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for '영화극장/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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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9/22 아아~ 하늘에 핀 한 송이의 꽃 - 밴드 오브 브라더스 by 함장 (13)
  2. 2005/09/10 무엇을 위한 희망인가? - 불멸의 이순신 by 함장 (3)
  3. 2005/09/05 순애보로의 귀환 - 101번째 프로포즈 by 함장 (10)
  4. 2005/09/04 현대판 셜록홈즈 시리즈 - CSI : Crime Scene Investigation by 함장 (7)
  5. 2005/09/02 소름끼칠 정도의 매끈한 설정 - 박수칠 때 떠나라 by 함장 (2)
  6. 2005/08/29 음모 이론의 결집체 - X-Files by 함장 (12)
  7. 2005/08/29 신데렐라 없는 이야기 - 아일랜드 by 함장 (2)
  8. 2005/08/29 일단 결과를 정해놓고 과정을 알아가기 - 속도 위반 결혼 by 함장 (7)
  9. 2005/08/26 스포츠와 Queen, 그리고 영국 - 기사 윌리엄 by 함장
  10. 2005/08/26 진정한 공포, 무서움이란 이런 것이다. - 우주전쟁 by 함장 (4)
  11. 2005/08/25 여성에게 자신감을, 남성에게 패배감을 - 내 이름은 김삼순 by 함장
  12. 2005/08/15 부자연스럽고 화려한 잔치, 여전한 불쾌감 - 친절한 금자씨 by 함장
  13. 2005/07/11 군대 조직의 특수성 - 『A few good men』 by 함장 (23)
  14. 2005/05/30 영화로 말하는 사회정의 - '야망의함정', '런어웨이' by 함장 (2)
  15. 2005/04/14 이해는 가족을 부른다 - 『주먹이 운다』 by 함장 (9)
  16. 2004/10/29 나에게 오라 - 장돌뱅이 하류인생 by 함장 (13)
  17. 2004/09/02 아일랜드 by 함장 (18)
  18. 2004/09/01 John Q by 함장 (18)
  19. 2004/08/30 The Rainmaker by 함장 (14)
  20. 2004/07/21 無間道, 無間道前傳, 終極無間 by 함장 (27)
  21. 2004/07/05 킬러들의 수다 by 함장 (16)
  22. 2004/04/29 말죽거리 잔혹사 by 함장 (28)

한국에선 참 대단한게 그냥 아무나 다 제대하면 '공수부대'라 구라를 쳐도 믿어준다. 그 악명높은 '공수부대'라는 것과 그 양대 산맥에 걸쳐진 '해병대', 요 두 가지만 볼작시면 참 재미난 현상을 보게 된다. 사실 흔히 얘기하는 '공수부대'를 가리키는 것은 '특전사'를 의미한다. 물론 그 특전사 중에서도 특수전 임무를 주로 하는 사람들은 '부사관'들이고, 사병들이 특수전 임무를 맞는 경우는 몇몇 다른 헬기 강하 부대라던가 수색대를 제외하곤 얼토당토 않는 얘기다. 그런면에서 또 '해병대'와 '특전사출신'을 비교하는 것도 꽤나 웃긴것이다. 사실 둘이 비교대상이 아니라, 육군에 특수전 임무를 띈 부대가 특전사라면 해군엔 그런 역할을 하는 부대는 해병대라기 보다 Seal팀이나 UDT등이 비교하기 편할텐데 도무지 왜 그다지도 '해병대'가 들어가는지는 도통 알 수가 없다. 물론 해병대도 특수수색대는 특수전을 이행하지만 그들은 국가의 '전략기동부대'일 뿐 특수전을 담당하는 팀도 아니다. 더군다나 특전사의 경우 장기적 특수전과 정규전을 모두 염두에 둔 부대이지만 해군의 Seal이나 UDT의 경우 단기 작전을 수행하는 '미션팀' 정도로 해석하면 쉽게 이해 될게다. 더군다나 어차피 특전사도 Seal팀에 찾아와서 수상침투를 비롯한 훈련을 수료받고, 해군이나 해병도 산악전 따위의 교육을 위해 파견교육을 받으니 그렇게 비교의 대상으로 두지말고 '그냥 우리 군'으로 보면 무리가 없을 텐데 말이다.

어쨋든. 난 휴가나온 군인들을 여기저기 보면서 말이다. 도대체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 공수교육단이 있길래 '개나 소나'다 날개달고 다니는 것을 보면 참 기가찬단 말이다.


공수훈련 3주의, 흔히하는 '지옥같은 경험'은 사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늘상 술 안주거리로 올라오는 이유를 난 도통 알 수 없다. 물론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는 자리라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게 '아무나' 받아 볼 수 있는 훈련은 아니잖는가?

뭐 어쨋든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보면서 초반 감정이 '많이' 상했던 이유는 도대체 저 녀석들은 돈이 얼마나 남아 돌길래 매번 비행기를 타면서 낙하를 해대냐는 것이다.

사실 공수훈련중에 가장 기분이 더러운 것은 바로 첫 낙하인 300미터 상공의 기구에서 이다. 시누크에선 그냥 뛰어내리면 그만이지만 도무지 시누크보다 400미터 낮다는 이유로 기구에 둥둥 떠서 그 난간에서 움찔움찔해대는 기분이란 참 더럽다. 더군다나 뛰어내린후 '1만 2만' 속으로 세는 사람은 참 비위좋은 사람임도 인정한다. 1만의 만자가 나오기도 전에 놀이공원 바이킹 최정상의 10배쯤 되는 장기이동을 느끼고도 그렇게 숫자 세는 사람은 진정한 강하왕일 수 밖에.

어쨋든 매번 비행기 타고 낙하연습하는, 그것두 2차세계대전때!. 그런 미국이 부러울 수 밖에 없었다. 나도 자동으로 낙하산 펼쳐지는 비행기에서 훈련받았으면 그 더러운 기분 따윈 가지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유유히 세상구경.....을 할 수는 없지만 낙하하며 바라보는 세상경관은 참 뛰어나다. 그 재미로 낙하를 하기도 하지만. 번지점프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그 즐거움은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을게다.

낙하산의 줄이 목덜미를 세게 치기 때문에 기왕이면 낙하전에 목의 깃을 올려세워 보호하면서 교관과 눈싸움하던 기억들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하는 1부의 커레히 공수 훈련 과정은 이 땅의 모든 예비역들에게 '얼차려'와 '소위 길들이기' 따위의 악습이 존재하는 군대의 모습에서 '정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풍경은 비록 저리 보여도. 낙하산을 펼치고 낙하되는 속도는 무려 초속 5~6미터에 달한다. 요즘은 재질을 바꿔서 2~3미터로 늦춰졌다고 하지만, 군대 물자가 최신식이 나왔다해서 금새 갈아엎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어쨋든. 스필버그와 톰행크스가 만들어낸 이 리얼한 2차 세계대전 속으로 들어가보면, 참담한 전쟁의 폐허와 얼어죽을 낭만을 느낄 수도 있을게다.

Posted by 함장

2005/09/22 13:10 2005/09/22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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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장장 100회가 넘는 상영분을 끝낸 '불멸의 이순신'이 종방했다. 드라마 사상 초유의 제작비도 들였겠거니와,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를 넘어서 '조선시대' 주말 대하드라마가 이토록 국민적 열성을 받은 일도 참 드물게다. 심지어 이젠 공중파 뿐만이 아니라 케이블, 위성 채널까지 수십여가지인데 그렇게 주말 저녁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니던가?


드라마 기획의도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순신을 제작한 이유는 '새로운 리더쉽'을 보여주기 위해서라 하고있다. 과연 '새로울' 것이 있는 가는 의문이라 하더라도,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리더쉽'은 충분히 연구대상이며 본받을 것이 많다는 점도 사실이니까 말이다.

최근에 '박노자'氏가 한국인의 '이순신 신드롬'이 박정희의 군사문화 잔재와 연관된 전체주의로 흘러가고 있다고 얘기가 나온 적이 있는데, 난 개인적으로 이 사람이 흔히 소개될 때,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을 잘 '아는' 사람으로 소개된다는 것이 조금 껄끄럽다. 물론 한국인들 스스로 보다 객관적인 관찰력이 뛰어날 수 밖에 없는 외부인인데다가, 그가 가진 보편적 상식에서 우리사회의 비뚤어진 모습을 관찰하다가 보면 그 개연성을 역사적 사실에서 비춰보는 것은 당연한 논리수순이기도 하나, 과연 그 정도 평가를 받을 날카로운 시각을 가졌냐하는데 대한 의문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어쨋든 드라마 기획의도가 가진 '국민 분열을 통합하기 위한...'이라는 부분엔 나도 동의할 수가 없다. 국론이 분열되는 것이 불안하여 통일해보기 위한 다른 시각을 비춰주는 것은 어찌보면 기존 정권의 3S(Sex, Sports, Screen)과 맥락이 같은 이야기로 밖에 떠벌여지지 않는다.

새로운 리더쉽을 보여주고 싶다는 얘기는 현재의 혹은 과거의 리더쉽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현재의 구도에 대한 절박한 심정이 결부되어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이의 염원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의 염원을 담은이와 과거의 향수를 찾는 자들에게 뿌려지는 정제되지 않은 '리더쉽'의 표출은 분열된 국민의 논의를 통일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다른 관심을 부추기게 될 뿐이니까 말이다.

다시 박노자氏 얘기로 돌아가보자면, 그는 명확하게 잘못 짚어내고 있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박정희가 정치적이든 어쨋든 끌어낸 것이 맞긴하나, 현재의 드라마가 비춰지는 인물과 '박정희'가 꺼내놓은 인물의 차이는 현격하다.

군사적 인물의 영웅화가 전체주의를 이끌어낸다는 의견에는 동조할 수 있으나 과연 '형식적 군사'의 주체인 드라마 속의 이순신이 과연 국민들에게 '군인'으로 다가갔을지, 하나의 '전투적 독립체'로 다가갔을지에 대한 판단을 보건데 과연 박노자氏는 드라마를 관찰해 온것일까?

대한민국 남성 50% 이상이 군복무의 경험이 있으며, 그런 그들에게 선조의 명을 거역하는 이순신의 모습이 '군인'의 모습으로 비춰질까? 이미 대한민국의 사람들에게 그 모습들은 '군인'의 모습이 아닌 그저 직장이나, 사회 곳곳의 모습에서 '남들이 Yes를 말할 때 No를 외칠 수 있는 용기'로 보여지는 그 모습이 과연 '군사 전체주의'와 맞물릴거라 생각한다면 그의 '한국을 아는 모습'은 반쪽짜리일 뿐이다.

어쨋든 우리가 이순신을 통해 얻는 것은 위대한 역사의 이야기도, 한 인물의 위대한 인간상도 아니다. 역사는 '존재'했었고, 그 인물도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못한다. 애써 후일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더라도 존재했던 사실에 대한 영향력을 절대시간이 지난 오늘에서 다른 결과를 도출해낼 순 없으니까 말이다.


불멸의 존재라는 이유는 그런 것이다. 존재했던 사람을 지워낼 순 없다. 우리가 다만 그에게 '기대는 이유'는 일본을 막아냈기 때문도 아니고, 그 뛰어난 전략체계와 전술, 병참의 보급, 정말 군사전략가로써 '한줌의' 실수 조차 용납치 않던 모습또한 더욱 아니다.

우리네 삶이 지속 될 수록, 가진 것이 한계가 있고, 그 가진 것을 통해서 이루어야 하는 성과는 커야한다는 것. 그렇게 투쟁해나가는 삶속에서 스스로의 '이성'을 얼마나 믿고, 그 '이성'을 통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걸고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띄워 살아나가는 우리들의 치열한 삶.

그 삶에서 얻는 희망을 보기위해, '이순신'의 한마디를 떠올릴 뿐이다.

'신에게는 아직도 열 두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것이 늘 모자라다고 불평해오며, 늘 더 가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한번도 내가 가진것에 감사하고, 그것을 걸고 최선의 성과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런 우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묵묵히 적어 들려줄 수 있었던 한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에서 '희망'을 찾는 것은, 군사적 우월감도, 역사적 우월감도 아닌. 현실에서도 적용되는 한 조상의 지혜를 동감하고 이 난세를 이끌어나갈 현명한 계략을 떠올려 볼 시간을 건네줌이다.

박노자氏. 당신이 그토록 잘 아는 '한국인'은 이순신을 보면서 맨 주먹에서 지금의 한국을 만들어낸 '다이내믹'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자주, 쉽게 간과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Posted by 함장

2005/09/10 09:09 2005/09/1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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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겨울연가던가? 그런 '순애보'가 아줌마 팬들의 열혈 환성을 산 이유는 크게 멀지 않다. 일본이라고 그런 순애보 드라마가 없었던가? 이미 일본은 그런 '트렌드' 드라마가 사라지고, 온갖 '말초 자극적' 드라마들이 판을 치면서 나타나는 현상을 보인지 오래다. 그렇기에 '유행의 복고'를 통한 아줌마부대의 열화와 같은 성원은 '순애보로의 귀환'이라는 어이없으면서도 웃긴 한류 열풍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사실 일본의 극작가 거장인 '노지마 신지'의 '101번째 프로포즈'는 엄청난 대작이다. 이미 15년 전, 1991년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여파는 실로 상당한데. 드라마 주제곡이었던 Say yes를 통해 'Chage & Aska'를 국민가수 반열에 올려뒀고, 1993년에는 김희애와 문성근을 필두로 우리나라 영화로도 리메이크 된데다가, 2004년에는 그 '순애보'로 극동아시아의 '공동연대감'을 형성하며 '최지우'가 주연하는 '한중일' 합작 '101번째 프로포즈' 리메이크작을 선보일 정도로 그 인기는 아직까지도 전해져 오니까 말이다.

