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가 뭔지 몰라도 이니셜D 애니메이션이 주는 감동은 남다르다, 일본에서 팔리고 있는 실제 스포츠카들을 3D로 작업하여 일반 '공도'에서 경주용 차량으로 둔갑시키는 화려함은 드리프트가 뭔지 모르던 사람들에게 '기본 상식'으로 각인시켜 버렸고, 물리상식 따윈 개나 줘버리게 만들면서 그 화려한 '심야 주행'의 세계로 사람들을 몰아갔다.

뭐 어쨋든 어처구니 없는 설정 속에서 화려함을 만끽하는 일은 각자 알아서 해야할 일이고, 그런 '괴리감' 속에서도 우리가 이 애니메이션을 즐겨찾고 하루라도 빨리 '다음회분'이 연재되길 기다리는 열광적 팬들도 많다는 점을 인지하고, 조금 딴 얘기를 해볼까 한다.

사실 레이싱에 대한 이야기 거리들이 그동안 꽤나 나왔더랬다. 우리 시대의 미남 중 한 분으로 꼽힐 나이가 되어버리신 '톰 크루즈'가 출연한 '폭풍의 질주'라던가 최근에 실베스타 스탤론 옹께서 출연해 주신 '드리븐'까지, 그 '경주'가 주는 남다른 즐거움은 아마 대부분이 느끼는 스릴일테다.


그런데 기존의 그러한 '경주' 영상들의 기본 토대는 '동일한 차량'에 의한 '기량의 승부수'였다. 타고난 천재적 감각도 중요하지만 어쨋든 그 '하드웨어'는 특출나면 특출났지 절대 '뒤쳐지'는 일은 없었기에. 그런면에서 이 '이니셜 D'가 주는 화려함 속에 뭍힌 AE86의 꼬락서니는 지금까지 '경주'를 지켜보던 우리들에게 신선하지 않으면서도 꽤나 '통쾌한' 구도의 변화를 보여준다.

생긴건 꼭 70년대 포니에다가, 그 옆에 떡 하니 붙어있는 후지와라 두부점. 괄호치고 자가용. 참 어처구니 없는 '외모'가 타쿠미와 결합하여 상상초월의 다운힐 스피드를 구사한다는 것은 시청자들 모두에게 전해주는 일종의 대리만족을 대신하고 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외모'에 대해 자신있어 하는 사람은 없으며, 스스로의 자아성찰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된 사람들이 얻는 경지의 '자기사랑'을 배제하곤 요즘 시대에 누구나 한번 쯤 '성형'의 유혹을 느끼지 않던가?

AE86이 가진 한계를 끝까지 끌어내고, 외형의 튜닝은 전혀 없이, 그 내부에서의 폭발로 다시금 자신의 한계점을 상위로 끌어올리는 모습은 마치 '인간'의 그것과도 동일시 여겨진다.


비록 애니메이션이기에, 그렇게 '겉만 보고 판단하는 것들'과 '지레 짐작하는 것들'을 쉽게 비웃을 수 있지만서도. 그럼으로 인해 우리가 얻는 '만족감'은 충분히 애니메이션을 즐길만한 시도로 여겨지지 않던가? 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관이 펼쳐질리 없음을 알면서도 마냥 행복해지지 않았더냔 말이다.

어쨋든. 프로젝트 D 가 가동되기 전까지의 모든 '배틀'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이니셜 D - 배틀스테이지. 전편을 몰아 볼 수 없는 직장인과 바쁘디 바쁜 수험생을 위하여. 이 액기스를 추천하는 바이다.

Posted by 함장

2005/09/26 12:54 2005/09/26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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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n'이라는 영화가 있다. '웨슬리 스나입스'와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한 '광팬'의 스토킹을 다룬 작품이다. 그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섬뜩'함을 이 아동용에 가까운 애니메이션에서 느꼈다면. 이미 이 애니메이션은 아동용의 그것을 넘어선 스릴러 물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다.

픽사르의 개성넘치는 인물 묘사와 그 배경의 리얼리티는 이미 정평이 나있다. 캐릭터는 만화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실사에 버금가는 화려한 그래픽은 보는 이의 눈을 휘둥그래지게 만들기도 한다.

