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팀 버튼 감독의 그 오묘한 원색 빛깔 찬란한 배트맨 시리즈를 뛰어넘어 프리퀼을 만든다는 것에 '현실적 요소'까지 부과한다는 것은 더이산 본연의 '배트맨'과 다르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사실 만화 영웅중에 가장 '정상적 인간'에 가까운 배트맨이 팀버튼 특유의 판타지적 세상에 물들어가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었지만 이토록 '현실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낸다는 소식은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될지 사뭇 궁금하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영화는 뜻밖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특히 액션 장면에서 보여준 그 '정신없는' 편집은 일부 관객에게 불편함을 선사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 세세한 액션에도 배트맨이 입고 있는 복장을 감안하여 만들어낸 액션이라는 점과, 잠깐 잠깐 스치듯 보여지는 액션과 그 '재빠른 몸놀림'을 통해 하나하나 사라져가는 악당들이 느끼는 '공포심'을 적절하게 담아냄으로써, 역시 '공포'의 대명사인 배트맨을 제대로 그려냈다는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이던가? 크리스천 베일의 '목소리'연기는 가히 압권이었는데, 가면을 통한 이중성을 넘어서서 배트맨일 때와, 아닐 때의 완벽하게 다른 인물을 꺼낼 수 있는 그 '격한' 목소리는 스스로가 악당들에게 '공포스러움'을 줄 수 있도록 만들어내는. 배트맨의 인물이 훨씬 살아나는 점을 발견하면서 극에 몰입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온다.


더군다나 배트맨이 무슨 무기공학 '박사'도 아닌데다가 무술 익히는데만도 꽤나 걸렸을 터, 어려운 무기는 회사의 힘을, 소소한 무기는 스스로 구닥다리 방법을 통해 제작하는 모습을 비춰줌으로써 전자장비에 둘러싸인 머나먼 영웅이 아니라, 현실에서 접근해나가는 가까운 영웅으로 둔갑시키면서 사람들에게 '환타지'가 아닌 동시대의 인물로 착각토록 만들기도 한다. 물론 등장하는 요소들도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닌자의 '인술'을 통해 배트맨의 은닉성을 보조하고, 그런 어둠속으로 부터 걸어나오는 영웅이 주는 '두려움'은 결국 '공포'로 형성되는 사회정의라는 한계를 가지게 됨에도 불구하고 배트맨이 '영웅'으로 대접 받을 수 있는 것은, 일종의 '경외감'을 통해 같은 인간의 틀 속에서 '인간을 넘어선 인간'의 현신을 통해 안심을 느끼는 '종교적 틀'의 변종인지도 모른다.

종교가 가지는 경외심, 그리고 그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 다는' 교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범죄를 저지르면 '배트맨'이 찾아가는 이야기는 이미 속세 곳곳에서 뻔히 발견되는 '신의 추종자'들의 윤리의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포'가 정의를 다스리는 모습이 불편한 것은 마치 인간이 '지옥'의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선행을 하게되어야하는 슬픈 해석과 맞물리면서 느껴져오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어쨋든, 개그의 발현 수준이 이젠 하늘을 찌를 집사 알프레드와 어벙벙하면서 깜장옷만 입어대면 날카로워지는 배트맨의 모습은 그 암울한 고담시의 밤 그늘에서 한 줄기 유쾌한 빛이 아니던가?

가장 궁금한 것은. 그럼 조커부터 시작해서 기존 스토리 다시 다 갈아엎어주는 건가?

Posted by 함장

2005/09/30 12:29 2005/09/30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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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이하드' 이후로 폐쇄적 구조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상당히 뛰어난 감각이 아니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과 치밀한 시나리오가 뒷받침 되지 않을 경우엔 극악의 영화가 탄생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은 누가 봐도 익히 아는 사실일 것이다.

공간적 배경이 '폐쇄'라는 길 하나로 주어진다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쓰일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내부에 있는 것과,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 그리고 내부의 사람들은 그 얼토당토 않은 외부의 장벽을 뚫고 '밖'을 향해 나가거나, '밖'을 향한 연락을 위해 몸부림 치는 것은 당연한 전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특이한 상황 전개'라는 것이 존재할리는 없기에, 아예 애초에 주어진 상황의 설정이 흥미로운 점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기도 하다.

쉽게 얘기해서 '왜?' 갇혔는가 말이다.

자연재해는 늘 사람을 고립시키에 충분하다. 심지어 이제는 쫄딱 망해버린 자동차의 도시 디트로이트의 겨울 폭설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리라.

주인공에 대한 소개를 위해 초반에 전개된 마약반의 '함정수사'는 우리의 에단 호크가 얼마나 '마약 거래상'들이나 '마약 제조업자'들에게 화딱지가 나있으며, 마약으로 인한 범죄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을지 상상이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피어스로 더 잘 알려진 로렌스 피쉬번이 마약상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이 둘이 '절대' 양립하지 못할 거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만드는 효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나, 결코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들여다 보면 과연 인간이 자신이 '추구하는' 신념보다 '생존'에 더 중요한 비중을 둔다는 그 본연의 의지에 초점을 맞추게된다. 일종의 자기합리화랄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라면 '생존'해야지 '신념'을 추구할 수 있다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러나 혹자는 '신념'을 위해선 죽음도 무릅쓰지 않던가? 그런 이들에게 과연 이 부당한 '강제폐쇄'는 어떤 식의 자기방어기제로 작동하게 되는지에 대한 고찰을 보여주는 영화의 스토리 전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만하지 않은가?


이런 밀실 이야기에 늘 대립되는 감정의 '군중'들을 해결해 나가는 것은 리더역할을 하는 주인공이 당연하겠지만서도, 보통의 겁에 질린 일반 군중이 아니라, 범죄자들과 경찰들로 이루어진 묘한 연합전선은 그들의 상대 또한 부패경찰이라는 점에서 궁극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범죄자는 부패했다, 부패 경찰도 부패했다. 그럼 경찰의 적은 범죄자와 부패 경찰이어야 하나 그러지도 못한다. 창 밖엔 부패 경찰이 있고, 여기엔 범죄자와 연합한 경찰이 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옳은 경찰'인가? 범죄자가 부패 경찰과 대치 중이라면 이 범죄자는 '올바른 행동'을 벌이고 있는 것인가?

