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학년도 1학기
현대 문학의 이해 과제.
이런 류의 과제는 처음이라서 글을 쓰기도 참 뭐해서 억지로 글을 써내려간 전형.
어떤 주제를 가지고 비교하는 글도 아닌채, 그냥 좋아하는 시 하나와, 이해가 가지 않는 시 하나를 뽑아 두 개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데, 각각 따로 쓰기도 그렇거니와 - A4 5장에 두 편 모두 쓸 것 - 시인 하나를 정하는 것도 아니고, 더불어 1주일만에 그 수 많은 현대 시 중에 골라내야 하는 뻘짓을 하게 되다니. 이건 좀 억지다 싶음.
더군다나 나는 영화든 뭐든 '칭찬하기'는 잘해도 '비평이나 비판하기' 따위는 질색인데 이해 안 가는 시를 가지고 난도질을 하라 하니 이거 영 어색해서 글을 못 쓰겠음 ㅡ.ㅡ
암튼 이런 과제는 정말 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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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의 ‘가난한 사랑의 노래’와
류시화의 ‘거리에서’
유홍준 교수가 얘기했던가?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 그 말은 어쩌면 대부분의 예술에 걸맞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저 캔버스에 칠해진 물감의 거친 표면을 볼 수 있는 사람과 그 안에 담긴 구도, 작가의 내면을 통찰하는 능력은 어쩌면 ‘지식’에 달려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굳이 더 많은 것을 ‘보기’ 위해 지식을 늘려나가야 한다면, 그건 이미 대중과 격리된 예술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어쩌면 이는 못 가진 사람들이 느껴야 하는 자괴감 섞인 읊조림일지도 모른다.
시가 주는 매력은 그런 ‘지식’의 한계를 뭉그러뜨리는 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포장마차를 경영하는 아주머니의 시를 읽으면서 기쁘고, 벅차고, 슬픈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은 시작(詩作)이 결코 어렵고 까다로운 형식에 얽매여 옥죄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이런 시의 느낌이 주는 감상. 그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결국 자신이 가진 경험에서 오는 게 아닐까? 직접적인 경험과 간접적인 경험, 그 모두를 아우르는 ‘공통의 인식’이라는 틀 말이다.
류시화의 시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에 실린 ‘거리에서’라는 시를 살펴보자.
거리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사람들이 오가는 도시 한복판에서
모두가 타인인 곳에서
지하도 난간 옆에 새처럼 쭈그리고 앉아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아무도 그 남자가 우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무도 그 눈물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거리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한 세기가 저물고
한 세기가 시작되는 곳에서
모두가 타인일 수밖에 없는 곳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신이 눈을 만들고 인간이 눈물을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가 우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나는 다만 그에게
무언의 말을 전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눈물이라고
이 시를 읽으면서 같이 고개를 주억거리기에는 너무 불편한 감이 있다. 일단 우리 사회에서는 ‘거리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는 상황은 드라마에서조차 보기 어렵다. 사회가 그리는 남성상 또한 그렇거니와 남자의 눈물이 ‘짠’ 상식은 극히 경험키 어려운 낯섦을 선사한다.
더불어 둘째 연의 ‘한 세기가 저물고 한 세기가 시작되는 곳에서’라는 시간적 배경은 더욱더 의문시된다. 과연 화자가 무엇을 말하기 위해 이를 집어 넣었는지 알 길이 없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밀레니엄 시대의 혼돈과 IMF의 광기를 겹쳐 구조조정과 실업에 비친 우리들의 남성들로 대변되는 가장상을 그리려 했다고 억지로 이해해 주기도 뭣하다. 차라리 저 한스밴드라는 소녀들이 부른 ‘오락실’이라는 노래가 더 나은 그 시대의 가장을 묘사하지 않았던가?
이어서 신이 ‘눈’을 만들고, 인간이 ‘눈물’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뜬금없게도, 평등한 사회에 주어진 ‘종족 내부의 경쟁’을 비꼬는 투라면 차라리 성공했을지언정.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으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가 없게 만들어버렸다. 문장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속에 숨은 의미를 유추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벌어진 느낌이 들지 않는가?
마지막 연에 와서는 상투적인 표현과 더불어 어색함의 정수를 보여준다.
‘무언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 몸짓도 손짓도 아닌 ‘말’을 사용하는 이 화자의 배반적 행위와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눈물이라는 일방적인 선언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모든 ‘타인’이 지켜보는 거리 한 가운데서 눈물을 흘렸기에 가장 강한 것인가? 사회적 통념을 깨고 덤벼들어 ‘남자’가 거리에서 ‘눈물’을 보였다는 것이 그토록 위로 받고, 격려 받아야 할 일이던가?
얼마나 울음이 급해서, 얼마나 억울하고 비통해서. 지나가던 도중에 거리에 주저 앉아서 울었겠는가? 그 누구도 그 눈물의 의미와 ‘왜’ 울어야만 하는 줄을 모르지만, 관찰자로서는 그 심정 충분히 짐작할 수는 있으리라. 그러면서도 그 내면적 갈등에 위로를 한답시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눈물이다’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어 놓는다면 너무나 갑자기 낯 설은 풍경이 밀려오게 되지 않는가?
숭고한 눈물일지도, 아니면 그저 그런 감정에 겨운 눈물일지도. 두 가지 모두 당사자에게는 무척 중요한 눈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눈물이 과연 그 사람이 다시금 그 슬픔을 이겨내고 일어서게 만드는 ‘강한 의지’일지, 아니면 또 다른 절망 속에서 헤매게 만드는 독약이 될지. 그렇게 단언할 수 있을까?
