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오후의 감상

회사에 청소 일을 하시는 아주머니가 계신다. 가끔 아주머니가 일하시는 뒷모습을 볼 때면 눈시울이 붉어지곤한다.


죽을 때까지 죽지 못해 따라오는 노동의 굴레. 더군다나 생산수단에서 철저히 소외된 도시인의 노동 굴레.


현재 나는 내 수입의 25%를 부모님께 드리고, 15%는 내 서울에서의 필수 생활비(식사와 교통 정도), 10% 정도는 문화생활비(지인을 만나는 일부터 시작해서 모든 소셜 생활비)로 쓰며 25%정도가 집세와 보험료, 인터넷 공과금 등으로 나간다.


25% 정도가 저축 가능한 금액이나 이 또한 빚 이자에 몇 달마다 한 번씩 터지는 예상치 못한 지출에 써버리면 돈을 모으기가 여간 쉽지 않다.


언론에서 4년제 대졸 - 그것도 in 서울 - 정규직이 받는 ‘평균 연봉’에 대해서 씨부릴 때마다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내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내 어머니에게 한 달에 몇 만원을 더 보낸다고 내 부모님의 삶이 나아질까?


회사에서 청소 일을 하시는 아주머니의 뒷 모습에서 내 어머니를 느낀다. 과연 내 어머니는 내가 보내드리는 그 얼토당토 안 되는. 내 서울 거주 및 생활비의 절반을 가지고 부모님 두 분이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문화생활을 포기하고 10%를 더 드릴까? 그만큼 이 복잡하고 괴물 같은 도시에서 뒤쳐지면 결국 더 수입이 줄어들어 나 뿐만 아니라 다시 부모님까지 옥죄지는 않을까?


돈이 행복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걸 우리 모두 잘 알지만.


나는 심지어 이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시기를 지나 매월 조금씩 모을 수 있는 시기에 들어왔지만.


아직도 우리 부모님의 생활 걱정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아마, 이런 비극은 내 세대에서 끝날 것 같지 않다.


그래서 회사 아주머니의 뒷모습에 내 어머니를 투영하는 것이고, 내 노년을 투영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슬픈 것이다.


돈을 더 벌기 위해 악착같이 살지도 않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멍하니 앉아 세상에 당하지도 말아야겠다.

Posted by 함장

2009/10/16 14:30 2009/10/16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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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작동하는 방법

비정규직이든 인턴이든 개나발이든.

일하는 꼴을 봐서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준다는 '악마의 유혹'을 한다.

왜 악마의 유혹일까? - 일하는 꼴을 평가하는 기준은 '악마'의 마음대로니까.

그리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지 않고 '해고'시키면서 당당하게 '계약종료'라 외친다.

그렇다. 악마와 계약은 종료되지 파기되지 않는다. 그건 영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



쫓겨난 비정규직이 시위를 하고 지랄을 떤다. 그렇다고 자본이 몸을 드러낼쏘냐?

그저 정규직에게 압박을 가할 뿐이다.

'당장 사측에 유리한 의견을 널리 퍼뜨리라!'

그럼 원래 '아 씨발 좆같은 비정규직 새끼들, 정규직으로 취업도 못하는 주제에'라며 자기 일 불편하다고 수군대던 애들은 얼싸꾸나 도배질을 해대고

'아 씨바 이 따위 것을 왜 시키고 지랄이야'라며 '주인'을 나무라는 '사람'도 몇 있을 것이다.

결국 자본은. 그 자본이라는 '힘'만으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다툼을 이끌어낸다.

꽤 많은 '사람'들에게 쌓이는 것은 노동자끼리의 분노이며, 자본에 대한 분노를 느낀다 하더라도. 그 거대한 힘 앞에 주저한다.



이런 현상은 어디에든 나타난다. 북한이 '미제국주의자'들과 맞짱을 뜨는데 항상 남한은 '정규직'과 같은 들러리였고,

아프가니스탄 피랍자 이야기를 하면서 정작 죽여패야하는, 선교사업이랍시고 사진 몇 장 기록하여 헌금을 받아 먹는 '기독교'는 어디로 가고 신앙인과 분노자의 대립만 남는 걸까?



soundcard 님이 내 글 중 'RSS, 코멘트 -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글에 트랙백을 쏘셨다. 블로그에 쏟아지는 기독교에 대한 미움, 사람에 대한 미움에 진저리가 나신 모양이다.

박노해의 '다시'라는 시에 대해서 내가 했던 이야기에도 조금 언급했지만. 나는 soundcard 님과는 견해가 다르다.

저렇게 미움 가득, 증오 가득 쌓인 사람도 사람이거니와, 그들의 그런 미움과 증오 속에서도 난 희망을 본다.

사람이라서 화가 나는 거고, 사람이라서 미운 거다.

기독교 자본이든, 그냥 자본이든. 결국 그 자본은 '사람'을 옥죌 것이고. 그 옥죔을 이겨내는데 '분노'로 대동단결하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다.