이 묘한 권력구도의 설정은 폐쇄공간에서 쓰이는 전형적인 이야기 풀이의 '변종'으로 치부될 수도 있으나, 내부의 또 다른 인물이 '거래'를 틀면서 결국 '연대감'에 대한 의심으로, 인간 사회의 내부 깊숙히 들어있는 서로에 대한 신뢰감의 지속력에 대한 의문으로. 하나의 축소판과도 같은 인간형을 보여줌에 어색함이 없다.


머리에 총구를 겨눈 상태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특이한 인간들만이 결국 살아남는다는 '권선징악'과도 같은 구도의 결말 속에서도 산뜻한 느낌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은 간만에 '잘 짜여진' 시나리오로 구성된 여러 장치들의 연결고리와 그 속에 숨은 '인간'의 포악한 면에 대한 씁쓸함도 마저 놓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인지도 모른다.

폐쇄구도의 이야기는 뻔한 전개여도 즐겁다.

Posted by 함장

2005/09/28 12:47 2005/09/28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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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에서 다시금 깨달은 거지만 아무리 달리 보려해도 안젤리나 졸리의 모습은 쌍권총의 라라 크로프트를 넘어서질 못하는 것 같다. 선글라스 까지 꼈으니 더할나위 없지 않은가? 영화 '툼레이더'를 본 사람이라면 아마 그 괄괄한 성격의 말괄량이 아가씨를 누가 데리고 살꼬라면서 한탄했을지도 모르듯이 이 '스미스 부인' 또한 그 들쭉날쭉한 성격의 끄트머리에 선 간당간당한 우리의 브래드 피트는 불쌍해서 못봐주겠다.

사실 영화의 재미는 이렇게 간간이 드러나는 안젤리나 졸리의 육감적인 몸매를 감상하는 재미였으리라. 그러나 어느 새, 이 웃고 시각으로 즐겨야할 오락영화는 감히 '가정의 평화'를 노래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며, 심지어 확실히 '현명한' 위치에 놓여있는 안젤리나 졸리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 집안의 확실한 구도 자체가 '여성우위'에 있음을 만천하에 공개한다.

그렇다. 암만봐도 브래드 피트는 기 못펴고 산다.

영화의 첫 인터뷰 장면에서 그네들의 '섹스'가 그리 신통치 않았다는 것을 읽어냈을 때, 이미 저 나이에 결혼생활의 끝을 달리고 있을 그들이 자연스레 연상되는 것은 '섹스'가 삶의 중심에서 얼마나 중요한 소통의 도구인가를 다시금 느끼게 만드는 무작위적 코메디의 철학을 넘어서는 현학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묻게되는. 과연 '액션 영화'로 남을 것인가?

과연 그 '섹스'를 멀리하게 된 이유가 남성에게 있느냐 여성에게 있느냐 혹은 '서로에게 있느냐'에 대한 해답을 도통 찾을 수 없는 이 살벌한 '전쟁터'의 분위기에서 과연 무엇을 추측해야하는지, 실마리는 어디에 있는지 생각할 새도 없이 이미 영화는 빠른 전개를 통해 여성이 '집안 권력'을 주도하면 가정이 평화롭다는 '인지상정'을 폭력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실적 가정생활을 눈꼽만큼도 보여주지 않은채, 오로지 '힘'과 '폭력'만이 난무하는 영상들로 가득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처음과 끝을 통해 그들의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삽입함으로써, 오히려 한 떨기 꿈같은 그네들의 총격전이 치열하고 그 폭력적 미학에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결혼생활'의 색다른 표현으로 다가오게끔 하는 감독의 '센스'는 어느새 관객의 '액션영화' 인식에 무시되기도 한다.

영화 '트루 라이즈'라던가, 부부 중에 어느 한 쪽이 '특수요원' 또는 '킬러'로 나온 영화들이 즐비했으나 그들의 결과가 결국 또 다른 한쪽도 같은 직업을 갖던가, 혹은 비극이던가로 귀결되는 모습을 쭉 봐오던 우리에게 그 '출발'부터 같은 길을 걸어오던 동종업계 종사자들 간의 경쟁으로 보이는 이 치열함은, 결국 '가족'이란 한 틀에서 비웃어주기엔 너무나 황당한 이야기 아니던가?

차라리 '스파이 키드' 시리즈나 '인크레더블'와 같은 맥락의 길을 걷는다고 선언을 했다면 이해해 줄 수도 있었으나, 그저 '둘'의 스캔들을 뒤로하고 개봉되기엔 좀 씁쓸한 부부싸움.

그래도 즐거운 건, '생각없이' 보기에 충분한 영화라서기 보다, 어떻게든 안젤리나 졸리의 캐릭터 때문에 '여성주의'를 찾아보려다가 실패한 내 모습이 어처구니 없음에 즐거운지도 모른다.

결국 라라 크로프트 같은 성격과 같이 살기위해선 속궁합(?)도 잘맞아야 한다는 결혼의 '절대적 진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족의 '화평'을 안겨준다는데 절대적 동의를 안겨주는 영화.

Posted by 함장

2005/09/27 11:13 2005/09/27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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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블코믹스의 영웅들은 더 이상 특별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미국을 지켜내는 그들이 한국인의 눈에 그리 곱게 보일리도 없거니와, 온갖 슈퍼히어로들이 판을치다 보니 이젠 각각의 히어로 네임 조차 외우기도 벅찰 정도다. 오죽하면 슈퍼맨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 헐리우드 영화이겠냐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갸날픈 허리와 육감적인 몸매의 제시카 알바는 우리를 극장으로 인도하기에 너무나 완벽한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은가?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한다. 도대체 이 영화 어딜 봐서 여성관객을 위한 서비스가 있냔 말이다. 맨 우측의 철없는 섹시가이? 글쎄, 별로 잘나보이지도 않잖은가?