사실 인크레더블은 '판타스틱4'보다 훨씬 전에 나온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판타스틱4'를 능가하는 각 캐릭터의 '연계'를 보여준다. 포스필드를 사용하는 딸이나, 거의 무협지에서 쓰이는 허공답보의 한단계 아래인 수상비(水上飛), 일위도강(一葦渡江)과도 같은 경지에 이른 초스피드 구사의 아들, 괴력의 아빠, 고무줄을 넘어서 도저히 인체로 보이지 않는 엄마 등등, 이 '가족'의 조합은 실로 강대하다. 그 뿐이던가? 악마로도 변신하는 막내 아들의 모습은 가히 이 집안이 '영웅'다운 집안임을 인정케 한다. 얼마나 가소롭게 웃어댈 수 있단 말인가!

영웅의 '은퇴'이야기 나부랭이는 관심이 없다. 그들의 무료한 일상이 곧 우리의 무료한 일상이고 그들의 평범함이 곧 우리의 평범함인데다가, 그들이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에서 다 때려치고도 무슨 짓을 하던 먹고 살 수 있는 인크레더블 가족과 아무런 '특수한' 능력하나 없는 관객들 사이의 괴리감은 이미 애니메이션이 주는 즐거움에 푹 빠져버릴 수 없게하는 장애물 따위는 갖추고 있지도 않다.

허무맹랑은 허무맹랑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네의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어쨋든 만인의 스포트 라이트를 몸소 받는 영웅이 던진 한마디로 가슴에 비수가 박힌양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영웅들을 갈아엎으려는 의도를 보이는 저 악랄한 '신드롬'은 동정을 해줄 수도 없으나 무턱대고 무시할 수도 없는 소외자이기도 하다.


누구나 이 시대의 '루저'들. 늘 집중을 받는 자는 따로 있고, 성과를 통해서 자신이 부각되는 일은 없으며, 행여 운이 좋아 부각된다하더라도, 곧 잊혀져가는 시시각각변하는 현대사회. 그 속에서도 다시금 '부활'을, 영광을 찾아 헤매이는 불쌍한 영혼들이 주위에 즐비하게 널려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때. 우린 마냥 '신드롬'을 악인으로 쫓을 순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 섬뜩한 스토킹과, 자녀까지 납치해가는 악랄한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섬찟한 주근깨. 그 악의에 찬 얼굴에서 피어오르는 묘한 장난끼는 어쩌면 이 시대의 청춘들이 쫒고 있는 허영과도 그닥 멀지 않은, 겹쳐가는 환영을 보여주기도 한다.


가족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프로즌이 자신의 평생을 같이할 사람을 차치하고,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가정을 뛰쳐나오는 이 현실적 괴리감은, 슈퍼 히어로라면 무조건 용서해주어야 하는 '히어로'의 시각만을 조명하는 쓰디쓴 영화의 핵심을 향해 비웃음을 날리기에도 충분하다. '슈퍼 히어로'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 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더라도. '나 아니면 안됀다'라는 생각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고 오만한 생각이라는 것을 쉽게 망각하는 수퍼 히어로 영화.

결국 우리가 바라는 것은 지구를, 내 신상을 지켜줄 히어로가 아니라, 나와 함께 같이 늙어갈 동반자들 이라는 것을 쉽게 가려버리는 이야기를 통렬하게 비판하지 못한 인크레더블은 결국 그 한계를 넘어서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4명의 캐릭터가 활약하는 모습은 마치 한편의 멋들어진 액션영화보다도 훨씬 스펙터클하고 화려하다는 점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나. 저 아줌마에게 반해버렸단 말이다.....

Posted by 함장

2005/09/13 11:38 2005/09/1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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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바람의 검심을 접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데다가, 원작인 '만화'로 부터의 출발이 아니라 '추억편'을 통해서 접하였던 경험으로 인해서 그 '진중함'의 뒷편을 익히 알고난 후에 통하게 되어 그 심도가 남달랐던 기억이 선명하다. 더군다나 지인이 상영식을 가져주며 건넨

'자네 일본의 역사를 좀 아는가?'

라는 질문에 당혹해 할 정도로 그 깊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문외한인 나로써는 호기심의 발동을 억누를 길이 없어 다시금 역사서에 고개를 파묻는 기현상까지 생겼으니 말이다.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는 흔히 '왜곡'으로 점철된 문화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왜곡의 중심에는 사실 일본 스스로 보다는 서구인들의 시각이 훨씬 접점되어있음도 볼 수 있다.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 땅에 발 조차 디딘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화와 칼'이라는 철저한 미국인의 시각에서 쓴 일본 문화의 틀에 대한 연구가 일반적 인식으로 다가오는 '아이러니'는 과연 정체성을 누가 부여하는 가에 대한 명목적인 고찰을 부추기기도 한다.

