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for '영화극장'


53 POSTS

  1. 2005/09/30 그래, 배트맨은 공포스러워야지 - 배트맨 비긴스 by 함장 (13)
  2. 2005/09/28 폐쇄적 구조가 던저주는 즐거움 - 어썰트 13 by 함장 (6)
  3. 2005/09/27 라라 크로프트와 같이 살려면.... -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 by 함장 (9)
  4. 2005/09/26 겉만 보고 판단해선 안된다니깐? - 이니셜 D 배틀스테이지 by 함장 (15)
  5. 2005/09/22 아아~ 하늘에 핀 한 송이의 꽃 - 밴드 오브 브라더스 by 함장 (13)
  6. 2005/09/21 현대 물리학의 결정체 - 항공모함 by 함장 (8)
  7. 2005/09/14 약자의 무기에서 강자의 무기로 - 잠수함의 역사 by 함장 (7)
  8. 2005/09/13 스토커의 공포 - 인크레더블 by 함장 (7)
  9. 2005/09/12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 판타스틱 4 by 함장 (10)
  10. 2005/09/10 무엇을 위한 희망인가? - 불멸의 이순신 by 함장 (3)
  11. 2005/09/09 결국 남자를 성장시키는 건 여성 - 바람의 검심, 추억편 by 함장 (10)
  12. 2005/09/08 밥먹고 섹스만 하는게 어때서? - 녹색의자 by 함장 (5)
  13. 2005/09/06 살아있는 신화 - Michael Jordan to the MAX by 함장 (13)
  14. 2005/09/05 순애보로의 귀환 - 101번째 프로포즈 by 함장 (10)
  15. 2005/09/04 스나이퍼, 그 은밀한 움직임 - 히스토리 스페셜 : 저격수 시리즈 by 함장 (9)
  16. 2005/09/04 현대판 셜록홈즈 시리즈 - CSI : Crime Scene Investigation by 함장 (7)
  17. 2005/09/03 '연애의 목적' 읽기 by 함장 (9)
  18. 2005/09/03 상식의 틀을 깨면 진보가 보인다 - 스팀보이 by 함장 (2)
  19. 2005/09/02 소름끼칠 정도의 매끈한 설정 - 박수칠 때 떠나라 by 함장 (2)
  20. 2005/09/02 자연을 모방한 무기개량 - 21세기 비밀병기 by 함장
  21. 2005/09/01 전체주의가 만들어낸 명차 - 독일의 영광, 실버 애로우 by 함장 (5)
  22. 2005/09/01 한 과학자의 집요한 도전 - 신비의 해저 괴물 대왕오징어 by 함장 (13)
  23. 2005/09/01 실종이 주는 두려움 - 악마의 삼각 지대: 버뮤다 삼각 지대엔 무엇이 숨어 있는가? by 함장 (6)
  24. 2005/08/31 나는 눈물로 구원을 받았다 - 연애의 목적 by 함장 (4)
  25. 2005/08/29 음모 이론의 결집체 - X-Files by 함장 (12)
  26. 2005/08/29 신데렐라 없는 이야기 - 아일랜드 by 함장 (2)
  27. 2005/08/29 일단 결과를 정해놓고 과정을 알아가기 - 속도 위반 결혼 by 함장 (7)
  28. 2005/08/29 수채화로 그려진 동화 - 곰이 되고 싶어요 by 함장
  29. 2005/08/27 이상에 대한 갈망 - On your mark by 함장 (10)
  30. 2005/08/26 전쟁터, 외인부대, 고독 - Area 88 by 함장 (8)

사실 팀 버튼 감독의 그 오묘한 원색 빛깔 찬란한 배트맨 시리즈를 뛰어넘어 프리퀼을 만든다는 것에 '현실적 요소'까지 부과한다는 것은 더이산 본연의 '배트맨'과 다르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사실 만화 영웅중에 가장 '정상적 인간'에 가까운 배트맨이 팀버튼 특유의 판타지적 세상에 물들어가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었지만 이토록 '현실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낸다는 소식은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될지 사뭇 궁금하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영화는 뜻밖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특히 액션 장면에서 보여준 그 '정신없는' 편집은 일부 관객에게 불편함을 선사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 세세한 액션에도 배트맨이 입고 있는 복장을 감안하여 만들어낸 액션이라는 점과, 잠깐 잠깐 스치듯 보여지는 액션과 그 '재빠른 몸놀림'을 통해 하나하나 사라져가는 악당들이 느끼는 '공포심'을 적절하게 담아냄으로써, 역시 '공포'의 대명사인 배트맨을 제대로 그려냈다는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이던가? 크리스천 베일의 '목소리'연기는 가히 압권이었는데, 가면을 통한 이중성을 넘어서서 배트맨일 때와, 아닐 때의 완벽하게 다른 인물을 꺼낼 수 있는 그 '격한' 목소리는 스스로가 악당들에게 '공포스러움'을 줄 수 있도록 만들어내는. 배트맨의 인물이 훨씬 살아나는 점을 발견하면서 극에 몰입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온다.


더군다나 배트맨이 무슨 무기공학 '박사'도 아닌데다가 무술 익히는데만도 꽤나 걸렸을 터, 어려운 무기는 회사의 힘을, 소소한 무기는 스스로 구닥다리 방법을 통해 제작하는 모습을 비춰줌으로써 전자장비에 둘러싸인 머나먼 영웅이 아니라, 현실에서 접근해나가는 가까운 영웅으로 둔갑시키면서 사람들에게 '환타지'가 아닌 동시대의 인물로 착각토록 만들기도 한다. 물론 등장하는 요소들도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닌자의 '인술'을 통해 배트맨의 은닉성을 보조하고, 그런 어둠속으로 부터 걸어나오는 영웅이 주는 '두려움'은 결국 '공포'로 형성되는 사회정의라는 한계를 가지게 됨에도 불구하고 배트맨이 '영웅'으로 대접 받을 수 있는 것은, 일종의 '경외감'을 통해 같은 인간의 틀 속에서 '인간을 넘어선 인간'의 현신을 통해 안심을 느끼는 '종교적 틀'의 변종인지도 모른다.

종교가 가지는 경외심, 그리고 그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 다는' 교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범죄를 저지르면 '배트맨'이 찾아가는 이야기는 이미 속세 곳곳에서 뻔히 발견되는 '신의 추종자'들의 윤리의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포'가 정의를 다스리는 모습이 불편한 것은 마치 인간이 '지옥'의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선행을 하게되어야하는 슬픈 해석과 맞물리면서 느껴져오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어쨋든, 개그의 발현 수준이 이젠 하늘을 찌를 집사 알프레드와 어벙벙하면서 깜장옷만 입어대면 날카로워지는 배트맨의 모습은 그 암울한 고담시의 밤 그늘에서 한 줄기 유쾌한 빛이 아니던가?

가장 궁금한 것은. 그럼 조커부터 시작해서 기존 스토리 다시 다 갈아엎어주는 건가?

Posted by 함장

2005/09/30 12:29 2005/09/30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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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이하드' 이후로 폐쇄적 구조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상당히 뛰어난 감각이 아니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과 치밀한 시나리오가 뒷받침 되지 않을 경우엔 극악의 영화가 탄생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은 누가 봐도 익히 아는 사실일 것이다.

공간적 배경이 '폐쇄'라는 길 하나로 주어진다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쓰일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내부에 있는 것과,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 그리고 내부의 사람들은 그 얼토당토 않은 외부의 장벽을 뚫고 '밖'을 향해 나가거나, '밖'을 향한 연락을 위해 몸부림 치는 것은 당연한 전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특이한 상황 전개'라는 것이 존재할리는 없기에, 아예 애초에 주어진 상황의 설정이 흥미로운 점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기도 하다.

쉽게 얘기해서 '왜?' 갇혔는가 말이다.

자연재해는 늘 사람을 고립시키에 충분하다. 심지어 이제는 쫄딱 망해버린 자동차의 도시 디트로이트의 겨울 폭설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리라.

주인공에 대한 소개를 위해 초반에 전개된 마약반의 '함정수사'는 우리의 에단 호크가 얼마나 '마약 거래상'들이나 '마약 제조업자'들에게 화딱지가 나있으며, 마약으로 인한 범죄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을지 상상이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피어스로 더 잘 알려진 로렌스 피쉬번이 마약상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이 둘이 '절대' 양립하지 못할 거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만드는 효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나, 결코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들여다 보면 과연 인간이 자신이 '추구하는' 신념보다 '생존'에 더 중요한 비중을 둔다는 그 본연의 의지에 초점을 맞추게된다. 일종의 자기합리화랄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라면 '생존'해야지 '신념'을 추구할 수 있다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러나 혹자는 '신념'을 위해선 죽음도 무릅쓰지 않던가? 그런 이들에게 과연 이 부당한 '강제폐쇄'는 어떤 식의 자기방어기제로 작동하게 되는지에 대한 고찰을 보여주는 영화의 스토리 전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만하지 않은가?


이런 밀실 이야기에 늘 대립되는 감정의 '군중'들을 해결해 나가는 것은 리더역할을 하는 주인공이 당연하겠지만서도, 보통의 겁에 질린 일반 군중이 아니라, 범죄자들과 경찰들로 이루어진 묘한 연합전선은 그들의 상대 또한 부패경찰이라는 점에서 궁극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범죄자는 부패했다, 부패 경찰도 부패했다. 그럼 경찰의 적은 범죄자와 부패 경찰이어야 하나 그러지도 못한다. 창 밖엔 부패 경찰이 있고, 여기엔 범죄자와 연합한 경찰이 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옳은 경찰'인가? 범죄자가 부패 경찰과 대치 중이라면 이 범죄자는 '올바른 행동'을 벌이고 있는 것인가?

이 묘한 권력구도의 설정은 폐쇄공간에서 쓰이는 전형적인 이야기 풀이의 '변종'으로 치부될 수도 있으나, 내부의 또 다른 인물이 '거래'를 틀면서 결국 '연대감'에 대한 의심으로, 인간 사회의 내부 깊숙히 들어있는 서로에 대한 신뢰감의 지속력에 대한 의문으로. 하나의 축소판과도 같은 인간형을 보여줌에 어색함이 없다.


머리에 총구를 겨눈 상태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특이한 인간들만이 결국 살아남는다는 '권선징악'과도 같은 구도의 결말 속에서도 산뜻한 느낌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은 간만에 '잘 짜여진' 시나리오로 구성된 여러 장치들의 연결고리와 그 속에 숨은 '인간'의 포악한 면에 대한 씁쓸함도 마저 놓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인지도 모른다.

폐쇄구도의 이야기는 뻔한 전개여도 즐겁다.

Posted by 함장

2005/09/28 12:47 2005/09/28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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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에서 다시금 깨달은 거지만 아무리 달리 보려해도 안젤리나 졸리의 모습은 쌍권총의 라라 크로프트를 넘어서질 못하는 것 같다. 선글라스 까지 꼈으니 더할나위 없지 않은가? 영화 '툼레이더'를 본 사람이라면 아마 그 괄괄한 성격의 말괄량이 아가씨를 누가 데리고 살꼬라면서 한탄했을지도 모르듯이 이 '스미스 부인' 또한 그 들쭉날쭉한 성격의 끄트머리에 선 간당간당한 우리의 브래드 피트는 불쌍해서 못봐주겠다.