슬픔도 때론 힘이 되고, 증오도 때론 힘이 되며, 분노도 물론 힘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미워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자본'을 휘두르는.

기독교 단어를 빌자면 '악마'를 미워해야 하는 것이다.

개좆같은 기독교를 믿어주는 신앙인들 덕분에 우리는 기독교를 멸할 수도 없거니와

그런 종교 덕분에 자본주의 국가에서 그 '자본' 때문에 '사람'이 고통 받는 것도 막지못해 현세를 눈감고 보내면서 영생을 기약하고.

개좇같은 자본가의 위세에 눌린 정규직 덕분에 우리는 비정규직 시위도 비난 받거니와

그런 기업 덕분에 같은 노동자끼리 서로 대치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상이 벌어진다.



내가 사람만이 희망이라 하는 이유는 별 거 없다.

주님의 뜻이 어떻든. 내게 자유의지를 그들의 논리대로 주셨다면.

'같은 사람'으로 세상에 마주 설 기회를 얻기 위해, 사는 게 지옥인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의 뜻을 옹호하는 사람들이든, 기독교의 만행을 '원래는 그렇지 않지만 일부 몰지각한...'으로 두둔하는 사람들이든.

결국 싸워야 할 적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것에. 나와 함께 연대해서 싸울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것. 그게 내 희망이고. '사람'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다라는 것이 내 희망이다.

자본의 힘에 휘둘리고, 신앙의 힘에 휘둘리고.

그러면 내가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인가? 나 스스로 반문해도 명쾌한 답은 나온다.

Posted by 함장

2007/07/24 21:04 2007/07/24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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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글의 시작은 앞 글의 ‘bum’ 님이 남긴 코멘트 중, ‘왠지 모를 서글픔에 우는 애에게는 사탕을 주지만, 사탕을 얻기 위해 우는 애에게는 싸대기를 날려야 합니다.’라는 비열한 비유에 대한 분노로부터 시작함을 명시한다.


예전에 내 글에서 나는 자유주의자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가끔 자본에 대한 내 얘기나 노동자에 대한 내 시각을 보면서 네가 왜 자유주의자냐?, 사회주의자지혹은, ‘자유 시장경제를 규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네가 왜 자유주의자냐?’라는 이야기를 던지는 분이 있다. 이 분들은 자유주의의 뜻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듯 한데, 내가 얘기하는 자유주의는 모든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적인 개념이 강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성격이 강한 개념이다. 여기서 두 가지 오해를 사게 되는 것인데, ‘개인이라는 단어 때문에 사회주의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생각되기도 쉽고, 공동체의 속박으로부터도 벗어나려는 성향이 짙기 때문에 공화적인 개념과도 맞서게 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렇다. 오해다. ‘개인의 권리’, ‘시민의 권리를 존중하기 때문에 자유 시장경제 체제의 자본의 횡포와 그 자본이 로비를 할 수 있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규제를 선택하는 것이 자유주의자고, 그런 노동자 개개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공화국을 이룩하기 위해 연대하여싸우는 것이 자유주의자다. 같은 자유라는 단어가 들어간다고 자유 시장경제의 신봉자가 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이건 내 정치적인 정체성이고, ‘경제적인 정체성을 꼽으라면 당연히 수정 자본주의자가 된다. 자본주의의 폐해가 어떤 것인지 인지하고 깨달아갈수록 나는 내가 믿는 자유주의를 위해 자본주의에 지속적인 수정을 가하는, 그러니까 지속적인 규제를 가하는 게 당연하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게 내가 사람답게남아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이니까 말이다.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앞 글에서와 같이 내 경계의 대상은 대기업이 가진 자본이다. 물론 단어만으로 보면 웃긴 얘기이기도 한데 사실 대기업의 순수 자기 자본은 적다. 기업가의 돈은 금융기관에서 빌려오는 게 더 많으니까 이때 대기업이 가진이라는 표현은 그들이 융통할 수 있는 자본을 의미한다. 고로 대기업이 자본의 횡포를 부리는 것을 욕하는 것이지 대기업의 노동자들을 싸잡아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도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일례를 들어보자.


모든 기업가는 노동자의 적이다라는 얘기를 누가 한다고 치자. 그럼 기업에 들어가 일하는 노동자는 노동의 배신자인가? 아니면 적과의 동침인가? ‘모든 기업가는 노동자의 적이라는 명제는 성립할 수 없는 거다. 노동과 대치되는 개념은 경영기업도 아닌 자본그 자체이다. 그렇다고 자본을 혐오할 수 있는가? 어림없는 소리다. 우리 가계 - 는 일신상의 이유로 은행을 이용하여 저축을 하거나 주식회사의 유상증자 증권이나 신주가 발행되는 것을 구매한다. 그 돈을 금융권이 중개하여 기업이 빌려가거나, 자본금으로 확충하는 거다. 이거 중학교 때 배우지 않는가?