예를들어 그네들의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나오는 '신선조(신센죠)'라던가, 명치 유신(메이지 유신) 지사(志士)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들이 튀어나오는 이유를 다각도로 분석하는 것들을 볼작시면 흔히들 '왜곡'이란 단어를 가져다 붙이는데 사실 그 '왜곡'이라는 것이 어떤 분야의 왜곡을 의미하는지 나로써는 도통 'No'라는 것이다.

흔히 신선조를 '깡패집단'으로 분류하는 사람들을 내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그네들의 교토 치안 유지 명목과 사실 종로에서 야쿠자 나와바리 견제하면서 살아갔던 김두한 패거리나 그 명분이 서로 다르지 아니하건데 우리네 김두한은 영웅이고 걔네 신선조는 깡패새끼라는 '이분류법'은 도무지 어느 '이데올로기'에서 나온지 모르겠단 말이올씨다 라는 것이다.

사실 그도 그럴것이 '막부'의 보수성을 지키려던 무사들과 사무라이들, 낭인들까지도 아름답게 미화시키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 개화기때의 위정척사파들과 크게 다를게 없는 사람인것을 도대체 뭘 그리 '일본'얘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물고 일장연설을 해대는지 나로써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단 말이다. 역사는 '역사'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지 그게 '잘되거나', '잘못된 것'으로 쉽게 판단 내릴 수 있을 정도로 그 거대한 물결의 흐름을 가벼이 볼 순 없는 것이다.

2004년이었던가? 우리의 톰 크루즈 아저씨가 설쳐댔던 '라스트 사무라이'도 그 명치 유신의 막부 측의 사람들 이야기를 다루며 아직도 어느 쪽이 '승자' 혹은 '패자'로 판단하기 어려운 역사적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즐비하건데 그렇게 쉽게 결단을 내는 사람들의 학자적 풍모는 쓸데없는 겉치레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바람의 검심, 루로우니 켄신은 그런 '유신 지사' 중의 한 사람을 가상의 인물로 부가하여 실존 역사속에 배치된 가상의 이야기로 즐거움을 주는 하나의 픽션이다. 유신, 유신 해대니 기분이 거슬리기는 하나 뭐 어쩔 수 없이 저 단어 외에 사용할만한 것이 없으니 참도록하자.

추억편의 이야기는 명치 유신이 시작되기 전의 폭풍같은 일본의 상황과, 그 속에서 켄신이 어떻게 검술을 익혔으며, '발도제'라는 별명을 얻어가며, 얼굴에 왜 '십자흔'이 생겼는가를 이야기하면서 막부화 유신 지지파들의 사이에 일어나는 권력 암투와 칼 하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보여준다.

빗속에서 '창포'의 향을 내뿜던 토모에가 히무라 켄신의 암살로 빚어진 '핏빛 비'를 끼얹음 당하며 시작된 그들의 로맨스 또한 그 속에서 '한 남자'가 성장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필연적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또 '여성'이 남성의 성장을 위한 도구냐고 핀잔을 주시는 분들이 더러 계시겠지만 어쩌겠는가, 소녀검객 아즈미 시리즈도 아니거니와 살인을 즐기는 미학적 취미는 없다 할지라도 '검 이야기'에 사죽을 못쓰는 남정네들의 킥킥대는 이야기일지언정 결코 '여성주의' 픽션은 아니잖는가?


칼 하나에 의지하면서 잠조차도 편히 잘 수 없는 암살자의 길. 그 길에 뛰어든 '토모에'의 활약은 이미 날이 시퍼렇게 선 상태로 뽑아진 검을 감싸기 위한 칼집으로 '매도'되며 결국 그 운명적 칼집을 향해 걸어나가게 되는 뻔한 스토리와 달리 그 섬세한 터치를 통한 눈동자 하나하나까지도 엮어내는 애니메이션의 특징은 가히 명작이라 불릴만큼의 독보적 견지를 유지한다.

원작이 그저 '얼빠진 듯 한' 켄신의 방랑 생활에 섞여 역사를 비췄던 것을 볼작시면 이렇게 진중하고 묵직한 역사의 흐름을 '춘하추동'에 담궈 뽑아내는 설정의 기술들은 실로 뛰어난 '화법'이 아니던가? 켄신의 스승이 하는 결론적인 대사인

'검은 흉기, 검술은 살인술'

이라는 깰 수 없는 굴레를 깨기 위한 몸부림. 살수가 아니라 '활수'를 펼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뇌는 그가 가져야 하는 '막부'를 부숴야 하는 검의 한계를 지고 결국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채, 삶의 돌고 도는 인생의 격정을 계절별로 보여주며 그 눈부신 성장을 보여준다.


