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적으로 변해가는 것.

요즘 시간 날 때마다 예전 글들을 재분류 해 넣고, 거기에 달린 코멘트의 링크를 따라가서 다시금 RSS를 등록하면서 재구성하고 있다.

이로 인해 타 블로그를 거의 방문하지 않고 있는데, 게으르기보다는 RSS가 완성되어야 방문에 의미가 있다고 스스로 주장하며 참고 있다.

새벽에 '좌파'에 대한 글을 올렸는데, 사실 죨라 할 말이 많은 부분인데 2,000 자에 다 때려 넣자니 어설픈 글이 됐다.

좀 더 가벼운 주제를 고르자니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더러운 것' 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정상적인 제출이 어려웠다. 물론 좋게 보려면 끝도 없이 좋게 볼 수 있으나, 내가 하고픈 얘기는 그렇지 않은 게 문제다.

내 블로그 초기의 글을 보면 알겠지만 난 민족주의를 비롯한 우파들의 '사상'에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 민족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한국'이라는 죨라 골때린 상황을 하나 둘 벗겨내면서 알아가자, 내가 가진 생각들도 변해가기 시작했다. 자주 써먹는, 유홍준 교수의 '아는 만큼 보인다'의 적용이랄까?

지금은 이름도 까먹은 - 나 이거 졸라 나쁜 버릇인데, 가르쳐 준 교수 이름도 기억 못한다 - 행정학 교수가 '공부'를 왜 하는지 가르쳐 줬는데, 참으로 명쾌하다.

'사람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공부한다.'

체제로부터, 자연으로부터, 공포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공부한다.

정말 내 옛 글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참으로 많이 '생각'이 변했구나.

참으로 무식한 글도 숨어있고, 오히려 지금보다 더 리버럴한 글도 숨어있고 말이다.

그런데도 가장 중요한 건.

계속 변해가는 거다.

마치 석공이 돌에 정을 대고 망치로 쳐내듯, 계속 깎아 가며.
뭐가 나올지 모르지만 그렇게 변해간다.

죽기 전에 완성하지 못 하면 어떤가?

가만히 버려진 채 있는 것 보다, 이끼끼며 구석에 쳐박혀 있는 것 보다.

그렇게라도 조금씩, 변해가면서 나를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지 않던가?



원칙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변해도 좋지아니한가?

나는 우파다.

우파 일변도의 삶을 살겠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디 서 있는가가 중요한 거다.

앞으로 몇 년 뒤에, 나는 또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하다.

Posted by 함장

2007/04/02 13:39 2007/04/02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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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좌파에 대한 착각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미디어작문 1차과제
2,000자 '한국, 한국인' 주제 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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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지난 대선에서 좌파정당에 실망한 지지자들의 표가 극좌와 우파쪽으로 분산되는 바람에 좌파 후보가 1차 선거에서 탈락됐다. 결국 2차 선거에서 우파 후보인 시라크와 극우 후보인 장-마리 르펜이 겨루는 상황을 맞았다. 극우가 당선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좌파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시라크를 지지했다. 결국 80%가 넘는 득표율을 얻으며 우파 대통령이 등장했던 과거다.

이제 다시 대선을 맞아, 프랑스 시민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계급과 정체성에 맞춰 ‘좌, 우’파를 구분하여 정당을 지지하고 있다. 우리도 대선을 곧 맞이하게 되지만, 과연 우리 국민들은 좌우파를 구분하는 방법을 알기나 할까? 그저 색 바랜 이데올로기로 아는 것은 아닐까?

사실 좌파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엔 너무 방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자신이 지켜야 하는 가치, 그리고 자신이 배격해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또한 동반된다. 그런데도, 우리의 언론에서는 '좌우파'라는 단어를 너무나 많이 접하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 정당 중, 민주노동당을 ‘좌파’라고 얘기하는 언론이 꽤 있다. 이건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복지 정책을 늘려달라고 주장하면 좌파가 되고, 거기에 ‘친북’이라는 단어를 붙여 ‘친북좌파’라는 어이없는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우리의 비틀어진 언론이기에 더욱 재미있다.

‘친북’이라는 개념은 사실 민족주의의 성격을 나타낸다.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기에 통일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밑바탕인 친북은 그에 합당한 근거이다. 그런데도 이런 ‘친북’이 ‘좌파’라는 단어와 나란히 쓰이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이데올로기에 무지한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민족주의라는 것은 지극히 보수적이면서 우파적인 생각이다. 민족이라는 가치를 지켜내야 하는 우파의 스펙트럼이며, 이는 그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런 ‘민족주의’가 ‘좌파’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기 시작했을까?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는 스스로 ‘민족주의’를 이용해서 외세에 대항하였다. 항일운동의 근간에는 ‘민족주의’가 있었으며, 이는 곧 더 나은 세상으로 나가고픈 ‘진보’의 삶도 묻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상황은 ‘민족주의’계열의 지식인과 ‘사회주의’계열의 지식인이 ‘독립’을 위해서 한데 뭉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진보적인 삶을 이끌어내는 데는 우파나 좌파나 가릴 것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서구의 천재 지식인 중 사회주의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걱정이 바로 이것이었다. 식민지배로 인해서 사회주의보다 민족주의가 먼저 각 국가에 퍼져나간다는 예견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예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광복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이 이루어졌다거나, 이승만의 북진 통일이 성취되어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완성되었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정체성의 혼동은 겪지 않고 있으리라. 식민지배를 당했던 하나의 민족이 둘로 나뉘어져 완전히 다른 체제의 국가를 세우고, 서로를 적으로 규명한 시대의 아픔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에 대한 기본적 정체성마저도 혼동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반공주의와 자유 민주주의조차도 구분하지 못하는 구세대와 그를 이용해 정략적 흔들기를 일삼는 언론의 시너지 효과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보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악랄하게 작용한다. 지성인이라 불리는 대학생들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도 구분하지 못하며, 이런 색안경을 만들어낸 정치인들과 언론은 한술 더 떠 자신들의 정략에 이용한다.

민족주의와 사회 민주주의가 더불어 공존하는 정당이 좌파로 불리고, 시장경제체제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독점을 눈 감아주려는 정당이 우파로 불리는 나라. 이게 바로 대한민국의 현실이 아니던가?

이제라도 바꿔야 한다. 민주주의의 미덕이 교과서에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단어로 묘사되는 교육은 잘못된 것이다. 자본주의가 심화되면서 더더욱 좌파와 우파의 정책적 대결이 필요한 시점인데도 우파 일변도의 교육을 펼치고 있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이는 교과서를 만들 수 있는 권력 자체가 자본과 닿아있는 기득권층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일제 강점기의 숱한 ‘사회주의 세력들’이 ‘신경향파’, ‘계급주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라는 단어들로 완곡하게 표현된 역사 교과서를 살펴보아도 우리가 얼마나 ‘좌파’에 대한 무지를 스스로 교육해왔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이제는 좌파들 스스로도, 그리고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도, ‘좌파’라는 단어나 ‘사회주의’라는 단어에 움찔 하지 말아야 한다. 민주 ‘공화국’의 시민들이 사상의 다양성을 인정도, 구분도 못한다면 획일화된 체제 속에서 살던 봉건 시민과 다른 것이 무엇이겠는가?

Posted by 함장

2007/04/02 00:53 2007/04/02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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