문화 차이를 넘어서서 이 '순애보'라는 것이 주는 동양적 감성은 아직도 사람들을 눈물을 자극할 정도의 뛰어난 저력을 가지고 있다. 40대의 호시노 타츠로 아저씨가 저 아리따운 30대 초반의 야부키 카오루를 사랑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가 이토록 많은이의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이유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이 드라마 어디에도 '신데렐라'는 없으며, 그저 조금 추한 얼굴의 이미 자기 자신만의 삶에 대한 고집이 가득히 머리구조를 지배하는 남성과, 아리따움의 도를 넘어서 궁극의 눈빛 연속 스킬 콤보로 남성을 제압한 후 길게 늘어뜨리는 생머리 사이로 45도 갸웃하게 숙여진 그녀의 얼굴을 보면 이건 말짱 넘어갈 수 밖에 없는 시츄에이션이 아니던가?


이 바보 형제는 또 어떠하던가? 사랑에 흔들리며 침울해 하는 두 형제가 선술집의 끄트머리에 나뉘어 앉아 자신들의 아버지를 회상하며 불러대는 노랫소리. 그 속에 담긴 사내들의 우울함. 마력처럼 이끌어져 버리는 두 사람의 연기는 '맛깔' 이상의 뛰어난 캐릭터의 몰입감을 보여준다. 그 긴 나이터울에도 불구하고 마치 연년생처럼 굴어대는 두 형제의 모습을 통해 사랑을 앓고 있는 '남자'들의 진솔한 이야기도 묻어나는 모습은 다른 감동과 다른 차원의 느낌을 건넨다.

드라마 어디에도 성공은 없다. 주인공은 늘 실패하고, 실패하고, 실패하며. 또 그런 실패들이 '짜증'스럽지 않게 포장된 솜씨는 가히 '노지마 신지'다운 깔끔함을 보이기도 한다. 사랑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리저리 방황하는 야부키 카오루의 역할을 멋드러지게 부담스러운 45도 각도의 고개짓으로 소화해낸 아사노 아츠코 역시 그 섬세하디 섬세한 눈빛으로 '떨림'을 표현해내며 꽤 많은 남성의 심금을 울려대지 않았던가?


15년전, 이 드라마에 열광했던 일본인들이 이제 아줌마가 되어 '겨울연가'와 '욘사마'와 '최지우'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이든, 사회 일이든.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이런 풍토에서. 그렇게 확고한 '믿음'을 주는 순애보와 같은 사랑. 그것이 주는 희열감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냔 말이다.

1990년대 초의 그 어설픈 '헤어스타일'과 거부감 이는 '색조'화장. 바지에다가 쑤셔넣은 남자들의 셔츠들이 비록 눈에 거슬릴지라도. 마치 중학교때 여선생님이 즐겨입던 정장스타일을 입은 여주인공을 볼지라도.

이들이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지금에와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이 시대에 존재할 수 없는 아픈 곳을 찔러주는 그런 이야기.

그 속에서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직 순수한 걸까? 아니면 이미 그런 것의 존재감따위는 잊고 사는 것일까?

Posted by 함장

2005/09/05 12:44 2005/09/05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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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만 봐도 무척이나 촌스러운 질감이 느껴지는 이 CSI 도 벌써 시리즈가 시작된지 5년이 넘었다. 국내에 X-File 시리즈나 ER 시리즈가 인기를 받았던 만큼, CSI도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고, 그로 인해 국내 케이블 방송에는 이와 비슷한 아류작들이 대거로 계약되어 방영될 만큼, '범죄과학수사' 혹은 '의학수사' 쪽의 시리즈 물이 넘쳐나고 있다. '메디컬 인베스티게이션' 이라던가 'NAVY CSI', '라스베가스' 등등 말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범죄물은 늘 인기를 끌어오던 품목이었다. 그러나 제작자의 이름이 1년에 한번은 우리 눈을 즐겁게 해주는 '제리 브룩하이머'여서일까?

사실 생명공학개론에서도 잠시 소개되는 '법의학 관련' 쪽에서 이용되는 과학이란 우리의 상식 속에서도 'DNA'라던가 '지문' 등의 이야기로 쉽게 와닿아있다. 심지어 총기류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각 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다른 형태로 새겨지는 흔히 '총지문'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는 것 쯤은 아니까 말이다.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솜씨는 극중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실마리들과 캐릭터 상호간의 연결고리들이 얼마나 흥미롭게 이어지는가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로 다가온다. 미국 본토에서도 그 많은 인기를 얻고 Spin-off 시리즈로 두 가지나 더 만들어지는 이런 '기록적인' 드라마가 나오는 것이 흔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CSI는 라스베가스 Crime lab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이 후에 인기를 끌며 만들어진 Spin-off 시리즈는 각각 '마이애미', '뉴욕'등으로 하나의 도시에 있는 CSI lab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재미있는 것은 미국은 각 주(州)마다 법이 다르기 때문에, 각 주의 CSI도 그 세부 권한이라던가, 형태가 다르다. 물론 그 상위 법인 '연방법'을 준수하는 내에서이지만 말이다.

어쨋든, 라스베가스에선 이들이 늘 주장하듯이, Officer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시에 의해 고용된 사람들일 뿐이고, 경찰 서장을 상관으로 두고는 있으나, 경찰은 아닌 신분이다. 마치 런던 경시청에서 늘 셜록홈즈에게 찾아와 사건의 해결을 부탁하듯이. 사건이 발생하면 이 셜록홈즈들이 돋보기를 들고오 사건현장을 뒤지고 증거들과 추리들을 제공하며, 경찰은 말그대로 '사법권'을 행사하는 도구적인 존재로 나온다.

우리나라 경찰도 물론 수사권이 없긴 하지만, 흔히 인식되는 탐문조사부터 시작하여 상당히 광범위한 영역에 CSI 요원들이 개입되고 있는 점을 볼때, 묘한 매력이 있는 시스템으로도 관찰된다.

더군다나, 범죄가 일어나고 그 범죄현장의 통솔부터 시작하여 거의 전권을 가지게 되는 이 '비경찰' 단체란 미국이란 나라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쨋든, 라스베가스의 CSI 중, '밤 근무조'의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에 영화의 영상은 비교적 '어두운' 면으로 구성되어있다. 물론 그 '어두운'이라는 것은 슬픈 다크블루가 아닌, 그저 밤이 주는 범죄의 공포와 연관된 어두움이랄까?

반장인 길 그리섬 부터 시작하여, 각 캐릭터가 가진 고유색이 너무나도 특출나게 잘 발휘되는 바람에 드라마를 보는 재미도 더욱 쏠쏠하다. 집에선 디스커버리 채널을 즐겨보고, 곤충학자이자 연애감정에 참 어색해하는 길 그리섬이지만, 한 대사에서 그가 가진 범죄에 대한 사고를 단편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내가 참을 수 없어하는 세 가지 것들이 있어, 부인을 때리는 남편, 어린이 성폭행, 그리고 아이들을 죽게 만드는 인간쓰레기'

물론 그리섬의 대사처럼, 이 드라마가 이토록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보만을 보이면 좋겠지만, 현실과의 괴리감 짙은 이상을 비웃듯, 그렇게 보기좋게 해결되지많은 않는다. 물론 그런 반전과, 현실성 속에서 더욱 보는 재미를 느끼게 되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 외에도, 이혼가정 문제, 자녀 양육문제, 인종차별 문제, 도박, 권력욕등, 군중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여러 단면을 보는 재미또한 뛰어나다.

현재 시즌 5를 완료하고, 6편이 시작하고 있다. 이 정도의 '대작 시리즈 물' 이라면 강추한방 날려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Posted by 함장

2005/09/04 12:06 2005/09/0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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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포스터만 봤을 땐, 그저 차승원과 신하균의 두뇌게임 정도로 생각을 했었다. 원작인 장진 감독이 연출한 연극을 본적이 없어서 자세한 내막을 몰랐기도 하지만 말이다.

나름대로의 특이한 설정, 실소를 머금게 하는 '좋은 나라 운동 본부'의 방송 전파는 현실의 좋은 나라 운동 본부 방송과 맞물려, 과연 그저 관심의 '양의 탈을 쓴 늑대의 만행'이 폭로 되면서 그런 '악질적' 인간과 자신을 비교하여 도덕적 우위를 보고 있는지, '올바른 공동체 생활'을 깨닫기 위해 설정된 프로그램인지. 그 가늠쇠의 끝망울에 걸린 것을 비웃는 듯. 미디어의 음지를 맹공하기도 한다.


사실 궁금했던 것은 과연 범인이 누굴까였다. 범죄스릴러나, 미스테리물들이 늘 그러하듯, 그 유명한 '유쥬얼 서스펙트'도 결국 안쪽으로 굽어있던 발끝이 정상걸음으로 바뀜으로 인해 사람들의 뒤통수를 날리는 것이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용의자도 잡혔고, 용의선상에 있는 사람들의 신원도 확보되어있고, 자백이냐 새로운 범인이냐. 그런 구도속에서의 스릴감을 맛볼지 알았다. 물론 맛봤지만. 이 영화는 '누가 죽였는가'를 보여주기 보다 '왜 죽었는가'를 보게 된다.

인기리에 공중파와, 케이블에서 방영중인 CSI의 스토리를 보게되면, 사실 범죄 수사에서 과학수사가 도입된 이유는 '범인'을 찾아내기 위함이지만, CSI 요원들의 '수사 행각'은 범인이 누구였다를 알아맞추기 보다 '왜? 어떻게 하다가?' 죽었는지를 찾아감으로써, 용의선상에 있는 사람들을 추려내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건의 물증들, 예컨데 총이라거나, 칼, 그 밖의 것에서 추출된 지문, DNA 따위로 '범인'을 골라내는, 어찌보면 식상한 단계를 넘어서서 죽어있는 현장을 통해, 당시의 정황부터 시작하여 결국 개인의 인간관계, 그 속에 숨은 의도등을 토해내게 만드는 증거들을 확보함으로써 '왜 죽였는가?' 혹은 '왜 죽었는가?'를 따져내는 그 논리정연함 속엔 예상치 않은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눈에 띈다.


장진 감독의 영화는 '킬러들의 수다'에서도 그랬고, '아는 여자'에도 그러했듯이, '사랑'이란 관념을 넘어선 남성 중심의 일관화된 행태를 보여주게 된다. '킬수'에선 좋아하는 여성이 시킨일이라는 이유로 호랑이 굴로 들어가고, '아는 여자'를 통해선 야구공도 관중석으로 던져버리는 행태가 이젠 '살인'이라는 형태로 다가옴으로써, 사람이라는 것이 맺고 끊음이 칼같을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속에 얼마나 맹목적이고 퇴화적 두뇌사고를 보여주는가를 빚어낸다.

더군다나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미디어와 결합되면서 '믿지 않고 이용하는 자'들 속에서, 그 속의 군중 심리를 일관되게 관찰할 수 있는 설정들은 감독 특유의 감수성과 맞물려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수 가지의 다른 시선들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다.

너무 많은 것을 시사하는 복선으로 인해 뻔한 반전과 결과가 인지됨에도 불구하고, '미스테리 수사물'이라는 쟝르에서 한 걸음 물러나, 감독이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지 진지하게 관찰해보기 시작하자, 더 이상 이 영화는 차승원과 신하균의 투맨쇼가 아닌, 스페셜 게스트들의 잔치가 되어버리는 놀라운 연기파들의 깔끔한 군중 구성을 보여준다.


신경쇠약으로 의심되는 결말임에도 불구하고, 무당이 어쩝네, 미신이 어쩝네 하는 관람기들을 보며 다시금 영화를 관찰해보길 권하고 싶다.

영화의 곳곳에 배치된 주인공의 배경을 알 수 있는 설정들 속에서, 미신따위가 주는 어처구니 없는 종결이 아닌 감독의 설정이 얼마나 매끄러웠는지 그 섬뜩함에 소름이 돋을게다.

정동환과 신구, 두 늙은 배우의 연륜을 넘어서는 연기를 보면서. 감히 별 다섯개로 랭크시키고 싶다.

Posted by 함장

2005/09/02 15:40 2005/09/02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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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 이론의 결집체 - X-Files

우리는 참 많은 음모 이론들을 봐온다. 대부분이 '정부'의 '거대한 음모'를 밝혀내는 이야기고 늘 그 뒤엔, 무기 밀거래라던가, 전쟁, 혹은 정보부와 관련된 정치인의 추문 등등, '권력'과 관계된 것들이 늘상 놓여있다. 그러나 엑스파일 시리즈가 출발한 것은 약간 다른 이야기인데, '외계인'과 관련된 정보를 '정부'가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 하나. 도대체 '왜?', 국민들에게 알려지면 공포로 다가와서?

