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수 감독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큰 기대는 당연히 없을 수 밖에 없었다. 어설픈 페미니즘을 나불거릴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두려움도 있었고, 서정 특유의 색기가 줄줄 흐르는 묘한 매력의 구렁텅이에 흠뻑 빠져들거라는 추측도 있었으며, 서른 둘의 이혼 여성과 열 아홉의 남자아이라는 요즘엔 '흔해져 버린' 커플의 이야기가 솔깃하지 만은 않다는 것이 적극적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되기에 충분했는지도 모른다.

사랑에서 '섹스'를 뺀다면 과연 사랑인가? 라는 의문을 넘어선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내겐 그저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이 그 옛날 '거짓말'이라는 영화에서 보여주던 '탐닉'의 수준을 짓밟고 넘어설 수 있는 '상업적 흐름'을 보여줄 수 있는가가 관건이었고, 결국은 그에 부응하는 낮설지 않은 이야기를 펼쳐줬음은 인정할 수 있다.

예컨데 포장 자체는 왠지 사회 통념적으로 있어서는 안될, '열 아홉과 서른 둘의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 속살을 까보면 그저 그런 사랑이야기로 밖에 보일 수 없는 구도를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자신들의 '상황'으로 상처입고, 힘들어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서정이 받은 '사회봉사 100시간'을 견뎌내는 장면들은 그의 행동에 대한 속죄도, 억울함도 아닌, 그저 단순히 그 '순간'이 어처구니 없음에 대한 '분노 아닌 분노'일 뿐이다.

그러면 우리의 탕아, 심지호는 어떤가? 도무지 열아홉이라 볼 수 없는 저 놀라운 통빡 굴리기는 마치 이 영화가 박철수 감독의 영화가 아니라 김기덕의 영화인가 착각하게 만들 정도의 어처구니 없는 캐릭터가 아니던가? 물론 나도 애늙은이로 불리던 사람이었지만, 애늙은이와 30대 초반 여성과의 사랑은 '나이'를 넘어선 '나이살'을 통한 연애질이 아니던가?


초반에 보여준 신문기자들의 접근과, 그 후로 스토커 처럼 이어지는 신문기자의 취재활동도 그리 '부담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것은 감독이 의도한 '3者'의 시선 구도라기 보다 애초에 그런 '나이 제약'은 사회의 가시적 허울일 뿐, 명명백백하게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느껴지게 한다.

그렇다. 오히려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결국 그들의 서로에 대한 소통의 의지였다. 며칠 밤낮을 먹고 자고 섹스만 함으로써 그동안 떨어져 있던 나날들에 대한 복수를 해대고, 그것도 모자라 도대체 아버지 카드를 사용하는지, 노동은 제외된채, 아무 생각없이 그저 먹고 즐기고 섹스하고 잠을 잘 뿐이다.

그런 그들이 결국 도달하는 것은 사랑이던가? 그렇다. 사랑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애틋한 사랑도 사랑이고, 격정적인 사랑도 사랑이다. 그 누구나 일생의 몇일간을 처음 본 여자와 격하게 섹스하고, 그 날들을 잊지못해 평생 반추하며 살아가는 경험을 가질 수 있지 않던가?

심지호가 결국, 성인이 되어 '생계'를 걱정하는 아주 미약한 한마디의 모습속에서야 겨우 그들이 부닥친 삶의 환경이 얼마나 머나먼 거리에서 그들을 향해 달음박질 쳐오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의 사랑이 '철부지'들의 연애질로 보일뻔한 이 장면 또한 결코 그들의 격정적인 사랑에 해가 될리가 없다.

결국 그들이 바라는 것은 같이 있고 싶음, 같이 사랑나누고, 섹스를 하고, 같이 요리하고 밥을 먹기 위함이 아니던가?

사실 영화내내 나의 주의를 끈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오윤홍씨의 매력이 상큼발랄 발산되는 영화속 캐릭터는 나를 서정의 색기 따위는 차치해버리고 홀랑 빠져들게 만들만큼 강렬하기도 했다.

서정의 친구로서, 이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상상'을 채워가며 나름의 즐거움을 만들어내고, 그들의 행복을 옆에서 관찰해나가는 모습.