결국 토모에는 켄신이 또 다른 살수를 펼치더라도 그 길의 '끝'에 다다르면 해야할 일을 결심케 해줌으로 인해 켄신의 4계절의 끝 자락에서 그를 또 한번 성장의 도약으로 끌어오르도록 만들어준다.

아무리 냉혹한 남자든, 범접할 수 없는 남자든. 그 사람에게 '따스한' 눈빛을 부여하고, 그로 인해 성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여성'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음을 익히 알기에. 그저 뻔한 사랑이야기가 아닌 '당연한' 이야기인 것도 알기에.

궁금해지는 것은.

그럼 여성은 진짜로 16세면 완전히 정신적 성장이 끝나버리는 건가?

Posted by 함장

2005/09/09 09:00 2005/09/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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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모 가츠히로는 이미 익히 알려진 에니메이션 '아키라'를 감독한 사람이다. 물론 이 '스팀보이' 또한 그의 작품이고. 두 작품의 사이엔 크게 '일치'하는 면이 없지 않다. 무조건 다 깨부수는. 그러면서 그 잔인한 부서짐의 미학 속에서 관객에게 던지는 물음은 단연 일치한다. 과연 사람은, 사람들이 이룩하는 문명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말이다.


현대문명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19세기 후반, 산업혁명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삶을 현대 문명에 빗대러 묘사하는 이런 쏠쏠한 재미는 풍부한 상상력과 함께 극중의 재미를 더하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 '빽 투 더 퓨처 3'에서 19세기 후반으로 시간여행을 한 박사와 마이클 J 폭스가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얼음'을 만들거나 기계 장치들의 역학관계를 사용하여 토스터기를 만들어 사용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작은 재미를 느꼈던 것 처럼 말이다.

위의 모습이 대리묘사하는 현대의 외륜구동 자전거와 자주증기차가 후에 디젤 엔진 차량이라는 것을 놓고 볼때, 그리 '새로울 것 없는' 발명품임에도 불구하고, 신비감을 주는 이유는 전혀 '상식적'이지 못한 디자인이 주는 '외적 사실감'에 근거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저런 연동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중고등학교 과학교과서를 다시 펼쳐볼 필요없이, 그저 극중에서 눈에 익은 원리를 묘사해주는 것 만으로도 '있을 법한' 사실성을 부과해버리기 때문이다.


어쨋든 감독은 관객에게 그 얼토당토 않는 '과학적 지식'을 무시하고 영화에 몰입할 수 있는 장치를 꽤나 만들어두었고, 그렇기에 애니메이션은 더욱 더 빛을 발한다. '아키라'가 인류문명의 가식에 포효하며 부숴버리는 역할을 보여줬다면, '스팀보이'는 유치를 넘어선, 뜬금없음을 넘어선 '만민평화의 길'을 어둡고도 어둡게 보여준다.

'나디아'라는 애니메이션의 도입부에 파리의 '만국박람회'가 모습을 보였듯이, 스팀보이도 영국의 만국박람회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는데, 과학의 발전을 세계에 알리게 된 계기가 그런 행사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늘 얘기가 나오는 민감한 '핵'이야기를 이번 스팀보이에선 살며시 덮어서 직접적인 표현이나 묘사가 전혀 없음도 예의 주시된다. 핵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한 저 '스팀볼'은 그런 민감한 부분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쓰였을지도 모를일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三父子들은 마치 정반합의 논리를 보여주듯, 그리고 '핵'을 개발했던 과학자들의 일련의 '행동선'을 보여주듯 묘사된다. '과학'이 순수해야 하는가, 아니면 '한 국가'의 평화를 위해 바쳐져야 하는가. 그 속의 고민 또한 관객에게 던져지며 결론은 무의미하듯 퇴색되어 있다.


저 거대 섬의 컨트롤 룸이, 공포와 폭력의 지휘로 쓰일 땐 화려하고 첨단에 있는 모습으로, 놀이공원을 모방한 거무튀튀하고 암울한 아이들의 놀이터로 둔갑할 땐 저 지하 한구석 어두침침한 작은 방으로 묘사되는 것을 보며, 스포트라이트 받는 과학자와, 순수과학을 위해 몸바치는 과학자들. 그 사이의 괴리감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세기의 첨단과학을 달리는 것들이, 가장 '보조금'을 많이 받으며 각광을 받는 곳은 군사분야이다. 그런 쪽으로, 늘 '국가'라는 울타리를 두고, 경계를 하고, 국가간 경쟁을 하고, 민족주의로 서로의 정세를 살피고, 국민 감정을 이용하고.