사실 영화의 재미는 이렇게 간간이 드러나는 안젤리나 졸리의 육감적인 몸매를 감상하는 재미였으리라. 그러나 어느 새, 이 웃고 시각으로 즐겨야할 오락영화는 감히 '가정의 평화'를 노래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며, 심지어 확실히 '현명한' 위치에 놓여있는 안젤리나 졸리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 집안의 확실한 구도 자체가 '여성우위'에 있음을 만천하에 공개한다.

그렇다. 암만봐도 브래드 피트는 기 못펴고 산다.

영화의 첫 인터뷰 장면에서 그네들의 '섹스'가 그리 신통치 않았다는 것을 읽어냈을 때, 이미 저 나이에 결혼생활의 끝을 달리고 있을 그들이 자연스레 연상되는 것은 '섹스'가 삶의 중심에서 얼마나 중요한 소통의 도구인가를 다시금 느끼게 만드는 무작위적 코메디의 철학을 넘어서는 현학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묻게되는. 과연 '액션 영화'로 남을 것인가?

과연 그 '섹스'를 멀리하게 된 이유가 남성에게 있느냐 여성에게 있느냐 혹은 '서로에게 있느냐'에 대한 해답을 도통 찾을 수 없는 이 살벌한 '전쟁터'의 분위기에서 과연 무엇을 추측해야하는지, 실마리는 어디에 있는지 생각할 새도 없이 이미 영화는 빠른 전개를 통해 여성이 '집안 권력'을 주도하면 가정이 평화롭다는 '인지상정'을 폭력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실적 가정생활을 눈꼽만큼도 보여주지 않은채, 오로지 '힘'과 '폭력'만이 난무하는 영상들로 가득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처음과 끝을 통해 그들의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삽입함으로써, 오히려 한 떨기 꿈같은 그네들의 총격전이 치열하고 그 폭력적 미학에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결혼생활'의 색다른 표현으로 다가오게끔 하는 감독의 '센스'는 어느새 관객의 '액션영화' 인식에 무시되기도 한다.

영화 '트루 라이즈'라던가, 부부 중에 어느 한 쪽이 '특수요원' 또는 '킬러'로 나온 영화들이 즐비했으나 그들의 결과가 결국 또 다른 한쪽도 같은 직업을 갖던가, 혹은 비극이던가로 귀결되는 모습을 쭉 봐오던 우리에게 그 '출발'부터 같은 길을 걸어오던 동종업계 종사자들 간의 경쟁으로 보이는 이 치열함은, 결국 '가족'이란 한 틀에서 비웃어주기엔 너무나 황당한 이야기 아니던가?

차라리 '스파이 키드' 시리즈나 '인크레더블'와 같은 맥락의 길을 걷는다고 선언을 했다면 이해해 줄 수도 있었으나, 그저 '둘'의 스캔들을 뒤로하고 개봉되기엔 좀 씁쓸한 부부싸움.

그래도 즐거운 건, '생각없이' 보기에 충분한 영화라서기 보다, 어떻게든 안젤리나 졸리의 캐릭터 때문에 '여성주의'를 찾아보려다가 실패한 내 모습이 어처구니 없음에 즐거운지도 모른다.

결국 라라 크로프트 같은 성격과 같이 살기위해선 속궁합(?)도 잘맞아야 한다는 결혼의 '절대적 진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족의 '화평'을 안겨준다는데 절대적 동의를 안겨주는 영화.

Posted by 함장

2005/09/27 11:13 2005/09/27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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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가 뭔지 몰라도 이니셜D 애니메이션이 주는 감동은 남다르다, 일본에서 팔리고 있는 실제 스포츠카들을 3D로 작업하여 일반 '공도'에서 경주용 차량으로 둔갑시키는 화려함은 드리프트가 뭔지 모르던 사람들에게 '기본 상식'으로 각인시켜 버렸고, 물리상식 따윈 개나 줘버리게 만들면서 그 화려한 '심야 주행'의 세계로 사람들을 몰아갔다.

뭐 어쨋든 어처구니 없는 설정 속에서 화려함을 만끽하는 일은 각자 알아서 해야할 일이고, 그런 '괴리감' 속에서도 우리가 이 애니메이션을 즐겨찾고 하루라도 빨리 '다음회분'이 연재되길 기다리는 열광적 팬들도 많다는 점을 인지하고, 조금 딴 얘기를 해볼까 한다.

사실 레이싱에 대한 이야기 거리들이 그동안 꽤나 나왔더랬다. 우리 시대의 미남 중 한 분으로 꼽힐 나이가 되어버리신 '톰 크루즈'가 출연한 '폭풍의 질주'라던가 최근에 실베스타 스탤론 옹께서 출연해 주신 '드리븐'까지, 그 '경주'가 주는 남다른 즐거움은 아마 대부분이 느끼는 스릴일테다.


그런데 기존의 그러한 '경주' 영상들의 기본 토대는 '동일한 차량'에 의한 '기량의 승부수'였다. 타고난 천재적 감각도 중요하지만 어쨋든 그 '하드웨어'는 특출나면 특출났지 절대 '뒤쳐지'는 일은 없었기에. 그런면에서 이 '이니셜 D'가 주는 화려함 속에 뭍힌 AE86의 꼬락서니는 지금까지 '경주'를 지켜보던 우리들에게 신선하지 않으면서도 꽤나 '통쾌한' 구도의 변화를 보여준다.

생긴건 꼭 70년대 포니에다가, 그 옆에 떡 하니 붙어있는 후지와라 두부점. 괄호치고 자가용. 참 어처구니 없는 '외모'가 타쿠미와 결합하여 상상초월의 다운힐 스피드를 구사한다는 것은 시청자들 모두에게 전해주는 일종의 대리만족을 대신하고 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외모'에 대해 자신있어 하는 사람은 없으며, 스스로의 자아성찰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된 사람들이 얻는 경지의 '자기사랑'을 배제하곤 요즘 시대에 누구나 한번 쯤 '성형'의 유혹을 느끼지 않던가?

AE86이 가진 한계를 끝까지 끌어내고, 외형의 튜닝은 전혀 없이, 그 내부에서의 폭발로 다시금 자신의 한계점을 상위로 끌어올리는 모습은 마치 '인간'의 그것과도 동일시 여겨진다.


비록 애니메이션이기에, 그렇게 '겉만 보고 판단하는 것들'과 '지레 짐작하는 것들'을 쉽게 비웃을 수 있지만서도. 그럼으로 인해 우리가 얻는 '만족감'은 충분히 애니메이션을 즐길만한 시도로 여겨지지 않던가? 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관이 펼쳐질리 없음을 알면서도 마냥 행복해지지 않았더냔 말이다.

어쨋든. 프로젝트 D 가 가동되기 전까지의 모든 '배틀'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이니셜 D - 배틀스테이지. 전편을 몰아 볼 수 없는 직장인과 바쁘디 바쁜 수험생을 위하여. 이 액기스를 추천하는 바이다.

Posted by 함장

2005/09/26 12:54 2005/09/26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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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참 대단한게 그냥 아무나 다 제대하면 '공수부대'라 구라를 쳐도 믿어준다. 그 악명높은 '공수부대'라는 것과 그 양대 산맥에 걸쳐진 '해병대', 요 두 가지만 볼작시면 참 재미난 현상을 보게 된다. 사실 흔히 얘기하는 '공수부대'를 가리키는 것은 '특전사'를 의미한다. 물론 그 특전사 중에서도 특수전 임무를 주로 하는 사람들은 '부사관'들이고, 사병들이 특수전 임무를 맞는 경우는 몇몇 다른 헬기 강하 부대라던가 수색대를 제외하곤 얼토당토 않는 얘기다. 그런면에서 또 '해병대'와 '특전사출신'을 비교하는 것도 꽤나 웃긴것이다. 사실 둘이 비교대상이 아니라, 육군에 특수전 임무를 띈 부대가 특전사라면 해군엔 그런 역할을 하는 부대는 해병대라기 보다 Seal팀이나 UDT등이 비교하기 편할텐데 도무지 왜 그다지도 '해병대'가 들어가는지는 도통 알 수가 없다. 물론 해병대도 특수수색대는 특수전을 이행하지만 그들은 국가의 '전략기동부대'일 뿐 특수전을 담당하는 팀도 아니다. 더군다나 특전사의 경우 장기적 특수전과 정규전을 모두 염두에 둔 부대이지만 해군의 Seal이나 UDT의 경우 단기 작전을 수행하는 '미션팀' 정도로 해석하면 쉽게 이해 될게다. 더군다나 어차피 특전사도 Seal팀에 찾아와서 수상침투를 비롯한 훈련을 수료받고, 해군이나 해병도 산악전 따위의 교육을 위해 파견교육을 받으니 그렇게 비교의 대상으로 두지말고 '그냥 우리 군'으로 보면 무리가 없을 텐데 말이다.

어쨋든. 난 휴가나온 군인들을 여기저기 보면서 말이다. 도대체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 공수교육단이 있길래 '개나 소나'다 날개달고 다니는 것을 보면 참 기가찬단 말이다.


공수훈련 3주의, 흔히하는 '지옥같은 경험'은 사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늘상 술 안주거리로 올라오는 이유를 난 도통 알 수 없다. 물론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는 자리라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게 '아무나' 받아 볼 수 있는 훈련은 아니잖는가?

뭐 어쨋든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보면서 초반 감정이 '많이' 상했던 이유는 도대체 저 녀석들은 돈이 얼마나 남아 돌길래 매번 비행기를 타면서 낙하를 해대냐는 것이다.

사실 공수훈련중에 가장 기분이 더러운 것은 바로 첫 낙하인 300미터 상공의 기구에서 이다. 시누크에선 그냥 뛰어내리면 그만이지만 도무지 시누크보다 400미터 낮다는 이유로 기구에 둥둥 떠서 그 난간에서 움찔움찔해대는 기분이란 참 더럽다. 더군다나 뛰어내린후 '1만 2만' 속으로 세는 사람은 참 비위좋은 사람임도 인정한다. 1만의 만자가 나오기도 전에 놀이공원 바이킹 최정상의 10배쯤 되는 장기이동을 느끼고도 그렇게 숫자 세는 사람은 진정한 강하왕일 수 밖에.

어쨋든 매번 비행기 타고 낙하연습하는, 그것두 2차세계대전때!. 그런 미국이 부러울 수 밖에 없었다. 나도 자동으로 낙하산 펼쳐지는 비행기에서 훈련받았으면 그 더러운 기분 따윈 가지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유유히 세상구경.....을 할 수는 없지만 낙하하며 바라보는 세상경관은 참 뛰어나다. 그 재미로 낙하를 하기도 하지만. 번지점프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그 즐거움은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을게다.

낙하산의 줄이 목덜미를 세게 치기 때문에 기왕이면 낙하전에 목의 깃을 올려세워 보호하면서 교관과 눈싸움하던 기억들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하는 1부의 커레히 공수 훈련 과정은 이 땅의 모든 예비역들에게 '얼차려'와 '소위 길들이기' 따위의 악습이 존재하는 군대의 모습에서 '정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풍경은 비록 저리 보여도. 낙하산을 펼치고 낙하되는 속도는 무려 초속 5~6미터에 달한다. 요즘은 재질을 바꿔서 2~3미터로 늦춰졌다고 하지만, 군대 물자가 최신식이 나왔다해서 금새 갈아엎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어쨋든. 스필버그와 톰행크스가 만들어낸 이 리얼한 2차 세계대전 속으로 들어가보면, 참담한 전쟁의 폐허와 얼어죽을 낭만을 느낄 수도 있을게다.

