 있는 미니 모터싸이클에게 자리를 내주었건만
왜 아직도 저 노인들은 얼음조차 다 녹아버린 미숫가루를 먹어가며, 이 땡볕에 돈을 벌어야 하는가.



뒤에선 홈에버 파업으로 인해 전경들이 모여 앉아 식판에 쌀밥을 얹어 먹고

연인들은 벤치에 누워 사랑을 나눈다.

아! 대한민국!



그 노부부의 오래된 자동차에,
그 노부부의 오래되었을 짜증섞인 실랑이에,
목이 메어 눈물을 훔쳤다.

Posted by 함장

2007/08/24 03:08 2007/08/24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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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의 전쟁'과 자본주의

재무관리 시간이었을게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일수'가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 자기네 아버지가 영세자영업자였던 학생이라면 알법도 했지만, 뽀송뽀송한 아해들이 알 턱이 없었다. 학생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내게 교수의 시선이 돌아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고, 난 당연히 교수의 의도와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다.

'보증이나 담보가 없는 영세 자영업자들이 주로 돈을 끌어쓰는 방법이죠. 서민들이 목돈이 필요할 때 자주 손 벌리기도 하고요'

물론 교수가 바라는 답은 그게 아니다. 일수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매월'이 아닌 '매일' 이자가 복리로 붙는 것이 바로 그 '일수'다.



고등학교 미적분이 지나가면 가장 골 아픈 게 바로 저 '복리' 계산이었다. - 물론 며칠 고생 후엔 별 것 아닌 걸 알게 되지만 - 시그마 기호 하나 붙이고 그걸 공식에 넣어 계산하던 그 '복리'도 '월리'를 따졌다.

그런데 그게 '일리'가 된다고 생각해 봐라.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미 자신이 갚아야 할 금액이 빌린 금액의 두 배가 된다.

그런데도 '쩐의 전쟁' 독고 영감 말마따나. 일수는 서민 경제에 없으면 '큰일' 날 존재다.



민주노동당 말을 빌리자면 이건 순전히 '공공의 기능'을 개무시한 은행의 더러운 욕망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불평등한 요소인 '태어날 때 주어지는 자본의 규모'는 서민들에게 '담보'를 쥐어주지 않으며, 인간의 본성은 성선도 성악도 아니기에 도무지 '보증'을 설 사람도 얻기 어렵다.

'농협'은 농민을 위한 은행이 아니라 농민의 피빨아 먹는 은행이라고 공공연히 회자되는 만큼 - 주변의 농협 관계자 여러분에겐 미안하지만, 솔직하게 살자 - 은행은 그저 '이윤을 추구하는' 집단일 뿐, 서민을 위해 손해의 가능성을 '감수'하면서 융자해주지 않는다.



아무 것도 없는데. 목돈이 필요하면.

서민은 어쩌겠는가?

복리를 따져 계산하면 엄청 손해다.

그러나 당장 들어갈 목돈이 있고, 매일 몇 천원에서 1~2만원 정도는 갚을 능력이 되는 서민들 - 아마도 하루 품삯의 절반이 넘겠지만 - 은 그렇게라도 끌어 쓸 수 있는 곳에 감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돈 놀이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 안 꼬울리 없지만.

그 일수돈의 숨통까지 조여버리면 서민들은 어디가서 돈을 구걸하나?



나는 돈을 역전 시장통에서 배웠다.

그래서 재무관리를 들으면서도 저 따우 '질 낮은' 답변을 골랐다.

배운 사람들 주식으로 돈을 버나.

사채시장 고리로 돈을 버나.

부동산으로 돈을 버나.

돈 놓고 돈 먹기.

다만. 바라는 것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有錢無罪 無錢有罪.

국가 시스템이 서민의 '자본'을 해결해주리라는 망상따윈 하지 않는다.

다만 법 앞에서 평등하게 사람다운 대접이라도 받아보고 죽고 싶다.

Posted by 함장

2007/06/26 00:20 2007/06/26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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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스틸러가 주연한, '아동용'으로 겨울 극장을 강타한 이 영화는 상당히 재미난 구석이 있다. 공룡 뼈가 살아서 돌아다닌다거나 미니어처들이 살아 숨쉬는 것이 재미난 것이 아니라, 벤 스틸러가 처해진 상황을 재미있게 표현한 구성에 놀라움을 느끼며 박수를 쳤으니 말이다.

상황은 이렇다. 벤 스틸러가 창업에 실패하고, 이혼을 겪고, 집세까지 밀리자 자신의 애를 키우기 위해 생각지도 않은 박물관 야간 경비를 맡는다는 얘기다. 이전에 박물관 경비를 서던 노인 셋이 박물관의 '예산 삭감' 때문에 잘리고, 튼튼한 - 혹은 멍청하게 착한 - 젊은이 하나로 야간 경비를 세운다는 스토리부터 범상찮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 이 세 노인이 벤 스틸러에게 던져준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매뉴얼'!!

그렇다. 경비에 무슨 매뉴얼이 필요하겠느냐마는. 여긴 꼭 필요하다. 왜냐? '살아 있는' 박물관이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의 멍청한 벤 스틸러는 이 '매뉴얼'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 만의 노하우를 개발하여 박물관을 이끌어간다는 뻔하디 뻔한(?) 내용이 분명함에도. 무릎을 탁 치는 재미가 숨어있다.




그럼 잠시, 영화를 벗어나 보자.

미국이란 나라는 '매뉴얼', 그러니까 작업자의 '매뉴얼'이 무척 잘 발달된 나라다. 물론 그 외의 매뉴얼도 뛰어나지만.

이런 문화가 어디서부터 발단했는가 쫓아 올라가 보면 우리의 극악무도하고 쓰레기 같은 인간성과 함께 자신의 변호를 위해 최악의 개구라를 펼치고도 당당히 '업계' 및 '경영학계'의 지존으로 지금까지 군림하고 계신 테일러 슨상을 만날 수 있다.

이 냥반은 베들레햄 제철소에서 일할 때부터 십장들이 할 일 같은 것을 적어 둔 매뉴얼 같은 것을 만들어서 돌리기 시작했는데, 이게 어떤 의미냐 하면.

첫째, 사람들이 노동에서 자기 창의성을 말살하게 내버려둔다.

예를 들어 한 숙련공이 자기가 하는 방식이 가장 쉽고, 어찌보면 재미나고, 어찌보면 게으름피기 쉬운 방식으로 몸에 익어, 그것을 '전수' 해줄 때도 그 요령을 전수해주는 것과 달리.

매뉴얼이라는 것은 가장 업무를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하나의 특징있는 개성을 각각 갖추고 있는 인간에게 개량화된 잣대를 대고, 거기에서 '우량종'을 골라내어 움직이게 만드는 도량형과도 같은 것이다.

둘째, 매뉴얼은 철저하게 기존의 것을 보호하고(보수적이고) 변화를 억제한다.

매뉴얼대로(흔히 얘기하는 FM. 이것도 웃긴다 'FM'대로 하라는 표현을 쓰는데 FM 자체가 '매뉴얼을 따르라'는 얘긴데, 그냥 'FM해' 라고 쓰면 되는데 말이다. 이래서 외국어 혼용은 자제해야 되는 거다.) 따르면 아무 손해가 일어나지 않는 풍조는, 인간이란 존재의 특성을 완전 개무시하고 하나의 기계 부품 정도로 전락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매뉴얼은 소통이 '단절'된 상황에서는 정말 멋드러지게 필요한 '기록'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시의 상황'이 아닌.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환경이라면 글쎄. 너무나 억울한 삶 아닌가?