극중 화자에 가까운 이 모습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우리사회의 통념을 깨기 위한 시도들이 결국 각 연결요소인물들의 잔치장이 되어버렸을 땐, 그 초점이 흔들려 아쉬운 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위치는 보는 이가 가져야할 태도를 견지하기 쉽게 해주었다. 사회적 제도인 '법'의 테두리를 무시하는 그의 공방에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넘어선 인간 본연의 자유도 주어지고, 그 자유의 틀속에 심지호와 섹스하는 상상을 펼쳐보이며 스스로의 생각의 나래에 대한 자유도 부여한다.

그리고 법적으로 미성년인 심지호와 관계를 가지는 서정도 그 공방에선 용서를 받은거나 진배없지 않던가?

사실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과, 안위, 그 외의 여러 잡다한 요소들 때문에 '노동'을 하고 그로인해 벌어먹고 사는 모습을 견지한다고 인지하지만 포장마차 아주머니의 한마디는 너무나 노골적이고도 직설적인 표현으로 충고 한마디를 건넨다. 결국 먹고 살려 하는 짓이 '살기 위함'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함'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진실.

궁극적인 목적이 살기 위함이던가? 사랑하기 위함이던가? 성공하기 위함이던가?

식욕이든 성욕이든. '욕구'가 생긴 후 부터 인간이 죽을 때까지 영위하는 삶. 그 속에 든 '지속의 욕구'가 충족하게 채워질 때까지, 밥먹고 섹스만 하는 것이 '나쁜 짓'으로 오해받기엔, 우리가 실제 행해가고 있는 삶 속에서 그것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들인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나저나 오윤홍씨에게 너무나 빠져버렸다. 공방에서 구워내는 모습과 그 '섹시'한 모습이 겹쳐지면서. 간만에 '극'을 보면서 여배우에게 빠져버린다.

Posted by 함장

2005/09/08 17:04 2005/09/08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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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목적' 읽기

이 글엔 영화 '연애의 목적'이야기가 주를 이루니 아니 보신분은 스리슬쩍 넘어가시는 것이 DVD 대여료를 아깝지 아니하게 여길 수 있는 길입니다.

꽤 많은 분이 '연애의 목적'에 '반감'을 가지시는 것 같아서 제가 즐긴 시선들을 적어볼까 합니다.

그 누구나, 남자든 여자든 초반에 박해일의 행동을 보면서 반길 사람은 없을 겁니다. 박해일과 친한 조선생 역할의 '이대연'씨가 아마 남성의 시각에서 보는 3자의 입장을 잘 비춰주고 있다고 봐야죠.

이건 박해일이 싱글이든 더블이든의 문제가 아니라 분명 '성추행'을 넘어서 '성폭력'의 문제거든요.

강혜정의 태도 또한 '교생'이라는 사회적 지위로 눌리는 것과 묘한 감정의 선상에서 노니는 듯 보여도, 분명히 '성적 접근'에 대한 거부감은 명료하게 보였죠.



그런데 여기서 오는 괴리감 하나. 분명 성폭력상담쎈터나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구호. 여성의 'No'는 정말 'No'라는 것. 이 구호와 사실여부에 관해서 100% 공감합니다. 그러나 결혼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경험담 속에서 늘상 숨어있는 스토리에서 그 'No'가 명확하게 'No'인 경우가 100%가 아니된다는 것이죠.

오해가 쉬운 얘기이기도 한데,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명백하게 '성추행'으로 보이는 것이 그 당사자들의 '접근'과 '거부' 사이에선 그들 나름의 다른 시각이 생길 수 있다는 점.

그 점을 관객의 입장에서 제 3의 시각으로 즐기기엔 분명하게 불편한 장면들이고, 행위였다는 점을 잊을 수가 없죠.



그러나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명확하게 나뉩니다. 50만원의 얘기가 나온 직후, 그들이 여관방을 합방한 후로 부터는 상당히 재미있는 양상이 벌어지게 되죠. 사실 그 후로는 박해일이 초반에 보였던 그 노골적이고 뻔뻔스러우며 추잡한 짓거리를 벌이지 않습니다.

강혜정이 명확하게 자신의 '집'에는 다른 '남자'가 올 수 없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박해일은 열쇠를 몰래 뺏아서 집으로 뛰쳐갑니다. 문제는 여기에서의 시선이 전반부로 인해서 갈라집니다.