극 중 지속적으로 내뱉는 과학자들의 걸음 걸음, 그 속에 담긴 문장. '상식을 벗어나면 진보가 보인다'는 얘기는 결코 과학자들의 '힘찬 도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연구든 '돈'이 되어야 한다는 자본주의 논리. 그리고 그 돈과 결부되는 '권력' 그 속에서 서서히 잃어가는 인간 본연의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되어가고, 인류 보편적 평화를 유지하고 지켜나가야할 과학이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하에 '폭력을 억제하기 위한 폭력수단'으로 인간 본질 내면에 숨은, 타인을 믿을 수 없는 상식과, 타국을 믿을 수 없는 상식.

그런 상식속에서 이루어지는 과학의 한계는 결코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민족주의, 국가주의, 자본주의... 우리 시대의 '주류'로 존재하고 있는 '상식'의 선을 넘지 않는다면 '진보'란 이어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아무리 애니메이션이라지만.... 일본 것이 아니라고 저렇게 영국의 템즈강 주변을 완전 박살내어도 되는건가?

Posted by 함장

2005/09/03 14:18 2005/09/03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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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많은 동화들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던 시절이 있었다. 백설공주가 그러했고, 신데렐라도 그러했다. 애니메이션이 그저 '아이들의 만화' 쯤으로 치부되던 다시의 상황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애니메이션이 선택해야 하는 폭은 요즘과 달리 그리 많지 않았다.


허나 3D 애니메이션까지 발달한 현대의 애니메이션 풍토 속에서 이토록 '수채화' 느낌으로 산뜻하게 다가오는 애니메이션은 기술적 진보나 소재의 참신함 따위는 제쳐두고라도, '애니메이션'을 보는 즐거움을 배가시키며 상당히 신선한 감각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그린랜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동화같은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 이 애니메이션의 저 질감은 보는 내내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시각적인 효과와 더불어 감상할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한 '백곰' 부부가 아기곰이 죽자, 아빠곰이 '이누이트'족의 한 집을 찾아와 '인간 아기'를 훔쳐가는 내용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어, 아기를 찾기위한 사투와, 몇 년만에 찾은 아기를 다시금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이야기를 담은 이 애니메이션은 참 여러가지를 말하고 있다. '낳은 자녀'를 애타게 찾는 마음, '길러준 정'을 잊지 못하는 아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 '다름'을 인정하고 떠나 보내는 마음.


일종의 '유아 납치극(?)'에 해당하는 중죄를 지은 곰이 아기의 아빠를 향해 으르렁 거리는 모습. 그 속엔 어느새 '인간' 아기는 사라지고, 낳은 아기를 뺏긴자와 죽은 자신의 아기를 대신하고 있는 아기를 지키기 위한 두 아버지의 싸움으로 묘사되어버린다.

슬프디 슬픈 이야기대로, 사냥꾼인 '인간 아빠'의 창에 엄마곰은 죽어가고, 일순 이누이트 가족은 행복해진 것 처럼 보였다. 허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타잔', '정글북'. 이 둘의 공통점. 과연 저들은 '인간의 삶'에 적응해 나갈 수 있을까? 야생 동물의 삶을 보고, 배우며 자란 그들에게, '인간'의 문명이란 거추장 스럽고 불편한 형식에 불과하지 않을까?


야생에서 성장한 아이, 그리고 당연히 '낳은 정' 따윈 생각지도 못하는 교육, 그리고 엄마라 느낀 '엄마곰'의 죽음을 통해 '비통'을 겪은 아이가 택해야 할 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결국 엄마처럼 곰이되고픈, 자신이 사랑한 사람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을 진행하고 싶지 않았을까?

결국 우리 시대 단군신화는 아닐 지언정, 곰이 사람이 되는데 필요한 마늘과 쑥은 온데간데 없어도. 사람이 곰이 되는 세 가지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가 '곰'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에선 슬픔을 넘어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아름다운 수묵과 수채의 혼합, 그로 인해 어우러진 자연의 영상미가 그토록 깊숙히 각인되어져 오는 이유는 '단순한 구조'의 이야기로 '편히' 느낄 수 있는 동화구연과도 같은 그런 이야기였기 때문일게다.

아이 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연인, 가족 모두에게 권할만한. 감히 별 다섯개를 주는 애니메이션이다.