매뉴얼을 통해서 '옛 것'(박물관)을 그대로 '가두어' 두면서 살다가 이젠 아예 그것을 '팔아' 또 다시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늙은이들과, 그 '옛 것'을 물려받아 매뉴얼 따윈 잃어 버리고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 '옛 것'과 진정으로 함께 숨쉬는 축복의 날을 만들어 내는 이야기.

조화란 이런 게 아닌가?

엄숙한 척, 그러면서도 속은 탐욕으로 가득찬, 보수를 넘어서 기득권을 수호하는 것 보다.

오히려 과거와 그렇게 '소통'하면서 현재의 우리를 '축제처럼' 사랑하고 살아가게 만드는 것.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던가?



자본주의가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을 잃어버리면 쓰겠냔 말이다.

Posted by 함장

2007/02/12 19:44 2007/02/12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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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얼굴 - 자본을 대하는 태도


크리에이티브 단평을 몇 개쓰면서 듣는 얘기가 뭔 놈의 '자본'에 대한 얘기가 그렇게 많냐는 것과 '자본' 아니면 할 얘기가 없냐는 것이죠.

이 노래는 김광석 때문에 알게 된 겁니다. 이 냥반이 이 곡을 부르면서 울었다고 해서. 어린 날에 찾아 듣고 저도 울었던.

사진은 군대 있을 때 제 모습입니다. 노래가 '못생긴 얼굴'이라는 거라 저 사진을 고른 것이지만 사실 저 사진에는 상당히 많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자본에 휘둘려 제가 어떻게 짓이겨졌는지. 그리고 그 자본을 어떻게 초월해 냈는지.

모든 게 자본 탓이라는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노랫말을 곱씹으며 얘기해 보죠.

못생긴 얼굴이라는 것은, 그것도 열 사람 중에 아홉 사람이 못생겼다고 얘기하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그렇게 '태어난' 모습을 의미하지요. 이건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거라 어쩔 수 없어요. 가난이라는 것도 이와 같은데,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처음에 주어지는 '자본'이 동등하지 않다는 걸 간과합니다. 그런데 사회는 '돈 없는 사람'이 죄인인 마냥 구조를 만들어가지요.

꼭 그렇게만 볼 게 아니냐고 반박을 하는 사람들 - 사실 반박이라고 급을 매겨 주는 것도 웃깁니다만 - 이 불쌍한 이유는 이미 자본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에 접근하기 편리한 구조가 되고, 그게 계속 이어지다보면 고착화가 되는 겁니다.

자본주의의 '자'자는 재물 資, '본'은 으뜸(근본) 本자를 씁니다. 돈이 으뜸이 되는 사회지요. 주로 경제 체제를 자본주의로, 정치 체제를 민주주의로 결합시키면 이상적이라고 저 같은 우파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가끔 '정치 체제'를 무시하고 경제 체제를 사회 전체의 '체제'로 삼아 사람보다 '돈'이 으뜸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자본의 노예이자, 민주공화국의 적이며 우리가 지속적으로 경계해야할 부분인데 그런 '경계'를 위한 구조를 만들 수 있는 권력에 접근하기는 어렵습니다. '자본가'들이 훨씬 쉽게 접근하지요.



우리나라는 땅도 좁은 주제에 부동산 부자는 대박을 쳐 왔습니다. 노랫말에 '너 네는 큰 집에서 네 명이 살지, 우리는 작은 집에 일곱이 산다, 그것도 모자라서 집을 또 사니, 너 네는 집 많아서 좋겠다' 라는 부분이 있죠.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도 사람이 살면서 필요한 것이 '의식주'라고 가르치면서 정작 '주'는 인생의 황혼기에나 자기 것을 얻어볼 수 있습니다.

공급을 늘이면 뭐 합니까. 결국 사는 사람들은 프리미엄까지 얹어가며 사는 땅부자들이며, 꼴에 서민을 가장한 중산층이 재태크랍시고 배운 것이 분양 받아서 프리미엄 받고 더 부자인 사람들에게 팔며 차익을 챙깁니다. '진짜 서민'은 분양. 꿈도 못 꾸죠. 중도금 10년 상환하다가 도태되기도 쉽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개입할 건 개입해야지, 아니하면 죽어나는 게 서민인 겁니다.



노래에서 가장 '강렬한'. '개새끼'가 연발되는 강제 철거 상황. 재개발한다고 TV에서 보여주는 '강제 철거민' 이야기. 실제로 현 정부 들어서서 보상 기준과 보상액은 기존 정부에 비해 나아졌습니다. 그런데도 용역 깡패는 여전히 나타나고, 헌법에서 보장된 주거 자유의 권리 따위, 개무시되는 사회는 결국 '사람보다 자본이 위인 사회'. 재개발을 통한 부가가치를 먹는 사람들은 기존에 살던 사람이 아니라 투자를 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감출 수 없는 현실이지요.

제 아버지가 손수 해머를 들고 우리 집을 헐며. 울분을 감추지 못해 벽면에 빨간 페인트로 쓴 장문의 억울함은 자본가와 그 수호자인 공무원들의 비열함에 대한 증오심보다 가슴에 칼을 갈며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서릿발 어린 눈의 기억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강금실이 며칠 전에 이너뷰를 하면서 이런 무식한 얘기를 했지요. '서민들은 부자들을 규제하기 보다 부자들이 돈을 쓰게 풀어주길 원하더라'는. 정말 철학없는 이야기 아니더이까?

편법 증여에, 자본을 앞세워 온갖 횡포를 부리는 사람들이 돈을 푸는 게 서민에게 돈을 쥐어줄까요?

돈이라는 건 돌고 돌아야 합니다. 가진자 끼리 돈을 돌리면 그건 돌리는 게 아니라 폐쇄된 겁니다. 부자들이 돈을 내어놓지 않으면 세금으로 '뺏아'서 강제로 돌려야죠. '뺏기기'싫으면 법에서 정한 '기부금'이라던가, 자신들이 가진 돈을 돌리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죠.

기업 문화가 재벌 문화로, 복지 사회로 나아가는 발판 조차 갖추지 못한 전근대적 사고를 갖춘 사회에서. 저런 소신과 철학이 없는 정치인이 우먼파워로 나서는 모습은 너무나 아쉽습니다.



전 '수정 자본주의자'입니다. 수정 자본주의나, 자본주의나 무어가 다르냐고 요즘 자본주의가 어디 자본주의냐고, 모든 걸 수정하는 수정 자본주의 아니냐고 얘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적어도 자본이 사람위에 서는 사회는 '수정'되어야. 그게 수정 자본주의 사회죠.

못생긴 사람도 내 아버지의 노동을 자랑스러워 하며 살 수 있는. '인본주의'사회가 되어야죠.

그렇기에 더욱. 노동운동이 대한민국에서 '사람답게 사는' 희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대부분이 노동자니까요.

Posted by 함장

2006/10/16 16:58 2006/10/16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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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서울공화국 - 『짝패』

한나라당의 어떤 치는 『공공의 적 2』가 만들어진 것은 노무현 정권의 음모라 했다.

미친 한국의 한나라당 지지율은 도를 넘어서고 있다. 아, 씨바 이 나라 사람들의 냄비 정신이란 끝이 없구나.

그래, "류승완"도 빨갱이 만드는 게 너희에게 좋겠다.