Posted by 함장

2005/09/22 13:10 2005/09/22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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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커버리의 '익스트림 머쉰'시리즈에서 아주 흥미로운 '항공모함'다큐멘터리를 발견했다.

항공모함이란 개념이 나온 것은 20세기 초반이다. 배 위에서 비행기를 띄오보려 했고, 그 띄운 비행기가 정찰을 담당해서 승리를 올리자 이에 질세라 강대국들이 찍어내기 시작한 것이 바로 '항공모함'인 것이다. 상당히 웃긴 얘기이기도 한데, 오로지 '비행기'를 싣고 다닐 목적으로 만들어진 '배'라는 것도 어이없는 상황이지만, 그런 '배'들이 난무하던 시절이 '거함거포 주의'를 낳았단 사실도 돌이켜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어쨋거나 현재도 전 세계 바다의 왕자 랭킹 4위에 들어가는 일본은 그런 면에서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매우 유명해졌다. 진주만을 때려잡은, 그 공포의 '항공모함'에서 날아오른 제로센이 미국의 정박해 있는 함대를 '초토화' 시켜놓음으로 미국이 입은 손실이 막대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복수로, 미국 또한 100여대가 넘는 공격기로 일본의 '항공모함' 함대를 공격하려 했으나, 근접도 못한채 항모에서 날아오른 제로센에게 초토화당해버렸다. 미국이 암만 날고 기어도 천황의 자식들이 모는 '제로센'을 공중전으로 이겨낼 순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게 왠 일이던가? 구름 속에 숨어있던 미군의 1개 비행대대가 항모로 귀환하여 유류보급을 받던 일본의 제로센기들을 무시한채 항모를 집중공격하여 단 6분만에 격침시켰으니 말이다. 그렇다. 그렇게 공격받는 시간동안 '제로센'은 한대도 이륙하지 못했기에 그 미군기들은 유유히 돌아갈 수 있었다.

요기까지. 돌아보면 무언가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 '배'든 '비행기'든 정박되거나 착륙해 있으면 '무용지물'인 것이다. 도통 전투력 0란 말인것이다.


이런 '일본의 교훈'을 통해 항공모함의 편대는 비약적 발달을 하게 된다. 흔히 얘기하는 '궁수가 활시위를 당기기 전에 궁수를 제압하라'는 교훈을 잘 적용한 사례라 할 수 있겠다. 항모에서 전투기가 이륙하기 전에 항모를 격침시키던가. 아니면 침공을 받게되면 악착같이 살아남아 항모에 남은 전투기를 모조리 이륙시키던가 말이다.

물론 말이 쉬울 뿐. 아예 죽자고 덤벼드는 '카미카제'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선 함대는 모든 공격력을 대공화기에 말아넣을 수 밖에 없었다.

요즘 현대의 항공모함 편대는 보통 항공모함 1대와, 순양함 2대, 구축함 4대, 잠수함 2대 순으로 구성이 된다. 잠수함과 구축함은 대잠작전 위주로. 순양함과 항공모함은 '대공작전'위주의 공격력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흔히 알려진 '이지스 시스템'을 위한 연계이다.

사실 함대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은 공중으로 부터의 위협이다. 이는 '전투기'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함 미사일 따위의 모든 '공중으로부터의' 위협을 의미한다. 잠수함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이나, 잠수함이 어뢰 발사가능 거리까지 좁혀오려면 그 촘촘하디 촘촘한 대잠 작전 방어선을 뚫어야 하지만 전투기의 경우 수평선 너머에서 장거리 대함미사일 몇방 쏘고 돌아가버리면 그만이기에 당하는 입장에선 더욱 바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으로 돌아가서 미친척하고 비행기몰고 통째로 몰아쳐 오는 일본군을 상상해보라. 함대원들은 모든 화기를 동원해서 그 녀석이 갑판으로 떨어지지 않게 공중분해 시켜야할 생존을 위한 의무가 있는 것이 되어버린다.

물론 현대의 함정들은 그런 '대공미사일' 체계나, 골키퍼나 팰렁스 같은 최후의 저지선까지도 갖춘 뛰어난 함정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위협은 심히 두려운 것이다.


그렇기에 미국이 더욱 두려운지도 모른다. 현대 물리학의 정수는 다 끌어모아서, 추진력엔 원자력, 레이더 교란 시스템, 자체 레이더, 원자력에서 나온 스팀을 사용한 캐터펄트, 그 캐터펄트를 이용해 항모의 30노트 추진력과 합세하여 가볍게 날아오르는 전투기, 그 전투기 보다 높은 상공에서 전투기 레이더에 비치지도 않는 적을 발견해서 자동으로 데이터 링크를 시켜주는 전자장비들.....

도무지 '창'과 '방패'를 늘상 같이 가지고 있는 그들이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는가? 자기들 딴엔 '자유'를 지키고 널리 '자유'를 퍼뜨리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내 눈엔 그저 두려울 뿐이다.

어쨋든, 적을 알고 나를 알면 100전 100승이니, 항공모함의 발전 역사와 전반적인 '연계'를 알고 싶다면 한번 쯤 볼만한 다큐멘터리이다.

Posted by 함장

2005/09/21 12:18 2005/09/21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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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많은 사람들이 잠수함이 가지는 전략적 우위라던가, 그에 상응하는 대안 세력이 훨씬 '큰 위력'을 가진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비밀로만 감춰져 있던 그 어떤 '군사적' 요소들 보다는 사실적 고찰이나 정보 접근에 대한 불필요적 제한들이 엮어내는 아쉬움들일 경우가 많다.

EBS의 군사 다큐멘터리 중 하나인 이 영상물은 잠수함이 발전해온 역사의 '큰 맥'을 조금씩 더듬어 주면서 그 변화의 중심은 항상 '전쟁'이었고, '무기'로써의 잠수함을 벗어나지 못함을 일깨워준다. 역시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서인 걸까?

사실 잠수함이 개발된 목적은 애초에 그 의지가 '스텔스' 기능. 그러니까 적의 '시야'로 부터 사라진채 은밀히 접근하여 요격하고 사라지는 이론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만들어졌다. 화력이 쎄다던가, 막대한 군사력을 가진 자들은 '정공법'으로만 치고 나가도 충분하기에 당연히 이런 개발은 '단시간 내에' 적을 섬멸할 수 없는 위치의 진영. 즉 약소국이라던가, 침략받는 위치에서 해결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숙제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렇기에 그 첫 '잠수정'에는 해군도 아닌 미 육군이 탑승했으며, 그 공격의 대상은 18기 세계 최강을 달리던 영국해군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미국의 독립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벌인 '약소국 미국'의 대영제국 함대에 대한 공격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물 속에서 공격을 감행한다는 무슨 UDT의 개념의 확장자격인 이 작전은 후일 미국의 남북전쟁에서도 쓰이게 된다.

당연히 남북전쟁의 약자는 남군이었다. 그런 남군이 스스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잠수함 개발에 열을 올리면서 북군을 견제하려 했던 성과는 후일 제 1,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잠수함 운용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경과 중에서도 특히나 재미난 역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일랜드 인들 중, 대기근으로 영국에 대한 분노를 가진채 미국으로 대 이동한 사람들 중에서 '잠수함의 아버지'가 탄생했다는 점과, 제 1차 세계대전 중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그 악명이 높았던 U-Boat가 독일의 패전으로 강제 개발 중지가 되었던 것을 '히틀러'가 부활시키고, 그런 독일의 기술력을 통해 현재 우리나라의 '잠수함'들이 도입되었다는 점을 볼때, 나치즘을 통해 '혐오'의 극을 달리는 히틀러라는 존재 덕분에 현재의 '해군력'을 갖춘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 보면 역시 여전히 '역사'라는 것이 섣불리 판단되어서는 안될 '존재했던 일'이라는 점을 각인시키게 된다.


사실 그토록 경쟁이 치열했던 영국과 독일의 잠수함 전쟁에서 비록 독일이 그렇게 '몰락'해 갈 수 밖에 없던 잠수함 인력 보급 시스템이었지만. 그토록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사람들이 축전지 외에 '원자력'을 생각지 못했다는 것. 물론 그럴 여력이 없었지만, 그런 비약의 경쟁 구도가 '영국'과 '독일'에서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으로 바뀌어 나간 것은 결국 '미국'의 첫 원자력 잠수함인 '노틸러스'가 생겨남으로 인해서 변화되어 간것이다.

잠수함이 수직발사대를 통해 '탄도 미사일'에 '핵'을 실어 날려보낼 수 있다는 것. 지구 상 어디든 연결된 바다를 통해 미국 본토에서 몇 천킬로미터 떨어진 대륙에도 미국의 힘으로 '폭탄'을 투하할 수 있다는 것은 가히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재래식 잠수함은 여전히 '약자'의 무기로써 존재하고 있다. 잠수하여 항해할 수 있는 기간이 무려 6개월이나 되는 무서운 원자력 잠수함의 잠항능력을 갖추진 못했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잠망경 위치까지 부상하여 스노클을 올리고 디젤엔진에 발동을 걸어 축전지를 충전해주어야 하는 재래식 잠수함임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잠수함보다 훨씬 낮은 '소음'율을 유지하는 그 심해의 무서운 병기는 '약소국'의 바다도 지켜낼 수 있는 무서운 저력이 숨어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 핵잠수함의 무서운 '속도'와 그 오랜 '잠항'능력에 견줄바가 아니더라도, 잠수함 본연의 '은밀한' 기능쪽은 재래식 잠수함이 한수 위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면. 충분히 약소국가의 방어적 무기로 사용되기에 '경제적'인 무기일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인명'을 살상할 수 밖에 없는 무기들이지만. 강대국의 독주를 막기 위해 약소국이 갖추어야할 작은 용기의 방패로써 손색이 없는 재래식 잠수함. 잠수함 '한대'를 잡기위해 몇십척의 전투함과 몇 대의 대잠헬기가 운용되는지, 그리고 그런 함대가 운용되어도 잠수함을 잡아낼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의 비율이 높지 않다는 점을 들 때. 이 '무서운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저력'도 꽤나 만만치 않음은 분명하다.

Posted by 함장

2005/09/14 13:16 2005/09/14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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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n'이라는 영화가 있다. '웨슬리 스나입스'와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한 '광팬'의 스토킹을 다룬 작품이다. 그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섬뜩'함을 이 아동용에 가까운 애니메이션에서 느꼈다면. 이미 이 애니메이션은 아동용의 그것을 넘어선 스릴러 물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다.

픽사르의 개성넘치는 인물 묘사와 그 배경의 리얼리티는 이미 정평이 나있다. 캐릭터는 만화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실사에 버금가는 화려한 그래픽은 보는 이의 눈을 휘둥그래지게 만들기도 한다.