Posted by 함장

2005/08/29 07:24 2005/08/29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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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메이션을 전혀 모른다고 해도 한번은 들어봤을 법한. 그들이 만들어낸 이 10년전 애니메이션은 약간 특이한 면이 있다.

'장편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TV 시리즈 물도 아닌 이 애니메이션은 'Chage and Aska' 라는 일본 그룹이 만든 곡 'On your mark'를 위해 만들어진 뮤직비디오용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이다.

명작이라 불릴만한 조건 중의 하나는 분명 '언제 다시 봐도' 그 감동이 사라지지 않는. 분명한 울림이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면에서 6분을 조금 넘는 이 애니메이션이 주는 이 무한의 감동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마치 처음 만날 때의 벅찬, 가슴 깊숙히 끌어오르는 울컥한 느낌이 전달되어져 온다.

핵폭풍이 닥쳤든, 뭐가 어찌 되었든 방사능으로 오염된 외부와 폐쇄되고 통제되는 단일규모의 사회. 어느 날 갑자기 '광신도'들의 집회를 진압하러 습격한 경찰들. 그리고 그 경찰 주인공들에게 발견된 '돌연변이 조류소녀'.

광신도들이 '돌연변이'를 벌하려 감금해 뒀든, 광신도들을 규합시키기 위한 '영물'정도로 사용해먹기 위해 감금해 뒀든. 발견된 '돌연변이'는 방사선 오염으로 '격리'되는 순을 맞는다.

이어지는 주인공들의 갈등, 선술집에서 술잔을 놓고 둘이 그저 하루의 일상이었을 뿐이라는 표정을 짓고도. 결국 머릿속엔 하나의 생각. '합당하게 이루어져야 할 그 무언가'를 고심하게된다.

결국 '돌연변이'를 구출하고, 탈출을 실행하나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뮤직비디오의 묘미랄까? 탈출의 실패와 어우러져 나오는 가사구절.

'우리들이 그래도 그만두지 않는 건'

실패를 해도, 그만두지 않고, 시간을 돌려 다시 탈출을 성공시키는 놀라운 '기적'은 인간이 가진 '또 다른' 집념을 보여준다.


참으로 인간 중심의 관점을 완벽하게 비웃어버린다. 사실 '방사선 오염'을 시킨 것도 인간이며, 그 오염 구간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인간들을 격리시키는 것도 인간이다. '돌연변이
가 인간에게 해가 될까봐 격리시키는 것도 인간이며, 모든 것은 인간 중심으로 돌아간다.

자칫 어찌 보면, 주인공들은 결국 날개가 달린 '돌연변이'를 '날 수 있도록', 그가 그렇게 방사능에 오염되어 태어나게 된 환경으로 '돌려' 보내는, 그저 무언가 있던 위치로 돌려보내는 역할만을 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거창하게 '날개를 가진 자'에게 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것도 아니고, 자신들이 방사능 잔존물에 노출될 것을 걱정하는 것도 없이, 그저 '무언가 하루를 찝찝하게 만드는' 잘못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저지른 범죄치고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가슴 한구석 뿌듯함과 벅찬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우리는 저 '돌연변이 조류소녀''에게 방사능에 오염되었을지 모를 저 푸은 창공을 날아가도록, 그가 가지고 있는 상황을 맞추어 주어야 했을까?

규제와 통제. 그 속에 갇혀있는 인간은 모두가 어느 일정한 정도의 암묵적 사회 합의를 거친다. 그렇다고 그 암묵적 합의가 '도덕적 규제'의 당위성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수'가 가진 도덕성이 절대적 진리로 본다면 그것은 '절대'라는 단어에 대한 부정을 뜻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인간 중심의 자연, 인간 중심의 사회. 그 속에서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이라도, 자유의지가 있고, 생명을 스스로 유지하는 것들에 대한 배려는 결코 없는 것일까?

인류보편적 갈망, 평화, 인권, 자유, 평등, 그 모든 사상들을 추구하고픈 '이상'을 버리고 현실을 택하여 '느긋한 보수'를 유지하는 삶 속에서 과연 저들의 '우리들이 그래도 그만두지 않는 건'을 외치며 이상을 향해 걸어나가는 모습을 우린 따를 수 있을까?

저 선글라스에 익살맞은 지브리 스튜디오 특유의 미소는 순수 이상을 넘어, 가슴 따뜻한 의지를 보여준다.