바로 이거다. 노동자들이 모아준, 바로 그 자본이 노동자를 몰아세우는 경지에 이르는 게 자본주의다. 그렇기에 늘 자본은 무섭다고 내가 씨부리는 거고, 오로지 자본이 경계 대상이다. 자본은 양날의 검과 같다. 기업가가 혹은 경영자가 쓰면, 부와 명예, 더불어 시너지 효과까지도 창출한다. 반면 잘못쓰면, 경영자와 주주들의 금전적인 부분에서는 이득이 될지도 모르지만 꽤 여러 면에서 타격을 입힌다.


문제는 노동자들은 이 자본을 대어줄 수만 있을 뿐, 경영자나 기업가처럼 운용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자본에 대한 두려움으로 생겨나는 공격대상은 자연스레 잘못쓰는 경영인 금융권 포함 - 이나 기업가가 될 수 밖에 없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삼성 공화국을 우려하며 삼성 욕을 해대면 삼성이라는 그룹의 계열사 직원 전체가 그런 기사나 글들을 보면서 짜증내기 쉽다. 자신이 일하는 터전이며, 실제로 삼성 내부에서 바라보면 왜 이렇게까지 욕을 먹나?’ 싶을 정도로 괴리감을 느끼는 분도 많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런 면은 서로가 인지하는 노동자에 대한 존재 본질을 다르게 느끼기 때문이다. 삼성 욕을 하는 사람들은 삼성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욕할 입장이 못 된다. 반대로 삼성 노동자도 무 노조경영신화 과연 이게 신화인가 하는 의문과 더불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지만 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왜 우리 회사 욕하고 지랄이야


당신네 회사가 자본의 횡포를 부리면 욕을 바가지로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노동자인 당신들을 욕하는 것은 아니다. 툭 까놓고 얘기해서, 자본 운영은 주주나, 경영진, 혹은 컨설턴트나 기획팀에서 경영 마인드에 입각해 저지른 일이지,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고용된 당신들이 결정한 일은 아니거니와 당신네 회사에서 비 윤리적인 자본 운용을 했다면 당신들 스스로도 자신의 일터에 대한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어 갈등하고 고민하게 될 노동자일 뿐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최근에 화물연대 파업과 함께 벌어진 삼성 광주전자 이야기. 이 환장할 노릇의 이야기에 삼성이 끼어들어가는 이유는 뭘까? 삼성의 주장은 이렇다 극동 컨테이너와 계약한 사람들의 일이니 자신들이 개입할 수 없다고 언론에 얘기했다. 일단 사실 관계는 그러하니 믿어주자. 극동 컨테이너의 이야기는 더더욱 기가 찬다.


운송료는 협상을 통해 조정할 수 있지만, 단체협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씨바, 헌법에서 보장하는 노동 3권 중에 단체교섭권도 가볍게 개무시하는 센스라니, 어이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 여러분이 노동자인데, ‘밥그릇 싸움이라고 얘기하면서 양비론이나, 심지어 위에서 얘기한 대로, ‘삼성의 주장이 일리가 있네라며, 극동 컨테이너나쁘다고 코멘트를 날린다면 곤란하다. 심지어 어떤 분은 운송업자라는 얘기를 들며, 화물 수송 기사는 자기 차량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 것이니 노동자로 보는 것에 무리가 있지 않냐고 얘기를 한다. 어찌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노동자가 화물 수송이라는 사업을 하면서 화물차라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묻자. 내가 번역 일을 하는데, 노트북이 필요해서 할부로 노트북을 구매하고, 번역 일을 얻어서 하고 있다. 그러면 나는 번역 노동자인가, ‘번역 사업가인가? 개인택시를 모는 사람은 택시를 소유하고 있는데, 그럼 이 사람은 자영업자인가 노동자인가?


화물 운송 시스템이 예전에는 업체가 차량을 소유하고, 기사만 고용해서 수송을 하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요즘은 기사가 자신의 차량을 구매하여 업체와 계약을 맺고 운송을 한다. 물론 택배의 경우 회사 차량을 쓰지만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화물연대에 가입한 사람들 대부분의 경우 그러하다. 문제는 이 화물차값이 장난 아니라는 점이다. 더불어 이걸 일시불로 구매할 능력이 되는 사람은 그 돈으로 장사하지 화물차 운송 안 한다.


업체가 자신들의 유지비용을 아끼기 위해 노동자에게 밥벌이 물품의 부담을 지운 것이고, 대형 화물차량 운전 능력이 있는 기사들은 기술을 넘어서서 차량이라는 생존수단까지 구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시 지불 능력이 될 턱이 없기에, 무조건 할부 구매를 한다. 그러나 이 직종은 화물 운송’. 1년에 수 만 킬로미터는 기본이다. 차량 유지 보수와 수리는 기본이며 노후화 현상도 몇 배나 빠르다. 할부금을 다 갚고, 숨 좀 돌리자 싶으면 새 차를 또 구비해야 한다. 환장할 노릇이지.