사실 인크레더블은 '판타스틱4'보다 훨씬 전에 나온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판타스틱4'를 능가하는 각 캐릭터의 '연계'를 보여준다. 포스필드를 사용하는 딸이나, 거의 무협지에서 쓰이는 허공답보의 한단계 아래인 수상비(水上飛), 일위도강(一葦渡江)과도 같은 경지에 이른 초스피드 구사의 아들, 괴력의 아빠, 고무줄을 넘어서 도저히 인체로 보이지 않는 엄마 등등, 이 '가족'의 조합은 실로 강대하다. 그 뿐이던가? 악마로도 변신하는 막내 아들의 모습은 가히 이 집안이 '영웅'다운 집안임을 인정케 한다. 얼마나 가소롭게 웃어댈 수 있단 말인가!

영웅의 '은퇴'이야기 나부랭이는 관심이 없다. 그들의 무료한 일상이 곧 우리의 무료한 일상이고 그들의 평범함이 곧 우리의 평범함인데다가, 그들이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에서 다 때려치고도 무슨 짓을 하던 먹고 살 수 있는 인크레더블 가족과 아무런 '특수한' 능력하나 없는 관객들 사이의 괴리감은 이미 애니메이션이 주는 즐거움에 푹 빠져버릴 수 없게하는 장애물 따위는 갖추고 있지도 않다.

허무맹랑은 허무맹랑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네의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어쨋든 만인의 스포트 라이트를 몸소 받는 영웅이 던진 한마디로 가슴에 비수가 박힌양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영웅들을 갈아엎으려는 의도를 보이는 저 악랄한 '신드롬'은 동정을 해줄 수도 없으나 무턱대고 무시할 수도 없는 소외자이기도 하다.


누구나 이 시대의 '루저'들. 늘 집중을 받는 자는 따로 있고, 성과를 통해서 자신이 부각되는 일은 없으며, 행여 운이 좋아 부각된다하더라도, 곧 잊혀져가는 시시각각변하는 현대사회. 그 속에서도 다시금 '부활'을, 영광을 찾아 헤매이는 불쌍한 영혼들이 주위에 즐비하게 널려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때. 우린 마냥 '신드롬'을 악인으로 쫓을 순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 섬뜩한 스토킹과, 자녀까지 납치해가는 악랄한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섬찟한 주근깨. 그 악의에 찬 얼굴에서 피어오르는 묘한 장난끼는 어쩌면 이 시대의 청춘들이 쫒고 있는 허영과도 그닥 멀지 않은, 겹쳐가는 환영을 보여주기도 한다.


가족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프로즌이 자신의 평생을 같이할 사람을 차치하고,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가정을 뛰쳐나오는 이 현실적 괴리감은, 슈퍼 히어로라면 무조건 용서해주어야 하는 '히어로'의 시각만을 조명하는 쓰디쓴 영화의 핵심을 향해 비웃음을 날리기에도 충분하다. '슈퍼 히어로'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 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더라도. '나 아니면 안됀다'라는 생각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고 오만한 생각이라는 것을 쉽게 망각하는 수퍼 히어로 영화.

결국 우리가 바라는 것은 지구를, 내 신상을 지켜줄 히어로가 아니라, 나와 함께 같이 늙어갈 동반자들 이라는 것을 쉽게 가려버리는 이야기를 통렬하게 비판하지 못한 인크레더블은 결국 그 한계를 넘어서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4명의 캐릭터가 활약하는 모습은 마치 한편의 멋들어진 액션영화보다도 훨씬 스펙터클하고 화려하다는 점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나. 저 아줌마에게 반해버렸단 말이다.....

Posted by 함장

2005/09/13 11:38 2005/09/1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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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블코믹스의 영웅들은 더 이상 특별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미국을 지켜내는 그들이 한국인의 눈에 그리 곱게 보일리도 없거니와, 온갖 슈퍼히어로들이 판을치다 보니 이젠 각각의 히어로 네임 조차 외우기도 벅찰 정도다. 오죽하면 슈퍼맨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 헐리우드 영화이겠냐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갸날픈 허리와 육감적인 몸매의 제시카 알바는 우리를 극장으로 인도하기에 너무나 완벽한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은가?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한다. 도대체 이 영화 어딜 봐서 여성관객을 위한 서비스가 있냔 말이다. 맨 우측의 철없는 섹시가이? 글쎄, 별로 잘나보이지도 않잖은가?


혹시나 수염 기른 남자를 좋아한다면 현실의 이들 모습에서 '인간횃불' 역할을 한 저 크리스 에반스에게 혹 빠질지도 모른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했으니 크리스 에반스가 이 영화를 본 모든 여성관객을 끌어잡았을거라 확신도 해주자. 그러나 우리가 엑스맨의 울버린 역할에 남성들도 열광했듯이, 남성관객이 열광할만한 캐릭터가 이렇게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제시카 알바'의 허리선과 가슴선 만으로도 모든 걸 눈감아 줄 수 있는 점은 충분히 '칭찬' 받아 마땅하다. 결국 뒤집어 얘기하면 볼 것 없단 얘기지만.


마치 40대의 나이로 비춰지는 나머지 두 주인공들. 이마에 패인 깊은 주름과, 결혼 생활 꽤나 오래했을 듯한 저 대머리 중년남성의 모습은 아무리 헐가워진 우리나라의 '중년문화'에 끼워 맞추려 해도 내겐 너무나 먼 당신 아니던가?

엑스맨 시리즈 같이 영웅이 떼거지로 등장하거나, 적어도 배트맨과 로빈 같이 3인조로 출동한다 하여도 일당 백의 역할을 하던 영웅들을 보아오다가, 도무지 하나씩은 맥을 못춰 각개격파 당하듯이 힘을 못쓰던 영웅들이 상추, 콩나물, 된장찌개, 고추장까지 완벽하게 버무려진 비빔밥을 봐야 맛이 돌듯, 네명이서 쇼부보는 클라이막스는 신선하기 보다는 예견된 일이기에 그저 '시각적 즐거움'으로 확인하는 재미를 볼 뿐이다.


사실..... 이 장면에서 난 고스트 버스터즈를 떠올려버렸다......

Posted by 함장

2005/09/12 11:25 2005/09/1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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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장장 100회가 넘는 상영분을 끝낸 '불멸의 이순신'이 종방했다. 드라마 사상 초유의 제작비도 들였겠거니와,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를 넘어서 '조선시대' 주말 대하드라마가 이토록 국민적 열성을 받은 일도 참 드물게다. 심지어 이젠 공중파 뿐만이 아니라 케이블, 위성 채널까지 수십여가지인데 그렇게 주말 저녁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니던가?


드라마 기획의도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순신을 제작한 이유는 '새로운 리더쉽'을 보여주기 위해서라 하고있다. 과연 '새로울' 것이 있는 가는 의문이라 하더라도,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리더쉽'은 충분히 연구대상이며 본받을 것이 많다는 점도 사실이니까 말이다.

최근에 '박노자'氏가 한국인의 '이순신 신드롬'이 박정희의 군사문화 잔재와 연관된 전체주의로 흘러가고 있다고 얘기가 나온 적이 있는데, 난 개인적으로 이 사람이 흔히 소개될 때,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을 잘 '아는' 사람으로 소개된다는 것이 조금 껄끄럽다. 물론 한국인들 스스로 보다 객관적인 관찰력이 뛰어날 수 밖에 없는 외부인인데다가, 그가 가진 보편적 상식에서 우리사회의 비뚤어진 모습을 관찰하다가 보면 그 개연성을 역사적 사실에서 비춰보는 것은 당연한 논리수순이기도 하나, 과연 그 정도 평가를 받을 날카로운 시각을 가졌냐하는데 대한 의문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어쨋든 드라마 기획의도가 가진 '국민 분열을 통합하기 위한...'이라는 부분엔 나도 동의할 수가 없다. 국론이 분열되는 것이 불안하여 통일해보기 위한 다른 시각을 비춰주는 것은 어찌보면 기존 정권의 3S(Sex, Sports, Screen)과 맥락이 같은 이야기로 밖에 떠벌여지지 않는다.

새로운 리더쉽을 보여주고 싶다는 얘기는 현재의 혹은 과거의 리더쉽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현재의 구도에 대한 절박한 심정이 결부되어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이의 염원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의 염원을 담은이와 과거의 향수를 찾는 자들에게 뿌려지는 정제되지 않은 '리더쉽'의 표출은 분열된 국민의 논의를 통일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다른 관심을 부추기게 될 뿐이니까 말이다.

다시 박노자氏 얘기로 돌아가보자면, 그는 명확하게 잘못 짚어내고 있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박정희가 정치적이든 어쨋든 끌어낸 것이 맞긴하나, 현재의 드라마가 비춰지는 인물과 '박정희'가 꺼내놓은 인물의 차이는 현격하다.

군사적 인물의 영웅화가 전체주의를 이끌어낸다는 의견에는 동조할 수 있으나 과연 '형식적 군사'의 주체인 드라마 속의 이순신이 과연 국민들에게 '군인'으로 다가갔을지, 하나의 '전투적 독립체'로 다가갔을지에 대한 판단을 보건데 과연 박노자氏는 드라마를 관찰해 온것일까?

대한민국 남성 50% 이상이 군복무의 경험이 있으며, 그런 그들에게 선조의 명을 거역하는 이순신의 모습이 '군인'의 모습으로 비춰질까? 이미 대한민국의 사람들에게 그 모습들은 '군인'의 모습이 아닌 그저 직장이나, 사회 곳곳의 모습에서 '남들이 Yes를 말할 때 No를 외칠 수 있는 용기'로 보여지는 그 모습이 과연 '군사 전체주의'와 맞물릴거라 생각한다면 그의 '한국을 아는 모습'은 반쪽짜리일 뿐이다.

어쨋든 우리가 이순신을 통해 얻는 것은 위대한 역사의 이야기도, 한 인물의 위대한 인간상도 아니다. 역사는 '존재'했었고, 그 인물도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못한다. 애써 후일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더라도 존재했던 사실에 대한 영향력을 절대시간이 지난 오늘에서 다른 결과를 도출해낼 순 없으니까 말이다.


불멸의 존재라는 이유는 그런 것이다. 존재했던 사람을 지워낼 순 없다. 우리가 다만 그에게 '기대는 이유'는 일본을 막아냈기 때문도 아니고, 그 뛰어난 전략체계와 전술, 병참의 보급, 정말 군사전략가로써 '한줌의' 실수 조차 용납치 않던 모습또한 더욱 아니다.

우리네 삶이 지속 될 수록, 가진 것이 한계가 있고, 그 가진 것을 통해서 이루어야 하는 성과는 커야한다는 것. 그렇게 투쟁해나가는 삶속에서 스스로의 '이성'을 얼마나 믿고, 그 '이성'을 통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걸고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띄워 살아나가는 우리들의 치열한 삶.

그 삶에서 얻는 희망을 보기위해, '이순신'의 한마디를 떠올릴 뿐이다.

'신에게는 아직도 열 두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것이 늘 모자라다고 불평해오며, 늘 더 가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한번도 내가 가진것에 감사하고, 그것을 걸고 최선의 성과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런 우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묵묵히 적어 들려줄 수 있었던 한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에서 '희망'을 찾는 것은, 군사적 우월감도, 역사적 우월감도 아닌. 현실에서도 적용되는 한 조상의 지혜를 동감하고 이 난세를 이끌어나갈 현명한 계략을 떠올려 볼 시간을 건네줌이다.