혹시나 수염 기른 남자를 좋아한다면 현실의 이들 모습에서 '인간횃불' 역할을 한 저 크리스 에반스에게 혹 빠질지도 모른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했으니 크리스 에반스가 이 영화를 본 모든 여성관객을 끌어잡았을거라 확신도 해주자. 그러나 우리가 엑스맨의 울버린 역할에 남성들도 열광했듯이, 남성관객이 열광할만한 캐릭터가 이렇게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제시카 알바'의 허리선과 가슴선 만으로도 모든 걸 눈감아 줄 수 있는 점은 충분히 '칭찬' 받아 마땅하다. 결국 뒤집어 얘기하면 볼 것 없단 얘기지만.


마치 40대의 나이로 비춰지는 나머지 두 주인공들. 이마에 패인 깊은 주름과, 결혼 생활 꽤나 오래했을 듯한 저 대머리 중년남성의 모습은 아무리 헐가워진 우리나라의 '중년문화'에 끼워 맞추려 해도 내겐 너무나 먼 당신 아니던가?

엑스맨 시리즈 같이 영웅이 떼거지로 등장하거나, 적어도 배트맨과 로빈 같이 3인조로 출동한다 하여도 일당 백의 역할을 하던 영웅들을 보아오다가, 도무지 하나씩은 맥을 못춰 각개격파 당하듯이 힘을 못쓰던 영웅들이 상추, 콩나물, 된장찌개, 고추장까지 완벽하게 버무려진 비빔밥을 봐야 맛이 돌듯, 네명이서 쇼부보는 클라이막스는 신선하기 보다는 예견된 일이기에 그저 '시각적 즐거움'으로 확인하는 재미를 볼 뿐이다.


사실..... 이 장면에서 난 고스트 버스터즈를 떠올려버렸다......

Posted by 함장

2005/09/12 11:25 2005/09/1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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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부여의 힘 - 리크루트

리크루트는 개봉당시 소재의 참신함과 배우들의 열연을 제외하곤 뻔한 스토리와 뻔한 반전을 이유로 그리 호평을 받지 못한 영화였다. 허나 그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포스터가 말하듯이 '알 파치노'라는 배우의 무게와 요 몇년 최고의 흥행주가를 올려대고 있는 '콜린 파렐'이란 배우의 대치구조는 상당한 끌림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영화 제목인 '리크루트'처럼 CIA 요원을 헌팅하는 작업과 헌팅된 예비요원들의 교육, 그 속에서 숨겨져 있던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는 영화 전반의 스토리는 관객들에게 참신할 수도, 혹은 그저 그런 이야기로 치부될 수도 있다. 호기심을 갖는 자라면 과연 어떤식으로 CIA 예비요원들이 선발되고 어느 장소에서 어떤 식으로 훈련을 받는지 궁금해 할 것이며,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저 그런 소재거리들 보다는 극을 얼마만큼 긴장감 있게 끌어나가는지 감독의 연출력을 찾아내려 혈안이 될지도 모를일이다.

허나 이미 우리에게 노출된바와 같이 굳이 'CIA'의 특별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너무나 익숙한 환경들을 넘어서 우리 생활 가까이 접근해 있는 '스파이 놀이'가 다시금 확인되는 과정을 거칠 뿐, 달의 뒷면처럼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선 조금의 설명도 다루지 않는다.

예컨데 대사 중에 튀어나오는 '결국' 공무원일 수 밖에 없는 CIA요원들의 월급과, 경제 침체기에 놓여진 미국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공무'라는 직업이 상당한 경쟁율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런 '관권'을 손에쥔 사람들이기에 '공화당'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다는 농담은 상당히 뼈있는 미국인의 실생활을 짚어내 주기도 한다.


스파이 영화에 으례 나오는 거짓말 탐지기나 인물 관찰을 통해 거짓을 분별하는 법 따위도 이미 진부해진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세세히, CIA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설명해 주는 이유는 관객에게 '정보'를 알려주는 내용보다 그로인해 주인공과 그 주변인물들이 '스파이'라는 직업에 갇혀있음을 나타내기위한. 일종의 암묵적 약속을 권고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여진다.

미국이란 나라의 영화풍토는 쉽게 '화씨 9/11'과 같은 영화나, '에어포스원' 같은 영화가 공존하는. 스펙트럼도 넓지만 그들이 가진 정보중 '자신 있는 것'은 드러낼 수 있는 나라이다. 쉽게 얘기해서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는 Art of war를 알고 있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의 비밀을 내보여도 무방하며 심지어 법으로 정해둔 측면도 있다.

대통령과 정치적 행보에 대한 정보가 상당히 넓은 범위로 노출되고 있으며, 지금은 퇴역한 비행기지만, 실제 'Air Force One (공군 1호기, 미 대통령 전용기)'의 내부도 마음놓고 영화를 통해 공개해버리는 국가이니까 말이다.

그런 그들에게 '정보요원'을 채용하는 과정(물론 픽션에 제한적 노출이지만 어쨋든 그 가이드 라인은 제시하고 있다)을 노출시키는 것은 이제 쉬운 일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런 영화속 일련의 '정보공개'는 알리기 위한 일이라기 보단, 그를 통해 관객들, 혹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케릭터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케 만드는 과정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콜린 파렐이 연기하는 역할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아버지에 대한 의심을 가진채 CIA로 뛰어드는 케릭터인데 여기서 첫번째로 재미난 상황설정이 있다. 아버지가 의문사를 당한 이유가 그가 'CIA 비공식 요원'이었다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임무 중 죽은 요원들을 추모하는 메모리얼 앞에서 그의 아버지가 죽은 해에 그려진 익명의 별표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그를 발견함으로 인해 그가 '자신의 아버지가 걸었던 길'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다잡는 모습을 비춰준다.

허나 '정보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정보 불균형성으로 인해서 사실은 늘 왜곡되고 '가진 자'의 논리로 편파적인 형태를 띄게 되는데 그 상황설정이 바로 이러한 경우를 이끌어내게 된다.