이게 사랑에 빠진 얼치기의 호기심 해소인지, 그저 집에 들어가 또 섹스를 하자고 보챌 남자의 쓰레기 같은 근성인지. 그 해석의 차이가 갈리게 되죠.

그런데 하나 논리적 문제를 짚자면. 남자가 '섹스'에만 집착하는 동물로 해석을 할 수 있는 전반부를 보자면 '관계'를 가졌기에, '죨라 맛있다'는 표현을 써가며 '맛'을 본 박해일이 그 '맛'에 중독되어 계속 찝적대는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알아가기' 위해서 찝쩍대는지 명확하게 표현된 점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특유의 보여주기는 후반부에 노골적인 섹스신을 보여주지 않음으로 인해 시선의 변화를 꾀합니다.

분명 많은 이의 분노를 샀을지도 모를 '열쇠뺏기' 신공으로 강혜정의 집에 쳐들어간 장면이 오히려 강혜정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녀를 이해하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가 도래하는 거죠.

표현하는 사람자체가 혐오스러운 '걸레'라는 표현. 그리고 그 표현이 가져오게되는 영향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해일은 그녀의 '아픔'을 이해하는 얼치기 마초정신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얼치기'로 인해서, 세련되지 못한 토닥임은 이미 강혜정의 숨기고픈 비밀을 '훔쳐봤다'는 사실과 결부되어 강혜정의 분노를 사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악몽을 다시금 들춰낸 박해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팔베게'가 필요하게 된 웃긴 상황이 오는거죠.

자신의 아픔을 아는 것을 넘어서 이해하고 다독여주려 한 남자니까.



사실 여기서 부터 큰 변환점이 되어버립니다. 스무살 때 만나 6년이나 사귀어온 여자가 있는 녀석이 '진짜 사랑'이 뭔지 깨달아버린 거죠. 그저 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성에 대한 맹목적 굶주림으로 덤벼들고 진지한 관계의 고찰없이 맺어진 끊으로 결혼까지 준비하던 그 녀석에게 사랑하는 사람, 아픔을 감싸주는 사람, 이해하고 다독여주는 사람. 여러가지의 존재감을 깨닫게 하고, 심지어 그 안에서 '그'를 이용하는 사람을 만나면서 그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림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어느새 박해일은 '남자'가 되어버립니다.

이 변화가 얼마나 큰지는 강혜정을 끝까지 보호하려하고, 강혜정의 자기보호의 발언에도 배신감을 넘어서 '확인'을 가지려 하는 태도는 분명 기존의 격분적인 박해일의 태도와 상반됩니다.

어느새 박해일이 커버린 거죠.

그 뒤로 맨정신에서 조차 강혜정에게 '과거'의 얘기를 들춰내지 않는 이유는 그겁니다.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돌아보고, 자신의 반성을 거쳤을 그 남자.

물론 술에 취해서, 침대위에서 나누었을 사랑의 밀어들에 대해, 자신이 가졌던 상대에 대한 신뢰가 마치 성폭력으로, 힘으로 눌러버려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들었던 여성처럼 뒤집어지는 현상을 분노로 느끼며 울분을 토로하지만.

그를 그렇게 '성장'시킨 것은 강혜정이란 여성캐릭이 되어버립니다.



꽤나 많은 남성이, 마치 성의 중독자처럼, 속물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주위에 넘쳐나는 성매매업소들이 죽지 않는 다는 것은 그런 혐오감을 충분히 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이 가지는 '힘'이 쓰레기 같은 남성과, 그로 인해 늘 굴종되는 여성의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나빠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연애의 목적'을 보면서 초반에 박해일에게 더러운 기분과 함께 분노의 주먹을 날리고 싶은 기분과도 동일하죠.

그러나 저도 그랬고, 많은 분들도 그랬을 과거. 깨닫고, 가르침 받고, 세상에 대한 시각이 바뀌어 가는 '성장'의 이야기를 놓칠 순 없죠.



강혜정이 과거의 아픔을 이겨내고 다시금 설 수 있게 만든 것도 결국 '박해일'의 이해와 사랑 때문이고, '박해일'을 개 난봉꾼에서 조금 나아진 아직도 철들려면 한참 먼 인간 정도로 개과천선 시켜놓은 것도 '강혜정'입니다. 물론 그 뒤로 강혜정이 얼마나 고생해가면서 저 인간을 바꾸어 놓을지는 모르지만 말이죠.