이십세기 폭스, 아 이젠 이십일세기 폭스던가? 암튼 폭스사가 다루는 드라마 이야기 거리는 주로 미국의 정치권 중 '공화당'에게 편애적인 드라마가 꽤나 많다. 물론 '공화당'을 대놓고 지지하는 드라마는 아니지만, 뭐랄까, 개인의 권익보다 '공권력'이 우선인 경우가 많다고나 할까? 최근의 '24'라 흥행되는 드라마만 보더라도 '테러의 방지'라던가 그 어떤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인권은 무차별적으로 무시하고 공권력을 남용해대는 꼴이란 한편으로는 통쾌할 수 있어도 어처구니 없는 요소들이 많이 비춰지는 것도 사실이니까 말이다.

어쨋든, 우리네 시청자들은 그런 '올바른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기에 폭스 시리즈가 행하는 무참한 인종차별이나 뭐 그런 비 상식적인 이야기들이 그저 '극적 요소'라 생각하고 알아서 필터링해서 보실 줄 아리라 믿어의심치 않으니 계속 해보자.


이 드라마가 1시즌을 계속하면서도 늘 '외계인에 대한 결론'은 유보지은채 끝나는데, 이는 '멀더(데이빗 듀코브니)'의 시각으로 외계인 혹은, 심령의 세계를 노출시킨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길이 없는 '스컬리(질리안 앤더슨)'의 입장을 보여주면서 '확실한' 것이 없는, 진실은 저 너머에를 외치게 만든다. 물론 엑스파일 1시즌의 마지막에 스컬리에게 외계인의 아기가 냉동된 상태를 보게 하는 '셧'을 넣지만, 좀더 확실한 '껀'은 극장판이 등장하면서 확실하게 우주인은 존재하는 것으로 결론을 짓게 되지만 말이다.


멀더와 스컬리의 케릭터의 상호 보완성은 시청자들에게 중도의 길을 벗어나지 않게 해주는 점도 있다. 멀더는 '외계인이 존재한다'라는 가정하에서 늘 출발하고, 스컬리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모든 것은 과학적 사실이 증명해준다'라는 가정하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물론 좀 더 자세하게 관찰할 경우, '멀더'는 늘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 나가는 존재로, '스컬리'는 자신이 알고 있던 과학적 사실이 지속적인 '케이스'를 겪으면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지만 뭐 어쩌겠는가? 폭스 비디오 시리즈인데.

어쨋든, 그런 묘한 '미증유적' 사건들에 대해 접근해가는 과정에서 smoking man을 비롯해 지속적으로 이들을 방해하고 정보에 대한 접근을 막으려는 모습을 '거대한 음모'로 보는데 전혀 무리가 없을 모호한 미스테리 설정은 드라마 시즌 내내 지속되는 긴장을 맛보게 하기도 한다. 어떨 때는 공포를 다루기도, 어떨 때는 '외계와 관련없는'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룸으로 지루하지 않은 흥미진진한 전개를 맛 볼 수도 있다.

묵묵히 담배만 피워대는 smoking man에 대한, 그리고 우리 영화 '실미도'에서도 써먹었던, 거대한 '비밀 자료' 보관창고의 모습은 '음모이론'이 가지는 위력. 더욱 더 파내고 싶고, 그 '이유'를 알고싶어하는 욕망을 무척 자극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이 드라마가 너무나 유명해진 이유를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길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은 과연 왜, 이 둘의 이런 '콤비'의 모습이 매니아 팬들에게 즐겁게 다가오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함장

2005/08/29 11:32 2005/08/2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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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를 보다보면 참 화딱지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중 하나는 왜 그렇게 '빈부의 차'를 극심하게 내는지도 모르겠고, 둘째는 그런 '극심한' 빈부의 차를 깨고 사랑을 억지로 이루게 만드는 경우인데, 왜 그리 그런 이야기가 잘 팔리는지도 참으로 알쏭달쏭하다.

실제로 여론조사를 해보면 자신의 결혼 상대는 '비슷한 경제력'의 집안을 선호하는 경향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서로 커온 환경이 다를 경우나, 양쪽 집안의 빈부의 차가 격심하면 그로 인해 생겨나는 삶속의 트러블이 많아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 때문일까? '운명적 만남'?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는 사랑? 무슨 중세시대 영화 찍나 신분차이내게?

실제 삶의 환경은 결코 그 '부자'들과 '서민'들이 마주칠 수 있는 공간이 희박하다. 부자집 자식들이 잘 드나드는 펍이나 바에 서민층이 가볼수도 없거니와, 살아가는 주거환경도 극히 다르다. 기껏해야 그 자녀들이 얼굴이라도 마주쳐볼 수 있는 공간이랑 '대학' 정도?

이런 로또 복권보다 힘든 경우의 수가 존재하는 '만남의 장'을 이루지도 못하는데 도대체 뭔놈의 신데렐라 이야기는 그리도 판을 치는지 아니꼽다 못해 껄끄럽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좋다하니 암만봐도 이건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전 국민 중 시청자들에게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뿐이다.

각설하고.

인정옥 작가의 이전 작품인 '네 멋대로 해라'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삶에서 '빈부'를 떠나 '살아간다는 것' 그것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는 실로 아름답기만 하다. 사람이 독고다이식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결국 '추억'에 기대고, 사람에 기대고, 가족에 기대고, 연인에 기대고. 그렇게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듯이. 이 '아일랜드'는 차분하게 4명의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기대어 가는 과정, 그 속에서 생겨나는 애틋한 감정들과 모호하고 씁쓸한 삶의 향기속에서 지쳐가는 영혼들을 따스하게 이끄는 묘미도 들어있다.

호텔 사장 경호원질 하다가 쫓겨나 경호업체 사장을 하는 현빈도 결코 '돈이 넘쳐나는' 부자가 아닌, 그저 얹혀 살지 않을 정도의 약간 부자. 맨 주먹으로 아일랜드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이나영, 가난은 둘째치고 돈도 못벌어오는 백수 김민준, 부자였다 몰락하고 집안을 먹여살리는 에로배우 김민정. 이 네명의 케릭터가 가지는 강렬한 인상들은 벌써 그들이 가진 '경제적'배경을 인지하더라도 이내 그 '차이'는 사라져 버린다.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마치 어느 만화 처럼 금화 동전 풀에서 헤엄치는 정도의 부자도 없는. 그저 특이한 직업을 가졌을 뿐인 우리 주위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그들이 '마주치고', '다시보고', 서로의 존재감을 느끼고, 깨달아가고, 다시 보고싶고, 보면 설레고, 같이 있으면 즐겁고.

일상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토록 아련하게 나타낼 수 있을까?

현빈의 발에 있는 굳은 살을 보며, 현빈의 마음속에 이나영 스스로가 굳은 살 처럼 박혀있을 거란, 떼어내면 아플거란. 서로의 마음을 읽으면서도 다른 곳을 봐야하는 슬픔. 그 슬픔 속에서도 사랑을 이어나가는 그들의 '기대어 가는 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평생 지나쳐가야 하는 삶의 리얼스토리가 아닐까?

신데렐라가 없어도, 그토록 잘생기고, 그토록 아리따운 배우들이기에 더욱 아름다워 보였을 그 '지겨운' 삶이 비춰주는 모습은 슬픔의 선율에서만 노니는 바이올린의 현은 아닐게다.

삶이 우연속에서 발전해가는 것이기에, 그들의 만남이 가지는 우연으로부터 가져오는 '운명'이란 것이 그들을 속박하고, 삶의 굴레에 틀어박히게 하더라도 결국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네 삶을 더욱더 밝혀주는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이 하나의 섬이라 가정하고, 바닷물을 통해 서로의 소통이 끊어진 하나의 '군도(群島)'를 형성한다고 했을 때, 결국 타인을 알아가기 위해선, 서로의 동의하에서든, 개인의 의지이든 '다리'를 놓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홀로' 갇혀있고 싶지 않은 욕망에서 오는 표현이며, 사람이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듯이, 의지가 되는 이에게 기대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의지로의 귀결로도 승화된다.

결국 그들 넷은. 서로 의지해서 살아갈 거고. 나도 누군가에게 의지하면서, 누군가의 의지를 받으면서. 그렇게 살아가겠지.

Posted by 함장

2005/08/29 09:57 2005/08/29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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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연애 드라마라는 것, 그 드라마가 갖출 덕목은 따로 있지 않다. 연인들의 밀고당기기는 모습을 보여주며 때로는 아슬아슬한 '급랭'을 보여줌으로 연인들의 '위기'를 보여주는 재미로 먹고 사는 것이 덕목이다.

사실 우리네 연애질에는 참으로 많은 케이스가 존재한다. 남자에 목메는 여자, 혹은 여자에 목메는 남자부터 시작하여 서로 죽고 못사는 연애, 서로 무덤덤한 연애, 연인인지 친구사인지 자기네들 스스로도 모르는 연애 등등. 그 가지수로만 따져도 이 세상에 수억의 사람이 있듯이 수억의 케이스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 이야기가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그에 대한 호응도가 일반적으로 나온다는 얘기는 결과적으로 '어떤 과정'이든 결국 '연인 사이' 혹은, '부부 사이'라는 Goal 을 달성함으로 인해 시청자 모두에게 '바라고 있던', 무언가를 달성하는 연애성공담의 이야기로 진부하더라도 일종의 소기목적을 달성하는 대리심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평일이든 주말이든. 연애질 하는 사람이 그 시간에 연애질 하지 드라마 보겠는가?

각설하고, 사회가 개방적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놈의 '콘돔' 사용법을 온 누리에 설파하는 단체도 없거니와 도무지 배려없는 남성 중심의 빌어먹을 사회의 존재속에서. '속도 위반 결혼'. 흔히 하는 얘기로 '과속'을 벌이고 결혼에 골인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물론 상대 집안의 결혼 승락을 얻어내기 위한 '정략적' 임신도 있지만 뭐 그런 것은 다 계획을 염두에 두고 한일이니 차치하도록 하자.

신부의 드레스 디자인도 더욱 좋아져서 임신 6개월의 여성도 도무지 임신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를 정도로 깔끔한 맵시를 뽐낸다. 그리고 요즘 세상, 어디 구닥다리 보수 촌로의 모습을 하지 않은 이상. '과속'이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다. 물론 '실수'로 만들었다고 책임을 져야 하느냐는 어처구니 없는 발언이 존재하는 이상 모든 성관계에서 '콘돔'을 의무화 시키는 캠페인을 벌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지만 말이다.

각설하고.


일본 드라마인 이 '속도 위반 결혼'은 우리네 남정네들이 사모해 마지 않는 히로스에 료코(우릴 버리고 왜 그렇게 일찍 가신겁니까 료코상~)와 도무지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모를 다케노우치 유타카가 등장한다. 참 수염이 어울리는 남자는 섹시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드라마의 설정이 1화에서 끝나버린다. '한 여름밤의 불장난'으로 임신을 하고, 생명 존중 사상을 빌어 결국 결혼하기로 마음먹어버린다.

그 후의 이야기들이 참으로 와닿는 이유는 이들이 깨달아가는 '순간의 감정'을 넘어선 '평생의 감정'을 유지하기 위한 긴밀한 감성의 대화들이 주를 이루면서 '결혼'이라는 우리네의 '사회적 약속'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보통의 드라마들이 '시작되는 연인들을 묘사'하면서 서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장난치는데 반해, 초반에 이미 '결혼'을 확정시키고 그를 향해 달려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우리가 일상생활의 연애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를 나타내어준다.

'생각없이' 사랑을 나눈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지, 가족이 된다는 것, 아빠가 된다는 것, 이미 저질로 놓고 난뒤에 상황파악을 해가는 두 젊은이의 생활에 대한 적응을 관찰한다는 것은 다시금 우리 주위를 둘러보게 만든다.

부모와 같이 살아가는 자식이 부모로 부터 받는 '기대'와 부모에 대한 '의리'들을 가지고 고민하며, 같은 가족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발견되는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한다는 의미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서로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아가며 '크리스마스 선물'을 패러디한, 서로의 중요한 것을 포기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그들을 바라보며.

서로 손해볼까 조마조마하며 '기브 앤 테이크' 식의 사랑을 해나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며. 계약 결혼이라던가, 계약 연애, 속도 위반 결혼과 같은 '결과'가 정해짐으로 인해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는 사랑의 방법도 감정의 소모가 없이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쩝, 이 드라마를 찍고. 료코는 정말 속도 위반 결혼을 했다...... 아 료코상 ㅠㅠ

Posted by 함장

2005/08/29 09:07 2005/08/29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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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영화에는 온갖 요소들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팀웍이라던지, 동료애, 박애정신, 휴머니즘 등등 말이다. 스포츠를 스포츠로 즐기는 형태의 요소들도 있지만 굳이 사람들이 경기장이나 스포츠 중계채널에서도 볼 수 있는 것들을 극장까지 찾아가면서, DVD 대여점에까지 들려가면서 기회를 스스로 가져 보게되는 경우는 드물다. 분명 그 스포츠 물엔 '극적인 요소'라던가 혹은 무언가 '구미가 당기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기사 윌리엄, A knight's tale을 '중세의 이야기'로 보면 무척 곤란해지는 데, 그것은 이 영화가 가진 스스로의 정체성이 '결코' 중세에 촛점을 맞춘것이라기 보단 '스포츠'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포스터 카피에 써 있는 'He will rock you'는 영화의 시작과 함께 무슨 의미였는지 그 중의성을 깨닫게 되는데, 그 연관관계는 이 영화가 가진 여러 요소들과도 긴밀하게 연계되어있다.