Posted by 함장

2005/08/27 13:10 2005/08/27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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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고전인 에어리어 88이 명작이라 함엔 아무도 주저하지 않을게다. 1985년 작으로 이미 20년이 지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애니메이션계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아마도 그 '침울한' 이야기에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AREA 88 이란 부대는 '항공 외인부대'로 중동 지역, 한 왕국의 내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정부군의 용병으로 쓰인 부대의 활주로 넘버가 88이라는 설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설정만 그럴뿐, 이 애니메이션과 원작 만화에 '사실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가끔 어떤 리뷰들을 보면 공중전을 사실성있게 그려냈다고 운을 떼는 것을 보면 어처구니 없음도 느껴지지만 뭐 어쩌겠는가.

일단 현대전에서 '항공병과'에 용병이라던가 외인부대가 존재할 수는 없다. 항공군의 시스템이 갖는 원활한 보급과 정비체계는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일개 용병부대 하나로 메꾸어질순 없는 노릇이다. 미군이 '혼성부대'를 표방하며 한 부대에 항공운용에 필요한 모든 것을 때려넣고 단위작전을 수행해보려 했지만 결과는 '너무나 비효율적'으로 판명되었던 사례도 있다.

그리고 '외인부대'라는 것. 용병이나 다름없는 그들의 활동은 이런 '대단위 전투'에 투입되긴 힘들다. 외인부대로 유명한 프랑스 외인부대도 사실 요인경호, 주요시설 경비, 점령지역 치안활동 정도만을 활동할 뿐이지 단위지역 전투에 투입되진 않는다. 미국의 특수부대 출신들이 구성원으로 활동하는 '데브그루'도 마찬가지다.

물론 '항공 용병'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2차 세계대전때, 중국이 미국에게 '용병'을 요청하여 미군에서 '제명'된 전투기 조종사들이 중국에 고용되어 일본과 전투했던 기록이 있다. 그 부대 이름이 '플라잉 타이거'였는데, 한때 독일군이 '샤크 마우스'라 하여 전투기 앞에 상어의 얼굴과 이빨을 그려넣고 비행한 적이 있는데, 그 '악랄한' 전투 위용은 오히려 이 '플라잉 타이거' 용병들의 전투기를 통해 더 많이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의 '항공전투'란 그저 좀더 구경이 큰 기관총과 폭탄을 투하할 수 있는 '비행기'였을 뿐이지, 레이더가 등장하고 전자장비가 도입된 후의 '항공용병'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다.

보통 '사실성 있는 작품'이 각광을 받게된다는 일반적인 관념이 있을 때, 직관적으로 에어리어 88은 전혀 그런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니메이션이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종군기자를 통해 주인공 '카자마 신'이 비춰지는 모습에선 '전쟁'이란 틈 속에서의 '사랑에 대한 향수'와 '고독'. 전장에서 느낄 수 있는 '전투 용병'의 도구화를 처절하게 보여준다. '돈'이 자유를 구속하고, '돈'이 다른 자유를 빼앗고, '돈'이 사랑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는 그리 현실과 동떨어진 설정이 아니라는 감각을 느끼게되면서, 지독하게 현실과 괴리된 이야기가 결국 '삶속의 벗어날 수 없는 구도'로 나타나지는 모습은 의미의 확장을 거치면서 '소외된 현대인의 삶' 조차도 투영되어버린다.

삶이 전쟁터고, 살기위해 '벌어야'하고, 결국 복잡한 도시 속은 그저 흔하디 흔한 하나의 개체로 살아가는 고독감과 주인공의 비장미 넘치는 치열한 삶속의 구도가 맞물리면서 현대인의 무의식에 숨어있는 자각을 이끌어내지 않은채 통과시켜버리는 애니메이션의 힘은 삶의 괴리감을 너무나 아프게 드러낸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긴장의 삶속에서 그토록 바라던 자유와 편안함을 '파리'에서 누리던 '신'이 결국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판단을 세우고 긴장의 삶으로 돌아서는. 삶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의 모습은, 그토록 뛰어난 전투감각과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라하더라도 결국 인간의 하나임을 잊지 않게 해주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이 흔히하는 이야기. '내가 있을 곳은 여기인 것 같다'라는.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삶을 마주치게 되었을 때, 그토록 바라던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불편함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결국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보수적'인 인간의 성향도, 새로운 상황에 대한 부적응도 아닌. '고독'속에 삶의 본질을 깨달은 자의 결국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선택일 뿐인 것이다.

명작은 별 다섯개를 받아도 무방하다.