'연애'라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바꾸어 놓을 수 있는가'에 대한 완벽한 고찰이라 여겨지는 이 영화는 수작이라고 볼 수 밖에 없어요. 모든 남성이 다 역겹고 더러운 존재라 하더라도, 연애 좀 하면서 철이 좀 들어야지 그나마 그 단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은 비록 여성분들을 슬프게 할지 모르지만.



사람이 사람을 믿는 다는 것이, 믿고 같이 잘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리고 그 힘든 '연'의 인과관계속에서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고, 그 틀속에서 다독이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이 영화 각본 쓴 여자분에게 '경의'를 보냅니다 --)b

Posted by 함장

2005/09/03 15:28 2005/09/03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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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말이 많던 영화를 이제야 본 것은 그 평이 너무나 노골적인 비판의 수준이었던데다가 사소한 문제까지 겹침으로 인해 잊혀져갈 즈음, 밤을 지세우는 머릿속의 공백속에 아련하게 떠오르는 이야기 꺼리의 발견으로 집어들게 된 이유가 있어서 입니다.

보신 분들 중 다수가 '직장내 성폭력'에 대해서만 언급했던 터라 과연 어느 정도일까 궁금하기도 했었지요.

사실 초반내내 영화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지요. 홍상수 방식도 아닌, 보통 남자들이 흔한 속내음을 넘어서서 그런 '노골적인' 접근은 당연히 '모범인간'으로 살아가고픈 충동을 느끼는 제겐 너무나도 먼 당신이 아닌가 반문하며 눈살을 찌푸렸더랬지요.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사실 인간의 내면 속에 있는 인물의 묘사가 아니라 이미 영화속 그 버러지 같은 행동을 벌이는 박해일에게서 '저'를 발견해버린 겁니다.

네, 그 사람이나 나나 다를게 없던 것이었죠. 직장 내에서 상사 위치의 권력 따위가 아니라 '남성 주도의 데이트'라던가 뭐 그딴 사회의 통념 아닌 통념속에서 그가 했던 행동이 내게도 낯설지 않은 일로 다가온 겁니다.

참 강혜정의 캐릭터 같은 여성은 접근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만, 그 숨은 진정성이 폭발하기 시작하면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것은 사실이죠. 아마 모든 여성이 그런다면 그건 또 거짓말이 될지도 모르지만요.

테이프 녹음을 듣는 장면과 그 뒤로 이어지며 강혜정과의 실갱이 속에선 전율이 돌 정도의 모습입니다. 두 사람이 부딪히는 결계부분의 접촉이 '임계치'에 다다른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네, 결국 연애의 목적은 팔베게입니다. '삶의 공포'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편안한 밤. 그 품이 얼마나 편안한지.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제 모습을 발견한 박해일의 캐릭터는 '과거'를 알면서 극도로 확장됩니다. 과거란 늘 '진실'이어야 하며, 그 '진실'은 결국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도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랑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죠.

강혜정의 과거사 이야기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박해일의 동분서주는 분명 합리적입니다. 강혜정과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는 착각속에서 이루어진 영리한 행위니까요.

그러나 결국 피해자는 강혜정이 되어버리는, 여성이 되어버리는 이 우스꽝스러운 현실이 개탄되어질 때쯤. 어느새 보호받는 강혜정과 그에 대한 분노보다, '믿었던 사람'에 대한 허탈감 속에 '대화'를 요구하는 박해일을 보면서. 어느새 성장한 두 사람을 봅니다.

다시 상처입지 않을 방어기제를 착용한 여성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남성.



강혜정과 박해일의 마지막 술집 장면에선 내내 울어버렸습니다. 박해일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 깊숙히 맺혀있던 나의 죄의식이 강혜정의 달콤한 한마디 한마디에 눈 녹듯이 녹아내립니다.



타인에겐 그저 재밌게 볼 수 있을 영화이언정. 나는 가슴 아프도록 감사해하며. 저는 최고의 로맨스 영화를 통해 제 삶을 구원 받았습니다.

