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조카가 요즘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다행히도 형수님이나 형이 보내고 싶어서 보낸 게 아니라 자기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갔댄다.
누구나 어릴 때의 기억이 있을 거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 못 배웠다. 레슨 비가 너무 비쌌다. 학원 갈 돈이 없었다...
그래. 이건 슬픈 이야기다. '배우고 싶은 데' 못 배우는 것. 그것만큼 슬픈 일이 또 어디 있으랴 - 사실 슬픈 일은 오지게 많다만 - 그런데도 중요한 건 배우고 싶은 마음이지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는 마음'은 아닐게다.
내가 한글을 깨우친 건 집에 '가나다라'가 씌여진 유아 교육용 벽보가 붙어 있어서도 아니고 - 우리 부모님이 무지했던 건지 정말 찌들게 가난했던 건지 내가 읽을만한 책 따위는 없었다 - 우리 아버지가 읽던 신문을 옆에 앉아 같이 보면서 아버지에게 줄기차게 물었고, 아버지는 짜증 한 번 없이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다. 더불어 당시엔 한자가 신문에 섞여 나와서 전부 읽지 못 했는데, 이를 어엿비 여기신 우리 할머니는 내게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가르치며 한자를 읽을 수 있게 하셨다.
그렇다. 온 집안이 교육에 힘쓸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아버지는 자영업자로 오전에 한 시간 정도 신문을 읽으실 시간이 있었고, 할머니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손자를 앉혀두고 한자를 가르칠 교육열이 있으셨다.
그러나 대세를 꺾을 수는 없는 법. 나보다 5년 빠른 우리 형도 다닌 유치원을 나 또한 안 갈수 없지 않던가.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에 들어가는 뺑뺑이에 실패하고 죠낸 비싼 - 사실 내 어머니의 회고를 들으면 요즘 같이 비싸진 않았다고 한다 - 사설 유치원에 들어가서 매일매일 나오는 간식인 소보루 빵과 조립식 블록으로 자동차를 만들어 밀고 다닌 기억만 날 뿐, 솔직히 거기서 얻은 거라고는 옆 자리의 그림 잘 그리는 남자 녀석이 그리는 그림체를 모방해서 내 생에 첫 '그림'이라는 것을 그려 본 것이 전부다. - 당시 나는 정말 머리는 동그랗게, 몸은 작대기로. 그러니까 졸라맨 스타일의 사람에 대해 정면의 모습만 그릴 수 있었지, 사람 얼굴이 측면에서 그려진다는 사실에 놀라기까지 했다 - 물론 그 뒤로도 그림에 대한 발전은 전혀 없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미농지 - 죠낸 얇은 종이 - 에다가 만화 드레곤볼 따라 그리고, 거기서 약간 발전해서 이현세의 폴리스 겉장, 이명진씨 만화를 눈으로 보고 똑같이 그리려 삽질하는 수준 정도에서 나의 열정은 끝났다.
대가리가 좀 좋은 편에다가 집중력도 좋아서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늘 전교에서 수위권이었다. 당시에 우리 학교에서는 무궁화 개수로 3개는 1등급, 2개는 2등급, 1개는 3등급으로 나누어서 상위권 아이들에게 상장을 주었는데, 그냥 주는 대로 받긴 했는데.
1. 내가 시험이라는 것을 보고
2. 그걸 채점한 후에
3. 아이들의 순위를 결정하고
4. 상장을 줄 아이들을 정하는 것
이라는 시스템을 어렴풋이 안 것은 초등학교 4~5학년이 되어서였다. 이때까지 관심이 없었던 이유는 단 한가지였는데 집에서 부모님이나 형이 내가 공부를 하든 매일 나가 놀든 신경을 안 쓴데다가, 집에 가정통신문이 와도 내게 뭐라 하신 적이 없었고 - 어찌보면 무책임한 부모로 보일 수 있겠으나, 우리 부모님 철학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성적이 좋아서 아무 말 안 하셨는지도 모르지만 - 나는 학기 내내 수업 중에 들은 것을 시험친다고 다시 본 적도 없고, 시험 기간이라고 부산을 떤 적도 없던 터라 시험이라는 것이 가진 의미, 더불어 그로 인해 결정지어지는 성적순의 서열 따위에 전혀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때, 친구 생일 집에 놀러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는데 - 당시에 난 집 주위에 나랑 동갑이 없어서 늘 동네 형들이랑 옥대 맞추기, 숨바꼭질, 쌍동그라미, 오징어 따위를 하고 놀았다. - 거긴 마치 요즘으로 치자면 성적 잘 나오는 애들의 사교클럽 같은 분위기였다. 서로 중간고사 때 무슨 과목 몇 점 나왔는지 물어보고, 어느 반 누가 공부를 잘 한더라부터 시작하여 참 고리타분한 학부모 수다와 같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어떤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는, 친구가 하던 공부 마저 해야 한다고 거실에서 나를 기다리게 했는데, 그 아이는 '아이템풀'이라는 학습지를 하고 있었다.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는데, 첫째로 집에 와서 공부 - 라기 보다는 시험문제 풀기 - 를 하는 모습이 신선했고, 둘째로 그런 '학습지'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으며, 셋째로 그걸 다 풀어야 놀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6학년이 되었을 때, 매 시험마다 무궁화 3개를 받던 내 상장은 어느새 무궁화 1개로 줄어있었고, 나도 중학교 반 배치고사라는 것을 봐야했기에 서점으로 나가 문제집을 세 권 구매했다. 슬램덩크의 열풍으로 난 농구에 미쳐 있었기에 집에서 TV를 틀어놓고 농구 리그 경기를 보면서 그 문제집을 풀어나갔다.
그리고는 7등으로 중학교에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수업 시간에만 공부하고, 학교를 나오면 내 시간 즐기고 아르바이트에 바빴던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공부라는 것. 그건 자기가 알고 싶은 걸 해결해나가는 거지 '시험'이라는 목적을 두고 덤비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시험 준비'지 공부가 아니라고 스스로 선을 긋고 살아간다.
미디어부터 시작하여 사람들이 참으로 '공부'라는 단어를 '시험 준비'에 적용시켜 얘기하는 것을 보면. 그리고 그 시험준이와 달리 진짜 '공부'에 매진하며 살아가는 대학원 이상 교수진들을 보면. 우리 사회가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교수의 수업권은 4학년의 '취업권'에 농락당한다.
당장 나조차도 대학에 '취업'하러 왔지 '공부'하러 오진 않았으니까.
서로 불쌍한 처지의 연속이 된다. 물론 그 중에서 교수들은 자신의 뒤를 이을 인재하나만 발굴해도 멋진 성공일테지만.
참으로 독서량이 적은 나도 - 1년에 제대로 '독서하자'고 읽는 건 한 권 될까 말까 - 궁금한 게 생기면 빚을 내서라도 돈 주고 책을 사서 봐야 직성이 풀린다.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면 궁금해서 잠을 못 이룬다.
그게 공부하는 재미가 아닐까?
알고싶어서 미치겠는 것.
시험 점수와 낙방에 관계없이 말이다.
내 아이에게는 딱. 내 부모님만큼만 해줄 수 있는 내가 되길 바란다.
Posted by 함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