각설.


전라도 건달, 경상도 건달 다 나왔으니 이제 충청도 건달 나온 건가 생각하면 오산. 그러면 다음에는 강원도 건달 나와서 팔도 사나이 찍어야 되잖아.

서울과 수도권에 인구의 4분의 1이 사니. 지방 도시 돌아가는 꼴을 알겠냐 만은, 더 웃긴 건 그 지방 사람들도 교육이 모자란 건지, 아집이 도가 지나친 건지, 한나라당 뽑아 제끼는 갱상도가 있으니 미치겠다.

위에 '한나라당 지지율'에 링크해 놓은 철구님 글을 보면 알겠지만. 참 고향(경북 영주) 갈때마다 느끼지만. 맨날 '서울 놈들, 서울 놈들'하면서 욕해대는 고향 사람들이 왜 정작 투표할 때는 그 '서울 놈들', 그러니까 맨날 땅 사서 벌어먹고, 권력에 빌붙어 벌어먹는 '서울 놈들'의 방패막이에다가 돈 벌 수단을 위해 정책까지 마련해주는 한나라당을 찍냐고.


온성은 가상의 도시지만 우리 모두의 지방 도시이다. 박근혜 아빠가, 아니 이씨 조선이 들어섰던 그 봉건시절부터 배부르던 경상도는 빛이 났을까? DJ 정권 들어섰다고, 이제 좀 빛을 보려나 했던 전라도는 빛을 봤을까? 행정수도이전, 행정도시건설. 발목잡힌 충청도는 빛을 봤을까? 강원도 정선의 카지노는 빛을 봤을까?

위의 모든 곳에서 '번'돈은 어디로 갔을까?

그게 바로 '서울공화국',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지방 도시 내려가서, 툭하면 들려오는 소리, '어디에 뭐가 생긴다더라'.

그러면 그 지역 주민들이 땅을 살 수 있을까?

명의만 빌려주고 수수료 받아 쏠쏠한 재미를 챙긴 지역 주민들. 결국 늘 돈 먹는 것은 그 놈의 '서울 놈들'.


『짝패』는 그런 영화다. 그런 '서울 놈들'의 돈과, 무력과, 권력의 횡포에 푼돈, 눈 앞의 이익에 혹한 서민들의 잔혹한 모습이다.

'서울 놈'에 어떻게든지 들어가보려 자기 정체성을 변조하는 필호("이범수")의 모습. 필호에게 사채를 끌어쓴 주민들의 모습.


『공공의 적 2』대사이긴 하지만, 세금 내려준다하고, 월드컵이나 열어주면 누가 죽어나가도 상관없는게 일반인이다.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야금야금 당하다가 된통 호되게 당하는 것도 그 일반인이다.


곧 개봉할 『모노폴리』라는 영화는 '대한민국 1%' 안에 들어가려는 인간의 행각을 다룬다. 한나라당은 그 '대한민국 1%'를 대변하고 있고, 저 멋도 모르는 '대한민국 40%' 이상의 인간들은 그 한나라를 지지한다.


배운 것 없이, 불같은 성격에, 남의 돈 빌려가서 안 갚는 게 나쁜 줄 알고, 그래서 수금하며 채무자를 개 패듯이 패는 생양아치 상환("류승완")도 마약 나쁜 줄 알고, 음모 있는 검은 돈 나쁜 거 안다.


씨바. 좀 사람답게 살자.

Posted by 함장

2006/05/26 01:57 2006/05/26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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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글의 시작은 앞 글의 ‘bum’ 님이 남긴 코멘트 중, ‘왠지 모를 서글픔에 우는 애에게는 사탕을 주지만, 사탕을 얻기 위해 우는 애에게는 싸대기를 날려야 합니다.’라는 비열한 비유에 대한 분노로부터 시작함을 명시한다.


예전에 내 글에서 나는 자유주의자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가끔 자본에 대한 내 얘기나 노동자에 대한 내 시각을 보면서 네가 왜 자유주의자냐?, 사회주의자지혹은, ‘자유 시장경제를 규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네가 왜 자유주의자냐?’라는 이야기를 던지는 분이 있다. 이 분들은 자유주의의 뜻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듯 한데, 내가 얘기하는 자유주의는 모든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적인 개념이 강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성격이 강한 개념이다. 여기서 두 가지 오해를 사게 되는 것인데, ‘개인이라는 단어 때문에 사회주의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생각되기도 쉽고, 공동체의 속박으로부터도 벗어나려는 성향이 짙기 때문에 공화적인 개념과도 맞서게 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렇다. 오해다. ‘개인의 권리’, ‘시민의 권리를 존중하기 때문에 자유 시장경제 체제의 자본의 횡포와 그 자본이 로비를 할 수 있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규제를 선택하는 것이 자유주의자고, 그런 노동자 개개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공화국을 이룩하기 위해 연대하여싸우는 것이 자유주의자다. 같은 자유라는 단어가 들어간다고 자유 시장경제의 신봉자가 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이건 내 정치적인 정체성이고, ‘경제적인 정체성을 꼽으라면 당연히 수정 자본주의자가 된다. 자본주의의 폐해가 어떤 것인지 인지하고 깨달아갈수록 나는 내가 믿는 자유주의를 위해 자본주의에 지속적인 수정을 가하는, 그러니까 지속적인 규제를 가하는 게 당연하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게 내가 사람답게남아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이니까 말이다.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앞 글에서와 같이 내 경계의 대상은 대기업이 가진 자본이다. 물론 단어만으로 보면 웃긴 얘기이기도 한데 사실 대기업의 순수 자기 자본은 적다. 기업가의 돈은 금융기관에서 빌려오는 게 더 많으니까 이때 대기업이 가진이라는 표현은 그들이 융통할 수 있는 자본을 의미한다. 고로 대기업이 자본의 횡포를 부리는 것을 욕하는 것이지 대기업의 노동자들을 싸잡아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도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일례를 들어보자.


모든 기업가는 노동자의 적이다라는 얘기를 누가 한다고 치자. 그럼 기업에 들어가 일하는 노동자는 노동의 배신자인가? 아니면 적과의 동침인가? ‘모든 기업가는 노동자의 적이라는 명제는 성립할 수 없는 거다. 노동과 대치되는 개념은 경영기업도 아닌 자본그 자체이다. 그렇다고 자본을 혐오할 수 있는가? 어림없는 소리다. 우리 가계 - 는 일신상의 이유로 은행을 이용하여 저축을 하거나 주식회사의 유상증자 증권이나 신주가 발행되는 것을 구매한다. 그 돈을 금융권이 중개하여 기업이 빌려가거나, 자본금으로 확충하는 거다. 이거 중학교 때 배우지 않는가?


바로 이거다. 노동자들이 모아준, 바로 그 자본이 노동자를 몰아세우는 경지에 이르는 게 자본주의다. 그렇기에 늘 자본은 무섭다고 내가 씨부리는 거고, 오로지 자본이 경계 대상이다. 자본은 양날의 검과 같다. 기업가가 혹은 경영자가 쓰면, 부와 명예, 더불어 시너지 효과까지도 창출한다. 반면 잘못쓰면, 경영자와 주주들의 금전적인 부분에서는 이득이 될지도 모르지만 꽤 여러 면에서 타격을 입힌다.