할부 넣으랴, ‘화물 운송이란 직업 덕분에 보험료는 좀 비싸던가. 그런 그들이 대형 화주인 삼성에게 운송료 5,000원 인상을 요구했다. 결과는 51명 전원 해고.


이걸 극동 컨테이너만의 문제로 보라는 사람은 자신이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바보인 건가? 이런 노동 환경에서도 화물 운송업자라는 이유로, ‘화물 연대는 인정할 수 없으며, 노동자가 아니니까 단체 교섭권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한 예를 더 들어보자. 평택 농민들의 농토가 미군 기지로 주어지고 이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지만, 농민들은 보상금액이 적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한다. 그리고 노동자들과 연대해 시위에 들어간다. 이 방송을 접한 택시기사 왈,


개새끼들 보상금이 적으니까 지랄을 하네


이 냥반아. 국가가 당신의 개인택시 면허를 실 거래가도 아니고, 당신네가 관청에 신고하는 값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얘기하는데, 개인택시 면허는 거래가 가능하다 - 보다 약간 많은 금액에 박탈해 가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토지 보상에서 농토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농토는 생산수단의 하나이며, 생업의 터전인데, 이를 일반 토지 보상하듯이 돈 줘버렸다고 끝나면, 평생을 논일, 밭일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살던 곳 마저 내팽개치고 또 다른 농토를 찾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리고 농민들의 시위에 민주노총부터 시작하여, 대학생들까지 왜 시민단체들이 더 설치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 노동3권에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주는 이유는 도대체 어디로 먹어버린 건가? 한 개인의 노동자, 그리고 위와 같은 51명의 화물 운송 노동자가 자본권력에 휘둘려서 가볍게 자신들의 터전을 잃는 것을 보면서도 이런 연대가 불경스럽게 보이는가?


과거의 학생 시위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었다면, 지금의 학생 시위는 자본 만능의 사회에서 스스로 노동자임을 자각해 나가는 과정이자, 미래의 노동자로서 현재의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자본을 경계하는 행위이다. 폭력시위엔 누구나 동의하지 않지만, ‘폭력을 내세워 시위의 본질과, ‘주도세력이 따로 있다는 식의 언론발림에 놀아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쯤하고, 이제 bum 님 같이 되도 않는 시장의 신봉자들이 주장하는 대한민국의 기업들이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보자.


시장시장 그대로내버려 두려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정보의 공정성정보 공개의 투명성이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시장은 왜곡된다. 내버려 두면 잘 돌아가야 한다는 이론으로 인해 내버려 두면 정보의 공정성정보공개의 투명성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선 그 자본이 정보의 루트를 통제해 버린다. 그에 대한 규제 하나 없이 시장이 돌아갈 거라 믿는다면 그건 맹목적인 믿음이지 사회적 합리성을 갖춘 믿음이 아니다.


국산품 애용이 웃기는 소리라는 점은 동의한다. 문제는 이 말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기업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결부시켜 우리나라 일류 브랜드 들이 과연 영화만큼의 정부 보호를 받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해주려 한다.


한마디로 죠낸 보호를 받아 쳐먹었다


태준이 포항제철에 있을 때, 제철 기계를 수입해 들어오면서 박통에게 달려가 세금을 비롯한 이러저러한 감면을 요구했다. 물론 거기엔 정치적 로비 자금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유는 철강은 국가 기간 산업이다! 이를 들여오는데 기업이 돈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 놀라워라 이토록 애국을 위한 뛰어난 정신을 봤나! 덕분에 그 포철이 냈어야 할 세금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됐다. 대우는 또 어떠했던가? 세계 경영 한답시고 이 돈, 저 돈 죄다 끌어서 내리 쏟더니 홀랑 망했다. 그거 살리는 공적 자금. 다 국민이 냈다.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안 간다고? 박통 때, 먹고 살 일은 수출뿐이라면서 기업 키워준다고 온갖 정부 돈과 금융권 돈을 연결해줘서 기업을 보호, 육성해준 나라가 우리나라란 말이다. 내수 시장에서 고가로 팔아먹어 외수시장에서 본 손해 돌려 막고, 이것저것 잡다한 돈 된다 싶은 거 죄다 건드렸다가 말아먹어도 어차피 자기 자본 별로 안 들이고 국민이 저금했던 금융권 돈 끌어다 썼을 뿐이니, 회사 하나만 포기하고 자기 자본금만 날리면 채권자들이 알아서 회사 정리하고, 자신들은 부채 걱정 날려버리는 거다.


그 짓을 정경유착을 통해 정부가 그토록 도와줬는데, 지금의 일류 브랜드인 삼성, LG가 시장경제로 살아남았다는 주장은 어처구니 없지 않은가? 국산품 애용으로 삼성을 키운 게 아니라 정부와 기업이 국내 대기업 제품밖에 구경할 수 없는 형태의 시장을 구축해 버려서 그들이 우리 를 빨아먹을 수 있었던 거다.