콜린 파렐은 자신의 아버지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음을 이용하여 알 파치노는 자신이 가진 정보를 사용하여 콜린 파렐로 부터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내려한다. 아버지가 'CIA 비공식 요원'이었다는 낚시질을 통해 콜린 파렐을 CIA 채용장으로 끌어내고, 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가끔 미끼로 던지면서 그에게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핏줄에 대한 암시와, 그 아버지가 했던 '비공식 요원'역할을 콜린 파렐도 잘 수행해 나갈 것이라는 믿음을 지속적으로 심어준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알 파치노의 '그럴 듯한' 이야기에 솔깃하여 콜린 파렐 스스로도 자신이 아버지를 닮아 가는 것이 당연하고 합당한 일인 것처럼 인식하며 그런 '믿음' 속에서 자신이 스스로도 '요원'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는 자신감에 빠지게 된다.

후에 알 파치노는 콜린 파렐의 아버지가 CIA 비공식 요원이 아니라 그저 석유회사 사원이었을 뿐이라고 마치 사실을 고백하는양 이야기를 꺼내고, 그를 속인 이유가 CIA에 끌어들이기 위한 계책이라는 이야기를 듣게된 콜린 파렐은 그동안 자신이 믿어왔던 과거에 대한 절대적 흔들림으로 인해 스스로의 자멸감에 빠지는 광경을 보여주며 보는 관객에게 씁쓸하면서도 재미난 인간의 성향을 보여준다.

그렇다. 모든 사람은 '합리적'인 이야기에 손을 들어주기 보다, 그저 자신의 취향 혹은 자신이 가진 신념, 혹은 이도 저도 아닌 그저 '기분'에 따라서,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을 귀담아 들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호불호' 문제를 떠나서,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이야기에 대해 스스로 자기보호를 위한 합리화를 맞추어 선택에 대한 양심적 가책을 잘라내는 행동을 보이는 형태이다.

그렇기에 콜린 파렐은 CIA를 선택함으로 인해 자신이 듣고 싶던 자신의 과거를 속시원히 얘기해주는 알 파치노에게 끌릴 수 밖에 없었고, 그가 알려준 자신이 '듣고싶던' 과거에 스스로 합리화 시킨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이 지향하는 길에 대한 긍정적 접촉을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가 바라는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 그것은 분명 자신을 만들어가는, 영화의 대사처럼 스파이가 '역할 수행'이라는 행동을 가지는 직업이듯, 우리 모두는 우리가 행하는 행동과 말들 속에 의미 부여를 통해 각자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나타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 '힘'이 가진 위력은 일터에서 넘치는 정력을 갖게 할 수도, 당장 때려치고 싶은 무기력감을 나타내게 할 수도 있다.

어떤 방향이든, 분명 감독은 삶의 그러한 면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별표를 굳이 꽂아주자면 3개 반. 알파치노 보면 4개 주고 싶기도 하다.

Posted by 함장

2005/08/26 16:58 2005/08/26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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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두려움 - 아일랜드

마이클 베이 감독은 원래 CF와 뮤직비디오 감독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보여주는 비쥬얼한 면들과 그 긴박감 넘치는 상황전개는 CF와 뮤직비디오가 가지는 '짧은 시간 안에 강렬한 것을 보여주는' 특징을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었다. 1995년 '나쁜 녀석들'에서 그 비쥬얼의 화려함을 선사했고, 1996년 '더 록'에선 엄청난 도로 추격씬과 함께 액션영화의 진수를 맛보게도 했다.

그런데 이 양반이 1998년엔 '아마겟돈'을 통해 좀 '쓸데없는'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로또가 몇 십번 연속으로 당첨될 확률보다 낮은 '혜성충돌'을 '있을 법한 일'로 포장하여 찍어댔던 것이다.

물론, 우리 주변의 모든 판타지를 제외한 드라마, 영화, 소설 등등은 '있을 법한 일'이다. 심지어 '혜성충돌'의 경우 영화 개봉 전에 한 혜성이 지구에 근접하는 사실이 발표되면서 상당한 관심을 이끌어 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말이다. 2005년의 '아일랜드'는 그 걱정이 너무 심해진 것은 아닐까?

일단 '아일랜드'는 즐겁다. '더 록'의 흑인 전차장도 카메오로 등장하고, '아마겟돈'에 등장했던 스티브 부세미와 마이클 클락 던컨도 등장함으로 인해, 마이클 베이의 이전 작들을 관람했던 사람들에게 '낮익은 인물'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 즐거움이 주는 의미는 영화 '아일랜드'에서 상당히 강한 영향으로 남는데, 이는 영화 속 두 주인공들이 TV 앞에서 자신과 똑같은 얼굴의 사람을 발견하는 장면과 비교되면서 관객들에게 '저 배우가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인데?'라는 또 다른 물음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감독은 달랐지만, '콘 에어'라는 영화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얼굴인 스티브 부세미가 살인을하고, 식인(食人)을 한 범죄자로 나오는 모습과, '아마겟돈'에서 비겁하고 약한모습으로 일관하는 스티브 부세미의 모습. 그리고 이어지는 '아일랜드'에서의 마치 순교자와 같은 스티브 부세미의 모습은 분명 '다른 영화', '다른 케릭터'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사람'의 '다른 인생'으로 다가오게 만드는 것은 분명 '아일랜드'라는 영화가 가져다 주는 분위기일게다.

우주의 모습을 설명할때 등장하는 이론 중에 하나인 '다중우주론'이라는 것이 있다. 몇 가지의 우주가 있고, 그 다른 우주에는 나와 동일한, 똑같은 인물이 전혀 다른 형태의 삶을 살면서 동시에 존재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우주론을 채용한 영화도 부지기수이다. 몇 년전, 우리의 친애하는 이연걸이 주연한 영화 '더원'도 100여개가 넘는 다중의 우주로 이동하면서 '동일한 모습의 자신'을 죽이며 결국 '홀로' 살아남아 우주를 지배한다는 얼토당토않는 개그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다중 우주속의 '자신의 모습'을 지워나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으로 부터 시작된 이야기 거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일랜드'를 관람하고, '황우석 박사'의 연구결과들이 하나 둘 씩 공개될 때마다 우려하는 것이 바로 '인간복제'인 이유는 결국 '자신과 동일한 인격체가 등장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인간과 가장 유사한 형태의 '로봇'을 만들어 내는 것에 주력하고, 그 '로봇'이 '인격'을 갖는 것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진행하던 인류가, 이제는 기계공학이 아닌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다. 좀 섣부른 걱정이 아닐까?