밝아오는 새벽녘에. 영화의 끝자락에 눈물을 펑펑 흘려대는 내 초라한 모습에 작은 위안과, 스스로에 대한 용서를 주며....

Posted by 함장

2005/08/31 15:46 2005/08/3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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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든, 영화든, 커플 사이에서 늘 뺨따귀를 후려 맞거나 혹은 쩔쩔메며 끌려가는 역할은 '구라'를 친 케릭터입니다.

사랑은 믿음으로 변해가는 것인데 도무지 이 '지극히도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이론'을 무시해가며 상황을 악화시키는 극 속의 케릭터들을 볼때마다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그 수많은 구라 속에서 우리네 사람들이 이어가는 '사랑 속의 진실, 이해'따위에 대한 철학적 관념들이 어떻게 사람의 뒤통수를 노리는가를 연구해 보는 것은 지옥에서 꿈틀대는 기분과 동일 선상에 놓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사람의 거짓말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 『사이드웨이』(Sideways)는 성격이 정 반대인 남성케릭터 둘의 '우정'과, 성격이 비슷한 '남녀'간의 사랑으로 인한 행복감을 보여주며, 서로 보완관계인 '친구'와,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해 줄 수 있는, 감싸줄 수 있는 '연인'의 설정을 보여줍니다.

동성인 친구들 사이에서의 '거짓말'은 쉽게 이해되고, 이성인 연인들 사이에서의 '거짓말'은 그들의 신뢰관계에 얼마나 큰 '충격'을 던져주는 지를 보여주며 사랑이 왜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인가를 생각해보게끔 합니다.



"잭"(토마스 헤이든 처치)이 "스테파니"(샌드라 오)를 만나면서 느낀 감정들은 한 순간의 '바람둥이 열정'으로 치부하기엔 진지했으며, 그 인기가 떨어지다 못해 이젠 마스크로 드라마에 비춰지지도 못한채로 '목소리'로만 CF에 겨우 출연해가는 낡은 배우로서의 길 위에서, 그가 찾은 이 열정적인 "스테파니"의 "잭"에 대한 신뢰는 "잭" 스스로도 "스테파니"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분명한 사랑의 힘을 선사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이혼한 전처를 잊지못하는 "마일즈"(폴 지아매티). 그의 소심한 성격은 "마야"(버지니아 매드센)의 '진실한' 이야기. 가슴속 깊은, 와인에 감정이입을 한 '사랑'의 열정을 나타낸 진솔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듣고서도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내비치지 못합니다.

A형인걸까요?

그의 논픽션에 가까운 자전적 소설의 원고를 "마야"에게 넘긴 것은 결국 '입으로' 자신의 속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엄청난 여성편력을 나타내듯 "잭"은 모든 와인을 맛있어 하고, 여성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보이는 "마일즈"는 와인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내리며 '와인취향=여성취향'이라는 묘한 풍경이 제시됩니다.



바람둥이의 섹스에 대한 열정이 과연 '사랑'에 가까울 수 있느냐에 대한 논란은 충분히 있을 수 있겠지만.

"잭"과 "마일즈"의 행동패턴은 분명 '여러종류의 사랑' 가운데 하나라 생각됩니다.

"잭"은 순간을 즐겼겠지만 그 즐기는 순간의 '본능에 솔직한 사랑'으로.

"마일즈"는 삶의 태도와 일관된 그 특유의 '진지함'으로 사랑에 서서히 접근해 나가는 모습으로.



그 많고 많은 오해속에서.

모든 절망속에서도.

"마야"가 "마일즈"의 소설에서 느낀 삻의 향수에 감동을 받고, 그 진솔한 이야기에 다시금 "마일즈"를 찾은 이유는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요?



사랑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혹자는 '연애전략'이라 하며 상황을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일들도 필요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대망'이란 드라마의 한 대사처럼.

'최고의 권모술수는 솔직함이다'라는 말은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위급한 상황을 '거짓'으로 슬기롭게 극복해나가기 보단.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 혹은 그렇게 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그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솔직하게 다가가야 하는 것이 진정한 '의지의 관계'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일즈"의 와인에 대한 솔직한 평가처럼.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솔직한' 느낌의 표현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는거죠.