문제는 노동자들은 이 자본을 대어줄 수만 있을 뿐, 경영자나 기업가처럼 운용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자본에 대한 두려움으로 생겨나는 공격대상은 자연스레 잘못쓰는 경영인 금융권 포함 - 이나 기업가가 될 수 밖에 없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삼성 공화국을 우려하며 삼성 욕을 해대면 삼성이라는 그룹의 계열사 직원 전체가 그런 기사나 글들을 보면서 짜증내기 쉽다. 자신이 일하는 터전이며, 실제로 삼성 내부에서 바라보면 왜 이렇게까지 욕을 먹나?’ 싶을 정도로 괴리감을 느끼는 분도 많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런 면은 서로가 인지하는 노동자에 대한 존재 본질을 다르게 느끼기 때문이다. 삼성 욕을 하는 사람들은 삼성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욕할 입장이 못 된다. 반대로 삼성 노동자도 무 노조경영신화 과연 이게 신화인가 하는 의문과 더불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지만 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왜 우리 회사 욕하고 지랄이야


당신네 회사가 자본의 횡포를 부리면 욕을 바가지로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노동자인 당신들을 욕하는 것은 아니다. 툭 까놓고 얘기해서, 자본 운영은 주주나, 경영진, 혹은 컨설턴트나 기획팀에서 경영 마인드에 입각해 저지른 일이지,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고용된 당신들이 결정한 일은 아니거니와 당신네 회사에서 비 윤리적인 자본 운용을 했다면 당신들 스스로도 자신의 일터에 대한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어 갈등하고 고민하게 될 노동자일 뿐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최근에 화물연대 파업과 함께 벌어진 삼성 광주전자 이야기. 이 환장할 노릇의 이야기에 삼성이 끼어들어가는 이유는 뭘까? 삼성의 주장은 이렇다 극동 컨테이너와 계약한 사람들의 일이니 자신들이 개입할 수 없다고 언론에 얘기했다. 일단 사실 관계는 그러하니 믿어주자. 극동 컨테이너의 이야기는 더더욱 기가 찬다.


운송료는 협상을 통해 조정할 수 있지만, 단체협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씨바, 헌법에서 보장하는 노동 3권 중에 단체교섭권도 가볍게 개무시하는 센스라니, 어이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 여러분이 노동자인데, ‘밥그릇 싸움이라고 얘기하면서 양비론이나, 심지어 위에서 얘기한 대로, ‘삼성의 주장이 일리가 있네라며, 극동 컨테이너나쁘다고 코멘트를 날린다면 곤란하다. 심지어 어떤 분은 운송업자라는 얘기를 들며, 화물 수송 기사는 자기 차량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 것이니 노동자로 보는 것에 무리가 있지 않냐고 얘기를 한다. 어찌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노동자가 화물 수송이라는 사업을 하면서 화물차라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묻자. 내가 번역 일을 하는데, 노트북이 필요해서 할부로 노트북을 구매하고, 번역 일을 얻어서 하고 있다. 그러면 나는 번역 노동자인가, ‘번역 사업가인가? 개인택시를 모는 사람은 택시를 소유하고 있는데, 그럼 이 사람은 자영업자인가 노동자인가?


화물 운송 시스템이 예전에는 업체가 차량을 소유하고, 기사만 고용해서 수송을 하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요즘은 기사가 자신의 차량을 구매하여 업체와 계약을 맺고 운송을 한다. 물론 택배의 경우 회사 차량을 쓰지만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화물연대에 가입한 사람들 대부분의 경우 그러하다. 문제는 이 화물차값이 장난 아니라는 점이다. 더불어 이걸 일시불로 구매할 능력이 되는 사람은 그 돈으로 장사하지 화물차 운송 안 한다.


업체가 자신들의 유지비용을 아끼기 위해 노동자에게 밥벌이 물품의 부담을 지운 것이고, 대형 화물차량 운전 능력이 있는 기사들은 기술을 넘어서서 차량이라는 생존수단까지 구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시 지불 능력이 될 턱이 없기에, 무조건 할부 구매를 한다. 그러나 이 직종은 화물 운송’. 1년에 수 만 킬로미터는 기본이다. 차량 유지 보수와 수리는 기본이며 노후화 현상도 몇 배나 빠르다. 할부금을 다 갚고, 숨 좀 돌리자 싶으면 새 차를 또 구비해야 한다. 환장할 노릇이지.


할부 넣으랴, ‘화물 운송이란 직업 덕분에 보험료는 좀 비싸던가. 그런 그들이 대형 화주인 삼성에게 운송료 5,000원 인상을 요구했다. 결과는 51명 전원 해고.


이걸 극동 컨테이너만의 문제로 보라는 사람은 자신이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바보인 건가? 이런 노동 환경에서도 화물 운송업자라는 이유로, ‘화물 연대는 인정할 수 없으며, 노동자가 아니니까 단체 교섭권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한 예를 더 들어보자. 평택 농민들의 농토가 미군 기지로 주어지고 이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지만, 농민들은 보상금액이 적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한다. 그리고 노동자들과 연대해 시위에 들어간다. 이 방송을 접한 택시기사 왈,


개새끼들 보상금이 적으니까 지랄을 하네


이 냥반아. 국가가 당신의 개인택시 면허를 실 거래가도 아니고, 당신네가 관청에 신고하는 값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얘기하는데, 개인택시 면허는 거래가 가능하다 - 보다 약간 많은 금액에 박탈해 가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토지 보상에서 농토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농토는 생산수단의 하나이며, 생업의 터전인데, 이를 일반 토지 보상하듯이 돈 줘버렸다고 끝나면, 평생을 논일, 밭일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살던 곳 마저 내팽개치고 또 다른 농토를 찾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리고 농민들의 시위에 민주노총부터 시작하여, 대학생들까지 왜 시민단체들이 더 설치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 노동3권에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주는 이유는 도대체 어디로 먹어버린 건가? 한 개인의 노동자, 그리고 위와 같은 51명의 화물 운송 노동자가 자본권력에 휘둘려서 가볍게 자신들의 터전을 잃는 것을 보면서도 이런 연대가 불경스럽게 보이는가?


과거의 학생 시위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었다면, 지금의 학생 시위는 자본 만능의 사회에서 스스로 노동자임을 자각해 나가는 과정이자, 미래의 노동자로서 현재의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자본을 경계하는 행위이다. 폭력시위엔 누구나 동의하지 않지만, ‘폭력을 내세워 시위의 본질과, ‘주도세력이 따로 있다는 식의 언론발림에 놀아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쯤하고, 이제 bum 님 같이 되도 않는 시장의 신봉자들이 주장하는 대한민국의 기업들이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보자.


시장시장 그대로내버려 두려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정보의 공정성정보 공개의 투명성이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시장은 왜곡된다. 내버려 두면 잘 돌아가야 한다는 이론으로 인해 내버려 두면 정보의 공정성정보공개의 투명성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선 그 자본이 정보의 루트를 통제해 버린다. 그에 대한 규제 하나 없이 시장이 돌아갈 거라 믿는다면 그건 맹목적인 믿음이지 사회적 합리성을 갖춘 믿음이 아니다.


국산품 애용이 웃기는 소리라는 점은 동의한다. 문제는 이 말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기업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결부시켜 우리나라 일류 브랜드 들이 과연 영화만큼의 정부 보호를 받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해주려 한다.