Posted by 함장

2005/08/26 19:31 2005/08/26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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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이라는 스포츠는 꽤나 진지하다. 벗어날 수 없는 사각의 링과, 인생에는 늘 삶의 짧은 기간이 정해져 있듯이 정해진 한 라운드 3분의 시간. 그 속에서 상대와 스스로에게 투쟁하는 역사를 일구어내는 스포츠는 드물다. 마치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의욕을 모두 뛰어넘어 결국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로서의 경쟁적 인간구도의 축소판이랄까?

꽤나 많은 영화감독들이 '복싱'영화를 만들어 내고 싶어하듯이, 그리고 꽤나 많은 영화에 '복싱 장면'이 삽입되듯이. 그 인생의 축소판과도 같은 삶의 사각지대, 그 속에서의 땀과 헐떡임은 삶에 대한 잊어버린 편린을 일깨우는 성찰의 구도를 가지고 있다.

더 파이팅은 아직까지도 연재되는 한국에서도 꽤나 인기를 끌고 있는 만화다. 그 원작만화를 중심으로 TV시리즈용으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은 말그대로 만화를 '생동감'있게 표출해내고 있다.

하지메노 잇뽀, 하지메라 함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본어 '하지메마시떼'에서 알 수 있듯, '시작의, 처음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잇뽀 -> 일보,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한 걸음. 즉 제목인 '첫 걸음'이란 뉘앙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애니메이션은 주인공의 '성실성'을 들먹이고 있다.

우리네가 어릴 때 부터 질리도록 듣는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 속담을 거창하게 세 글자로 줄인, 이 복싱영화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바로 그 성실성에 있는 것이다.

무하마드 알리의 경우 자신의 펀치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늘 장작을 패댔다, 장작을 팰 경우 어께 뒤의 근육이 발달하여 내지르는 펀치의 힘이 가공해 지기 때문인데, 그는 자신이 정상에 오른 뒤에도 그런 꾸준한 노력을 했고, 그로인해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무서운 집념의 사나이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은 한 두번 들어봤음직한 복서들이 해낸 그 인고의 시간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삶의 거장들이 거쳐야 하는 알리워지지 않은 학습의 시간들임에 분명하다. 그런면에서 주인공인 '잇뽀'는 너무나 빠르게 정상에 도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싱의 정상은 타 스포츠의 그것과 사뭇다르다. 챔피언의 특권이자 의무인 '방어전'이 있기 때문이다. 정상을 이루고도, 그 정상을 지키기 위해 더욱 땀내고 노력해야 하는. 언젠간 나이와 체력에 젊은이들의 혈기에 눌려 쇠퇴해 갈지도 모를 한 줌의 정상. 언젠가 내려서야 할 때, 그 유명한 허리케인 조의 명언처럼 '하얗게 태워버린' 젊은 날을 반추할 수 있는 행복이 존재할 미래를 만들어내왔다는 것을 자부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복싱, 늘 들어왔던 7전8기.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늘 상승곡선과 하향곡선을 교차해가며 인생을 맞추어가듯이, 복서는 링 속에서 쓰러지고 일어나고, 다시 가드를 올리며 투쟁의 상대를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그 투쟁의 몇 분을 위해 링 밖에서 흘리는 땀과 노력의 고통은 우리가 사회에서 학습하고, 경험을 만들어가며, 삶의 철학들을 세워나가고, 결국 존재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존재의미를 깨닫기 위한 성찰로 접어들듯이, 자신의 주먹 하나에 존재가치를 걸어 온몸을 내던진다.

스포츠 만화, 그 속에서 성장해나가는 주인공의 모습도 즐거운 일이지만, 결국 스포츠나, 그 외의 것이나, 우리네 삶이나 한 틀 속에서 경쟁해나가는 시스템의 구성원으로서의 자아를 발견하게 됨과 동시에 우리는 즐거움을 넘어서 '복서가 아닌 복서'로서의 삶의 태도에 대한 동질감을 깨달아가게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명대사로 꼽히는 이 한마디는 우리네 삶의 태도를 다시금 성찰하게 하고, 그를 증명하듯 이루어나가는 잇뽀의 태도는 그 케릭터가 '꽃미남'이 아니고, 여성 앞에서의 수줍음도 극에 달하는 순진한 청년을 넘어서서, '삶의 순수성'을 잃지 않으려는, 인간의 자아발견을 위한 노력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를 천명하고 있다.

'노력한다고 모두 성공할 수 없겠지... 하지만...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노력했다는걸 기억해둬..... '

너무 진지했던가? 그러나 절대로. 진지한 만화는 아니라는 증명 컷.

Posted by 함장

2005/08/25 21:19 2005/08/25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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