박노자氏. 당신이 그토록 잘 아는 '한국인'은 이순신을 보면서 맨 주먹에서 지금의 한국을 만들어낸 '다이내믹'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자주, 쉽게 간과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Posted by 함장

2005/09/10 09:09 2005/09/1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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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바람의 검심을 접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데다가, 원작인 '만화'로 부터의 출발이 아니라 '추억편'을 통해서 접하였던 경험으로 인해서 그 '진중함'의 뒷편을 익히 알고난 후에 통하게 되어 그 심도가 남달랐던 기억이 선명하다. 더군다나 지인이 상영식을 가져주며 건넨

'자네 일본의 역사를 좀 아는가?'

라는 질문에 당혹해 할 정도로 그 깊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문외한인 나로써는 호기심의 발동을 억누를 길이 없어 다시금 역사서에 고개를 파묻는 기현상까지 생겼으니 말이다.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는 흔히 '왜곡'으로 점철된 문화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왜곡의 중심에는 사실 일본 스스로 보다는 서구인들의 시각이 훨씬 접점되어있음도 볼 수 있다.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 땅에 발 조차 디딘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화와 칼'이라는 철저한 미국인의 시각에서 쓴 일본 문화의 틀에 대한 연구가 일반적 인식으로 다가오는 '아이러니'는 과연 정체성을 누가 부여하는 가에 대한 명목적인 고찰을 부추기기도 한다.

예를들어 그네들의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나오는 '신선조(신센죠)'라던가, 명치 유신(메이지 유신) 지사(志士)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들이 튀어나오는 이유를 다각도로 분석하는 것들을 볼작시면 흔히들 '왜곡'이란 단어를 가져다 붙이는데 사실 그 '왜곡'이라는 것이 어떤 분야의 왜곡을 의미하는지 나로써는 도통 'No'라는 것이다.

흔히 신선조를 '깡패집단'으로 분류하는 사람들을 내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그네들의 교토 치안 유지 명목과 사실 종로에서 야쿠자 나와바리 견제하면서 살아갔던 김두한 패거리나 그 명분이 서로 다르지 아니하건데 우리네 김두한은 영웅이고 걔네 신선조는 깡패새끼라는 '이분류법'은 도무지 어느 '이데올로기'에서 나온지 모르겠단 말이올씨다 라는 것이다.

사실 그도 그럴것이 '막부'의 보수성을 지키려던 무사들과 사무라이들, 낭인들까지도 아름답게 미화시키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 개화기때의 위정척사파들과 크게 다를게 없는 사람인것을 도대체 뭘 그리 '일본'얘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물고 일장연설을 해대는지 나로써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단 말이다. 역사는 '역사'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지 그게 '잘되거나', '잘못된 것'으로 쉽게 판단 내릴 수 있을 정도로 그 거대한 물결의 흐름을 가벼이 볼 순 없는 것이다.

2004년이었던가? 우리의 톰 크루즈 아저씨가 설쳐댔던 '라스트 사무라이'도 그 명치 유신의 막부 측의 사람들 이야기를 다루며 아직도 어느 쪽이 '승자' 혹은 '패자'로 판단하기 어려운 역사적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즐비하건데 그렇게 쉽게 결단을 내는 사람들의 학자적 풍모는 쓸데없는 겉치레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바람의 검심, 루로우니 켄신은 그런 '유신 지사' 중의 한 사람을 가상의 인물로 부가하여 실존 역사속에 배치된 가상의 이야기로 즐거움을 주는 하나의 픽션이다. 유신, 유신 해대니 기분이 거슬리기는 하나 뭐 어쩔 수 없이 저 단어 외에 사용할만한 것이 없으니 참도록하자.

추억편의 이야기는 명치 유신이 시작되기 전의 폭풍같은 일본의 상황과, 그 속에서 켄신이 어떻게 검술을 익혔으며, '발도제'라는 별명을 얻어가며, 얼굴에 왜 '십자흔'이 생겼는가를 이야기하면서 막부화 유신 지지파들의 사이에 일어나는 권력 암투와 칼 하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보여준다.

빗속에서 '창포'의 향을 내뿜던 토모에가 히무라 켄신의 암살로 빚어진 '핏빛 비'를 끼얹음 당하며 시작된 그들의 로맨스 또한 그 속에서 '한 남자'가 성장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필연적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또 '여성'이 남성의 성장을 위한 도구냐고 핀잔을 주시는 분들이 더러 계시겠지만 어쩌겠는가, 소녀검객 아즈미 시리즈도 아니거니와 살인을 즐기는 미학적 취미는 없다 할지라도 '검 이야기'에 사죽을 못쓰는 남정네들의 킥킥대는 이야기일지언정 결코 '여성주의' 픽션은 아니잖는가?


칼 하나에 의지하면서 잠조차도 편히 잘 수 없는 암살자의 길. 그 길에 뛰어든 '토모에'의 활약은 이미 날이 시퍼렇게 선 상태로 뽑아진 검을 감싸기 위한 칼집으로 '매도'되며 결국 그 운명적 칼집을 향해 걸어나가게 되는 뻔한 스토리와 달리 그 섬세한 터치를 통한 눈동자 하나하나까지도 엮어내는 애니메이션의 특징은 가히 명작이라 불릴만큼의 독보적 견지를 유지한다.

원작이 그저 '얼빠진 듯 한' 켄신의 방랑 생활에 섞여 역사를 비췄던 것을 볼작시면 이렇게 진중하고 묵직한 역사의 흐름을 '춘하추동'에 담궈 뽑아내는 설정의 기술들은 실로 뛰어난 '화법'이 아니던가? 켄신의 스승이 하는 결론적인 대사인

'검은 흉기, 검술은 살인술'

이라는 깰 수 없는 굴레를 깨기 위한 몸부림. 살수가 아니라 '활수'를 펼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뇌는 그가 가져야 하는 '막부'를 부숴야 하는 검의 한계를 지고 결국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채, 삶의 돌고 도는 인생의 격정을 계절별로 보여주며 그 눈부신 성장을 보여준다.


결국 토모에는 켄신이 또 다른 살수를 펼치더라도 그 길의 '끝'에 다다르면 해야할 일을 결심케 해줌으로 인해 켄신의 4계절의 끝 자락에서 그를 또 한번 성장의 도약으로 끌어오르도록 만들어준다.

아무리 냉혹한 남자든, 범접할 수 없는 남자든. 그 사람에게 '따스한' 눈빛을 부여하고, 그로 인해 성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여성'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음을 익히 알기에. 그저 뻔한 사랑이야기가 아닌 '당연한' 이야기인 것도 알기에.

궁금해지는 것은.

그럼 여성은 진짜로 16세면 완전히 정신적 성장이 끝나버리는 건가?

Posted by 함장

2005/09/09 09:00 2005/09/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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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수 감독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큰 기대는 당연히 없을 수 밖에 없었다. 어설픈 페미니즘을 나불거릴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두려움도 있었고, 서정 특유의 색기가 줄줄 흐르는 묘한 매력의 구렁텅이에 흠뻑 빠져들거라는 추측도 있었으며, 서른 둘의 이혼 여성과 열 아홉의 남자아이라는 요즘엔 '흔해져 버린' 커플의 이야기가 솔깃하지 만은 않다는 것이 적극적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되기에 충분했는지도 모른다.

사랑에서 '섹스'를 뺀다면 과연 사랑인가? 라는 의문을 넘어선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내겐 그저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이 그 옛날 '거짓말'이라는 영화에서 보여주던 '탐닉'의 수준을 짓밟고 넘어설 수 있는 '상업적 흐름'을 보여줄 수 있는가가 관건이었고, 결국은 그에 부응하는 낮설지 않은 이야기를 펼쳐줬음은 인정할 수 있다.

예컨데 포장 자체는 왠지 사회 통념적으로 있어서는 안될, '열 아홉과 서른 둘의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 속살을 까보면 그저 그런 사랑이야기로 밖에 보일 수 없는 구도를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자신들의 '상황'으로 상처입고, 힘들어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서정이 받은 '사회봉사 100시간'을 견뎌내는 장면들은 그의 행동에 대한 속죄도, 억울함도 아닌, 그저 단순히 그 '순간'이 어처구니 없음에 대한 '분노 아닌 분노'일 뿐이다.

그러면 우리의 탕아, 심지호는 어떤가? 도무지 열아홉이라 볼 수 없는 저 놀라운 통빡 굴리기는 마치 이 영화가 박철수 감독의 영화가 아니라 김기덕의 영화인가 착각하게 만들 정도의 어처구니 없는 캐릭터가 아니던가? 물론 나도 애늙은이로 불리던 사람이었지만, 애늙은이와 30대 초반 여성과의 사랑은 '나이'를 넘어선 '나이살'을 통한 연애질이 아니던가?


초반에 보여준 신문기자들의 접근과, 그 후로 스토커 처럼 이어지는 신문기자의 취재활동도 그리 '부담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것은 감독이 의도한 '3者'의 시선 구도라기 보다 애초에 그런 '나이 제약'은 사회의 가시적 허울일 뿐, 명명백백하게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느껴지게 한다.

그렇다. 오히려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결국 그들의 서로에 대한 소통의 의지였다. 며칠 밤낮을 먹고 자고 섹스만 함으로써 그동안 떨어져 있던 나날들에 대한 복수를 해대고, 그것도 모자라 도대체 아버지 카드를 사용하는지, 노동은 제외된채, 아무 생각없이 그저 먹고 즐기고 섹스하고 잠을 잘 뿐이다.

그런 그들이 결국 도달하는 것은 사랑이던가? 그렇다. 사랑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애틋한 사랑도 사랑이고, 격정적인 사랑도 사랑이다. 그 누구나 일생의 몇일간을 처음 본 여자와 격하게 섹스하고, 그 날들을 잊지못해 평생 반추하며 살아가는 경험을 가질 수 있지 않던가?

심지호가 결국, 성인이 되어 '생계'를 걱정하는 아주 미약한 한마디의 모습속에서야 겨우 그들이 부닥친 삶의 환경이 얼마나 머나먼 거리에서 그들을 향해 달음박질 쳐오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의 사랑이 '철부지'들의 연애질로 보일뻔한 이 장면 또한 결코 그들의 격정적인 사랑에 해가 될리가 없다.

결국 그들이 바라는 것은 같이 있고 싶음, 같이 사랑나누고, 섹스를 하고, 같이 요리하고 밥을 먹기 위함이 아니던가?

사실 영화내내 나의 주의를 끈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오윤홍씨의 매력이 상큼발랄 발산되는 영화속 캐릭터는 나를 서정의 색기 따위는 차치해버리고 홀랑 빠져들게 만들만큼 강렬하기도 했다.

서정의 친구로서, 이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상상'을 채워가며 나름의 즐거움을 만들어내고, 그들의 행복을 옆에서 관찰해나가는 모습.

극중 화자에 가까운 이 모습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우리사회의 통념을 깨기 위한 시도들이 결국 각 연결요소인물들의 잔치장이 되어버렸을 땐, 그 초점이 흔들려 아쉬운 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위치는 보는 이가 가져야할 태도를 견지하기 쉽게 해주었다. 사회적 제도인 '법'의 테두리를 무시하는 그의 공방에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넘어선 인간 본연의 자유도 주어지고, 그 자유의 틀속에 심지호와 섹스하는 상상을 펼쳐보이며 스스로의 생각의 나래에 대한 자유도 부여한다.