한마디로 죠낸 보호를 받아 쳐먹었다


태준이 포항제철에 있을 때, 제철 기계를 수입해 들어오면서 박통에게 달려가 세금을 비롯한 이러저러한 감면을 요구했다. 물론 거기엔 정치적 로비 자금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유는 철강은 국가 기간 산업이다! 이를 들여오는데 기업이 돈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 놀라워라 이토록 애국을 위한 뛰어난 정신을 봤나! 덕분에 그 포철이 냈어야 할 세금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됐다. 대우는 또 어떠했던가? 세계 경영 한답시고 이 돈, 저 돈 죄다 끌어서 내리 쏟더니 홀랑 망했다. 그거 살리는 공적 자금. 다 국민이 냈다.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안 간다고? 박통 때, 먹고 살 일은 수출뿐이라면서 기업 키워준다고 온갖 정부 돈과 금융권 돈을 연결해줘서 기업을 보호, 육성해준 나라가 우리나라란 말이다. 내수 시장에서 고가로 팔아먹어 외수시장에서 본 손해 돌려 막고, 이것저것 잡다한 돈 된다 싶은 거 죄다 건드렸다가 말아먹어도 어차피 자기 자본 별로 안 들이고 국민이 저금했던 금융권 돈 끌어다 썼을 뿐이니, 회사 하나만 포기하고 자기 자본금만 날리면 채권자들이 알아서 회사 정리하고, 자신들은 부채 걱정 날려버리는 거다.


그 짓을 정경유착을 통해 정부가 그토록 도와줬는데, 지금의 일류 브랜드인 삼성, LG가 시장경제로 살아남았다는 주장은 어처구니 없지 않은가? 국산품 애용으로 삼성을 키운 게 아니라 정부와 기업이 국내 대기업 제품밖에 구경할 수 없는 형태의 시장을 구축해 버려서 그들이 우리 를 빨아먹을 수 있었던 거다.


정부가 도와 준 것이 이해가 안 간다고? 물론 정부는 중소기업을 도와준 적은 없다. 대기업 키우기에 급급해 중소기업에 대한 규제는 상상을 초월했는데, 기업하나 열기 위해서 정부에 허가를 받고 찍어야 하는 도장 횟수가 900회가 넘었다. 이는 역으로 대기업을 보호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거다.


더불어 FTA와 시장 개방 이야기. 전 세계의 경제 블록화와 더불어 시장 개방을 하면 득을 보는 이들과 실을 보는 이들의 구분을 해보라. 그 동안, 정부 덕에, 국가 권력 덕에, 국민 덕에 이득을 계속 보아온 이들이 이제 해외 각지에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해외를 나가려 하니 자꾸 국내시장 개방하라는 압박이 들어온다.


어차피 자기들 제품은 국내시장 선점했고, 자신들과 상관없는 분야인 스크린 코타부터 농업에 이르는 분야까지 개방해버리라고 정치권과 합의를 봤다.


기업인들과 상관없는 분야는 개나 줘버리라는 식으로 버려두고 자신들 잇속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게 자본을 대주고, ‘세금을 대 주었던 노동자이자, 국민들이 분노를 느껴야 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세상 풍파를 겪어야 어른이 된다는 이 비열한 비유로 일관된 bum 님의 글을 보면서 분노가 치민 것은 어처구니 없는 주장의 연속 때문이 아니라 결국 마지막 한 귀절이었다.


, 님이 말씀하신 기업과 경영자와 노동자에 대한 부분은 많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공감한다는 건가?


국내에서 국민 돈 받아먹고 잘 큰 뒤에, 이젠 국내 자기들 사업 분야 외의 시장을 내어주고 그를 발판 삼아 글로벌한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세계시장을 무대로 하는 기업들의 케이스와 국내 시장으로 한정된 영화 산업쌀 농업시장 케이스를 같은 시장 경제로 놓고 보는 시각의 차이가 다름인가 틀림인가?


며칠 전 KT&G 경영권 분쟁처럼, 우리나라 금융권은 비교적 우리나라 경영진들에게 우호적 지분으로 손을 들어준다. 일종의 국산품 애용인 셈이다. 기업은 외세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외국의 자본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면 박수를 받고, ‘노동자는 외국의 자본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면 시대에 뒤떨어지는가?




모든 건 밥그릇 싸움 맞다. 중요한 건 밥을 더 담을 수 있냐 덜 담을 수 있냐가 아니라, 밥을 담을 수 있냐. 밥 그릇을 뺏기면 이마저도 불가능해진다.


시장이 정하는 가격, 시장이 정하는 권력구도가 가장 이상적인 것은 동의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정보의 효율성이 채워지지 않는 한. 시장은 자본에 의해 쉽게 왜곡된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을 형성하고 확장하는 것은 소비자의 needs’보다, 자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자본이 두려운 줄 알고, 기업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이, 세계 시장에 수출할 수도 없는 품목의 국내 시장을, 송두리째 자본에게 안겨줄 수 있는 시장에 시장 논리를 주장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익히 보아오던 기업가의 태도아니던가? 정부와 국민으로부터 받을 것 다 받아먹은 주제에, ‘규제를 말라고? ‘시장에 맡기라고?


보건, 환경, 안전, 노무와 같은 것을 시장에 맡기란 말인가?




다시금 말하지만, ‘경영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나, ‘기업가가 적이 아니다. ‘자본은 더더욱 적이 아니라 경계의 대상일 뿐이다.


허나 자신이 노동자이면서, ‘한국 기업가의 시장 논리를 내세우는 모습을 보고, 그 표리부동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는 사람은 나의 적이다. 내 정치적 이상향을 세우는 대척점에 놓인 사람이며, 연대해가다가도 뒤통수 맞기에 딱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언젠가 노동자의 입장을 머리에서 가슴까지 이해하는 날이 오길 바라는 이유는.


아직도 이 사회에서 스스로노동자임을 자각하고 같이 연대해서나갈 사람이 턱없이 부족해서인지도 모른다.


적이기에 분노하고, 같은 계급의 노동자이기에 애처로우며, 같은 사람이기에 희망을 가진다.


그래, 사람만이 희망이다.

Posted by 함장

2006/03/17 07:32 2006/03/17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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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내 경영대 동아리 회지에 청탁 받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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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볼 때쯤이면 여러분들은 대한민국의 입시지옥을 끝내고, 아마 인생에 다시 없을 해방감과 함께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한 몇 개월을 보내고 이제 어엿한 대학교 새내기가 되어있을 것이다. 비록 합격자 발표에서 대기자 명단에까지 올라가며 숨죽이며 기다리던 시간이라 할 지라도 그 스트레스 따위야, 청소년일 때 해야 할 모든 것을 끝내고 여유로운 몇 달간의 기분에 비할 바가 아닐 테니 말이다.


춘 삼월 꽃이 피고 지나가는 청춘 남녀들의 설레는 가슴이야 모를 리 없건마는 그대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으니. ‘자네 여기 왜 왔는가?’


사람은 누구나 노동을 해야 한다. 태어났고, 죽기는 싫고, 살자니 먹어야 하고, 먹자니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자니 일해야 한다. 그렇기에 노동은 필수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자본을 가진 소유세력의 자녀로 태어나지 못한 사람이 노동을 하기 위해서는 취업을 해야 하고, 취업을 하려면 능력은 차치하고 학벌부터 챙겨야 한다. 시대가 사람이 평등함을 인정하고 그에 맞게 바뀌어나가고 있는 추세이긴 하나 사회 깊숙이 잘못 박힌 생각의 뿌리는 그 근원을 끊어내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비뚤어진 교육열은 대학이라는 학문의 터를 취업을 위한 수단이자, ‘취업 전문학원으로 돌변시켰고, 우리 시대 살아가는 지식인이자 지성인의 삶의 척도에 대한 고찰보다, 소비자의 심리가 어떤지에 대한 고찰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하면 소비자의 지갑 속에 든 을 내 주머니로 끌어올 수 있는가에 대한 심대한 관심만이 자본주의의 그늘 속에서 인식의 자아를 갉아먹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네의 양심을 속이고 자본주의 속의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대에게 총을 겨누는 법을 배우는 것을 어느 새 미덕으로 삼고 있는 동방자본지국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서구 사회의 밤거리를 TV에서 본 적이 있는가? 뉴욕 번화가의 화려한 불빛,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서울 밤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서구의 시골 밤 거리를 본 적은 있는가?