위에서 언급했던 '더원'이라는 영화부터 시작하여 최근의 '아이로봇'까지. 인간은 자신들을 닮은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온다. 로봇이 '인간'을 닮아가는 것을 두려워 하고, '사람'이 쌍둥이가 아님에도 'DNA'구조까지 똑같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일랜드'는 인간의 '생명연장'을 위해 인체를 복제한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런데 과연, 신체 장기를 '유지, 보수' 해준다고 해서 평균수명이 연장될까?

사람들은 '의학'의 발달로 평균수명이 연장되었다고 많이들 잘못알고 있는데, 사실 인류의 평균 수명이 연장된 이유는 의학보다는 청결한 환경이 발달되면서라고 볼 수 있다. 일례를 들어 '상하수도'가 완벽하게 분리되었다라던가, 그로 인해 생활환경이 오염원과 분리됨으로 청결성이 유지되어서 영아 사망율도 꽤 낮아졌기 때문이라는 것, 마찬가지로 전염병도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는 것이다.

인체 장기를 아무리 새것으로 갈아끼워준다 하여도, '뇌'의 노화는 다시 갈아넣을 수 없기에. '인체의 복제'는 무의미한 행동에 다름이 없다.

드라마 CSI 시리즈를 보면 가끔 나오는 얘기인 '인체와 돼지의 구조는 비슷하다'라는 얘기가 우리가 실제 처한 환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인간 장기의 보전은 '인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돼지'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미 인류에게 암 등의 장기 대체를 위한 의료시술을 위해 '무균돼지'를 개발하고, 그 돼지에게 인체에 장기 이식을 할 경우 거부반응을 없애기 위한 인체장기 DNA를 집어넣는 실험이 지속되고 있으며, 그 전망은 매우 밝다.


그렇게 되면 이런 '흉악한' 모습은 실제 삶에 나타나지 않게될 것이다. 일부에선 '인간'을 위해, 인간의 '장기'를 위해 돼지를 키우는 '동물보호'적인 주장을 펼치는 곳도 있지만, 그들에게 '아일랜드'에서 이완 맥그리거가 뱉은 대사를 똑같이 던지고 싶다.

'소고기를 먹는다고 소를 만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한 방편으로 돼지고기를 소비하는 것과,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한 방편으로 돼지의 장기를 이식하는 것. 과연 무엇이 다를까?

생명공학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성과를 이루어 낼수록, 진실에 접근해 갈수록. 겸허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인간의 유전자 개수가 하등생물보다 몇 배는 많을 것이라 추측했던 것과 달리, 일반 동물들과 그 개수의 차이가 별로 없음을 발견한 과학자들은 인간이 동물들보다 생물학적으로 우월한 존재라고 과감히 주장할 수 없게 된것이다.

나랑 똑같은 지문, 똑같은 DNA, 똑같은 모습을 한 사람이 동일한 지역을 활보한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인간은 그런 무서운 상황을 만들어내느니, '경제적'으로도 비용이 적게드는 돼지를 사용하는 방법을 택할 것이다.

마이클 베이. 좀 쓸데없는 걱정이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추격씬'은 멋지더라.

Posted by 함장

2005/08/25 13:45 2005/08/25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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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의 지휘명령체계는 한 국가의 '이상적인' 그것과 닮아있다. 함장의 권한은 잠수함 전체를 좌우하는 능력을 가지며 그 지위도 구성원들 모두의 동의로 보장된다. 사관식당에서 이루어지는 장교들의 대화나 회의는 '국가안보회의'와 같은 역할을 하며, 함장으로 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지휘통솔구조는 명확하게 구분되고 통합되어있다. 그리고 잠수함 승조원은 '전부' 남자로 구성되어있다. 이는 '남녀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성적인 평등'을 의미한다. '성'으로 인하여 구성원 간에 차별받는 것이 없는 완벽한 '유토피아'에 가까운 구조다. 마치 아마조네스 왕국처럼 말이다.

허나 국가든 잠수함이든, 권력의 수장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기에, 만약 그가 폭주할 경우엔 그것을 막아낼 수 있는 '조처'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바로 'Manual'. 규정이다. 중요결정사항에서 국민이나 국회의 동의를 얻거나, 부함장의 동의하에 지휘를 내리게 되는 시스템. 이는 역사적 '군부독재'사건들에서 보아온 일련의 지휘권 폭주들을 방지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결정안'들임에 틀림없다.

그런면에서 『크림슨 타이드』와 『유령』은 '핵'이라는 최강의 무력사용을 두고 벌이는 잠수함 이야기 속에서, 'Manual'이라는 것의 존재가치와, 인류보편적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서 '이성'이 하는 역할에 대해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크림슨 타이드』의 서두는 미국인들의 Nationalism으로 부터 출발한다. 그들은 USS 알라바마호에 승선하기 전에 함장("진 해크만")으로 부터 일장연설을 들으며 '국가주의 의식'을 고취시킨다. 자신들의 잠수함 이름이 가진 의미가 '선한 사람들'을 상징한다 스스로 다짐하며, 자신들이 '세계에서 제일 좋은 곳에 사는 사람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 사람들'이라 다짐하고, 앞으로 자신들이 벌일지도 모르는 '핵무기 발사'라는 임무가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선'을 행하는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이점을 욕할 수는 없다. 이는 미국의 '대외 정책' 기조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인데, 그들은 명확하게도 '프랑스의 인권선언문' 정신을 따르고 있다.

혹자는 '미국'이란 나라가 왜 남의 나라에 자신들이 '자유'를 못가져다 주어서 안달이 났는지 궁금해 하며 우리의 기억속에 있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떠올려 본다. 허나 '민족자결주의'의 허울은 그 민족이 '어느 제국의 식민지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지 자체 독립을 옹호해 준 것은 아니다.