그리고 법적으로 미성년인 심지호와 관계를 가지는 서정도 그 공방에선 용서를 받은거나 진배없지 않던가?

사실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과, 안위, 그 외의 여러 잡다한 요소들 때문에 '노동'을 하고 그로인해 벌어먹고 사는 모습을 견지한다고 인지하지만 포장마차 아주머니의 한마디는 너무나 노골적이고도 직설적인 표현으로 충고 한마디를 건넨다. 결국 먹고 살려 하는 짓이 '살기 위함'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함'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진실.

궁극적인 목적이 살기 위함이던가? 사랑하기 위함이던가? 성공하기 위함이던가?

식욕이든 성욕이든. '욕구'가 생긴 후 부터 인간이 죽을 때까지 영위하는 삶. 그 속에 든 '지속의 욕구'가 충족하게 채워질 때까지, 밥먹고 섹스만 하는 것이 '나쁜 짓'으로 오해받기엔, 우리가 실제 행해가고 있는 삶 속에서 그것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들인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나저나 오윤홍씨에게 너무나 빠져버렸다. 공방에서 구워내는 모습과 그 '섹시'한 모습이 겹쳐지면서. 간만에 '극'을 보면서 여배우에게 빠져버린다.

Posted by 함장

2005/09/08 17:04 2005/09/08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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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NBA 팬도 아니었을 뿐더러, 농구라는 종목을 경험한 것도 결국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의 그저 동네 형들을 따라하는 공놀이였을 뿐이었다. 손조차 닿지 않는 링에 걸린 그물에 행여 손가락이나 닿을까 달리고 점프하던 그 시절의 덩크에 대한 과시욕구는 일본 고교농구 수준을 NBA 수준으로 포장해버린 '슬램덩크'의 연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슬램덩크가 인기폭발을 거치고, 손지창의 '보호안경'이 유행하면서 '마지막 승부'의 심은하 존재는 잊혀지는 설정들이 안겨준 것은 국민적인 '농구 돌풍'이었을 거다. 농구공 보다 약간 큰 아이가 농구공을 '즐겁게' 굴려대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마치 박세리 이후, 골프교육이 휘몰아치는 것 이상의 열기를 서민들에게 가져다 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 흔한 속설인, 유도를 하면 키가 안크고 앉은 키만 커진다는 이야기와, 농구가 아이들을 크게 한다는 쓰잘데기 없는 설정이 슬램덩크를 통해 일파만파 커지면서 아이들은 개나 소나 농구공과 농구화를 찾아대기 시작하기도 했다. 뭐 결국 오락실에서 참 보기 드문 시점의 'NBA 농구게임'까지 등장하면서 그 국민적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었다. 요즘과는 달리 말이다.

그런 우리들에게 '조던'은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의자 따위를 사용하지 않으면 링에 닿을 수 조차 없는 우리였지만, 자유투 선상에서 점프하여 호쾌한 덩크를 내리꽂는 그 백만불짜리 영상은 꽤나 많은 아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며 학교에 설비된 비디오 영상시스템에 늘상 VHS테잎으로 꽂혀있던 일이기도 했다.

빨간색 유니폼과, 23번이란 숫자의 각인은 그 후로도 지속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명확한 호선을 그리며 '날았던' 것이다. 그 유명한 '나이키'의 '에어 조단' 시리즈는 결국 그 '날아가는' 조던의 모습에서 출발한 마케팅이 아니던가? 인간이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공중에 떠 있을 수 있는 시간이 3초를 넘을 수 없음에. 조던의 그 웅장한 '활공'은 비약하는 새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지 않던가?

다큐멘터리는 그런 조단의 '마지막 시즌'을 담으며,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버지의 죽음을 통한 외도와, 다시금 NBA로 복귀한 후에 승리를 이끌어내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흔히들 조던을 '천재', '황제'라고 부르지만 나는 별로 그 단어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 NBA에 진출한 사람들은 모두 '농구의 천재'라고 볼 수 있는데다가, 조던이 행해온 시간들은 스스로 '황제'가 되어간 어처구니 없는 역사적 서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조던이 농구를 '정식'으로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의 일이다. 대부분의 부모가 자신의 자녀들이 어떤 길로 성공하길 바라며 '조기 교육'을 시키려 드는 태도에 대해 조던은 확고하게 말한다. 아이 때는 그것을 즐기도록. 사랑할 수 있도록 하게하라고.

조던 스스로 농구를 그저 즐겨오다가 '형식적'인 농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이미 머리가 굵어질 대로 굵어진 고등학생때였다는 것을 상기시켜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심지어 당시의 조던은 '제대로'해내는 것 조차 없어서, 자신의 단점들이 너무도 많아 그 많은 단점을 강점으로 만들어나가기 위해 피나는 훈련을 시작한다.

그렇게 노력했던 그 이기에, 그런 위대한 업적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을 묵묵히 보여주는 영상들은 '천재' 혹은 '황제'의 위명 아래에 덮혀 있던 그의 처절하게 스스로와 투쟁한 역사를 가려놓기에 바쁘다. 그의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아버지를 추억하며 '야구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의 모습도 늘 우리 언론이든 미국 언론에선 '우스꽝스러운 사태'로 비춰지기만 했다.

그러나 그는 남들보다 일찍 야구 구장에 나가 훈련을 했고, 그 누구보다 오래 남아있으면서 피나는 수련을 했다. 자신 스스로 야구에 대해 처음부터 시작하는 자세로 말이다. 그런 피나는 수련 속에서 '플라이 볼'로 비웃던 캐스터의 웃음소리가 '홈런'으로 바뀌는 '통쾌함'으로 전달되어져 오는 모습은 그가 이루는 개개인 스스로의 능력 개선이 이끌어내는 '타인의 인식전환'에 대해 얼마나 투쟁적인지도 느껴진다.

결국 그는 NBA의 경이적인 기록들을 토해내며, 마지막 은퇴 시즌을 월드 챔피언을 거머쥔채, 승리로 장식하는 모습으로 '전설'의 퇴장을 만인앞에 자랑해낸다. 그 장시간의 '외도'를 거치면서도 스스로 '살아있음'을 팬들에게 보여준 그의 모습은 스포츠맨쉽도 아니며, 그저 순수한 한 인간의 의지를 천명한 모습이기도 하다.

내 아이에게도, 언젠가 '그런 멋진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얘기해 줄 수 있다는 것. 그런 사람의 플레이를 동 시대에 살면서 느낄 수 있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즐거워지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들려줄 신화와 같은 존재. 이런 존재와 우린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산다는 것 만으로도 경이롭지 않은가?

Posted by 함장

2005/09/06 09:18 2005/09/06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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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겨울연가던가? 그런 '순애보'가 아줌마 팬들의 열혈 환성을 산 이유는 크게 멀지 않다. 일본이라고 그런 순애보 드라마가 없었던가? 이미 일본은 그런 '트렌드' 드라마가 사라지고, 온갖 '말초 자극적' 드라마들이 판을 치면서 나타나는 현상을 보인지 오래다. 그렇기에 '유행의 복고'를 통한 아줌마부대의 열화와 같은 성원은 '순애보로의 귀환'이라는 어이없으면서도 웃긴 한류 열풍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사실 일본의 극작가 거장인 '노지마 신지'의 '101번째 프로포즈'는 엄청난 대작이다. 이미 15년 전, 1991년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여파는 실로 상당한데. 드라마 주제곡이었던 Say yes를 통해 'Chage & Aska'를 국민가수 반열에 올려뒀고, 1993년에는 김희애와 문성근을 필두로 우리나라 영화로도 리메이크 된데다가, 2004년에는 그 '순애보'로 극동아시아의 '공동연대감'을 형성하며 '최지우'가 주연하는 '한중일' 합작 '101번째 프로포즈' 리메이크작을 선보일 정도로 그 인기는 아직까지도 전해져 오니까 말이다.

문화 차이를 넘어서서 이 '순애보'라는 것이 주는 동양적 감성은 아직도 사람들을 눈물을 자극할 정도의 뛰어난 저력을 가지고 있다. 40대의 호시노 타츠로 아저씨가 저 아리따운 30대 초반의 야부키 카오루를 사랑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가 이토록 많은이의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이유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이 드라마 어디에도 '신데렐라'는 없으며, 그저 조금 추한 얼굴의 이미 자기 자신만의 삶에 대한 고집이 가득히 머리구조를 지배하는 남성과, 아리따움의 도를 넘어서 궁극의 눈빛 연속 스킬 콤보로 남성을 제압한 후 길게 늘어뜨리는 생머리 사이로 45도 갸웃하게 숙여진 그녀의 얼굴을 보면 이건 말짱 넘어갈 수 밖에 없는 시츄에이션이 아니던가?


이 바보 형제는 또 어떠하던가? 사랑에 흔들리며 침울해 하는 두 형제가 선술집의 끄트머리에 나뉘어 앉아 자신들의 아버지를 회상하며 불러대는 노랫소리. 그 속에 담긴 사내들의 우울함. 마력처럼 이끌어져 버리는 두 사람의 연기는 '맛깔' 이상의 뛰어난 캐릭터의 몰입감을 보여준다. 그 긴 나이터울에도 불구하고 마치 연년생처럼 굴어대는 두 형제의 모습을 통해 사랑을 앓고 있는 '남자'들의 진솔한 이야기도 묻어나는 모습은 다른 감동과 다른 차원의 느낌을 건넨다.

드라마 어디에도 성공은 없다. 주인공은 늘 실패하고, 실패하고, 실패하며. 또 그런 실패들이 '짜증'스럽지 않게 포장된 솜씨는 가히 '노지마 신지'다운 깔끔함을 보이기도 한다. 사랑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리저리 방황하는 야부키 카오루의 역할을 멋드러지게 부담스러운 45도 각도의 고개짓으로 소화해낸 아사노 아츠코 역시 그 섬세하디 섬세한 눈빛으로 '떨림'을 표현해내며 꽤 많은 남성의 심금을 울려대지 않았던가?


15년전, 이 드라마에 열광했던 일본인들이 이제 아줌마가 되어 '겨울연가'와 '욘사마'와 '최지우'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이든, 사회 일이든.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이런 풍토에서. 그렇게 확고한 '믿음'을 주는 순애보와 같은 사랑. 그것이 주는 희열감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냔 말이다.

1990년대 초의 그 어설픈 '헤어스타일'과 거부감 이는 '색조'화장. 바지에다가 쑤셔넣은 남자들의 셔츠들이 비록 눈에 거슬릴지라도. 마치 중학교때 여선생님이 즐겨입던 정장스타일을 입은 여주인공을 볼지라도.

이들이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지금에와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이 시대에 존재할 수 없는 아픈 곳을 찔러주는 그런 이야기.

그 속에서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직 순수한 걸까? 아니면 이미 그런 것의 존재감따위는 잊고 사는 것일까?