정부가 도와 준 것이 이해가 안 간다고? 물론 정부는 중소기업을 도와준 적은 없다. 대기업 키우기에 급급해 중소기업에 대한 규제는 상상을 초월했는데, 기업하나 열기 위해서 정부에 허가를 받고 찍어야 하는 도장 횟수가 900회가 넘었다. 이는 역으로 대기업을 보호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거다.


더불어 FTA와 시장 개방 이야기. 전 세계의 경제 블록화와 더불어 시장 개방을 하면 득을 보는 이들과 실을 보는 이들의 구분을 해보라. 그 동안, 정부 덕에, 국가 권력 덕에, 국민 덕에 이득을 계속 보아온 이들이 이제 해외 각지에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해외를 나가려 하니 자꾸 국내시장 개방하라는 압박이 들어온다.


어차피 자기들 제품은 국내시장 선점했고, 자신들과 상관없는 분야인 스크린 코타부터 농업에 이르는 분야까지 개방해버리라고 정치권과 합의를 봤다.


기업인들과 상관없는 분야는 개나 줘버리라는 식으로 버려두고 자신들 잇속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게 자본을 대주고, ‘세금을 대 주었던 노동자이자, 국민들이 분노를 느껴야 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세상 풍파를 겪어야 어른이 된다는 이 비열한 비유로 일관된 bum 님의 글을 보면서 분노가 치민 것은 어처구니 없는 주장의 연속 때문이 아니라 결국 마지막 한 귀절이었다.


, 님이 말씀하신 기업과 경영자와 노동자에 대한 부분은 많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공감한다는 건가?


국내에서 국민 돈 받아먹고 잘 큰 뒤에, 이젠 국내 자기들 사업 분야 외의 시장을 내어주고 그를 발판 삼아 글로벌한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세계시장을 무대로 하는 기업들의 케이스와 국내 시장으로 한정된 영화 산업쌀 농업시장 케이스를 같은 시장 경제로 놓고 보는 시각의 차이가 다름인가 틀림인가?


며칠 전 KT&G 경영권 분쟁처럼, 우리나라 금융권은 비교적 우리나라 경영진들에게 우호적 지분으로 손을 들어준다. 일종의 국산품 애용인 셈이다. 기업은 외세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외국의 자본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면 박수를 받고, ‘노동자는 외국의 자본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면 시대에 뒤떨어지는가?




모든 건 밥그릇 싸움 맞다. 중요한 건 밥을 더 담을 수 있냐 덜 담을 수 있냐가 아니라, 밥을 담을 수 있냐. 밥 그릇을 뺏기면 이마저도 불가능해진다.


시장이 정하는 가격, 시장이 정하는 권력구도가 가장 이상적인 것은 동의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정보의 효율성이 채워지지 않는 한. 시장은 자본에 의해 쉽게 왜곡된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을 형성하고 확장하는 것은 소비자의 needs’보다, 자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자본이 두려운 줄 알고, 기업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이, 세계 시장에 수출할 수도 없는 품목의 국내 시장을, 송두리째 자본에게 안겨줄 수 있는 시장에 시장 논리를 주장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익히 보아오던 기업가의 태도아니던가? 정부와 국민으로부터 받을 것 다 받아먹은 주제에, ‘규제를 말라고? ‘시장에 맡기라고?


보건, 환경, 안전, 노무와 같은 것을 시장에 맡기란 말인가?




다시금 말하지만, ‘경영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나, ‘기업가가 적이 아니다. ‘자본은 더더욱 적이 아니라 경계의 대상일 뿐이다.


허나 자신이 노동자이면서, ‘한국 기업가의 시장 논리를 내세우는 모습을 보고, 그 표리부동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는 사람은 나의 적이다. 내 정치적 이상향을 세우는 대척점에 놓인 사람이며, 연대해가다가도 뒤통수 맞기에 딱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언젠가 노동자의 입장을 머리에서 가슴까지 이해하는 날이 오길 바라는 이유는.


아직도 이 사회에서 스스로노동자임을 자각하고 같이 연대해서나갈 사람이 턱없이 부족해서인지도 모른다.


적이기에 분노하고, 같은 계급의 노동자이기에 애처로우며, 같은 사람이기에 희망을 가진다.


그래, 사람만이 희망이다.

Posted by 함장

2006/03/17 07:32 2006/03/17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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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스 사람들의 분노가 이해 가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네가 지속하고 있는 착각이 얼마나 사회 깊숙이 박혀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며, 결국 중요한 것은 서비스 사용자가 서비스를 요구하고, 품질을 높여나갈 수 있다는 단편적인 시각에서 오는 착각이 얼마나 팽배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불거진 스크린 코타제에 대한 이야기를 돌이키면, ‘왕의 남자같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저력이 있는 한국영화 시장이라면서, ‘스크린 코타제의 폐지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주장 중에 하나는 관객왕의 남자를 선택하듯이, 외국영화가 아무리 밀려와도 한국 관객은 잘 만들어진한국영화를 선택할 거라는, 길에 돗자리 깔고, 전 국민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는 듯한 선견지명적 발언으로 점철된 웃지 못할 이야기도 발견된다.


