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을 하고 재무관리 수업을 들어가니 마침 교수께서 이런 얘기를 하신다.
면접을 보는 데, 고3 학생에게 ‘경영학부’는 왜 왔냐고 물어봤더니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했댄다. 그래서 면접 점수 F 주고 떨어뜨렸다. 경영학부는 ‘경영자’의 길을 배우는 곳이지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배우는 곳이 아니다.
1학년 수업도 아니거니와, 2학년 첫 수업에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는 아마도 경영대 내에 ‘노동자’운운하며 돌아다니는 미친 새끼가 하나 있기 때문일 게다.
참 웃기는 일이다. 아니 인구 4천 500만 중 노동자만 1500만인 나라에, 도대체 CEO가 몇 명이나 되길래 고작 6천명 조금 넘게 대학생을 뽑으면서 경영학부 학생만 300명을 뽑는 대학의 ‘경영학부’에 경영의 길만 배우는 사람들이 모이는가?
Ceo 대상으로 하는 경영대학원도 따로 두었건만, 결국 장사하기 위해 만든 학부 아냐? 라고 내뱉으려고 하다가 학생들의 수업권을 침해하지 않고자 닥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교수께서 수업 도중에 ‘이상한’ 얘기를 하신다.
저 뒤의 학생이 ‘장난하나?’라는 표정으로 당당히 답한다
“이윤 추구입니다”
교수께서 물끄러미 보시더니 틀렸다 말한다. ‘이윤 추구’라고 단정지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윤 추구를 위해서, 제품의 품질을 떨어뜨리고, 단가를 낮추기 위해 하청 업체에게 납품가를 강제로 하락 시키고, 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하면서 ‘이윤을 추구’하면 그건 기업이 아니라는 얘기다.
학생들은 ‘당연한 얘기 아닌가?’. ‘이윤 추구라는 말에 그 말이 들어있지 않은가?’라는 반문을 한다. 학생이 순진한 건지 모자란 건지. 단어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오해’가 없어야 한다. 우리는 수많은 ‘이윤 추구만 하는 기업’을 목도해 오지 않았던가?
물론 내가 믿고 있는 우리네의 상식에선 ‘이윤 추구’라는 단어 안에 그런 의미가 들어가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이 정당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그건 아니다.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수많은 경영학부 학생들에게 ‘기업의 목표는 이윤 추구가 아니라, 사회에 기여하면서 이윤을 남겨야 하는 것’이라고 설득을 시도했으며, 경영학원론 B+이라는 점수는 그런 내 말에 조금의 신뢰성도 부여하지 못 했다.
그런데 반갑게도. 이 교수께서는 내가 한 해 동안 지껄였던 그 말들을 학생들에게 ‘교수의 권위’를 가지고 설파하셨다.
회사의 주인은 노동자가 아니라 ‘주주’며, 전문 경영인은 ‘주주’에게 고용되는 것이다. 고용된 경영인은 ‘주주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지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게 아니다. 기업의 이윤과 ‘주주의 이윤’이 Income Statement로 볼 때는 동일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기업’의 이윤은 ‘최대로’ 세후 이익을 많이 남기는 것이지만, ‘주주의 이윤’이라는 것은 회사의 이미지, 회사 노동자의 충성도, 회사에 공급하는 업체와의 긴밀한 관계 등 모든 것이 연관되어 나타나는 ‘가치의 집산’으로 이루어지는 이윤이라는 점이다.
그렇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너무나도 쉽게 망각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우리 회사’라고 부르며 우리가 계약하고 노동을 공급하는 일터를 마치 ‘우리의 소유’인양 생각한다. 이거 심오한 착각인 거다.
어쨌거나, 수업이 끝나고, 지난 학기에 진지하게 ‘기업의 목표가 이윤 추구가 아니다’라는 점을 설명해 주었던 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형 말이 맞네요?”
쓰바, 블로그에 쓴 ‘글’이 나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직업과, 내가 가진 계급이 나를 보여주는 게 맞다. 써글.
어쨌든, 학생들에게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깜빡 잊고 해주지 않았던 경영학부 1학년 생활 동안. 어떤 아이들은 얼마나 왜곡된 시선으로 세미나를 듣고, 참석하고, 이해했을까.
이런 교수가 있다는 기분 좋음에 교무실에 찾아가 커피나 얻어 마시러 올라갔더니, 어떤 교수가 날 보더니 대뜸 이런다.
“너 참 어리더라?”
“아니, 그럼 제 나이 이제 스물 일곱인데 어리지요”
“게시판 글 보니까 아직도 생각이 참 어린 것 같아, 군대도 갔다 온 녀석이”
뭐, 이런 교수도 있고, 저런 교수도 있겠지만.
내가 성숙하지는 못 해도, 나이 값은 하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하는 게 어리다고 내뱉는 교수들을 하나 둘 만나면서.
도대체 난 언제쯤 클지, 언제쯤 이런 어린 생각을 내비치지 않을 수 있을지.
언제쯤 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인간이 될 수 있을지.
생일날, 괜찮은 교수 만났다고 좋아하다가, 스물 일곱이나 나이 쳐먹고도 어리다는 소리를 듣는 나이 값도 못하는 써글 놈이 된 내 자신이 하도 초라해서.
노동자를 노동자라 부르는 내 어린 마음을 키우기 싫어서.
미역국 대신 토스트 조각을 겹쳐 물으며 목이 메는 걸 꾸역꾸역 눌러 내린다.
도대체 얼마나 더 머리가 굵어져야 ‘어리다’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까?
Posted by 함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