감독인 브라이언 헬겔랜드도 미국인이며, 주인공 헤스 레저도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여 주인공인 샤닌 소사몬도 미국 하와이 출신. 그런데도 영화는 '영국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구색을 맞추는데 완벽한 성공을 갖추는 이유는 포스터가 갖고 있는 한계를 한방에 부수는 초반 오프닝 때문일 것이다. 헤스 레저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이기에 '영국식 영어발음'을 구사하는 데다가, 포스터가 말해주듯이 '원맨쇼'일거라 생각했던 추측도 여지없이 빗나가게 되어버린다. 주인공의 친구들이 거의 '메인급'으로 다루어지는데다가 악역까지. 모두가 '영국인'이었으며, 그 오프닝신은 '중세'라는 시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Queen'의 'We wiil rock you'가 흐른다.

Queen의 음악이 쓰여지는 것만으로, 배우들이 영국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영국영화가 될 수는 없으나(그리고 사실 제작사는 미국이다. 이 영화는 '엄연히' 미국영화다.) '중세 이야기'라는 착각을 순식간에 부숴버리는 초반 오프닝신은 마치 축구의 나라 영국(축구를 잘한다는 얘기가 아니다)과 그 시민들의 마음속에 있는 'Queen'을 바라보는 착각을 일으킨다고나 할까?


영화는 중세의 마상창시합을 거의 대중화된 스포츠의 하나로 다루고 있다, 마치 축구의 '클럽 리그전'을 관람하듯이 토너먼트가 운영되고, 나무로 만들어진 창들이 장쾌하게 부서지는 장면은 골이 터지는 것보다 훨씬 '유쾌'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런 즐거움과 함께 더불어져 나오는 영화음악은 다시금 이 영화가 '중세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일깨운다.

물론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영화음악들도 모두 영국 그룹, 영국 가수들이다. 영국을 위한, 영국의 영화임엔 분명하다. 물론 영국에 의한 영화인지는 의문이지만.

영화는 영국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차다, 도박에 빠져 늘상 돈을 다 잃어버리는 폴 베타니는 셰익스피어의 피를 타고난 영국인답게 화려한 미사여구와 깔끔한 문장솜씨로 좌중을 사로잡으면서 우리의 영웅 헤스 레저를 멋진 기사로 포장해낸다. 그러나 과연 자부심일까? 아니면 '프랑스'에 대한 열등감일까? 그에 대한 의문은 한번쯤 관찰해봐야 한다.

마상 시합에서 '늘상' 영국인이 이기는 데다가, 가장 뛰어난 마상 창 겨루기의 두 사람 모두 영국인이다. 파리에서 벌이는 시합도 영국인의 잔치다. 심지어 파리에서 일어나는 pub에서의 프랑스인과의 작은 말다툼을 통해서도 잠깐 관찰할 수 있는 '정통성'의 문제도 결국 '예수'를 '영국인'으로 만들어버리면서 '과시'를 내세운다.

골치아픈 역사얘길 잠깐 꺼내보자면, 서구, 즉 유럽대륙의 정치적 모태는 '천주교'에 있다. 허나 유럽이 격변기의 사회를 거치면서 영국은 청교도 혁명을 통해 앙글리카니즘이라는 '신교'로 '국교'를 정하면서 '천주교'와 결별 선언을 하고, 자신들 스스로 정통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우스운 꼴'을 거쳤다. 종교개혁은 프랑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일어났고, 프랑스인들은 지금도 '구교'인 '천주교'를 믿고 있으나 그들은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아예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는 현상을 맞았지만, 그 외의 국가는 오히려 '종교'가 개혁되면서 '정치'의 주도세력으로 바뀌면서 또다른 '곪음'에 빠지게되기도 한다.

어쨋든 골치아픈 얘기는 그쯤해두고, 정통성을 부여받지 못한 자들의 '몸부림'은 부던할 수 밖에 없다. 300년도 안되는 미국이 자신들의 역사를 유럽에서 찾으려 해대는 모습이나. 우리나라가 반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전세계에 주장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면 '과거의 존재'가 '현재의 유지'를 의미한다 생각하며 그에 목숨을 거는 행태도 많이 비춰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주장하는 내용을 역사적 고증을 밟아보면 예수가 결코 '백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국인'이라고 주장하는 설정은 웃음을 자아냄을 넘어서서 이 영화가 추구하는 의도에 대한 궁금증이 들기도 한다.

어쨋든, '스포츠'를 위한 오락영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오로지 '배경만' 빌려온 기사 윌리엄은 프랑스에게 무던히도 뒤지는 그들의 '고전 문화'를, 셰익스피어와 기사도 정신, 바닷가에서 찔끔찔끔 나오는 석유로 명맥을 유지하는 그들이 아직도 '살아있음'을 외치는 처절한 외침과도 같은 용맹함 속에서.

그래도 영국인들의 'Rock' 음악은 인정해 줄만하지 않겠는가? 그들의 '자랑스러운' 문화를 말이다.


별 두 개 반의 볼만한 오락영화.

Posted by 함장

2005/08/26 18:59 2005/08/26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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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를 보고 문득 'Men in Black'을 떠올렸다, 은하계 전체를 하나의 구슬로두고, 그것으로 구슬치기를 하던. 소우주의 관념을 보여줬던 그 '마지막 반전'을 유쾌하게 즐겼던 영화말이다.

허나 스필버그가 공언했던대로, 더이상 'E.T'의 귀엽고 깜찍한(물론 이런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외계인은 없었다. 저 세 손가락이 의미하는 것은 구슬치기하던 세 손가락도, 꼬마아이와 검지를 맞대던 그 손가락도 아닌. 무참한 폭력과 무의식의 살인을 자행하는 손가락으로 바뀌어있다.

올 여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늦 봄부터 지금까지. 마치 한국 영화시장은 '공포물의 전성시대'가 아닐까 여겨질 정도로 거침없이 잔혹 스릴러 내지 공포물이 토해지고 있다. 피가 이리저리 튀어대는 하드고어물 부터 시작하여 여전히 학교와 미소녀를 내세운 상큼발랄한 귀신물과 살인마, 혹은 유령 따위로 컨버젼된 공포물의 범람으로 마치 올 여름시즌 영화는 '공포'만 다루는 듯한 착각을 들게할 정도였으니까.

허나 너무 자극이 많으면 무덤덤해지는 것일까? 그 어떤 공포도 더 이상 놀래키지를 못한다. 뻔한 스토리는 일단 넘겨두고서라도 일본판 공포물의 리메이크 작이라던가, 사지가 절단되는 참혹함은 이젠 공포라기 보단 그저 '불쾌함'을 통한 '보기싫은' 장면들이 되어 시각적 혹은 청각적 자극으로 생매장 되어버리는 감각의 끝선들을 잊게할 뿐, 더 이상 삶속에서의 공포를 들춰내는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런 공포물들이 진실로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비슷한 상황속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그 때 그 장면이 섬뜩함으로 다가옴으로서 유사한 장르를 찾게되는 일종의 심리적 효과도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한 밤중 무심코 방 천정 한 귀퉁이를 바라볼 때 이전의 화면기억과 맞물려 무언가를 본듯한 착각을 통해 '섬찟'함을 느낌으로 그런 소소한 재미거리를 다시 맛볼 생각에 공포물을 즐기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팔아먹을것 많이 팔아먹고, 보여줄 것 꽤나 보여준 심령현상과 귀신들의 저녁식사는 짙은 '인조'의 냄새를 뿌리칠 수 없기에 이것이 공포인지 불쾌인지 구분을 하기 힘들어져가는 듯 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저 액션영화라 생각하고 극장을 찾았던 이 '우주전쟁'은 초반 40분동안 '본능적 공포'를 선사하며 근래에 보기드문. 두려움이 피부 깊숙히 침투하는 경험을 맛보게 했다.


'쫓긴다'는 것. 그리고 그 무서움에 대항할 힘조차 없는 '무력감'이라는 것. 그 두 가지가 합쳐지면 '생존'의 위협을 넘어선 '공포'라는 것이 다가온다. 예를 들어보자. 유령 이나 귀신 혹은 살인마 따위에게 쫓기는 장면을 영화로 보게 될 경우, 상당한 긴박감을 느끼며 조마조마하게 되고, 아슬아슬한 추격전 속에 결국 안전권에 접어들거나 회심의 일격을 날리게 되는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 그 긴장감은 지속된다. 이런 형태 때문에 '절대적 공포'를 느끼기 힘든데, 학습된 효과로 인해 쫓기다가 곧 안전권에 접어들 장면이 나올 것이라는 의식적인 예상이나, 영화 내부의 복선이라던가,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과정 속의 연결흐름으로 그 긴장의 선이 원천적 공포라기 보단 술래잡기에서 술래를 피하기 위한 정도의 스릴로 인식됨 속에 그것이 '공포'로 착각되는 현상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천재, 스필버그는 완벽한 카메라 워킹과 기막힌 사운드 조합으로 우리에게 인간의 의식속에 깔린 근원적 공포를 이끌어냈다.

쫓기다 못해, 으스러져가는 사람들 속을 헤짚는 그 현란한 카메라와, 칠판 손톱긁는 소리 저리가랄 정도의 귀를 찢는 굉음을 통해 무참한 살육의 현장에 대한 섬찟한 모습을 담아내는 조합은 그 공포를 자아낸다는 '핏자욱'한번 노출시키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호러영화를 보여주었다.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고, 무엇 하나로도 대항할 수 없는. 마치 인간앞의 개미처럼. 그렇게 미약한 존재가 가져야할 공포감을 여과없이 보여준 장면 하나하나에 내 내면속 깊숙히 숨어있는 공포를 발견해 밖으로 꺼내기 충분했다.

도끼날로 목이 잘리는 장면도 하품을 하며 즐기던 내가 섬뜩함에 눈시울이 적셔졌으니 할말 다했다 볼 수 있겠다.

나도 톰 크루즈와 함께 쫓기고 있었고, 나도 그와 함께 '도망가는 것' 외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은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는. 그 근원적 공포를 건드려버린 것이다.


물론 그런 정신없던 초반 40분을 뒤로하고, 밀실에서 벌어지는 인간 스스로의 살아남기위한 본능들을 다루던 지루한 부분들의 요소요소를 담아내려 했지만. 초반부의 그 '힘있는' 전개가 너무 맥없이 늘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그러나, 팀 로빈스의 광기어린 연기를 보는 재미또한 놓치기 아까운 것임엔 분명하다.

반드시 사운드 빵빵한 곳에서, 진정한 공포를 느껴보길 바라며. 별 넷 짜리 영화를 추천해본다.

그러나 저러나 다코다 패닝은 어쩜 저렇게 연기를 잘하는 것일까? 분명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될 부분이니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텐데 어떻게 저렇게 공포에 빠져 '빽빽'거릴 수 있는 걸까?

Posted by 함장

2005/08/26 16:17 2005/08/26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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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재미있는 드라마 없어?"

"삼순이 봐, 삼순이"

"그게 그렇게 재밌냐? 회사에선 모르니까 도저히 대화가 안되드만"

"그거 웃겨죽어, 완전 포복절도의 도가니탕이라니깐?"

'내 이름은 김삼순'이 끝나고 어느 주말, 메신저로 말을 걸어온 그는 심심한 주말을 한방에 보낼 수 있는 '드라마 한번에 이어보기 신공'을 구사하기 위해 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이미 주말에 침대에서 뒹굴며 여의주 몇개를 먹었을 내공을 확보한 그였기에 긴긴 주말은 드라마 한 시리즈면 풍족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몇 시간 잠잠하더니 이내, 메신저 대화명이 바뀐채 중간쯤에서 더는 못보겠다고 GG를 선언해 버렸다.

그의 대화명은 다름이 아니라..... '5천만원.....'


드라마는 픽션이다. 실제 존재하지도 않을 뿐더러, 있을 법한 이야기를 재미나게 꾸며나가면 그로써 족하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유독 인기를 끈 이유는 멀리 있지 않다. 삼순이란 케릭터의 '현실성'에 열광하는 팬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과연 삼순이는 현실적인가?'

현실이란 단어는 상당히 왜곡될 소지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삼순의 신체사이즈가 원래는 '현실적 평균'이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드라마 속의 그저 착하고 공주같은 이미지가 아닌 그나마 현실생활에서 부딪힐 수 있는 케릭터라는 점을 들먹이며 '현실옹호론'을 펼치는 사람도 부지기수이다.

그렇다. 누구나 느낀 그대로, 현실적일수도,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아니다. 그 '현실성'이라는 것은 각 개체, 즉 사람들이 부닥치는 삶속의 경험을 통해 투과하여 나타나는 일종의 자기 세계의 현실성일 뿐이라는 것이다.

삼순이가 종영된 후 각 기업의 '인사담당'들에게 실시한 설문의 경우 상당히 많은 수의 인사담당자가 '삼순이 같은 케릭터'를 종업원으로 채용하지 않겠다고 응답을 한것과 관련해 볼때, 삼순이 '이 시대의 커리어우먼'을 대변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부터, 설문 결과처럼 이 사회는 아직도 비뚤어져서 뜯어 고칠것이 많기에 삼순이 같은 케릭터로 여성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겹치며 과연 '무엇'이 현실에 근접해 있는지 동요케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사람들은 삼순이라는 케릭터에서 자신감과, 여성으로서의 본질적 욕심, 그 모든 것을 충당해 나가고, 사회의 부조리한 선입견의 틀 속에서 고난을 이겨내가는 모습들에 즐거움을 만끽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껏 한국의 드라마에서 자주 접하지 못한 여성케릭터에 열광하기도 한다. 물론 삼순이가 '첫 케릭터'는 아니지만 말이다.