모두가 타인인 곳에서 울고 있는 자의 눈물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이야기는 행여 반어법이 아닌가 하며 억지 추측을 해주어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럼 여기서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의 노래’를 살펴보자.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서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접했던 이 시는 읽는 그 순간에도 하나의 충격이었다. 혼자 집에서 떨어져 나와 남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일터를 누비던 내 어린 날의 감수성은 가난이라는, 자본주의 사회가 준 원죄를 씻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이었다.
입에 달고 살던 것이 ‘돈 때문에’라는 변명이었고 책 하나를 사 보는데도 지갑을 열기가 두려웠다.
그러던 내게 이 시는 하나의 도피처와 같았다. 가슴과 정열이 원하던 뜨거운 젊음의 이야기도 눌러내려 삭히게 만드는 머리 속의 읆조림은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명확히 보여주기도 한다.
객지 밥 먹어 온지도 벌써 10년이 넘은 삶. 힘든 하루를 마치고 쓸쓸히 집으로 돌아오는 그 길은 1연의 이야기처럼 그토록 ‘새파랗지’ 아니하던가?
새벽녘, 풋잠 속에서 문득 깨어나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 사이로 왠지 모를 쓸쓸함과 두려움에 다시금 잠을 청하기 어렵던 수많은 밤들. 이 비뚤어져버린 서울공화국이 된 나라에서 ‘먹고 살아갈’ 일을 하기 위해 꾸역꾸역 대도시로 몰려들어야 하는 슬픈 청춘들.
내 어린 날의 철없음을 깨닫는 것도 너무 늦어, 고작 1년에 부모님을 몇 차례 더 뵙지 못하는 것이 아쉽고 슬프지 아니하던가? 가난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각자 먹고 살기 바쁘게 되던 순간부터. 피붙이에 대한 그리움은 이루 말하지 못할 슬픔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던가?
유명한 TV드라마는 대부분 ‘착한 이야기’보다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야망을 지닌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들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전하며 사랑보다 ‘일’이 우선이다. 시시껄렁한 우리네의 TV드라마가 사랑으로 점철된 이야기로써 꽃을 피우면 식상하고, 오히려 사랑 따윈 양념으로 두고 전문성을 갖춘 ‘일’과 ‘권력’에 매진한 이야기는 환대를 받고 즐거워한다. 물론 결국 드라마의 끝에서는 파국을 맞지만 최근의 ‘하얀 거탑’과 같은 드라마에서 볼 수 있듯. 우리네가 살아가는 모습에서 이제 그런 ‘야망의 추구’는 더 이상 ‘미워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신경림의 시에서 말하는, ‘가난 때문에 사랑을 버리는 모습’은 드라마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심지어 내게는 더욱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며, 오히려 더욱 우리네 ‘한’이 서린 모습과 맥을 같이 한다.
사랑한다고 미치도록 속삭이고 싶은 청춘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더 나은 경제력’을 갖추기 위한 선택이 아닌. 가난으로 인해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택으로 끝이 난다.
현대 사회에서, 특히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가난이라는 것은 노력 따위로 개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옛말에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해 주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가난은 분명 억울하면서도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사회가 더욱 심화될수록, 노동은 자본에 귀속되고 시장이 수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 일이 벌어지면서. 가난은 더욱 심화될 뿐이다.
이런 억울함에도 그저 ‘사랑’을 떠나 보내는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무력감에서 오는 자괴감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도 아니며, 더불어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배경이 결혼을 통해 성취해야 하는 도구라는 이미지 – 남성적 시각이든, 여성적 시각이든 - 가 부여된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고, 사회적 통념을 부수고 결혼이라는 것이 ‘평등한 사람’끼리 이루어지는 당연한 인간관계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된 후로. 자본주의 속에 살고 있는 ‘나’를 스스로 돌아볼 필요를 느끼게 되는 건 어쩌면 자격지심일지도 모르지만. 분명 ‘더불어 살아가기’에 필요한 요소임에는 분명하다.
어쩌면 자신의 ‘자본력’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며, 그런 시각은 염세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 하겠는가. 그토록 사무치는 사랑이 생물학적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2~3년 만에 짓밟히고, 아이를 낳고 찾아오는 금전에 대한 무기력감과 사회적 분위기에서 오는 위축감으로 벌어지는 갈등을 눈에 선하도록 보아오지 않았던가?
그런 면에서 신경림의 시는 내게 위안이 된다. 내가 선택해온 사랑들이 결코 비겁한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위로해주고, 우리 가족이 살아온 길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입증해주기도 한다.
‘돈’을 추구하기 위해 사랑도, 가족도 버리는 비열함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그리고 나와 관계 없음으로 ‘금전적으로 위협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을 위해. 사랑도 포기하고, 같이 살면서 행복할 수 있는 삶도 포기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슬프면서도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다는 위안감.
그나마 가지는 희망이라는 건. 그렇게 비슷한 생각으로 ‘욕심없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아닐까?
하나의 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남자의 눈물’이라는 이야기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조차 모르지만. 다른 하나의 시는 읽을 때마다 가슴 깊이 위로와, 인내, 편안함과 삶에 대한 태도까지 다시금 일깨우는 모습을 보면서, 시라는 것이 담는 세상은 참으로 다채롭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이는 시가 된다면. 시를 통해서 타인의 시각과 삶을 배우기에는. 시적 허용의 표현들이 너무 어려운 시는 곤란하지 않을까?
Posted by 함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