Posted by 함장

2005/09/05 12:44 2005/09/05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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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단연 돋보였던 캐릭터는 바로 저격수였을 것이다. 십자가에 입맞춤하며 기도문을 읊조리며 한방, 한방 조심스럽게 쏘아대는 그 모습은 모두에게 선명하게 남아있을게다. 히스토리채널 스페셜 코너중의 하나인 4부작 '저격수' 시리즈는 그런 저격수들의 역사와 활동등을 그 발전의 모습을 담으며 의미깊게 전달하고 있다.

사실 저격수라 생각하면 무조건 '총 잘쏘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군대를 갔다온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대한민국의 실정을 볼 때, 그런 의미는 상당히 '우스운' 의미로 여겨지기 쉽다. 여기저기 '특등사수'로 인해 포상휴가들을 나온 군인들이 모두 저격수는 아니니까 말이다. 물론 저격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런 의미가 강한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다큐멘터리는 총 4부작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전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미 해병 저격수가 1부, 영국의 코만도가 2부, 미 육군 저격수에 대한 이야기가 3부, 특수기관의 저격수를 4부로 다루고 있다. 영국의 코만도를 제외하면, 모두 미군의 저격수를 특급으로 쳐줄 수 밖에 없는데, 그 연유를 들어다 보려면 잠시 곁다리 상식을 짚어봐야한다.

영화 '패트리어트 : 늪 속의 여우'를 보면 멜 깁슨이 이끄는 자원군이 지속적으로 적군의 '장교'를 저격하는 장면과 적군의 장수가 '비 신사적인', 장교를 골라 죽이는 행위를 중지해줄 것을 요청하는데, 미국의 '독립전쟁' 당시에 총 꽤나 쏘는 병사들이 영국군의 장교들을 지속적으로 저격했기에 그런 일들이 발생하게 된것이다. 독립전쟁 뿐만 아니라, 남북전쟁시에도 저격수의 그런 활동을 활발했는데, 서부영화에서 늘상 봐왔듯, 권총 한자루씩, 혹은 쌍권총을 쓰든 간에, 주점 앞에서 몇 발자국 띄워진채 서로 1:1 총 대결을 벌이던 '무식한' 정정당당함을 내세우던 미국인들의 시선에 그 저격수들의 활동은 그리 반가운 존재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미국의 저격수들은 그 후로도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전쟁기간 중에는 무척이나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나, 전쟁 종료후에는 양성되지 않는, 그런 대우를 받아왔다.

사실 저격수의 존재는 무척이나 크다, 현대전에서 저격수의 저격 범위는 800~1,800미터 이며, 그 저격 범위로 인하여 중대에서 대대급 규모의 병력이동을 지연시키거나 아예 막아버릴 수도 있는 위협을 가하기에 충분한 전력이기에, 현재는 아주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메김하고 있다.


미국이 이런 저격수들을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시작한 것은 베트남전 부터이다. 베트콩들이 밀림에 숨어서 지속적으로 미군을 저격해나가자, 기존의 경험에서 가져온 '저격수 잡는데는 저격수'라는 공식을 다시금 각인시키며 베트남전에 저격수들을 배치하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이 때부터 '2인 1조'라는 시스템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그 시스템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그리고 흔히 저격수들을 보면 '부사관'들이 많은데, 톰 베린져가 주연한 영화 '스나이퍼' 와 '스나이퍼2', 그리고 그 외의 군 영화들을 보면 저격수 교관이나 특등 저격수들은 대부분 중사 또는 상사의 계급을 달고 있다. 군대에서 '부사관'이라는 계급이 가져오는 그 '위험한' 임무 때문이기도 한데, 지휘권이 있는 장교와 달리, 전선의 최 전방에서 사병들을 통괄하고 자신이 앞장서서 싸워야 하는 '경험많은' 존재가 바로 '부사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나라는 정식적으로 '해병대'에서 저격수 교육을 실시하고 있고, 해병대에서 져격 교육을 담당하는 '부사관'들은 모두 미 해병의 '저격수 교육과정'을 모두 수료한 군인들이다. 해병이 이런 임무를 적극적으로 담당하는 이유는 바로 그 '은밀성'에 있기도 하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의 실존 인물인 바실리 자이체프는 능수능란한 '은밀한 이동'을 통해 단기간에 독일군 수백명을 저격한 뛰어난 저격수이다. 당시 소련군에겐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고, 훈장까지 받은 군인이니까 말이다.

우리 해병은 '해병수색대'를 비롯하여, 침투, 고공침투 등의 역할을 맡으며 적군에게 치명적 타격을 가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이런 치명적 타격에는 '적에 대한 정찰'도 주요 임무가 되고 있는데, 바로 그 임무를 저격수들이 맡고 있는 것이다.

은밀하게 움직이고, 그를 통해 적에게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여 정찰할 수 있는 이 능력은 '단위 부대 전투'와 다른 또 다른 전략, 전술적 승부수를 띄워주는 계기가 되게 한다.

미군이 걸프전때, 적의 군사시설을 폭격할 때에도, 스나이퍼 침투조가 근처까지 몰래 다가가서 레이저 유도빔을 폭격 건물에 지속적으로 비춰줌으로 인해 폭격을 성공적으로 유도해 낸 것도 이와같은 이유에서이다. 스나이퍼는 '저격' 뿐만이 아니라, 정찰, 폭격유도등 그 '은밀성'으로 인해서 상당히 많은 활약을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살인 병기'로 지탄을 받고 있다. 군대라는 것이 '억제력'으로 작용한다 하여도 그 '폭력성'으로 인해서 늘 지탄을 받고, 감시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다가, '저격수'라는 것의 존재목적 자체가 '살상'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격수들은 자신들의 한방, 한방이 결국 자신의 부대원들을 죽일 가능성을 제거시키는 일이라 믿고, 그 '살인'을 묵묵히 인정하려 드는 모습에선 내 이성은 비난을 날리고 있으나, 그들의 믿음을 뿌리째 뽑아 흔들만한 근거를 들기에 너무나 부족한 현대 국가의 '야수성'에 씁쓸한 비웃음만 나올 뿐이다.

Posted by 함장

2005/09/04 17:20 2005/09/04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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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만 봐도 무척이나 촌스러운 질감이 느껴지는 이 CSI 도 벌써 시리즈가 시작된지 5년이 넘었다. 국내에 X-File 시리즈나 ER 시리즈가 인기를 받았던 만큼, CSI도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고, 그로 인해 국내 케이블 방송에는 이와 비슷한 아류작들이 대거로 계약되어 방영될 만큼, '범죄과학수사' 혹은 '의학수사' 쪽의 시리즈 물이 넘쳐나고 있다. '메디컬 인베스티게이션' 이라던가 'NAVY CSI', '라스베가스' 등등 말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범죄물은 늘 인기를 끌어오던 품목이었다. 그러나 제작자의 이름이 1년에 한번은 우리 눈을 즐겁게 해주는 '제리 브룩하이머'여서일까?

사실 생명공학개론에서도 잠시 소개되는 '법의학 관련' 쪽에서 이용되는 과학이란 우리의 상식 속에서도 'DNA'라던가 '지문' 등의 이야기로 쉽게 와닿아있다. 심지어 총기류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각 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다른 형태로 새겨지는 흔히 '총지문'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는 것 쯤은 아니까 말이다.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솜씨는 극중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실마리들과 캐릭터 상호간의 연결고리들이 얼마나 흥미롭게 이어지는가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로 다가온다. 미국 본토에서도 그 많은 인기를 얻고 Spin-off 시리즈로 두 가지나 더 만들어지는 이런 '기록적인' 드라마가 나오는 것이 흔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CSI는 라스베가스 Crime lab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이 후에 인기를 끌며 만들어진 Spin-off 시리즈는 각각 '마이애미', '뉴욕'등으로 하나의 도시에 있는 CSI lab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재미있는 것은 미국은 각 주(州)마다 법이 다르기 때문에, 각 주의 CSI도 그 세부 권한이라던가, 형태가 다르다. 물론 그 상위 법인 '연방법'을 준수하는 내에서이지만 말이다.

어쨋든, 라스베가스에선 이들이 늘 주장하듯이, Officer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시에 의해 고용된 사람들일 뿐이고, 경찰 서장을 상관으로 두고는 있으나, 경찰은 아닌 신분이다. 마치 런던 경시청에서 늘 셜록홈즈에게 찾아와 사건의 해결을 부탁하듯이. 사건이 발생하면 이 셜록홈즈들이 돋보기를 들고오 사건현장을 뒤지고 증거들과 추리들을 제공하며, 경찰은 말그대로 '사법권'을 행사하는 도구적인 존재로 나온다.

우리나라 경찰도 물론 수사권이 없긴 하지만, 흔히 인식되는 탐문조사부터 시작하여 상당히 광범위한 영역에 CSI 요원들이 개입되고 있는 점을 볼때, 묘한 매력이 있는 시스템으로도 관찰된다.

더군다나, 범죄가 일어나고 그 범죄현장의 통솔부터 시작하여 거의 전권을 가지게 되는 이 '비경찰' 단체란 미국이란 나라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쨋든, 라스베가스의 CSI 중, '밤 근무조'의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에 영화의 영상은 비교적 '어두운' 면으로 구성되어있다. 물론 그 '어두운'이라는 것은 슬픈 다크블루가 아닌, 그저 밤이 주는 범죄의 공포와 연관된 어두움이랄까?

반장인 길 그리섬 부터 시작하여, 각 캐릭터가 가진 고유색이 너무나도 특출나게 잘 발휘되는 바람에 드라마를 보는 재미도 더욱 쏠쏠하다. 집에선 디스커버리 채널을 즐겨보고, 곤충학자이자 연애감정에 참 어색해하는 길 그리섬이지만, 한 대사에서 그가 가진 범죄에 대한 사고를 단편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내가 참을 수 없어하는 세 가지 것들이 있어, 부인을 때리는 남편, 어린이 성폭행, 그리고 아이들을 죽게 만드는 인간쓰레기'

물론 그리섬의 대사처럼, 이 드라마가 이토록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보만을 보이면 좋겠지만, 현실과의 괴리감 짙은 이상을 비웃듯, 그렇게 보기좋게 해결되지많은 않는다. 물론 그런 반전과, 현실성 속에서 더욱 보는 재미를 느끼게 되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 외에도, 이혼가정 문제, 자녀 양육문제, 인종차별 문제, 도박, 권력욕등, 군중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여러 단면을 보는 재미또한 뛰어나다.

현재 시즌 5를 완료하고, 6편이 시작하고 있다. 이 정도의 '대작 시리즈 물' 이라면 강추한방 날려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Posted by 함장

2005/09/04 12:06 2005/09/0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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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목적' 읽기

이 글엔 영화 '연애의 목적'이야기가 주를 이루니 아니 보신분은 스리슬쩍 넘어가시는 것이 DVD 대여료를 아깝지 아니하게 여길 수 있는 길입니다.

꽤 많은 분이 '연애의 목적'에 '반감'을 가지시는 것 같아서 제가 즐긴 시선들을 적어볼까 합니다.

그 누구나, 남자든 여자든 초반에 박해일의 행동을 보면서 반길 사람은 없을 겁니다. 박해일과 친한 조선생 역할의 '이대연'씨가 아마 남성의 시각에서 보는 3자의 입장을 잘 비춰주고 있다고 봐야죠.