미국은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 받은 '프랑스 혁명 정신'을 따르는 국가다. 그 정신은 '국가의 위기는 곧 국민의 위기'라는 정신으로 대처하며, '자유정신'을 퍼뜨리는 것은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서 전세계 방방곡곡에 능동적으로 전파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면들을 이해해 볼때, 그들이 그들의 힘으로 '세계 경찰 국가'를 자처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사고'에서 무리함이 없는, 아주 당연한 처사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들의 '자유 전파'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는 또 다시, 간디께서 설파하신 인류 보편적 가치. 즉 '비폭력'에 대한 이야기로 반박할 수 밖에 없다. 과연 '폭력적인 방법'으로 '자유'를 전파하는 것이 합당한가? 라는 '목적의 합당성에 대한 수단의 변칙'을 짚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함장("진 해크만")과 부함장("덴젤 워싱턴")은 사관식당에서 '핵'에 대한 이견을 보인다. 그리고 클러스위츠 얘기를 들먹이며 '전쟁'이라는 국제 정치사회의 '수단'에 대해서도 '이견'을 보이며, 하버드에서 '수료'한 엘리트 부함장과 상당히 권위적이고 단순한 함장 사이의 의견대립을 통해 '사회의 권력층과 지성인층의 의견대립'을 보여준다.


권력층이 자신들이 내비치는 '정치적 행동'에 대한 변명을 늘 '구국의 결단'이라 위엄있게 칭하는 것을 보며, 지식인 엘리트 층이 그 '구국'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류보편의 가치에 어긋나는 지를 보여주는 이 사관식당 장면은 우리가 '국가'라는 틀안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오해하고 있는지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함장이 '클러스위츠는 전쟁이란 또다른 정치의 연장이랬지.'라는 발언을 통해 세계의 권력구도 속에서 '핵'이 가지는 정치적 권력에 대한 이해도를 보여주며 자신들의 행동에 '합리화'를 시키는 반면.

'하버드 수료생'이라는, 지식인의 잣대라는 편견을 관객에게 부여한 부함장의 해석은 함장과 달리 '전쟁은 정치적 이유보다 전쟁 자체를 위한 겁니다.'라는 대사로 맥을 달리한다.

이어서 '핵병기가 있는 현재에선 진정한 적은 파괴되선 안되죠.....핵이 있는 현재의 진정한 적은 전쟁 자체입니다.'라는 통렬한 비판으로 '군인'으로서의 자신들의 존재 정체성과, 현재 자신들이 잠수함으로 항해하는 이유가 '핵'을 발사키 위한 일이라는 아이러니를 통해 Nationalism과 인류보편의 가치추구가 상충하는 점을 다시금 환기시킨다.



그럼 우리 영화『유령』은 어떨까? 설정은 『크림슨 타이드』와 매우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핵'을 발사하려는 자와, 그것을 막으려는 자로 구분되니까. 허나 그 설정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가져오는 충격은 분명 『크림슨 타이드』와 다르다. 이는 우리민족의 정서 뿌리 깊숙히 심어져 있는 반일감정과, 강대국에 대한 '한' 때문이기도 하다.


202('유령'호의 부함장, "최민수")가 자신의 카리스마로 함내 장교들과 부사관들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관객이 그의 카리스마에 압도된 이유와도 동일하다. 러시아에서 차관 대신 몰래 들여온 '핵잠수함 유령'이 미국과 일본에게 들키는 바람에 결국 국가 수뇌부에서 이 '핵잠수함'을 태평양 한가운데 자침(스스로 파괴하여 침몰함)시키는 결정을 함으로써, 잠수함 승조원 모두와 늘 국가의 권력층에게 반감을 가져온 실제 현실의 국민들은 자연스레 202의 의견에 동류된다.


국가의 명령대로 잠수함을 자침시키려는 함장을, 202가 암살하고 잠수함의 지휘권을 잡으며 자신들의 '유령'을 침몰시키게 압박을 가한 '일본과 미국'에게 핵미사일을 퍼부으려는 상황전개에 관객들 스스로가 국가 수뇌부를 '군사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두 번의 상황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류해나간다.

이는 관객의 국민적 이성을 넘어, '약소국'이라는 설움과 '반일감정'이라는 분노감이 합류되어 어떤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가에 대한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심리적 요인이 크다.

파시즘국가는 어렵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국민들 스스로가 동류의식을 타면서 국민의 민족주의가 인류보편 가치를 넘어서서 자민족중심주의로 굳어지면 정치권력의 상층부는 쉽게 국민의 정서를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적 사건들이 증명해주며, 『유령』이란 영화를 통해서도 쉽게 보여진다. 잠수함 승조원 공동체, 즉 국민공동체가 전체적인 '멸망의 위기의식'을 느끼면 쉽게 '대동단결'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 대동단결을 통한 '단체행동'자체의 향방은 그 권력의 구심점이 가진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맞 대응과 폭력성이냐 혹은 평화적인 대화와 토론 또는 거래를 통한 협상인가 라는 성향으로 결정된다.



흔히들 우리민족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 얘기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지는 의문이다. 김진명씨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핵'을 보유하고 쏴대는 대한민국 이야기가 300만부나 팔리며 베스트 셀러를 장식하고, 언젠가는 통일을 이룰 북한의 핵 보유에 미래의 핵보유국을 꿈꾸며 열광한다.

헌법에는 '방어적 개념의 국군'을 표방하고 있지만 '공격적 개념의 해병대'를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아이러니는 '북한과의 대치상태'라는 이야기만으로 설명해내기엔 '헌법'이 가진 위력이 너무나 초라해져 버린다.

지정학적 위치의 약소국,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 사이에서도 '명분'과 '실익'을 쫓아 한반도 비핵화 선언, 군축협약 등을 논의화하며 '평화'를 부르짖는 것은 허공에 부르짖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일까?

지성인이라는 대학생들이 '반핵시위'를 하며, 인류의 평화를 부르짖으면서도 '일본 극우 지도층의 망언'에 발끈하여 '일본 국민 전체를 비하하는'이야기를 걸러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에선 궁금증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한 국가 정부의 의식수준은 그 국민의 의식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일본 군국주의 망령에 씌인 사람들을 향해 '인류 보편의 가치를 부정하는....' 운운 하시며 준엄하게 꾸짖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반면 우리 국민은 유난히 '일본'에 관하여서는 아직도 그 '분'이 풀리지 않은 채, TV에서 하는 600년전 '이순신 이야기'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현재의 일본'과 '과거의 일본'을 동일 선상에 놓고 바라보는 우를 범한다.