저녁 5, 6 되면 가게 문은 ‘Closed’라는 푯말로 바뀌고 상점의 주인들은 생업의 현장에서 퇴장한다. 영화 우주전쟁에서 톰 크루즈는 노동조합의 노동 제한 시간을 거들먹거리며 집으로 돌아간다. 반면 우리나라의 모습은 어떤가? 시골 구석에 가도 24시간 편의점이 있고, 동네 구멍가게는 한 명의 손님이라도 더 받기 위하여 12까지 잠은커녕 생업의 터전을 지켜야한다. 과연 무엇이 다를까?


우리 사회가 좀 더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이라고? 좀 더 빠르게 변화하기 위해서 개인의 노동시간을 최대로 늘려가며 이라는 것을 통해 소유를 늘려가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던가?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운 것을 돌이켜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여러분은 초, , 고등학교를 통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워 왔던가? 그렇다면 사람답게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해답을 갈구해 본 적은 있는가?


이런 여러 의문들을 여러분에게 던지는 이유는 바로 여러분이 대학에 온 이유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유가 얼마나 괴리해 있으며 그 괴리감을 좁혀나가기 위해 스스로 한 번쯤 생각해보는 시간을 꼭 가지길 하는 소망에 의해서이다.


전공을 배워서 전공으로 취업하는 사람이 드문데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대학진학율은 현재 85%에 달한다. 그런데도 대학의 간판을 따야 좀 더 나은직장을 갖게 된다는 믿음과 현실은 잘 바뀌지 않는다. 고등학교 윤리시간에도 나오는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본성에 가까운모습인 자아실현을 이루는 방법은 어느새 부자가 되는 것으로 바뀌어가는 노동자 설움의 시대가 만연해 버렸다.


대학에서 여러분이 배우는 것, 특히 경영학부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순수한 탐구 정신에 입각한학문과 거리가 멀지도 모른다. ‘실무랍시고 어떤 광고를 통해 소비자의 어떤 심리를 부추겼느니 하면서 심리학’, ‘영상학등 온갖 학문에서 탐구로 찾아낸 결과들을 가지고 을 벌기 위해 편집한 수많은 강의들을 보며 여러분은 무의식 중에 사람을 잊고 돈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한 때 유행했던 개그,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는가?’하는 말이 우리사회에 던진 경고라는 것을 이미 사람들은 잊은 지 오래다. 그 이유는 바로 고찰 없는 삶이 던진 삶에 대한 무비판적 적응이다.


대학생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사회로 나갈 발판을 마련하는 지식적 기반을 다루는 나이가 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여러분에게 가르친 학문들과 앞으로 여러분이 접해야 할 학문이 과연 우리네가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함께 추구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접근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학문을 하는 이로서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 없는지 스스로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자신을 갈고 닦을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누구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도 없고, 이는 직업도 마찬가지다. 사회적인 제약과 개인적인 환경,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도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하면서 삶을 통해 노동의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하늘이 준 선물을 받은 사람과도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런 삶을 이겨나가기 위해서 대학생의 자리는 자신이 배우는 학문현실의 괴리감을 이겨내고, 그 괴리감을 부수고 조금이라도 더 사람답게 사는 법학문현실이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도전하는 젊은이의 청년정신을 보일 수 있는 마지막 시기가 될지도 모른다.


바르고 당당함을 잊지 않기를 바라며. 현실과 부딪혀 이겨내길 바라며.


즐거운 대학생활이 되길 기원하는 바이다.

Posted by 함장

2006/02/28 18:17 2006/02/28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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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학우의 미니홈피를 들렀다가 '자유기업원'이라는 곳에서 주최하는 강연회 공고를 보았습니다. 대학생 동아리를 대상으로 한 이야기에다가, 이 강연을 들을 경우 주어지는 특전이 '삼성전자 인사 담당'이 강연할 때, 우선적으로 초청된다는 것이니, '취업'에 목말라하는 대학생들이 그냥 지나치긴 어렵겠지요.

그런데 그 '공고'를 보고는 참 어이가 없더군요. 잠시 빌어와 봅니다.

글 보기

어떠십니까? 확 돌지 않습니까?

참 어처구니가 없길래 학교 경영학부 게시판에 글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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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올리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전화가 오더군요. 게시판을 자주 보시는 어떤 교수님이십니다. 첫 마디부터 웃깁니다.

"니가 이제야 본색이 드러나는구나"

무슨 본색일까요? 영웅본색일까요? 짧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글의 품격이 없다.
'전경련 장학생이 총학회장'이 되었다고 공격하는 거냐?
무슨 근거로 경영대가 대학 먹여 살려주는 학부라고 단정하는 거냐?
니가 열심히 사는 대학생이길래, 졸업한 선배의 장학금도 이어줬잖느냐, 기업의 장학금 말이다.
구분도 못하는 어린 학생이라면서 같이 공부하는 애들을 바보로 만들다니 지독하게 오만하구나
니가 그렇게 많이 아느냐?
니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 관용이 없냐.
생각이 다른 거다.
제가 가만히 듣고 있을리가 없지요. 간만에 열좀 올렸습니다.

패러디 글에 품격을 바라십니까?
사상의 관용을 바라시는 분이 표현에 대한 관용은 없으십니까?
경영학과를 학부를 넘어 단과대로 만들고 타 과의 정원을 축소하면서까지 경영대 허용인원을 늘리는 것이 '먹여 살리는 게' 아니면 무엇입니까?
교수님이 아는 것 많으셔서 절 가르치려 드는 것과 제가 같이 공부하는 애들이 '어리다'고 한마디 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내부고발자 제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관용은 상대가 관용의 의지가 있을 때 하는 겁니다.
다름과 틀림은 엄연히 다릅니다.
아시다시피. 전 싸가지 밥말아 먹고,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보다 불합리한 건 못 봐주는 지랄맞은 성격입니다. 제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을 교수님에게 '대드는' 성깔은 지독하게 오래된 것이지요.

고등학교 때, 교감선생님이 좀 불합리한 지적을 반 학우 모두에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교무실로 불려가 교감선생님이 타이를 때, 이런 얘기를 하셨더랬지요.

'그건 소영웅심리다. 애들 앞에서 어른에게 대드는 것이 또래에선 '우월감'을 줄 수 있다. 네가 아이들 보다 어른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런 방식은 옳지 못하다'

당시엔 '우쭐하다'는 느낌조차도 들지 않고, 그저 합리적으로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는 상황'에 대한 거부감일 뿐이었는데, 내가 아이들 사이에서 '영웅'이 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는 거라는 '교사'의 추측은 교육자의 말이기에, 날 관찰하는 '성인'의 얘기이기에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얘기를 직장으로 끌어올리면 이렇게 될 겁니다.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상사에게 '대들지'말고, 조용히 따로 얘기하라고.