Posted by 함장

2005/02/23 09:33 2005/02/23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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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여자

역시 장진 감독은 실망을 주지 않았다.

그의 유쾌함이야 말로, 사랑에 대한 감각이야 말로, 묘한 행복감을 준다.

'킬러들의 수다'에서 보여주었던 '상상을 그대로 보여주기' 과정들은 너무나 포복절도케 만들어버렸다.

정재영이란 배우는 '킬러들의 수다'에서 처음으로 '인지'한 배우이기도 하지만. 이나영의 연기는 솔직하게 본적이 없다. 엄밀히 얘기하면 관찰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 난 그 유명한 '네 멋대로 해라'도 보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나는 만화나 영화, 드라마를 무척 좋아하긴 하지만 만화는 본 작품에 손으로 꼽을 정도. 영화는 수도 없이 봤다하더라도,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본 작품도 손에 꼽을 정도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다 싶은 것에는 푹 빠져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는 여자 많나 봐요?'
'아뇨 그쪽이 처음이에요'

그 한마디에 뾰루퉁한 표정으로 부터 미소로 바뀌는 한이연(이나영).

그래, 짝사랑에겐 그 희망적인 한마디가 늘 행복으로 다가오지.

무얼 그렇게 많이 재고, 상대를 위한 답시고 그런 배려 아닌 배려를 늘 생각하는 걸까?

그냥 사랑한다고, 해주고 싶은 거 해주고, 못해준다고 안달해 하지말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면 될텐데.

부담스러운건 또 무얼까, 좋으면 사랑받고, 싫으면 그냥 거절하면 되는 것을, 그토록 상대를 배려한다는 미명하에 거절도 명확히 못하고, 그렇다고 확실히 의지를 굳히지도 못한채 그렇게 흘러가게 버려두는. 그건 배려가 아니라 욕심이지.

결국은 그런 욕심들로 가득찬 사랑속에 헤매이는 것은 너와 내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아닐까?

둘 사이의 하트처럼. 사랑은 서로 하는 거야. 처음의 한이연처럼, 그렇게 좋아하다가 왜 좋아하는지 잃어버렸지만. 동치성(정재영)의 좋아하던 음악을 기억하며 그 음악이 나오는 것에 조아라 하며 동치성에게 들려주려 하는.

그런게 사랑이야.

돈이고 뭐고 다 필요없지. 그 순간에 한이연은 음악을 들려주며 얼마나 흐뭇했을까.

동치성은 그런 한이연의 성실한 사랑에 정말 무지한 대응을 보인다. 결국 물었던 것 또 묻고, 한이연을 삐지게 만든다.

하지만 동치성은. 이후로도 한이연으로 인해 변해가지 않을까?

글쎄. 아니면 결국 변하지 못할까?

영화의 부제인 '오직 한 남자만 아는 여자'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 사람만 바라보는 것' 그것은 '바람피지 않는다'는 얘기뿐만이 아니다.

모든 사물과 사고, 행동에 관련된 것들은 '그 사람'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 '생업수단의 일'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그 사람에게만 집중하는 것.

그런 B형의 한이연의 모습.

어쩌면 나는 B형임에도 불구하고. 동치성 같은 인물이 아닐까?

나는 그런 '아는 남자'가 될 수 없는게 아닐까?

아집과 자기교만에 빠져 나를 아는 누구나 불행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나도 사람인데....

Posted by 함장

2004/07/30 11:13 2004/07/30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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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Women Want

어제 On Style 채널을 보다가 (오옷! 구의동 유선방송 발전 했다!! 온스타일을 연결하다뉘 ㅠㅠ)b...참고로 여성을 위한 채널을 표방한다 --;;;) What Women Want를 방영해주는 것을 보고. 다시금 감상에 빠져들었다.

마초의 극을 달리는 닉 마샬(멜 귑슨 아쮜)은 달시 맥과이어(내 사랑 헬렌 헌트 ㅠㅠ)를 만나면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번개 맞고, 포스터의 카피처럼. 모든 여성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게 되고. 마침내 여성의 말을 '듣는' 남자로 바뀌게 된다는 줄거리.

뭐, 다들 유쾌하게, 혹은 기분나쁘게 봤을지도 모르는 그런 영화.