『유령』을 보고 나오는 관객들의 코멘트에서 '대량학살을 가져올 뿐인 핵의 발사'를 저지한 힘없는 지식인 엘리트 431("정우성")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강한 힘의 논리를 펼친 202처럼, '역시 나라가 설움을 받지 않으려면 핵이 있어야 해', '핵잠수함을 만들어야 해'라는 의견들이 수없이 발견되고 있음을 본다면 우리 국민의 '평화'에 대한 이중잣대가 무엇에 의해 가려지는지는 명백하다.



분명 막강한 군사력은 세계적인 안목의 국가권위를 세워준다. 허나 '핵'이 가지는 그 위협력을 모두가 이해하고, 전 세계 지식인과 지성인들이 반핵시위를 하며 전 세계의 '핵무기 감축'을 요구하는 이 순간에도 '국가가 강해지기 위해', '민족이 자주적으로 일어서기 위해' 핵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우린 어떤 연유로 동의를 해주어야 하는걸까?

아무리 세계가 약육강식의 정글과 같다 하더라도, '힘의 논리'가 도덕적 당위성을 갖출 순 없다. 인류가 '배우고 가르치는' 이야기는 모두 '사람이 걷고 있는 평등한 길'에 대해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과 관련있다.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로 시야가 가려져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지는 일들에 지식인층이 뛰어들어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가하는 것은 '이성을 지켜내려는' 그들의 순수한 노력이다.

『크림슨 타이드』에서 부함장이 이성적인 판단으로 Manual에 의거, 함장의 권한과 지위를 박탈하는 것은 Power Game이 아닌 '이성적인 고찰로 만들어진 규정'을 통해 상황을 차분히 대처하는 지식인 다운 행동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인류보편의 가치가 민족이나 국가가 추구하는 이상향 보다 상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우리 국민이 중국에서 반일감정으로 폭행당하는 일본학생의 안위를 걱정할 높은 수준의 인권의식을 가지고 있을거라 믿고싶다.

민족주의, 좋다. 민족의식 고취도 좋다. 허나 분명 그 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습관적으로 민족의식으로 인해 생각하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Posted by 함장

2005/05/16 07:11 2005/05/16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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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5년 1월 21일 새벽 3시 39분 40초에 작성완료되고
오늘 영진공 4호 발간에 맞추어 공개됩니다.

영화진흥공화국 가기

간만에 5천원짜리 문화상품권과 할인카드를 들고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세이브존의 1관은 좌석도 부서진 것이 많고, 넓기만 넓지 그리 좋은 시설은 아니었으나, 평일 이른 저녁이라 사람이 적다는 점과 좌석배치의 '자유자재'로운 점을 이용하여 마음껏 관람할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습니다.

잡다한 광고 없이 개봉예정작의 홍보용 필름만 두개 돌리고 영화로 바로 들어간다는 점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더군요.

『소림축구』가 '무협'의 실생활 접목을 보여줬다면, 이번 『쿵푸허슬』은 '무협지'를 1930~50년대 배경으로 끌어낸 재미난 시도였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취향으로 『와호장룡』으로 일그러져 비춰졌던 중국의 '무협문화'가 이 영화를 통해 다잡아 질 수 있었으면 하는 말도안되는 소망도 있습니다.

뭐 자잘한 이소룡 패러디부터 시작해서, 커다란 메트릭스 패러디까지 극장에서 관람하시도록 하고 이만 각설합니다.



"주성치"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순수로의 회귀'에 대한 비판은 하고싶지 않습니다. 제 나름의 주관으로도 그의 그런 성향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스타일이고, 오히려 그런 영화의 모습과 극 속에서 배우들의 '현실'과의 갈등속에서 빚어지는 마찰을 너무나 리얼하게, 혹은 과장되게 표현함으로 real life를 살아가는 우리의 가슴한 곳을 아리게, 혹은 부끄럽게 만드는 설정들은 "주성치"에게 반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흩뿌리고 있습니다.

『쿵푸허슬』의 '쿵푸'는 한자로 '功夫(공부)'입니다. 공부라는 것은 무언가 '완성'으로 나아가는 노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 한 거지의 눈에 이채롭게 띈 '싱("주성치")'은 그 거지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신 스스로 '세계평화'를 위해 '해적판 여래신장'을 구입합니다. 그 '세계평화'에 대한 집념은 저금통 마저 박살낼 정도로 하늘을 치솟았으며, 어린 '싱'은 줄기차게 '여래신장'을 공부해 나갑니다.

그렇게 익혀나간 '여래신장'을 써먹을 기회가 왔으나, 결국 비참하게 무너진 '싱'.

그때부터 '싱'은 줄기차게 비뚤어진 삶을 살아갑니다.

비록 이후에 '기연' 두 가지를 얻어 결국 '공부'를 끝마치고 진정한 '여래신장'을 이룩해내지만. 모든 '아이'가 '기연'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 '기연'이 없었다면 '싱'은 계속 삐뚤어져 나갔을 지도 모릅니다.



처음이 문제였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커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아이에게 '넌 여래신장의 힘을 가질거야'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하던 그 거지가 문제였던 것이죠. 그 아이는 다른 것을 더 좋아하지 않았을까요?

아이가 믿고 있던 순수성.

정의는 꼭 승리한다는 믿음을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다굴앞에 장사없다는 '힘의 논리'.

그런 실망과 좌절 이후에 오는 방황.

하지만 다시금 찾게되는 순수성과 그와 함께 이루어진 재성장. 이어지는 공부의 완성.

자신이 걷고 있는 길에 대한 믿음을 찾아내어 '완성'을 이루는 모습은 '아이의 성장'을 말하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이 하고팠던 일을 이루는', 순수했던 갈망의 성공을 이루는 것에 비추어 그 '순수로의 회귀'는 우리가 행하고 있는 '교육'이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 삶인지 느끼게 합니다.



영화가 끝난 후, 극장 옆 서점에 들렀습니다.

보기좋게 진열된 '논술대비 아동서적'들. '청소년을 위한...' 시리즈들. 그 뛰어난 문학작품들을 출판사의 입맛, 수능의 입맛에 맞게 요리저리 구차한 각주를 달고 부연을 달아 버젓이 내어 놓은 상술책들.