이거 완전 맞는 얘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조직'이라는 것이, 윗대가리가 안정적이어야 잘 굴러가듯, 윗대가리가 불합리해도, 일단 묵묵히 듣고 있다가, 나중에 조용히 '원만하게'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거라고, 그게 '더불어 살아가는'데 중요한 길이라고.

그런데 갈 수록 그건 아니라고 생각이 들더군요. '왜 기득권의 논리를 들어줘야 하는데?'

윗대가리는 윗대가리일 뿐입니다. 우리가 선출한 윗대가리가 아닌 이상, 우리가 그의 '권위'를 세워준 것이 아니라는 거죠.

나는 '조직의 시스템'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득권의 위치에서 자신이 유지해 온 세계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권위로 누르려 하는 자와 그 권위가 비합리적이라고 부정하는 자가 '조용히 만나서' 얘기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거리일 뿐입니다.



위의 제 패러디 글이, '너무 단정적이고, 편견으로 가득찼으며, 관용이 필요하다'고 긴 장문의 답글을 달아준 선배가 있길래, 답글을 달아주었습니다. 선배의 글은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글 보기


교수님의 지적처럼, 제 글이 지독하게 '오만한' 글일지도 모르지요.

지독하게 오만해서, 같은 경영대생으로서 '그렇게 살지마'라고 오만하게 글을 쓴 거겠지요.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니. 제가 그들보다 '많이 안다'고 주장한 것처럼 보이면 그게 바로 오만이 극에 달하는 것이겠지요.

그래도 어쩝니까? 사실을 왜곡하는 기업가의 나팔수나, 불합리하다고 확실히 느끼게 해주는 교수님의 권위주의나 전부다 어처구니 없어서 또 이렇게 '품격없는' 글을 써대니 말입니다.



곧 죽어도 잘못 된 건, 잘못 된 겁니다.

Posted by 함장

2006/02/22 09:04 2006/02/22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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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 Prisoners' Dilemma

실비아 님의 글에 달린 만두... 님의 코멘트를 보고, 쓰고 싶던 것인데, 이제야 쓰게 된다.

경제학을 배우다 보면 Prisoners' Dilemma, 즉, 수인(죄수)의 딜레마 라는 것이 나온다. 물론 경제학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단 '철학'에서 나온 것이라 사료된다. 아마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고 싶다면 Prisoners' Paradox 혹은, Prisoners' Dilemma 등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요약해 보자면, 두 명의 죄수가 공범으로 경찰에게 붙잡혀서 취조를 받는 상황에 놓여있다. 경찰은 둘을 잡아 넣을 수 있는 그 어떤 증거도 포착하지 못했다. 그래서 범죄를 수습하기 위해 경찰은 자백을 받아내야만 한다. 각각 격리된 곳에서 서로 연락을 취할 수 없게 해두고, 양쪽에게 경찰은 이렇게 고한다.

"자, 자백하면 넌 1년만 썩고, 저 방에 있는 네 친구녀석은 5년을 썩는거야"

물론 반대 방에서도 동일한 일이 이루어진다. 더불어 이미 범행을 저지른 이들은 법적 계산도 하고 있다.

'둘 다 자백 안하고 뻗대면 경미한 처벌로 2년만 살고 나오면되고,  둘 다 자백하면 정상 참작으로 3년을 살게 되겠지'

이런 상황에서, 한 형사가 취조실로 들이닥치며 외친다.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형사님!"

형사는 웃으며 범인을 돌아본다.

"자 마지막 기회다, 자백할텐가? 네 친구 녀석이 먼저 자백할지도 몰라"

물론 들이닥치며 증거를 확보했다고 한 경찰은 '엄포'를 놓은 거다. 그것이 바로 우리네 언론이나 다름없다. 조선일보 보라, 우리나라 경제 바로 내일 망할 것 같지 않은가?

위의 Prisoners' Dilemma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합리성'이 가지는 한계를 얘기한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순전히 교과서의 문맥이 틀려서 그렇다.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 '합리성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모든 인간의 선택이 합리적이라면, 우리는 아마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이치를 순식간에 꿰뚫고, 쉽게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라, 그럴 수 있는가?

경제학에서 얘기하는 '합리적 효용성'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인데, 예컨데 어떤 의사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봉사하는 것이 생의 '낙'인 사람도 있고, 어떤 의사는 병원하나 개업하고 그 동안 번 돈으로 외제차 몰며,  골프치는 것이 '낙'인 사람도 있다. 이는 저마다가 느끼는 '효용'이 주관적이기 때문이며, 이는 곧, 경제적 합리성이 '돈'과 관련된 이익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다시금 Prisoners' Dilemma로 돌아가보자면, '친구'와 소통할 수 없고, 미리 자백 안 하기로 짜둔 상황에서 증거를 확보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여건을 만나면 '합리적이고자'하는 인간은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여기서부터 인간군상의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친구는 '자백'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자신이 먼저 '자백'해 버리는 이 얼토당토 않는 '나부터 살고보자'는 식의 대처는 일견, '내가 그 사람이라면....'이라는 추측과 함께 합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불쌍하게도,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친구'도 그러하다. 결국 '나만 자백하기'로 결심하고 친구는 어떻게 되든 '난 1년 살테야'하고 자백을 감행했건만, 친구도 똑같은 상황으로 자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둘은 3년형을 언도받고, 3년동안 '친구'를 믿었던 자신을 한탄하며 출소후에 어떻게 상대방을 갉아먹을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우울한가?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명확하게 짚어낸다.



여러분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국민은 동등한 권리를 갖는데, 왜 늘 '권력'은 소수만 갖는지 말이다.

경제학을 좀 읊어댄 사람은 이렇게 말하겠지, '권력의 희소성' 때문이라고. 개뿔.

권력에 희소성이 어디있는가? 한 개인이 가진 권력은 제한되어있고, 그 제한된 권력은 평등하게 나누어져 있고, 더 필요하지도 않는데다가 '소모'되지도 않거늘 무슨 '희소성'운운인가?

그렇다. 권력이 '소수'만 갖게되는 이유는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와 맞물리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 거기 '지나가는 사람'. 키보드 내려놔라, 지구상에 나타난 '공산주의'가 그게 공산주의더냐?

'자본'은 한정되어있고, 쟁취는 제로섬 게임이다. 한 쪽이 '부'를 축적하면 반드시 '부'를 잃어버리는 쪽이 생긴다. 그래서 '부'는 소수가 독점하게 된다.  이 점이 '민주주의'와 닿으면서 웃기게 흘러버린다. '부'를 가진 쪽이 '권력'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분명 국가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오고, 그 행사권도 국민에게 있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바로 Prisoners' Dilemma에 그 해답이 있다. 각 국민이 '민주공화국'의 '공화'적인 성격, 즉, '개인적인 합리성'이 아니라 '사회적인 합리성'을 추구해야 권력추구에 있어서도 국민의 '진성'이 우러나오는 법인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Prisoners' Dilemma에서 '사회적인 합리성'이란 결국 둘다 자백하지 않고 가볍게 2년 형량을 보내고 끝내는 것이다. '친구'가 자백할 거라는 두려움도 이겨내고, 혼자 고백하면 1년만 살면 되지만, 둘이서 끝까지 버텨내면 둘다 2년씩만 살면 된다는 '연대감'으로 상황을 극복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사회적 합리성'이며, 서로 '상생'하자는 '공화'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국민연금, 월급에서 10만원 채 안되게, 혹은 10만원 넘게, 뭉텅뭉텅 잘려나가는 것 보면 울화가 치미는 것 이해 못할 바아니다. 어딜 가서 '연봉 얼마예요'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실 수령액'이 사실 얼마 안 되면, 짜증도 난다.