심지어 삼순이 언니역할인 이아현과 우리 푸근한 권해효의 모텔인지 호텔인지로 들어가는 샷이, 그것도 두번이나 나온다는 이 획기적인 변화는 그야말로 우리의 '현실'을 비추는 긍정적 걸음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런데....


왜 뜬금없는!! 5천만원이란 말인가!!

김선아가 원래 이쁘기 때문에 살쪄도 안 흉해보인다는 속설도 일단 미뤄두자. 마찬가지로 현빈이 잘생겼기 때문에 무조건 콩깍지 낄수있다는 논리정연한 주장도 일단 미뤄두자.

여성의 자립적 요소와, 여성이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는지 보여주려 하는 삼순이의 독백들과 행동들. 그 획기적인 연출속에서 왜 저런 '돈 많고 성격 더러운' 남자가 연결고리로 지어지는가에 대한 상식적인 답변은 들을 수 없는 것일까?

여성이 당차고, 자기 할말 하며, 당연히 아직도 아니 이루어지고 있는 남녀평등, 즉 인간 평등의 인류 보편적 평화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일견, 삼순의 케릭터 이미지는 그 방향성이 정치적으로 올바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여성의 맘도 이해하려 들지 않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며, 고집불통인 현빈의 케릭터가 가지는 현대 남성이 지향해야 할 모순점은 어떻게 극복시킬 것인가?

물론 현빈의 케릭터는, 려원이나 삼순처럼 콩깍지 씌면 뭐든지 해달라는 거 다해주는 착한남자로 바뀐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착한남자로 바뀌게 가는 결정적 찬스를 만들어 준것이 무엇이던가?

바로 5천만원이라는 연결고리의 손잡이 아니던가?

분명 '내 이름은 김삼순' 속에서는 이상적인 남성형이 드러나고 있다. 다니엘 헨리처럼 려원의 마음을 읽어내는 남자. 아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눈빛만으로 손짓만으로 마음이 통한다! 이야말로 하늘이 정해준 커플!

물론 저렇게 타고날 필요도 없다, 권해효 같이 마치 영화 '썸원라이크유'의 주인공이나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해리처럼, 여성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맞장구 쳐주는 이런 멋진 사내들도 노출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드러나는 '승자'로 비춰지진 않는다. 결국 '멋진' 사랑을 이루어내는 시작점에 5천만원이 놓여져 있다는 기분나쁜 찝찝함은 결국은 큰 틀에서 바뀌지 않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비꼬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이름은 김삼순'은 김선아의 애드립 만으로도 충분히 지루한 주말을 즐겁게 보내게 한다.

별 다섯개 만점 중에 별 세개 반정도?

Posted by 함장

2005/08/25 17:23 2005/08/25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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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친절한 금자씨'의 TV광고등을 보며 무의식 중에 착각했던 것은 '친절해 보이기 위해 눈두덩을 빨간색으로 칠했다'고 관념지은 것이다. 아무런 의심없이 광고편집된 영상만을 보고, 금자가 타인에게 친절하게 보이기 위하여 눈을 빨갛게 칠하고 다닌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헌데, 영화를 보면서 그 '문장'의 뉘앙스를 다시금 생각해보며 그 단어의 중의성(重意性)을 되짚어보니 그 무엇도 확신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타인에게 친절하게 보일까봐 불친절해 보이기 위해 빨간색을 칠했다는 얘기인지, 친절하게 보이기 위해서인지. 참으로 '애매한' 단어의 선정으로 더욱 금자의 행동선형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만들어버린다.

사실, 애초에 영화에 몰입할 수 없었다, 초반부 올드보이에서 그토록 무게 잡다가 '말로 하세요' 한마디로 포복절도케 만든 아저씨가 '부자연스러운' 가발로 등장하면서 영화와 거리감을 두게 했고, 납치사건 보도에 강혜정이 '부자연스러운' 헤어스타일과 화장으로 앵커우먼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인해 완전히 영화와 별개의 시선을 갖추게 만들어줌으로써 날 당황시켜버렸다.

영화 곳곳의 나레이션을 통해 거부감을 느낀이도 꽤나 있겠지만, 카메오들의 출연이 '작은 즐거움'을 노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내겐, 그들의 '부자연스러움'이 오히려 나레이션을 만나서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에 지나치도록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게 만들어버리는 박찬욱의 무서움을 보여줘버렸다.


아무리 복수를 얘기한다 하더라도 13년이나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복수를 부르짖는 한 여성에게 작은 동정심의 감정이입조차 헛웃음 몇번으로 완벽하게 차단해 버리는 효과를 인지한 후엔 확실히 박찬욱이 이젠 '영화를 가지고 노는 수준'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붓글씨로 치자면 과거 명필들의 글씨를 따라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기만의 필체로 휙휙 힘차게 써내려간 느낌이랄까?


이런 부자연스러움은 최민식의 통역씬에서 극에 달하는데, 그 진중하고픈 대사를 그토록 따스하게 영어로 주절거리는 그 장면은 금자의 슬픔도 저 멀리, 최민식의 처벌도 저 멀리, 관객을 완벽하게 박스 밖에 두면서 박스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무표정하게 혹은 '처형'을 앞둔 시점의 침울한 분위기와 달리 가벼운 개그의 뉘앙스로 바라보게 만듦으르 감정이입을 철저하게 막아내고 있다.

올드보이가 주는 모호한 불쾌감은 '잔혹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15년이나 갇힌자의 울분에 대한 감정이입의 힘겨움과 그로 인해 '인과관계'로 얽혀들어가는 인물간의 연결고리 속에 숨겨진 불친절한 '보여주기'가 융합되며 나타난 것이었다고 본다면, 이번 '친절한 금자씨'는 너무도 상세하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모조리, 죄다 설명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호한 '불쾌감'을 느끼게 만든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인식되게 하는 것일까?


사실 복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행동의 진행을 하는 금자씨의 모습은 지독하게 차겁고 어두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진과 같은, 그 외의 일련의 행동들에선 '정말, 말 그대로의 친절한 금자씨'가 본연의 성격이 아닐까 의심해버릴 정도로 부자연스러운 괴리감을 표출시킨다.

그리고 그 괴리감은 불쾌감의 일부로 다가와 또 다시 감정이입에 벽을 건설한다.

마치 초등학교 학급회의 수준을 보여주며 블랙코미디의 측면을 노출시킨 장면에선 그 '벽'이 상당히 효자노릇을 하면서 이미 관객의 입장이 복수라는 것에 얼마나 조소를 보내고 있는 가를 피부로 느끼게 해준다. 심지어 '군중심리'를 역이용하며 '복수'의 정당성을 무색화하는 대사들과 맡은 배역을 성실히 수행해나가는 배우들의 표정연기는 박찬욱 감독의 '연출' 또한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잘 만든 영화다. 잘 만들었고, 볼만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편하다. '거부감'이 드는 불편함' 아니라 인간이 가진 한계를 너무 쉽게 그어놓고 그 한계를 향해 몰아대는 불편함은 분명 지긋한 감정적 쓰림이 아니라 이성적 비관론에 입각한 것임에 더욱 화가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이영애 나이랑 저 장면은 정말...... 쩝 대단한 이영애라고 밖엔 뭐라 더 할말이.....

그러나 저러나 류승완 감독은 어디 나온걸까? 다시 봐야할 것같다. 별 네개를 선사해본다.

Posted by 함장

2005/08/15 06:03 2005/08/15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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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few good men. 굳이 해석하자면 소수정예.

이것은 해병대의 모토이다. 미 해병의 모토이며, 우리 해병의 모토이며, 대부분의 해병의 모토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해병은 '많은 인원'일 수도 없거니와, 배수진과 진배없는 상륙전을 감행해야 하는 군인이므로 그럴 수 밖에 없다.



최근에 일어난 우리 군 내부에서의 살인사건이 보도되면서 '한국 군대'의 구조를 비난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영화를 떠올린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한국군'의 구조 문제가 아니다. 군대 내부에서 '폭력'이란 수단이 '계급'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얼마나 위협적으로 쓰이는지는 여러 측면에서 관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태를 오직 '한국의 군대조직'에 대한 비난을 비롯하여 '모병제'로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모습에선 이 영화를 직시해봐야 한다.



미국은 모병제 국가이며, 우리와 비교할 수도 없이 복지화된 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내에서 폭력사건은 늘 발생한다.


'코드 레드'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암묵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모습은 결국 '규제'가 통하지 않는 그 내부의 규율이 '외부'로부터 통제가 되어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캐피 중위("톰 크루즈")를 통해 '대학생 같은 말투(지식인)'와 칼같이 주름잡아서 근무복의 등판을 다림질한 켄드릭 대위("키퍼 서덜랜드")와 달리 그저 밋밋한 등판의 근무복을 입고 등장시키면서 '군대'라는 체제로 부터 한 걸음 물러서있는 케릭터를 연출한다.

지극히 '명예'를 중시하며, '소수정예'처럼 나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군대의 모습에서 '준법'을 적용시키는 행위는 합리적 사고를 지니고 있는 민간인에 가까운 '겉만 군인'인 법무관에 맡기는 태도를 통해 '문관 우위의 통제력'을 강하게 암시한다.



현재 우리 나라의 군 지휘체계는 분명 '문관 우위'를 고수하고 있으며, 민간 출신의 국방부장관도 나오기 시작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1997년도 던가? 지금까지 한번도 '타 세력'에게 자리를 내어준 적이 없는 예비군 중대장 자리가 최초로 '육군 3사관학교 출신' 예비역에게 주어졌다.

이에 '분개'한 육군사관학교 출신 예비역들의 모임은 난리 부르스를 쳤다.

군대의 지휘구조에 대한 권력을 거의 독식해오던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밥그릇 침해'는 고까울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말이다.



군대는 합법적인 폭력기관이다. '폭력'이라는 것은 반드시 통제되어야 하기에, 그 통제를 '군'에게 맞기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쥐어주는 꼴이다.

이미 군사쿠데타 따위로 '군인이 생각이 많으면 나라가 망한다'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 국민이기에 이를 더욱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허나 군대의 이러한 특수한 성격과, 철저하게 명령체계가 나뉘어진 '계급구조'의 악용은 간부와 사병을 막론하고 그 '개념'의 정립이 없다.

분명 민간통제의 선에서 명령은 하달되었다. '사병끼리 구타, 폭언 절대 금지'는 이미 몇년이나 지난지 모를 정도로 줄기차게 시행되고 있으며, 간부들은 자신들의 인사고과에 반영되기 때문에 이를 지키려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지속되는 이유는 문서에 씌여있는 '금지의 법조항'들이 힘을 못쓰는 구조가 아니라 군대라는 폐쇄된 조직체계의 특수한 결함으로 인해 일어나는 문제다.



물론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적해있다. 폭력문제 뿐만 아니라 생활환경 등, 전 분야에 걸쳐서 말이다.

우리 사회의 의식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는 이번 국방장관의 GP 사태에 대한 의식이 대변해 주고 있다.

군사적 대치 상황에서 일어나는 '경쟁구도'의 군사력 강화가 아닌. 지속적인 평화추구를 위해 남북간 GP를 줄여나가는 방향의 '개혁'을 시행하려는 모습.

물론 육군의 축소를 우려하는 일부 예비역과 군부의 저항이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평화를 지향하는 '문관'이 우위를 점하고 군에 대한 통제와 개입을 지속적으로 확장해나간다면 군 개혁의 모습은 더욱 가속도가 붙지 않을까?



정말 꼭 필요한 인원만큼만. A few good men 만으로도 이루어지는 국방, 군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함장

2005/07/11 20:27 2005/07/11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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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8님으로 부터 부여받은 바통을 잇지 못하고 있는동안 camino님께서도 숙제를 주시는 바람에 무엇을 소개할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만.

제 블로그 스타일 답게, 그날 그날 있었던 일들의 상념을 적는 것이 좋겠다 싶어, 주말동안 봤던 영화 두 편에 대한 소개를 해볼까 합니다.

너무 많은 영화작품을 봐서 인지, 아니면 남들보다 적은 수의 영화를 봐서인지, 혹은 너무 영화에 감정이입이 잘되어 보는 작품마다 감동 받거나 너무 좋은 평을 가지게 되어 추천할 영화가 너무나 많은 건지, 아니면 식견이 낮아 모든 영화를 잘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저의 영화가치관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기에 이런 방식을 택하게 됨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원래 이모양입니다 (__;a

사진 출처 : Daum 영화


1993년 작품인 "야망의 함정"은 나름대로 거장이라 불리는 시드니 폴락이 감독한 영화입니다. 원제가 '기업'이라는 얘기인데 Law firm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출연하는 배우들도 엄청납니다. 진 해크만, 톰 크루즈, 에드 해리스, 홀리 헌터, 게리 부시(아주 잠깐 나오지만 정말 므찐 역할 --)b) 등등...