이거 대단히 큰 착각인데, 영화관에서 어떤 영화를 내 걸지, 그리고 얼마나 오래 걸어 둘지는 전적으로 극장 주마음이다. ‘왕의 남자케이스는 언론과 극장 주와 관객의 삼박자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을 뿐이지, 스크린 코타제가 없었으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이야기다. 스크린 코타라는 제도가 있으니까 스타가 없는 왕의 남자라는 영화도 극장에 걸릴 수 있는 것이고, 극장 주는 스크린 코타때문에 한국영화들 중에 그래도 관객 반응이 좋은 한국영화를 오래걸어두며, 언론은 때마침 그리 빨아줄영화가 없었기에(작품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연예 언론은 로비만 하면 빨아준다) 인터넷을 달구는 왕의 남자코드를 널리 설파한 것뿐이다.


스크린 코타제가 폐지되어도 대한민국 관객이 한국영화에 목말라하면서 수요가 있기에 공급을 바라니까, ‘한국영화가 공급될 거라는 시장논리의 큰 모순은 바로, 공급자와의 연계관계에 있는 극장 주가 공급자로부터 을 받고 공급을 한다는 점이다. 더불어 그 공급력은 거대한 자본까지 갖추고 있다. ‘타이타닉영화 한편이 우리나라 자동차 몇 만대 판 이윤을 가볍게 넘어버리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 같이 영화를 즐기는 관객이 많은 시장, 걸핏하면 국민의 4분의 1에 달하는 숫자가 한 영화를 봐 대는 골 때리는 시장규모는 외국 자본이 쉽게 들었다 놨다할 수 있는 허약 체질이다. 쉽게 얘기해서 헐리우드 애들이 큰 맘 먹고, 극장 주에게 헐리우드 영화 배급하면서 웃돈 얹어서 1년만 마진 없는 장사 해버리면, 한국 영화 제작 환경은 죽어버린다. 다들 시각을 돌려 이미 먹혀 든, 동남아 시장을 겨냥한 스타 체제 영화만 토해져 나올 것이고, 그러하다 보면 왕년의 홍콩 영화 시장 꼴 나는 것이다.


그렇다. 자본 앞에 장사 없다. 돈 되겠다 싶은 시장에 뛰어드는 자본력은 무서운 거다.


SK가 이글루스를 인수했다니까 여기저기 성토가 나온다. 한편으로는 그게 뭐 어때서라면서, 펀드 매니저 뺨치는 시황 분석에, 놀라운 경영 마인드까지 보여주면서 세태를 짚어낸다. 그런데 혹자는 반 기업 정서가 문제라면서 SK니까 딴죽 거는 게 아니냐고 되려 반문한다. 툭 까놓고 말하자. SK니까 딴죽 거는 거 맞다.


유공(현재의 SK)을 비롯하여, 삼성, 현대, 우리나라 대기업 모두를 돌아보자. 우리나라 시장 경제가 왜 이토록 왜곡되었는지 기억해 보자. 중소기업이 클 수 없는 풍토를 누가 만들어냈는지 똑똑히 기억해 보자. 해외의 상생하는 기업구도는 전부 협력구도다. 그런데 이 나라는 어떤가? 무려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현대자동차가 하도급 업체에 압박을 가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대기업, ‘의 횡포가 심한 곳이 바로 우리나라다. 물론, 전 세계 어딜 가도 비슷한 구도일 수 밖에 없겠지만, 우리나라가 유독 심한 이유는 중소기업이 자라날 수 있는 제도적 규제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재벌 독주의 시대. 승만박정희가 만들어낸 정경유착의 깊은 골이 그들의 독주를 막을 수 없게 했고, 그들의 자금력으로 넘어간 기업만 해도 부지기수다.


반 기업 정서가 심하다고? 나 어릴 적, 옆집 꼬마의 부모는 성냥공장에 나가서 일을 하였고, 내 친한 친우는 금속 회사에 취업하여 열심히살아가고 있다. ‘반 기업 정서라고? 기업 없이 우리 1 500만 노동자가 어떻게 먹고 사는가?


그렇다. ‘반 기업 정서가 아니라, ‘을 가진 기업들의 횡포에 두려워할 줄 알고, 치를 떨 줄 알며, 분노할 줄 아는 사람다운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는 사회가 우리 사회인 것이다. 영화 프리티 우먼에서 리차드 기어가 적대적 M&A를 포기하고 교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적대적 M&A는 기업 경영의 한 방편이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노동자가 존재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이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이글루스가 그토록 멋진 블로그 사회를 구현해 왔으면서도 고작 모은 인원이란 ‘15이었다. 온라인 업계 발 담궈 보면 알겠지만, 15만이란 인원으로 안 된다. 그리고 올블로그 인원과, 네이버 블로그의 인원들만 보더라도 답은 나온다. ‘블로그 서비스는 돈이 안 된다.