우리 아이들은 태어나서, 유치원때부터 '대입'을 준비해야 합니다.

어릴 때 부터,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그리고 스스로의 꿈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에게 무엇이 되라고 강요하고 있진 않을까요?

아이가 추구하는 바가 비록 현실의 이익과 결부되지 않더라도, 도의적으로, 사람답게, 자신이 하고픈 일을 찾아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 길이라면 그렇게 내버려두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아이가 '좋은 사람'이 되어가기 위해 '험난한 길'을 걷고 있어도, 뒤에서 다독여 주고 응원해 주면, 결국 언젠가는 자신 스스로의 길에 확신을 갖고 스스로 의미부여를 하며 힘차게 걸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어린 아이의 '스폰지 머리'에 부여될 '도덕적 가치'는 매우 주효합니다.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도덕인 '더불어 살아가는 법'은 이미 초등학교 때 다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다운 삶'의 배움보다 '사'자 달린 직업을 갖기위한 마라톤처럼 느껴지는 '과외'와 '학원'의 러쉬속에서.

우리아이들의 꿈은 커녕, 사회의 서열화에 대한 선입견을 가짐으로써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필요한 '다양성'을 가진 '평등한 사람들'의 인식을 더디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아이들에게 무엇이 되라고 강요하기 보다, 『쿵푸허슬』의 라스트 신처럼.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살아가는 길은 어떤 길들이 있는 지 보여주고 아이들 스스로택한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응원해 줄순 없는 것일까요?



신나는 패러디와 즐거운 비명속의 『쿵푸허슬』에서 '공부'라는 제목과 함께, 어린날의 꿈을 쫓아 다시금 회귀하는 주인공을 보며.

과연 어린 시절의 아이들이 성장함에 있어 그 '기억'들이 '공부'를 통한 '인격 완성'에 지대한 공헌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 동감하면서.

쓰잘데기 없이 주절거려 봤습니다.



이땅의 아이들이 '논술대비를 위한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수업'이나 '청소년을 위한 토지'가 아닌.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과 박경리의 '토지'를 즐겁게 읽어내려가길 바라며.

Posted by 함장

2005/02/02 16:30 2005/02/0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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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 장풍대작전



ㄱㄱ ㅑ~~ 류승완~~~ --)b

5월 5일을 맞이하야. 할일없이 빈둥 거리던 본인. 무작정 아침에 바이크를 몰고 강변 CGV를 급습했다. 때는 8시.......뭔 사람이 글케 많은겨.ㅠㅠ 대기인 순서 202번째....ㅠㅠ
무려 30분을 기다려 오후 표를 끊었다.

라퓨타를 보고 싶었으나.... 댕장. 어린이날이라...매진연쇄.ㅠㅠ

아~ 난 극장에서 그 빠방한 싸운드로 라퓨타 theme을 듣고 싶었단 말이다...ㅠㅠ

효자동 승부사....가 아니라 이발사의 유혹을 뿌리치고 류승범의 느끼한 미소...... 보다 소이~~양의 저 아리따운 자태 +_+에 홀딱~ 반해버려 바로 예매했다 쿠휏휏휏.

각설.

어제 포스팅 했어야 했는데..... 도원결의 때 온니쁠님의 압봑으로 인해 지금까지 포스팅 됀 글들에 리코멘트를 다느라...... (__;

그냥 그저 그런 웃긴 얘기일지 알았는데.

너무나 가슴 아팠다.

저번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처럼. 중간에 다큐멘터리 처럼 들어간 '응삼이'아저씨와의 경찰이야기는. 너무나 와닿는다. 그래 '사회는 저런 것이지 씁봑'이라고 나올정도로 너무나 리얼했다. 12세 관람가에서. 너무나 잔혹한 그 사실을. 그렇게 하나의 장치 정도로 다루는 듯이 보여주는 감독의 표현에. 혀를 내두른다.

때려부수고 싶은 세상.

마지막 격투씬에 대해서 말이 많다. 길다느니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니. 뭐 나야 모를일이고. 다만 와닿는 것은. 여성의 문제다.

이 영화가 처음 잡은 제목은 '마루치 아라치'였다.

분명 마루치는 남자고, 아라치는 여자다.

하지만 주인공 역할은 늘 마루치가 한다.

왜?

아라치가 주인공이면 원더우먼 스타일인가?

원더우먼도 몸짱만을 내세운 우먼파워가 아닌 섹시파워 아닌가?

분명 권한은 마루치와 아라치. 둘에게 공평하게 나뉘어진다.

하지만 결국 권한은 남자에게 통합되고. 소멸된다.

그리곤 아라치에게 장풍하나 제대로 못쓰냐고 투덜대는 모습.....

왜 여성은 늘 그렇게 결국 구박받거나, 사회의 주도세력이 될 수 없는 것인가.

남성중심사회의 기득권층은 남성일 수 밖에 없다. 남성이 변하지 않으면 진정한 성평등의 사회로의 변화는 늦어질 수 밖에 없다.

권력을,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가져야 한다는 것은 웃긴 얘기다. 금치산자나 한정치산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들쭉 날쭉 움직이더라도. 모두가 그 권한을 가지는 것이 합당하다.

사람다움 이라는 것은, 냉철한 판단을 요하지도, 논리적인 비판력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하나하나의 인격체를 동일시하고, 양심을 지킬 수 있으면 충분한 것이다.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것이. 사회에 타협하는 길이라면. 반드시 가야하는 길이라면 그냥 제자리에 눌러앉아야겠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통쾌함의 그늘로 그 조폭의 리얼한, 분노에 찬 얼굴로 짓밟던 사회의 지지받지 못하는 정의가 공존함을 느끼면서.

법보다 주먹이 가까워선 안된다는 이성과 결국엔 주먹이 가깝다는 한계를 다시금 곱씹으며.

그런 비뚤어진 사회에 대해 냉소를 날린 류승완 감독에게 감사를 표한다.

기득권층 KIN~

Posted by 함장

2004/05/07 15:34 2004/05/0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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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자본주의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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