하버드 법대를 5등안으로 졸업하는 미치(톰 크루즈)가 멤피스에 있는 로펌에 엄청난 몸값으로 들어가게 된 후, 겉으로는 무척 윤리적인 로펌이 내부가 얼마나 썩어문드러진 곳인가를 알게된 후,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합리적인 판단을 해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진 출처 : Daum 영화


두 번째 영화는 2004년 작품인 "런어웨이"입니다. 작년 말에 나와서 영화 내부에 애플의 아이팟도 등장합니다 --)b. 이 영화도 배우진이 화려합니다. 진 해크만은 또 나오고, 더스틴 호프만, 존 쿠삭, 레이첼 와이즈 등등. 배우들만 봐도 시원합니다.

원작이 법정 소설로 유명한 '존 그리샴'의 것이기에 스토리 구성도 탄탄하고 즐겁습니다. 늘 이야기하는 '거대 기업'과 '약한 소시민'의 법정 싸움이 주가 되고, 결국 '약한 소시민'이 승리하는 뻔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즐겁게 보는 이유는 영화를 '긴장감 있게' 잘 만들어냈기 때문일겁니다.



두 영화는 현재 미국의 10년 차이를 보여줍니다.

10년 전에는 마피아 얘기가 먹혀들었고, 10년 후에는 '거대 기업'이 먹혀 들어갑니다.

마피아나, 거대 기업이나. 마치 최근 종영된 드라마 '신입사원'의 강호가 얘기했던 말 처럼, 기업과 깡패의 차이점을 찾기 모호한.

강자가 약자의 것을 '착취'하고 그것을 '합법화'하는. 결국 '법'은 강자의 곁에 있는.

영화 테러리스트에서 최민수가 그토록 두 눈에 힘주며 각잡고 얘기하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가 일상 현실인 이야기.



이 두 영화는 비록 현실에선 이루어지기 힘든 기적같은 일이지만, 아주 흔해빠져 문드러진 '정의는 승리한다'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펴내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인공들의 선택이 사회정의에 대한 이상론적인 이야기로부터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죠.

10년전 "야망의 함정"에서는 톰크루즈가 '법'으로 부터 요리조리 피해가는 마피아의 배후엔 그 법을 잘 아는 '변호사'들이 있다는 점을 들어, 변호사를 '족쳐' 마피아들의 돈 세탁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웁니다.

결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돼, 악의 원천을 제거 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기생해 살아가는 것들을 제거해서 악의 근원을 말라죽게 하자는 이야기. 허나 그 갈길은 너무나 멀죠. 기생해 나가는 로펌이 몇 천개가 넘으니까요.



런어웨이는 아예 주인공이 법대를 다니다가 포기합니다. 법과 현실이 너무나 멀기에, 주인공은 배심원이 되어 판결을 '돈'으로 부터 보호하고, 결국 판결을 인간의 양심대로 지켜내고, 악의 근원인 '살상무기 제조업자'의 영업행위를 법으로 제한해내는 주춧돌을 마련합니다.

미국이란 나라에서 총기소유가 '권리'로 인정받는 다는 점을 뛰어넘으려는, 주인공의 의지는 그의 삶에서 몇년이란 시간을 뺏았는지, 앞으로 남은 미래의 얼마를 더 희생하게 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모든 기업이 악덕기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진 자'들에 대한 서민들의 증오가 상당히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서민들 스스로도 '부'를 추구하면서 '가진 자'에 대한 비난은 멈추질 못합니다. 물론, 사회의 창인 언론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부정축재'에 대한 시각이 편협하여 우리는 그 속에 감추어진 진실의 투명성이 흐리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이런 영화를 통해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현실에서 느껴보지 못할 일들에 대한 우리 서민들의 '염원'이 담긴 진실일지도 모릅니다.

"야망의 함정"에서 톰 크루즈가 '돈'으로 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활동을 하려 몸부림치는 이야기와, "런어웨이"에서 존 쿠삭이 살상무기의 '존재 자체'에 대해 회의하며, 음모와 매수, 협박으로 부터 '사람의 양심'을 지켜내려 하는 인간적인 노력은 바라보는 우리에게 충분히 심리적인 만족감을 줍니다.



애석하게도, 이러한 문제들은 조금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돈으로 해결되고, 돈에 얽메여서 자신의 삶의 목적과 지향점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 불가능한 사회는 앞으로도 이어질 겁니다.

일전에 누군가가 제 글에서 '금전에 대해 회의적이고, 혐오적'이라는 평을 해준 기억이 있습니다.

'돈'은 나쁜게 아닙니다. 성격조차 갖지 못하고 부여받는 주제에 나쁘면 그건 개그겠지요.

다만 그 '돈'을 가지고 인권을 우롱하는 치들이 사회의 기득권을 쥐고 있는 것이 비뚤어졌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직도 우리는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우리 서민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 가슴 트이게 하는 이야기를 보면서, 비록 현실과 지나친 괴리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열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직도 우리 가슴엔 양심이 남아있으니까요.

Posted by 함장

2005/05/30 18:52 2005/05/30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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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환 할머니(나문희 님)는 폐지, 종이박스, 재활용품을 모아서 고물상에 내다팔며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렇게 쪼들려 살다가도, 아들이 오는 날, 그토록 좋아하며 고기를 사들고 집으로 갑니다.

사고만 치고 다니는 상환(류승범 님)이. 굶고 다니지는 않나 걱정하며 국밥 한 그릇 먹이는 애비(기주봉 님). 둘 다 국밥 한 그릇 먹고도 집에 들어가 다시 밥상 앞에 앉는 모습은 가슴 한켠을 아리게 합니다.


뭐든 자기 멋대로인 상환을 결국 같이, 할머니와 마주보는 밥상에 앉히고, 결국 같이 밥을 먹고. 결국 철없는 상환이 밥상을 참아냄이 고마워서 애비는 소화제를 쥐어줍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의무방어전'을 치하하며 소화제를 먹습니다.



같이 밥먹는 것. 얼굴을 마주하고.



태식(최민식 님)의 무능함에 아내(서혜린 님)는 바가지를 긁습니다. 언성은 높아지고, 쌍욕까지 나옵니다. 아들(이준구 군)은 부모의 언쟁이 싫어서 뛰쳐나갑니다. 경제난으로 그토록 맞지 않는 부부의 이견이, 섹스라는 소통으로 한풀 꺾입니다.



돈이 사람의 인성을 갉아먹어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못 갉아먹습니다.



애비가 넣어준 빵과 우유를 화장실에서, 목메어가며 쳐먹고도. 미안하다, 사랑한다 말 한번 못한 상환. 그렇게 애비를 떠나보내고 이제 남은 가족은 쓰러져 머리를 다친 할머니.

가진 기술은 권투뿐인.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 강태식이. 돈이 필요해. 돈이 너무 필요해. 결국 몸까지 망가지는.



가족이라는 테두리는 법속에만 있는 것이 아닐겁니다. 우리 삶속에서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자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울고 웃을 수 있는.

그렇기에 '가족같다'라는 표현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박사범(변희봉 님)의 상환의 플레이에 대한 아쉬움과 교도주임(안길강 님)의 흐뭇함은 이미 가족처럼 되어버린 상환에 대한 기쁨일지도 모릅니다.


사기만 쳐대던 원태(임원희 님)가 용대(오달수 님)의 손톱을 먹고 태식의 곁에서 도와주는 모습은 미운정 가득 든 가족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박사범 말마따나 공부 잘해서 높은 자리 앉으면 뭐합니까?, 어린애 두번 죽이진 말아야죠.

상철(천호진 님) 말마따나 사연없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죽도록 고생한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입니다. 상철이 태식을 알아보고, 교도주임과 박사범이 상환을 알아보고, 상환과 태식이 서로의 주먹을 교환하며 서로에 대해, 서로의 주먹이 비겁하지 않음을 깨닫고, 서로에 대해 이해하며, 결국 서로를 '인정'하게 되는 모습. 그들만의 아우라를 인지하는 기술은 결국 경험에서 돌아오는 '깊은 이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이해'를 전제로 합니다.

때로는 그 '이해'의 폭이 벅차거나, 그 한계를 인지할 때도 많습니다만, 결국 서로의 이해로, 구성원간의 이해로. 그렇게 연결되어나갑니다.



부모님이 자신의 꿈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괴로워 하는 학생들.
자식이 자신 혹은 주변 사람들 처럼 고생하지 말았으면 하며 더 나은 학벌과 직장을 얻길 바라는 부모들.

학생은 서서히 철들며 부모가 바라던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가고, 부모는 서서히 인생에 달관하며 자녀들이 스스로의 삶을 찾아나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게됩니다.




자신이 믿던 것들이 시간이 지날 수록 부질없는 것을 깨달아가고.

이게 싫어, 저게 싫어, 선을 긋고, 그 선에 위배되면 아무런 생각없이 배척되고.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며 이해하기 보다 자신의 인지과정에 선을 그어 평가하는 못된 습성을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는 신이 줬다는 '이성'을 껌 바꿔 먹은 것일까요?

삶속에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그 속의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 둘 깨우쳐 가면서.

시간의 한정됨을 아쉬워 하며.

하루하루 이별의 시간을 깎아가는 우리의 가족 틀 속에서.



당신의 가족은 건강합니까?

당신의 가족과 하루, 한주, 한달, 일년에 한번이라도.

마주보며 밥한끼 같이 합니까?



내 인생이 60일지 80일지 30일지. 당신은 압니까?

Posted by 함장

2005/04/14 18:46 2005/04/14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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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수氏, 대단한 사람입니다.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 죽어도 용서 못한다고 방송에서 못박아 얘기하던 그 눈빛.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무룡氏가 죽었을 땐, 상주의 자릴 지켜냈지요.

그리고 용서하지 못할 아버지라도. 명예를 위해. 저런 모욕을 견디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一家를 이룬 남자 답다고 느껴집니다.

후까시를 잡든, 대발이 같든. 그의 연기는 뇌리 깊숙이 남아 있습니다.

중학교 때, 송기원씨의 신작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라는 책이 신문에 크게 광고된 것을 보고 서점으로 달려갔습니다. 책 제목을 기억하지 못한채 갔기에. 서점에서 당시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찾게 되어버렸죠. 서점 주인이 교복입고 그런 '야한'소설을 사는 절 보며 눈을 야리던 것이 기억납니다.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는 작가 송기원씨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70년대 사회에서 핍박받던 호남인들, 사생아 이야기, 자신의 운명을 자학하며 그 위선으로 수많은 여인을 깔아뭉갰던 황폐한 연애담, 75년부터 90년까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민중교육지 사건' 등으로 5년에 한 번씩 투옥되는 와중에 '당신 아들은 간첩이었다'는 주위의 손가락질을 견디기 어려워 문고리에 목을 매 자살한 어머니, 그리고 지독히도 마셔대던 술.

그토록 헤쳐나가기 힘들었던 그의 삶이 들어있는 그 소설이 영화화 되고, 그 작품에 저런 명배우들이 등장했다는 것은 참으로 이채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삶이 그랬듯, 영화는 마초이즘으로 가득차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여성분들에겐 그다지 추천하고픈 영화는 아닙니다.

임권택 감독의 '하류인생'보다 이 영화가 더욱 가슴에 와닿는 이유는 아마도 '서울'이 아닌 '지방'이야기라서 인지도 모릅니다. 당장 경상도와 전라도를 두루 다녀본 사람이라면 이 두 지방이 얼마나 많은 차별을 받아왔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88고속도로를 달려도 전라도 경계를 지남과 동시에 길은 최악의 코스가 되어버릴 정도였으니까요.

영화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 춘근 역의 박상민과 윤호역의 김정현, 정석역의 최민수가 이루어내는 연기들은 가슴 깊숙이 찔러 옵니다.

호로자식이라는 소리에 눈이 뒤짚히고, 대갈빡이 터져도 '자존심'하나 지키기 위해 그다지도 '개깡'을 부리는 모습.

지금의 최민수氏의 모습은 그런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요?

춘근과 윤호, 그리고 모든 장돌뱅이에게 우상이었던 정석처럼, 최민수氏도 그렇게 이겨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이 영화 못보신분. 강하게 추천합니다.

Posted by 함장

2004/10/29 17:52 2004/10/2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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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후라쉬 출처 : 어른 엠비씨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 아일랜드가 시작했습니다.

'네 멋대로 해라'는 본적 없지만. 그 명성을 익히 알기에.

인정옥 작가를 믿고 봤습니다.

뻔한 스토리.

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그들의 '사랑하는 이야기'

정말 기대가 현실이 되어버린. 너무나도 재미있는 드라마 첫회 였습니다.

이미 주인공들의 사랑관계가 어떻게 얽히고, 어떤 결론이 나올지는 나와있습니다.

하지만 '온갖 역경을 딛고 일어선 순고한 사랑'따윈 필요없이.

그 '역경 자체가 사랑'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그들이 이루어나가는 사랑은 무척이나 아름다울겝니다.

가슴한켠을 내리 꽂는 대사.

이나영의 '몸으로 하는 연기'

'웨이브 장(김민준)'의 변화.

'네멋'을 이은 이휘향을 비롯한 중견배우들의 사랑이야기.

너무나 기대됩니다.

지고지순, 화기애애, 화목한 가정이 아니라.

삶의 부채, 평생이 짐으로 다가오는 '가족'의 의미.