그렇지만 이글루스 사용자들은 하루에 몇 시간이나 되는 자신의 노력을 투자해 왔고, 그 노력으로 생성된 컨텐츠를 통해서 이글루스는 장사를 해보려 했으나 어려웠다.


이토록 뻔히 돈 안될 것으로 보이는사업을 SK는 미쳤다고 고스란히 남겨두겠는가?


가입형 블로그 사용자들은 - 물론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겠지만 - 자신들이 블로그에 써 내려가는 글이 취미생활의 생성물이 아니라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의 판매상품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불어 그 상품을 제공하기 위해 여러분이 투자하는 시간은 곧 여러분의 노동력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글루스가 사측이고, 이글루스 사용자가 노동자라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할 때, 난 비로소 이글루스 사용자의 분노를 십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경영측의 의지와 노동자의 의지가 맞물려, 코드가 맞아 잘 돌아가던 회사가, 경영난을 이유로, 혹은 회사의 비젼을 이유로, 인수되거나 합병이 되어간다. 그게 적대적 M&A, 우호적 M&A, 중요한 것은 먹은 회사가 그 동안 보여줬던 행태와, 과연 우리 회사가 그 정도로 이 되는 회사인지, 아니면 구조조정이 필요한 회사인지는 노동자들 입장에서도 답이 나오는 문제다.


SK가 보여준 행태는 그냥 먹자가 아니라 먹고 고쳐서 돈 되게 만들자였고, 이글루스도 그렇게 될 거라는 추측은 쉽게 나온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 걸까? ‘SK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혹은 이글루스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라는 발언은 말 그대로 그럴 수 있다고 치고 넘어가자. 기업 입장 이해해주는 사람이 널리고 널린 대한민국 사회니까.


다른 시각에서 보는 것은 생각의 전환, 발상의 전환을 얘기하는 것이지 존재의 배반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글루스 입장에서는 자본을 결합시켜, 좀 더 넓고 대중적인 무대로 블로그 서비스를 유포시키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는 입장의 논지는 말 그대로 이글루스 입장의 사측인 이야기일 뿐이다. 이글루스 측의 실수는 이글루스라는 실체적 조직의 노동자뿐만 아니라, 천원짜리, 이천원짜리 컨텐츠라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서비스의 실체를 생성해주는 15만 이글루스 노동자들도 한데 끌어안고 일을 진행했어야 한다.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말하는 게 아니다. 경영진이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이끌어 나갈지 설명을 성실히 수행했는지, 아니면 그저 이글루스에 컨텐츠를 제공하는 사용자들을 무시해도 되는 존재로 생각했는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후일 들려오는 이야기는 이글루스 측에서는 이런 결정이 사용자들에게 오히려 환대를 받을 거라고 착각한 모양이던데, 정보공개의 투명성만큼 신뢰를 얻는 방법은 드물다.


물론 어떤 사람은 그런 기업간의 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15만이나 되는, 그것도 회사에 대한 충성도는 둘째 치고 보안상황도 해결되지 않은 블로거들에게 공개하는 미친 기업이 어디 있냐고 말하겠지만, 그게 바로 우리네가 잊고 있는, 온라인 기업이 무료 컨텐츠 제공자를 얼마나 가벼이 여기는가를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번 한국인터넷콘텐츠 협회의 발족은 의미가 깊다. 거대 기업들이, 자본을 앞세워, 인지도를 앞세워, 사용자의 높은 질로 가꾸어진 콘텐츠를 거저로 가져다 쓰는 풍토가 만연한 우리나라의 인터넷 문화 속에 깊숙히 박힌 근본부터 잘못된 의식을 갈아 엎는 것이다.


이글루스 사용자 층이 마니아라고, 자기들만 잘난 줄 안다고. 그렇게 얘기하면서 이번 그들의 불만에 대해서, 자신들의 몸값이 고작 만원이라는 얘기로 비아냥거리는 모습들. 이 모습에서 지하철 노조의 파업, 고 연봉자들의 파업이 일어날 때마다 언론에서 흘리는 부정적인모습과 더불어 일반 대중의 돈 많이 버는 것들이 파업이야라면서 파업 자체에 대해 투덜거리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나의 지나친 상상일까?


제발 이글루스 사용자들의 불만을 이해하자. 그리고 자본을 무서워하자. 두려운 만큼, 서로 결속을 챙기고, 그렇게 연대해 가자.


가진 자의 논리로 세상을 보는 게 가능해 지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시각을 갖추는 성숙한 의식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배반하는 지독한 합리화의 그늘로 숨어들게 된다. 경영하는 사람들은 경영마인드 가지라고 하자. 누가 뭐라 안 한다. 다만, 적어도 노동자 주제에노동자 입장을 잊어버리지는 말자.