내가 남자여서, 여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딸에게 18세의 남자들이 원하는 것은 섹스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면서도 결국 자신도 섹스할 대상만을 찾아다니는 철부지 아빠. 정말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하룻밤 섹스를 위해 흥청망청 돌아다니는 네온싸인 아래 쓰레기들을 향해 뽀Q를 날리고 싶다.

하지만 플래쉬맨을 만들어 냈던, 그리고 여러 사람 슈퍼맨 만들었던 그 번개는 우리의 마초에게 벌을 내리니. 그것이 바로. 여성 속마음 듣기. 이 기능이 얼마나 탁월한가. 프랑스 암캐의 속마음도 들린다 --)b

각설.

자잔한 이야기 거리는 각자 영화 보시고 알아서 감동하시고. 나의 뷰포인트를 찾아보자면.

1. 아버지와 딸의 관계설정.

달시의 조언(딸 아이가 댄스파티에 가는 것의 준비는 드레스 하나면 완빵이다 --)b)을 듣고, 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쇼핑을 한 후, 딸과의 대화 중, 트러블이 생긴 씬에서. 딸이 화내면서 뒤돌아 가자.

아주 묘한 관계의 여운이 여성의 속마음을 통해 보여진다.

딸과 같은 또래의 여성은 딸을 옹호하는 마음을, 어떤 부인은 부모의 입장을 옹호하는 마음을. 아무리 여성이라도. 흔히하는 얘기처럼 여자는 16세때 성장이 끝난다 하여도. 결국 어머니 입장에선. 한창 사춘기때의 소녀와 세대차이랄까? 아님 보호관계랄까? 그런 것이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그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달시가 10대 소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자녀를 두지 않아서가 아닐까? 더 연구해 볼만한 문제인듯 하다.

2. 닉과 달시의 택시 옆 대화.

닉과 달시가 첫 키스를 끝낸 후. 헤어짐을 아쉬워 하며. 달시가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에 탈까~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닉은 달시가 자신을 섹시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달시의 마음을 '듣지'않은 채, 달시의 마음을 '읽어'내어 얘기를 했다. 진정 이때 부터. 이 순간 부터 닉은 여성의 마음을 '듣지'않고 여성의 마음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눈 대화는 내게 또 다시 눈물을 안겨준다.(나 너무 우는거 아냐 --)a)

마초의 극을 달리던 닉. 불쌍한 닉. 그런 감정이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어엿한 15세의 딸까지 있는 그 나이에. 진정한 사랑, 정말 소통이 되는, 상대를 배려하고, 감정이 공유된다는 그 흥분. 가식없는 그 사랑의 회오리속에 빠져든 그 행복감.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결국에 바뀌어야 하는 것은, 16세때 이미 다 커버린 여성이 아니라, 여든까지 가도 클지 안클지 모르는 남자다.

사랑이 사회관계의 연속인가?

여성을 상품화 하고, 그저 자신들, 남자들만의 game theory로, 선의의 경쟁이란 구라로 점철된 상대 짓밟기로 오로지 승부!승부!만 외치고 직장내에서든, 어떤 울타리 내에서든, 팀웍을 가장한 정치력,파워게임을 벌이며 라이벌을 물리치려하는.

그런 사고방식.

닉은 번개로 얻게된 재능으로 오로지 이기려하고, 달시는 같은 팀으로 인정한 닉이 잘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정말 남자는 죄악이다 --)a

난 자기 및 남성혐오주의자인지도 --)a

더군다나 여기서 한방 더, '여자가 남자보다 의리가 훨씬 좋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과연 이 글을 읽는 남자들은 그렇게 의리를 앞세울 친구가 있는가? 그 의리가 남자의 전유물이라 생각하는 자들이 약간의 이익을 위해 남을 배신하고 자신의 높은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애쓰는가?

남자들이여. 제발. 사랑하는 이의 말에 귀 기울이자.

그것으로 일단은. 다행이다.

그것이 가능해 졌다면.

이제 들을 수 있다면.

대화를 하고 노력을 하자.

현재에 충실하자.....



라고 말은 하지만 나도 남잔데 뭐. 쩝. 남잔 다 늑대야 --)a

그나저나 헬렌 헌트랑 결혼하는 방법은 없는가 ㅠㅠ

Posted by 함장

2004/05/12 15:34 2004/05/12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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