리얼리티가 떨어지더라도 이 판타지 아닌 판타지는 분명 삶의 의미에 무한한 욕구를 부여합니다.

귀여운 아역배우에서 집안이 몰락하여 이젠 가족 7인의 생을 책임진 에로배우.

아픈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서, 보호하고 싶어서 늘 그렇게 아픔을 나누기만 하는 보디가드.

동생은 입양을, 어머니는 재혼을. 자신의 삶은 잃어버린 늙은 양아치.

입양되어 가족을 잃고 주위와 단절된 채 살아가며 늘 '아픈' 사람.

사람은 늘 변해 갑니다.

이 케릭터 들도 서서히 변해갈겁니다.

사랑은 변합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머물러 있는 것은 없습니다.

너와 나, 우리 모두 변해 갑니다.

그 변해가는 모습에 슬퍼지지 않도록.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바라 봅니다.

자 다들, 수요일 목요일 밤엔 아일랜드 보셈 --)b

Posted by 함장

2004/09/02 13:11 2004/09/02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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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Q

보험관련 영화얘기 하나 더 해볼까 합니다. 마찬가지로 OCN에서 하길래 --)a

어제 뉴스에서 나왔듯이.

우리나라는 아직 미숙아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없습니다.

출산률은 줄어가고 있는데 정부에서 '애 낳으라고' 장려는 하고 있지만 정작 '낳은 애를 살리는 일'에는 힘을 쓰지 않고 있지요.

예를 들어 미숙아가 인큐베이터에서 정상아로 크게 될때까진 작게는 3천만원에서 크게는 6~7천만원까지 듭니다.

태어난 생명이 소중한 줄 안다면, 아니, 뱃속에 생겨난 생명이 소중한 줄 안다면. 그들이 적어도 중등교육을 받을 나이때까지 안전하게 자랄 권리는 사회에서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제논리에서 아직도 '성장이냐 분배냐'를 놓고 돈을 만들어보자 논하는 당신들. 기본은 해주고 있는가요?

레인메이커도 그러했고, 존큐도 그러합니다. 저 시스템은 단지 미국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거대 보험사업채는 '피보험자가 고소할 확률'이 지극히 낮음을 믿고 멋대로 굴며, 설사 고소한다 하더라도 절대 손해 보지 않는 합의금으로 끝을 봅니다. 정부와 연구단체에 로비를 하여 돈이 되는 의료품목은 절대 보험항목에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돈이 목적이 된 사회.

우린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이토록 배운 것 없어도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

겨우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들보다 더 '무지'한 부모이지만 그들은 행복합니다. 출근길에, 우리가 토익이다 토플이다 외워대고 있는 그 험난한 버캐브러리 33000 따위에 녹아있는 단어보다 더 쉬운 단어들도. 그들은 발음하기 조차 어려워하면서도 '아이를 위해' 단어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6~70년대 교육받을 권리조차 없던 미국의 흑인들이었으며, 다행히도 '글을 읽을 줄은 아는' 흑인이었습니다.

자녀와 가족의 행복을 위해 피땀흘려 넣어온 '보험'이 정작 아들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때. 아무런 쓸모가 없어집니다.

그들은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까요? 왜 존Q는 두려움에 떨며 총알도 넣지 않은 권총을 들어야 했을까요?

인질극으로 자녀의 목숨을 성취한 존Q를 좋게 볼순 없습니다. 그의 아들의 심장이 '비록' 유일하게 '미국 내에서' match되는 심장이었다 해도, 그의 명단이 그의 '폭력수단을 사용한 행위'로 올라간 점은 '형평성'에 어긋납니다.

하지만 뒤집어 볼까요? 생명의 고귀함과, 돈을 지불하여 얻는 '심장 이식 리스트 등록'중 어느 것이 우선이며 무엇이 '형평성'을 논하는 쟁점이 되는걸까요?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인질들이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오히려 존Q를 돕게되고, 방송을 타게 되면서 존Q는 영웅화 되어갑니다. 그로인해 사회의 권력자들인 이 사람들은 코너로 몰리게 되죠.

별4개 달고 있는 레이 리요타는 존Q 저격실패와 그 실황의 방송중계로 명성에 금이 가며,

원무과 이사인 앤 헤이시(ㄱㄱ ㅑ~ 앤 헤이시 이뽀~ ^0^)는 인질범의 소원을 들어주면 안된다는. '지속적으로 생겨날 미래의 범죄에 대한 고민'이라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유지하다가 로버트 듀발이 툭 던진 한마디와 존Q가 저격당하는 모습에 결국은 심장 이식 리스트에 아이의 이름을 올립니다.

로버트 듀발은 업무적인 네고시에이팅을 지나서 서서히 존Q와 인질들의 반응에 그 스스로도 동화되어 가는 듯 하지만. 연륜이랄까요? 결국 철저한 네고시에이터의 직업의식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참으로 이성적인 늙은이입니다.

결국 인질극으로 인해, 방송의 도움으로 인해. 존Q는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냅니다. 하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어땠을까요?

최후의 보루로. 마지막으로 심장전문의인 제임스 우즈를 설득해 보려 했지만 그는 거절했죠. 존Q는 그때부터 인질극을 시작합니다. 덴젤 워싱턴의 연기가 빛을 발합니다. 어설프게 권총을 허리춤에서 허둥지둥 뽑으며, 방송에 대고 외치는 단어 하나하나에는 그의 '무지함과 단순함'에 대한 짙은 의지가 베어있습니다.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에 자신의 심장을 이식할 것을 요구하는 그의 눈빛에는 결연한 의지보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아들이 느낄 고통에 대한 '진실된 통감'을 보이며 그 눈빛은 제임스 우즈를 설득시키고 결국은 '산 자를 자살케 하여 그의 심장을 이식'하려는 '반 윤리적인 의료행위'에 심장전문의를 동참케합니다.

하지만 이미 관객은 '무엇이 반 윤리인가?' 의문을 던지게 됩니다.

'내가 자식을 묻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식이 날 묻어야 한다'고 외치는, 그리고 당연히 자식을 위해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는 존Q. 그리고 그깟 돈, 그깟 돈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마음대로 저울질 하는 보험과 병원. 과연 무엇이 윤리적이고 무엇이 비윤리적일까요?

사람의 생명은 소중합니다.

하지만 시장경제에서도 병원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치 레인메이커에서 변호사가 시장경쟁을 할 수 밖에 없었듯이말이죠.

서비스로 경쟁을 한다는 꿈같은 얘기는 언제쯤 올지요.

의료공급이 모자란 우리 사회에서 언제쯤 '생명'이 존중을 받을까요.

연세대 병원의 병동엔 입원실이 5인이 사용합니다. 연세대 뿐만이 아닙니다. 많은 병원이 그러합니다. 이유는 6인실 이상이 '의료보험'에서 지원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작은 수술을 위해 입원을 이틀간 해도 수술비와 함게 70만원이 넘는 의료비가 나옵니다. 월급쟁이에겐 카드라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 시장통에서 1년 365일 휴일 없이 노점에서 사는 사람들은 과연 저 돈을 어디서 융통해서 비용을 지불하며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조카는 소아암입니다.

한해에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이 몇명이나 되는지 아세요?

병실조차 없고, 입원할 비용도 없어서 밤을 새워 불꺼진 병원 로비에서 고열로 올라간 아이가 어떻게 될까봐 고민하며, 마음 졸이며 살아야하는. 남편은 생계에, 부인과 아이는 병원에.

2년, 3년동안 '치료순번'을 무작정 기다리며 지쳐가는 그 아이들의 부모는 자식의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가요? 기적을 기다려야 하나요? 과연 무엇이 중요한지 다시금 각인 시켜야 하나요?

시장경제 좋죠. 좋습니다.

적어도 그 아이들도 그 좋디 좋은 시장경제를 맛보게 해줘야죠.

지각이 생긴 후에, 시장경제의 풍요로움을 맛보게 한 후에 하늘로 보내줘도 하늘에서는 늦게 보냈다고 화내지 않습니다.

전여옥씨는 신사동의 미용실 얘길하며 '경기가 안 좋아서 미국으로 가는 실장'이야기를 들며 '경제'얘길 합니다.

누군가는 하루 세끼가 경제적 부담으로 다가와 하루 두끼니로 줄이는 이야기를 합니다.

보험이든 공제든. 출발점은 '십시 일반'이었습니다.

밥 한공기에서. 열사람이 한 숟가락씩 떠주면 1사람의 밥한공기가 나옵니다.

빌어먹을 세상, 우리가 힘들면 우리 아이들에게는 꿈이라도 줘야하지 않을까요?

난 이 세상 가난한 자들의 모든 아버지가 저렇게 존Q처럼 쇠고랑을 차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나또한 저렇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Posted by 함장

2004/09/01 12:03 2004/09/01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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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ainmaker

내가 '레인메이커'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것은 어릴 때 본, 당시 '모건 프리먼'도 처음 만나게 된 영화 'The Power of One'을 봤을 때였습니다.

비를 만들어 주는 사람. 기우자. 샤먼의 성격을 띤 사람. 곧 그는 하늘과 소통하는 사람이며. 그토록 사람들이 염원하는 것을 중간자의 입장에서 연락하고 이어주며 해결해줍니다.

존 그리샴....(이 아자씨도 그러고 보니 존 G군. 메멘토의 임팩트가 큰데? --;;;) 그 아자씨 책은 읽은 적이 없습니다. 왠지 당시에 라디오에서 떠들어 대던 번역스릴러물들은 다 마케팅의 힘이라 생각하며 무시......할 수 없었고 다만 돈이 없어 못 사봤지요 --)a

맷 데이먼은 참 좋아하는 배우이기도 합니다. 액션을 연기하던 천재를 연기하던, 참 어울리는 배우이지요. ㄱㄱ ㅑ~ 므쪄~

각설.

늘 상상속의 일로만 여겨지며 참으로 일어나기 힘든 기득권층과의 전쟁은 극적인 재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출내기 변호사. 흔히 하는 얘기로 변호사 면허에 잉크도 안마른 맷 데이먼이 펼치는 거대 보험회사 '그레이트 베너핏(이름 죽입니다. 큰~~~ 이익이랍니다 --;;;)'과의 전쟁은 그런 면에서 '정의는 승리한다'라는 점을 부각 시킬수도 있습니다.
반면 사법권이 독립된 민주주의와 돈이 있어야 강자가 되는 자본주의가 결합된 시스템에서 '권리를 위한 투쟁'에는 '돈'이 든다는 사실을 여과없이 보여준 점은 무척이나 슬픈 점이지요.

하지만 이런 것들보다 간간이 지나쳐 갈 수 있는 점들은 더욱 이채롭습니다.

존 보이트는 악역의 '거성'입니다. 정말 저토록 얄미운 악역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 헐리웃에 몇이나 될까요. 하지만 저 악역을 엿먹이는 것은 맷데이먼보다는 데니 드비토가 더욱 통쾌합니다.

그(데니 드비토)는 극중에서 변호사 시험에 무려 5번이나 떨어졌습니다. 실질적 수완은 좋으나 시험공부하는 머리는 꽝인 셈이지요. 그런 그는 자신만의 '정보찾기 노하우'로 판례를 찾아내어 존 보이트를 완전 엿먹입니다.

그리고 그 판례를 존 보이트에게 던지며 한마디 하죠

'변호사라면 이 정도는 기본으로 해야할 거 아냐'

그렇습니다. 변호사 자격이 주어졌다고 본업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하고 '돈벌기'에 바쁜, 기득권에 빌붙어 '정의'를 잃어가는 그들. 통렬하게 비웃습니다.

그때 존 보이트의 표정연기란 --)b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보다 '쪽팔려하는' 악역의 표정을 그리도 리얼하게 연기하는 모습. 역시 연기의 '대가' 답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 영화에서 가장 감명깊었던 부분은 바로 '백혈병으로 죽어간 원고'의 아버지. 자폐증에 걸린 그 아저씨의 연기는 단연 압권입니다.

그는 보험회사에게 울분을 표하지도 않습니다. 보험회사 변호인들에게 화를 내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화를 내어봤자 소용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들이 병에 걸린 이후로 그렇게 '고양이들'과 함께 폐차된 자동차 '안'에 앉아 술병을 쥔채 살아가던 그에게 아들의 죽음. 그토록 억울한 죽음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요?

과연 그는 그들을 용서했을까요?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향합니다. 맷 데이먼은 배심원에게 원고가 죽기전 남긴 '비디오 증언'을 보여주며 감성에 호소합니다. 하지만 원고의 아버지는 관람석에서 자신의 아들 사진을 가지고 '그레이트 베너핏'사의 대표이사에게 다가가 아무런 말없이 사진을 '보여'줍니다.

아무런 말없이 그렇게 보여줍니다.

그토록 행복한 가정을 어떻게 그렇게 파괴시킬 수 있을까요.

없는 자들의 주머니를 털어 챙긴 그들의 잇속. 이젠 더 이상 영화는 영화가 아니게 되고 거대공룡이 바로 내 코앞에서 칼을 든채 날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지독한 비용을 지불해가며 결국은 승리를 거머쥔 멧 데이먼과 데니 드비토. 하지만 남겨진 것은 연쇄적으로 일어난 '그레이트 베너핏'사의 보험 해약과 그로 인한 파산. 결국 그들에게 배상금은 지불불가능이 되어버렸고 승리의 사과는 씨알도 남지 않은 채 사라집니다.