Daum이 블로그의 대중화를 위해 사실은 네이버 블로그를 따라잡기 위해 - 1,000Daum유저를 블로거로 만들기 위해 양질의 퀄리티를 자랑하던 ‘Daum 칼럼을 접고,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한지도 벌써 한 해가 지났다.


결국 지금 남은 것은, 펌질로 가득한 블로그와 그 좋디 좋은 ‘Daum 칼럼의 글들을 잃어버린 상실감뿐이다.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느끼고,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것만큼은 돈 따위에 휘둘려 변형되고 틀어지고, 사라지지 말기를 바란다.


그게 우리가 침해 받고 싶지 않은 정체성 아니던가?

Posted by 함장

2006/03/15 06:27 2006/03/15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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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별곡

주말에 있던 결혼식에 들렀다가 후배 녀석이 상경하여, 동기 하나랑 셋이서 대학로를 방문했다. 동기 녀석이 그 동안 '연극 좀 보자'라는 일장 연설을 퍼부은지라, 유명한 연극을 중심으로 표를 수배했다.

간만에 찔러들어간 주말의 혜화동은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연인들 사이로 비춰지는 풍경들은 아직도 젊음이 넘실대는 곳임에 변함이 없음을 느끼게 만든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던가. 골목 끝에서 끝까지 들리는 것은 '개그콘서트'와 '웃찾사'공연의 '호객행위'뿐이었다.

수준이 용산 전자상가 배회하기와 비교하여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소란스러웠을지 짐작하시리라. 물론 나는 그 '호객행위' 자체에 불만이라거나, 어떤 혐오를 담고 싶진 않다. 다만 어느 새 '연극'의 거리에 '코메디'만 남은. 슬픈 우리네의 자화상을 보는 거랄까?

물론 '코메디'도 괜찮은 '극'이다. 사실 내가 그 날 본 연극은 흔히 '라이어 2'라 불리는 '라이어, 그 후 20년'이다. 난 이 연극이 '코메디'라고 정의 내린다면 동의를 해 줄 수 있다. 문제는 '코메디'라는 장르가 아니다. '자본'이 혜화동에 수혈되면서 벌어지는 현상은 극단이 겨우겨우 운영해 나가는 수준의 소극장이 아닌, 하나의 거대 자본이 움직이는 '알바'와 TV라는 거대 홍보 영상을 통해 관객을 몰아가는 무서운 '시스템'이다.

사실 '라이어' 시리즈와 같이 정신없이 웃어 젖히는 극이 엄청나게 인기를 끌고, 영화화 되고, 2탄에 3탄까지 뱉어내는 것도 그리 '달갑지'는 않다. 그런데도 크게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같은 극단에서 '라이어 시리즈'와 같은 흥행작들을 상설로 걸어놓고, 그 수익을 극단 내부에서 돌려, 인기를 얻지 못하는 '극'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열정'을 담아서 내어 놓을 수 있는 시스템이라면. 그것으로 이 '자본 경쟁구도'를 이겨내 갈 수 있다면. 박수쳐주고 싶다.

물론 '개콘'사람들이나 '웃찾사'사람들이 '갈갈이 관' 등에서 그렇게 경쟁하며, 서로의 '품질'을 높이고, 후배들 중에 뛰어난 사람들을 선별해낼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추측 못하는 바는 아니다.

허나, 그 포근한 겨울 토요일 오후, 괜찮은 연극 한 편 볼까 찾은 대학로에서, 마치 용산 전자상가를 방문했는가 하는 착각을 가지게 할 정도로 접근하는 '그들'을 보면서.

안 그래도 목 마르고, 배고프며, 돈 안 되면서도 '연기'에 대한 열정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텃밭에. '자본이 가진 힘'으로 마케팅을 펼치고 있는 그들.

대학로는 충무로에 연기파 배우를 공급하는 공장도 아니고, 코메디언의 개그를 보는 건지 실수를 보는 건지 알 수 없는 공연을 보는 곳도 아닐게다. 마로니에의 '동숭로에서'나 동물원의 '혜화동'같은 노래처럼 느껴지는 대학로를 찾는 것은 웃긴 일일지도 모르지만.

난 적어도 '연극인'들의 열정이, 거대 자본의 힘에 설 곳을 잃지 않기를 기원한다.

추운 겨울 날, 밖에서 조금이라도 더, '개콘'과 '웃찾사'의 관람석을 채우려 부던히 노력하던 아르바이트人들과, 그곳에 방문할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몇 배나 땀 흘리며 열심히 노력했을 개그맨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텃밭에서, 텃새조차 부리지 못할. 가난한 '연극인'들의 생각에.

그렇게 '땀이 범벅되고 자신의 연기에 녹초가 되어버린' 그 아름다운 모습에.

밖에서 호객행위로 끌어갔을, 그들의 '연기'를 볼 수 있었을 모호한 관객들의 발걸음이 아쉬워. 이렇게 끄적인다.

자본은 무서운 것이다.

Posted by 함장

2006/01/16 14:58 2006/01/16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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