하지만, 당신은 '늙는 것'이 두렵지 아니한가? 우리 사회의 노령화 지수가 엄청난 속도로 증가하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더불어 장년층과 노년층은 늘어나지만 그들이 '노동인구'로 남아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기업'은 당연히 정부를 압박하여 해외의 싸고 젊은 노동자들을 들여올 것이고, 50을 넘으면 일자리는 커녕,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인데 말이다.

물론, 똑똑한 개인께서, 스스로 돈을 굴리면 노년을 보장하기 위해 돈을 잘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똑똑한 당신만의 착각이다.



어떤, 정규직 노동자가 어느 날 갑자기 '비정규직'으로 몰려나면서 '동일 가치 노동에 동일 임금을!'을 외치는 일이 생기는 이유는 바로 그런 것이다. 자신에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을 거라는' 왜곡된 기대 심리.

마치 복권을 살 때, 나만 당첨될 확율이 높은 것 처럼 기대되는 것과 동일한 이야기다.

현재 자신이 처한 입장이, 노년까지 저축할 비용을 충분히 벌어둘 수 있을 거라고 쉽게 계산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건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분명, 현재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너무나 많고, 그런 위치의 사람들과 우리가 '함께' 늙어가고 있으며, '함께' 노동인구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가라는 것이 '세금'으로 지탱되고, 그 '세금'이라는 것이 노동을 하든, 자본으로 굴려 먹든 소득이 있는 사람들에게 징수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불어 '소비하는 사람들'의 그 지불가격에도 엄청난 양의 세금이 붙어있다는 것도 말이다.

이 많은 인구가, 늙어서, 돈도 못벌고, 소비도 못하고, 생산도 못하는.

그런 대 재앙과 같은 세상을 상상해봤는가?



지금 국민연금에는 국민 전체가 '들이부어도' 한참 모자랄 우리 젊은 층의 '인구'가 생성되어 있다.

이들이 동남아로, 아프리카로, '돈 적게 드는' 곳으로 이민을 가서 정착하고 살지 않는 한, 우리나라에서 뼈를 묻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현재, 우리나라 출산율은 세계 최저다. 서구 유럽국가가 '이민정책'을 주도한 이유는 젊은 노동인구와 그 인구가 내어야 할 '세금' 확보를 위해서였다.

이제 우리나라도 '단일 민족국가'라는 개뿔딱지 같은 소리를 내뱉을 수 없다. 분명, 우리 사회는 노동력을 원하게 될 것이고 언젠가는 '이민정책'을 고려해야될 것이다.



우리 부모세대는 다카기 마사오 아래에서, 그저 가족 먹여살릴려고, 대한민국의 미래는 커녕, 가족의 미래를 챙기기도 바빴었다. 그렇게 허리띠 졸라매고 애들 낳아서 여기까지 달려왔더니. 이제 애들은 '당신들처럼 살지 않겠어요'라면서 자기 소비에 열심이다. 돈을 모아서, 차도 사고, 아파트도 사고, 좀 더 좋은 생활, 좀 더 나은 '소유'를 꿈꾼다.

한 마디로 이러다간 좆됀다.

Prisoners' Dilemma에서 처럼, 지하철 역사에서 자고 있는 노숙자와, 일자리가 없어 방황하는 30~40대 인부들을 바라보며,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이라고 비아냥 거리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는 자기 혼자 '1년' 살려다가 같이 3년 살게되는 꼴을 불러온다.

지금 20대부터 40대는 우리 부모세대가 고생했듯, 대한민국의 미래에 '연금'이라는 희망을 남겨주기 위해. 돈을 갖다 부을 수 밖에 없다.



그게 '사회적 합리성'으로. 우리가 민주'공화'국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Posted by 함장

2005/12/15 18:21 2005/12/15 18:21

아버지 in 자본주의 without 자유 & 평등

주말에 바람도 쐴겸, 동호회 겨울 MT에 참석하기 위해 Vex 님과 강촌으로 달렸다.
Vex 님의 차에서, 간만에 귀에 걸리는 노래를 만났다.
사실 싸이(PSY)라는 가수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싫어하는 것이 아니다)는 그가 생긴 것이 그저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간간이 괜찮은 곡을 내뱉는 모습을 보면, 음악성은 내 얇은 지식으로 도통 모르겠고, 기특한 가수임엔 틀림없다.

아버지라는 곡을 반복해 들으면서, 달리는 차 안에서 '흥겨워 하던' 우리 모습은 노래가 즐거워서가 아니었다. 인터넷 업종에서, 과장 좀 하자면 1년 365일 야근으로 보내는 Vex 님. 조또 가진 것도 없으니 취업 해보겠다고 대학으로 다시 뛰쳐들어간 미친 나.

국가가 담당하는 최저 기초생활보조금이 턱없이 모자란 우리 사회.

우리네 아버지는 자본주의가 뭔지도 몰랐고, 이 죨라 골때린 사회가 왜 이렇게 미친 파시스트들로 가득 차 있는지 파악할 지식기반도 없다.

자유라는 단어가 반공을 의미하는 몰지각한 사회에서,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자본'으로부터의 자유와 평등을 철학적으로 고찰할 시간을 갖기엔 너무나 숨가쁘게 '돈'을 모아와야 했다.

권력에 맛들인 미친 국가체제가 부추긴 '생존'을 위한 경쟁. 국가의 틀 안에서 보호해야 될 것이 무참히 짓밟히고, 국가 공권력에 사람이 죽어나가도.

그저 관심이 있는 건, 우리네 가족이 굶지 않는 것.

그렇게 살아온 내 아버지가, 국가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이, 자신이 살고 계신 고향의 경기가 그토록 나쁜 것이 다 노무현 때문이라고, 노무현이 나쁜 놈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에 무어라 답해 드릴 수 있을까?

마르크스 자본론을 권해드릴까?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권해드릴까?

맨큐의 경제학을 권해드릴까?



우리나라는 결국, 내 삶이 종결될 때까지, 서북유럽의 사민주의 국가나, 프랑스 수준의 국민 복지를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 슬프겠냐만은, 부모의 그릇된 권위나, 국가의 그릇된 권위에 항거하는 'Rock의 정신'이 담긴 곡보다.

뒤틀어진 사회를 보면서, NEXT의 노랫말처럼,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다 때려치고 싶어도, 가족들 얼굴보기 미안해 꼬랑지를 내리게 되는 이 시대 '가장'들의 더러운 기분.

그 기분을 이해할 수 밖에 없어서.

'아버지, 그게 그렇게 되어선 안 됩니다'며 일일이 조목조목 따지기 괴로워서.

평생 그렇게 이 악물고 살아오신 삶을 존경하여.

그렇게 밖에 사실 수 없었던 삶이 너무도 가엾고 슬퍼서.

그래서, 웃으며, 환호하며,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숨죽여 울 수 밖에 없었다.



삐뚤어진 내 나라여.

슬퍼도 외면하고, 벗어날 길이 없기에.

사랑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그렇기에 너의 변화를 철저히 끌어내려는 것 아니겠는가?

Posted by 함장

2005/12/14 15:24 2005/12/1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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