역시 정의란 '속빈 강정'이란 비웃음일까요?

다시금 기득권앞에서 낱낱히 발가벗겨지는 없는 자의 서러움과 그 속에서 아프디 아프도록 '돈의 노예'를 넘어서서 '돈을 숭배'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속에서.

과연 '레인메이커'는 존재할까라는 의문을 해봅니다.

너무도 슬프고 우울한 이야기. 더러운 이야기.

그 속에서 나는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까요?

저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이야기인데 말이죠.

미키루크의 카리스마와 '로미오와 쥴리엣'에서 볼 수 없었던 클레어 데인즈의 색다른 모습도 볼 수 있는 레인메이커. 한번쯤 씁쓸해져 봅시다 --)b

Posted by 함장

2004/08/30 15:29 2004/08/30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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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間道, 無間道前傳, 終極無間

슬프고도 슬프다.

감정의 절제 따윈 필요없다.

그토록 슬픈 無間道를,
절제의 미학 따윈없이,

無間道前傳으로 다 까발리고,

終極無間으로 남겨진 자의 슬픔따위도 다 날려버린다.

無間道에서 추측할 수 있었던 슬픈 과거.

그런 과거들이 여지없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을때의 슬픔이란.

절친했던 친구, 경찰과 조폭이라는 관계에서 조차도 친구로 남았던 그들. 결국 Mary로 인해, 그들은 절천지 원수로 바뀌고.

경찰인 조직폭력배. 그런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유산'을 했다 말하며 떠나가는 사랑했던 여인. 7년후 만난 그녀는 '7살 소녀'를 '6살인 딸'이라고 소개한다.

조직폭력의 하수인 경찰. 오로지 또다른, Mary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다시금 사랑을 시작한다.

인연이란 이런 것인가? 이토록 질기고 질긴 것이 인연이라는 끈인가.

조폭 조직내의 경찰들, 그 둘을 잇고 있는 한사람. 그들 셋 만의 '역지사지'는. 너무나 아픈 이야기로 다가온다.

떠난 뒤에,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린 여자. 다시 이룰 수 없는 그 사랑을 얼마나 아쉬워 할까.

다른 누구보다도.

너무나 불운했던 양조위의 역할에.

코끝이 찡해오며 눈가에 눈물이 핑돈다.

누구나 행복할 권리는 있다.

Posted by 함장

2004/07/21 12:50 2004/07/21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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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들의 수다

주말에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를 보고 나서.

다시금 '킬러들의 수다'가 보고싶어졌다.

장진 감독의 사랑에 대한 접근은 그만의 색깔이 있고, 난 그 색깔을 좋아한다.

'간첩 리철진'에서도 그랬고, '킬러들의 수다'에서도 그러했으며, '아는 여자'에서도 그러한다.

그의 사랑에 대한 철학은 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으며, 생활고와 행복의 사이에 있다.

생명의 고귀함은 이 영화에선 배제되어있다. 킬러라는 소재를 다루면서. 그는 '죽음'을 최대한 가볍게 다루려 한듯 하다.

그렇기에 그는 '사랑'이 죽음과 닿아있음을 쉽게 얘기 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오영란'이라는 케릭터는 어떤 의미였을까?

사랑에 배신당한 오영란의 눈물에 아무리 봐도 이루기 어려운 청탁을 바로 수락해 버리는 상연(신현준).

저렇게 멍하니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오영란을 위해 세상이 시끄러워질 일도 '무식하게' 해나가는 그들.

정말 단순함이 묻어나는 그들의 대화를 엿보자.


재영 내 말은 평소 때 경비 태세가 아니라구.
상연 말해봐. 그래서? 하지 말라구? 포기해?..... 후후... 연달아 두 번째 포기네.

정우, 살짝 눈치를 본다.
재영, 답답해져 온다.

재영 (조금 언성이 높아진다) 막말로 그냥가서 쏘고 오면 되.
그래 그러면 그냥 끝나지. 그런데 어떻게 나와?
들어갈 입구는 많아도 나올 출구는 없는데.
공연 중간에 나가?
정우 그건 실례지.
재영 이도저도 말고 그냥 쏘고 튈까? 불끄고?
재영 (다시 차분해진다) 형, 알잖아? 이거 덫이아. 우릴 쫓던 차....
우리집 앞에 왔던 경찰차들.... 걸려온 전화. 모니터에 뜬 글.. 없어진 총알...

상연... 심각하게 대꾸가 없다가 일어난다.
그리곤 살짝 걷는다.

상연 오영란이야.

재영 뭐가 오영란이야?!!!!!!!

<인서트 되는 화면 ...

인트로에 나왔던 도로 ... 차안

상연 뒷자리에 탄다.
운전석의 여인 선그라스를 끼고 있다.
상연, 서류를 받는다.

여인 혼자 왔어요... 안심하셔도 되요..

상연, 여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뭔가에 홀린 듯....
고개를 들어 앞자리에 여인을 본다.
그리곤 입가에 기적을 만난 듯한 미소.
여인, 상연이 언제나 아침에 만났던 여인 오영란이다.

여인 처음이라서 뭘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잘 몰라요.
그냥 꼭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상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다시 현재

킬러들 .. 상연이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

재영 그럼...형.. 오영란 봤어?
상연 응.... (알듯 모를듯 미소를 짓는다)
정우 그럼 얘기도 해봤겠네...?
상연 응...... (행복감의 미소를 짓는다)

다시 인서트 되는 오영란의 차안
상연, 오영란이 가지고 온 서류를 보고 있다.

상연 네... 서류는 이거면 됐고... 한가지가 .. 꼭 .. 이 장소에서 이날 해야 하는 건거요?
오영란 어려우신 가요?
상연 장소가 쉬운 장소도 아니고...
또 준비해야 할 사항도 그리 만만치는 않아 보입니다.
(오영란,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상연은 오영란의 얼굴을 한번 보곤) 문제없이 해드릴 수 있습니다.
오영란 거기서 해주세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그렇게 보내주세요.
상연 많이 힘드셨나봐요?
오영란 참 재미있죠? 어렸을 땐 혈액형이 B형인 남자랑은 죽어도 안 만난다고
했는데... 성질이 안 좋고.... 괴팍하다고.... 게다가 곱슬머리에 왼손잡이...
안 좋은 건 다 갖춘 사람이에요.... 근데도 제가 왜 그렇게 좋아졌나 몰라요? ... 결국 이렇게 상처받고 증오하게 될 것을.....
재미있지 않아요?
그런 거에 후회하는 게......

조금 흐느끼기 시작하다간 운다.
아~ 오영란이 운다.

<다시 현재

킬러들 고민이다.

재영 그래서 오영란이 울었단 말야?
상연 울더라.. 슬프게...
정우 이뻐?
상연 응....진짜 이쁘더라.

킬러들 서로 얼굴을 한번씩 보곤....
어쩔 수 없다는 듯

재영 아.. 참 왜 오영란은 누굴 죽이고 싶어하냐?

자신들의 안위에 관심없다.

그저 아침마다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좋아하는 오영란.

그녀의 눈물 하나에, 그렇게 위험을 감행한다.

정말 위의 대사중. 정재영의 '얘기도 해봤겠네?'는 압권이다 ㅠㅠ)b

분명. 장진 감독의 사랑에 대한 태도는. '킬러들의 수다'와 '아는 여자' 사이에 닿아있다.

하지만 상이한 점은.

킬러들의 수다에서 사랑의 아픔을 준 햄릿의 주인공이 B형이었는데...

아는 여자의 지고 지순한 사랑을 하는 이나영도 B형으로 나온다.

아이러니인가? 아님 남녀의 B형이 다른건가 --)a

어쨋든. 이 킬러들의 수다는 몇십번을 봐도 잼있다 --)b


p.s 배경음악은 '킬러들의 수다'에 삽입된 또 하나의 창작 '오페라 햄릿' 中, 오필리아가 미쳐가는 모습을 담은 곡. 참고로 이 '오페라'햄릿은 공연된 적이 없으며, 오로지 '킬러들의 수다'를 위해 만들어진 극임. OST트랙에 존재하는 이 곡의 제목은 Crazy Ophelia.

Posted by 함장

2004/07/05 13:24 2004/07/05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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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 잔혹사

아 내가 왜 이 영화를 이제야 봤던가. 왜 그 현란한 포스터에 속아왔던 것인가.ㅠㅠ

순전히 이런 스틸샷 때문에

'저런 영화 안봐, 유하氏는 왜 저런걸 만들었냐.. 실망이네....'

라고 주절대던 나의 생각을 한방에 날려버렸다.ㅠㅠ

아 저런 설정샷에 속지 말아야지.ㅠㅠ

저런 설정샷에서만 본다면 말죽거리 잔혹사는 그저 그런 학원폭력물로 밖에 묘사 되지 않는다. 다행히도... 저런 샷 안나온다.

하지만 영화는.....무어라 형용할 수 있는 표현이 없다.

철저한 남자 중심의 영화라는데는 이견을 달고 싶지 않다.

하지만 권상우의 연기가 어쨌네, 한가인 연기가 엉망이네..... 하는 말을 동의할 수가 없다. 나는 영화평론가의 눈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상업영화의 감성에 100%공조하면서 열광하는, 감정이입을 무척 잘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내 눈에 거슬리지 않는 연기는 비판치 않는다.

권상우라는 미남에 몸매까지 되는 스타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권상우의 연기에서 느낀 공감대는 그의 어눌한 말투와,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서 다가온다. 최적의 배우. 그런 것 같다.

여러분들의 학창시절은 암울했었는가?

늘 시계를 풀어헤치고 윗단추 풀고 학생을 샌드백인양 다루던 선생.
교련시간 마다, 뺑뺑이에, 오리걸음에, 얼차려만 죽도록 받던.
대학을 반드시 가야 인간대접을 받는, 잉여인간이 되어선 안된다던.
그런 학교로부터의 소외감에 단결되어, 학교간의 패싸움으로 번졌던.
선배들의 교실에 끌려가 흔한 표현으로 다굴당하던.

다행히도 나는 신생학교에서 386, 486세대께 교육받으며 살아온 것에 감사한다. 그들도 결국엔 그들이 당했던, 똑같은 상황을 우리에게 보냈지만. 말죽거리 잔혹사 시대와는 다른, 적어도 소통의 채널을 확보해준. 그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버스를 타며, 등하교 길에 마주치던 첫사랑, 결국엔 그 첫사랑을 따라 학원까지 찾아가던, 선생의 무자비한 권위욕에 대들며 결국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구둣발에 짓이겨 지면서도 부모얼굴 떠올리며 차마 때려치울 수 없었던........ 내 모습, 아니 공감하고 동일한 과거를 가졌던 우리의 모습들.

쪽팔리면 학교 못다닐것 같던 알량한 자존심, 쪽팔리기 싫어서 암것도 없는 주제에 꼬운 선배에게 대들고, 잘나가는 동창 녀석앞에서도 지지 않으려 비웃음을 날리던, 결국엔 다굴을 이기지 못하고 절권도의 길을 보며 쌍절곤을 돌리던...... 왜 학창시절의 난 그랬을까.

영화 속 권상우와 나의 다른 점은. 아니, 그 시절의 선배들과 내가 다른 점은, 선생과의 관계였을 뿐이다. 머리가 굵어져 갈 수록, 선생도 처자식 걱정을 하는 한명의 인간이라는 것을 인지하며, 사회구조와 불합리에 대해 선생과 논하고, 그들이 펴지 못했던 꿈을 내게 펴라 해주던, 그러면서도 이상만이 아닌 현실의 괴리감과 타협에 대해 얘기해주던.

어쩌면 난 영화 속 권상우같이 성장이 빠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만두는 법을, 불합리한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을 포기하는 법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는지도 모른다. 난 깨닫지 못한채 학창시절을 마무리하고, 오히려 늦게, 다른 곳에서 그걸 느끼고 그만둔 건지도 모른다.

영화 친구 에서의 한마디였던, 말죽거리 잔혹사에서의 한마디였던.

'쪽팔리잖아'

알량한 자존심 따위가 아니다. 내 스스로 동일한 선상의 한 인권임에도 불구하고 무시받고, 짓밟히는 것은, 내 스스로의 존재감을 찾기위한 생존의 몸부림이다.

하지만 결국 영화 속 권상우와 나의 모습은, 똑같은 시점으로 귀결되어진다. 대학을 가야 하는 사회. 결국엔 내가 테두리를 아무리 벗어나도 사회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그 한계.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나를 추구했던 내가, 결국에 가서 부닥친 대학의 벽.

결국 그 모든 커다란 백인, 흑인들을 꺾었던 이소룡은. 우리들 마음 속에 있을 뿐.

그런 아쉬움이 남겨짐에도 불구하고.

분명 세대가 나와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나오는 김진표의 랩은.

아련하게 코 끝이 찡해져 오는 무자비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미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들, 군대에서 배운 모든 것들이.

사회가 병영의 연장선이 되어있음을 느낄 때.

정말 권상우처럼 외치고 싶다.

'대한민국 사회(학교) 다 좆까라 그래!!'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이 외침 뿐이다.

다만. 그렇게 외칠 수라도 있어서. 난 존재한다.

너희의 권위와 권력으로 내가 너희에 의해 지워질 순 없다.

Posted by 함장

2004/04/29 13:24 2004/04/29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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