이건 박해일이 싱글이든 더블이든의 문제가 아니라 분명 '성추행'을 넘어서 '성폭력'의 문제거든요.

강혜정의 태도 또한 '교생'이라는 사회적 지위로 눌리는 것과 묘한 감정의 선상에서 노니는 듯 보여도, 분명히 '성적 접근'에 대한 거부감은 명료하게 보였죠.



그런데 여기서 오는 괴리감 하나. 분명 성폭력상담쎈터나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구호. 여성의 'No'는 정말 'No'라는 것. 이 구호와 사실여부에 관해서 100% 공감합니다. 그러나 결혼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경험담 속에서 늘상 숨어있는 스토리에서 그 'No'가 명확하게 'No'인 경우가 100%가 아니된다는 것이죠.

오해가 쉬운 얘기이기도 한데,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명백하게 '성추행'으로 보이는 것이 그 당사자들의 '접근'과 '거부' 사이에선 그들 나름의 다른 시각이 생길 수 있다는 점.

그 점을 관객의 입장에서 제 3의 시각으로 즐기기엔 분명하게 불편한 장면들이고, 행위였다는 점을 잊을 수가 없죠.



그러나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명확하게 나뉩니다. 50만원의 얘기가 나온 직후, 그들이 여관방을 합방한 후로 부터는 상당히 재미있는 양상이 벌어지게 되죠. 사실 그 후로는 박해일이 초반에 보였던 그 노골적이고 뻔뻔스러우며 추잡한 짓거리를 벌이지 않습니다.

강혜정이 명확하게 자신의 '집'에는 다른 '남자'가 올 수 없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박해일은 열쇠를 몰래 뺏아서 집으로 뛰쳐갑니다. 문제는 여기에서의 시선이 전반부로 인해서 갈라집니다.

이게 사랑에 빠진 얼치기의 호기심 해소인지, 그저 집에 들어가 또 섹스를 하자고 보챌 남자의 쓰레기 같은 근성인지. 그 해석의 차이가 갈리게 되죠.

그런데 하나 논리적 문제를 짚자면. 남자가 '섹스'에만 집착하는 동물로 해석을 할 수 있는 전반부를 보자면 '관계'를 가졌기에, '죨라 맛있다'는 표현을 써가며 '맛'을 본 박해일이 그 '맛'에 중독되어 계속 찝적대는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알아가기' 위해서 찝쩍대는지 명확하게 표현된 점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특유의 보여주기는 후반부에 노골적인 섹스신을 보여주지 않음으로 인해 시선의 변화를 꾀합니다.

분명 많은 이의 분노를 샀을지도 모를 '열쇠뺏기' 신공으로 강혜정의 집에 쳐들어간 장면이 오히려 강혜정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녀를 이해하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가 도래하는 거죠.

표현하는 사람자체가 혐오스러운 '걸레'라는 표현. 그리고 그 표현이 가져오게되는 영향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해일은 그녀의 '아픔'을 이해하는 얼치기 마초정신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얼치기'로 인해서, 세련되지 못한 토닥임은 이미 강혜정의 숨기고픈 비밀을 '훔쳐봤다'는 사실과 결부되어 강혜정의 분노를 사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악몽을 다시금 들춰낸 박해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팔베게'가 필요하게 된 웃긴 상황이 오는거죠.

자신의 아픔을 아는 것을 넘어서 이해하고 다독여주려 한 남자니까.



사실 여기서 부터 큰 변환점이 되어버립니다. 스무살 때 만나 6년이나 사귀어온 여자가 있는 녀석이 '진짜 사랑'이 뭔지 깨달아버린 거죠. 그저 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성에 대한 맹목적 굶주림으로 덤벼들고 진지한 관계의 고찰없이 맺어진 끊으로 결혼까지 준비하던 그 녀석에게 사랑하는 사람, 아픔을 감싸주는 사람, 이해하고 다독여주는 사람. 여러가지의 존재감을 깨닫게 하고, 심지어 그 안에서 '그'를 이용하는 사람을 만나면서 그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림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어느새 박해일은 '남자'가 되어버립니다.

이 변화가 얼마나 큰지는 강혜정을 끝까지 보호하려하고, 강혜정의 자기보호의 발언에도 배신감을 넘어서 '확인'을 가지려 하는 태도는 분명 기존의 격분적인 박해일의 태도와 상반됩니다.

어느새 박해일이 커버린 거죠.

그 뒤로 맨정신에서 조차 강혜정에게 '과거'의 얘기를 들춰내지 않는 이유는 그겁니다.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돌아보고, 자신의 반성을 거쳤을 그 남자.

물론 술에 취해서, 침대위에서 나누었을 사랑의 밀어들에 대해, 자신이 가졌던 상대에 대한 신뢰가 마치 성폭력으로, 힘으로 눌러버려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들었던 여성처럼 뒤집어지는 현상을 분노로 느끼며 울분을 토로하지만.

그를 그렇게 '성장'시킨 것은 강혜정이란 여성캐릭이 되어버립니다.



꽤나 많은 남성이, 마치 성의 중독자처럼, 속물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주위에 넘쳐나는 성매매업소들이 죽지 않는 다는 것은 그런 혐오감을 충분히 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이 가지는 '힘'이 쓰레기 같은 남성과, 그로 인해 늘 굴종되는 여성의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나빠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연애의 목적'을 보면서 초반에 박해일에게 더러운 기분과 함께 분노의 주먹을 날리고 싶은 기분과도 동일하죠.

그러나 저도 그랬고, 많은 분들도 그랬을 과거. 깨닫고, 가르침 받고, 세상에 대한 시각이 바뀌어 가는 '성장'의 이야기를 놓칠 순 없죠.



강혜정이 과거의 아픔을 이겨내고 다시금 설 수 있게 만든 것도 결국 '박해일'의 이해와 사랑 때문이고, '박해일'을 개 난봉꾼에서 조금 나아진 아직도 철들려면 한참 먼 인간 정도로 개과천선 시켜놓은 것도 '강혜정'입니다. 물론 그 뒤로 강혜정이 얼마나 고생해가면서 저 인간을 바꾸어 놓을지는 모르지만 말이죠.



'연애'라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바꾸어 놓을 수 있는가'에 대한 완벽한 고찰이라 여겨지는 이 영화는 수작이라고 볼 수 밖에 없어요. 모든 남성이 다 역겹고 더러운 존재라 하더라도, 연애 좀 하면서 철이 좀 들어야지 그나마 그 단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은 비록 여성분들을 슬프게 할지 모르지만.



사람이 사람을 믿는 다는 것이, 믿고 같이 잘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리고 그 힘든 '연'의 인과관계속에서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고, 그 틀속에서 다독이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이 영화 각본 쓴 여자분에게 '경의'를 보냅니다 --)b

Posted by 함장

2005/09/03 15:28 2005/09/03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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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모 가츠히로는 이미 익히 알려진 에니메이션 '아키라'를 감독한 사람이다. 물론 이 '스팀보이' 또한 그의 작품이고. 두 작품의 사이엔 크게 '일치'하는 면이 없지 않다. 무조건 다 깨부수는. 그러면서 그 잔인한 부서짐의 미학 속에서 관객에게 던지는 물음은 단연 일치한다. 과연 사람은, 사람들이 이룩하는 문명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말이다.


현대문명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19세기 후반, 산업혁명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삶을 현대 문명에 빗대러 묘사하는 이런 쏠쏠한 재미는 풍부한 상상력과 함께 극중의 재미를 더하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 '빽 투 더 퓨처 3'에서 19세기 후반으로 시간여행을 한 박사와 마이클 J 폭스가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얼음'을 만들거나 기계 장치들의 역학관계를 사용하여 토스터기를 만들어 사용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작은 재미를 느꼈던 것 처럼 말이다.

위의 모습이 대리묘사하는 현대의 외륜구동 자전거와 자주증기차가 후에 디젤 엔진 차량이라는 것을 놓고 볼때, 그리 '새로울 것 없는' 발명품임에도 불구하고, 신비감을 주는 이유는 전혀 '상식적'이지 못한 디자인이 주는 '외적 사실감'에 근거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저런 연동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중고등학교 과학교과서를 다시 펼쳐볼 필요없이, 그저 극중에서 눈에 익은 원리를 묘사해주는 것 만으로도 '있을 법한' 사실성을 부과해버리기 때문이다.


어쨋든 감독은 관객에게 그 얼토당토 않는 '과학적 지식'을 무시하고 영화에 몰입할 수 있는 장치를 꽤나 만들어두었고, 그렇기에 애니메이션은 더욱 더 빛을 발한다. '아키라'가 인류문명의 가식에 포효하며 부숴버리는 역할을 보여줬다면, '스팀보이'는 유치를 넘어선, 뜬금없음을 넘어선 '만민평화의 길'을 어둡고도 어둡게 보여준다.

'나디아'라는 애니메이션의 도입부에 파리의 '만국박람회'가 모습을 보였듯이, 스팀보이도 영국의 만국박람회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는데, 과학의 발전을 세계에 알리게 된 계기가 그런 행사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늘 얘기가 나오는 민감한 '핵'이야기를 이번 스팀보이에선 살며시 덮어서 직접적인 표현이나 묘사가 전혀 없음도 예의 주시된다. 핵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한 저 '스팀볼'은 그런 민감한 부분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쓰였을지도 모를일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三父子들은 마치 정반합의 논리를 보여주듯, 그리고 '핵'을 개발했던 과학자들의 일련의 '행동선'을 보여주듯 묘사된다. '과학'이 순수해야 하는가, 아니면 '한 국가'의 평화를 위해 바쳐져야 하는가. 그 속의 고민 또한 관객에게 던져지며 결론은 무의미하듯 퇴색되어 있다.


저 거대 섬의 컨트롤 룸이, 공포와 폭력의 지휘로 쓰일 땐 화려하고 첨단에 있는 모습으로, 놀이공원을 모방한 거무튀튀하고 암울한 아이들의 놀이터로 둔갑할 땐 저 지하 한구석 어두침침한 작은 방으로 묘사되는 것을 보며, 스포트라이트 받는 과학자와, 순수과학을 위해 몸바치는 과학자들. 그 사이의 괴리감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세기의 첨단과학을 달리는 것들이, 가장 '보조금'을 많이 받으며 각광을 받는 곳은 군사분야이다. 그런 쪽으로, 늘 '국가'라는 울타리를 두고, 경계를 하고, 국가간 경쟁을 하고, 민족주의로 서로의 정세를 살피고, 국민 감정을 이용하고.

극 중 지속적으로 내뱉는 과학자들의 걸음 걸음, 그 속에 담긴 문장. '상식을 벗어나면 진보가 보인다'는 얘기는 결코 과학자들의 '힘찬 도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연구든 '돈'이 되어야 한다는 자본주의 논리. 그리고 그 돈과 결부되는 '권력' 그 속에서 서서히 잃어가는 인간 본연의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되어가고, 인류 보편적 평화를 유지하고 지켜나가야할 과학이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하에 '폭력을 억제하기 위한 폭력수단'으로 인간 본질 내면에 숨은, 타인을 믿을 수 없는 상식과, 타국을 믿을 수 없는 상식.

그런 상식속에서 이루어지는 과학의 한계는 결코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민족주의, 국가주의, 자본주의... 우리 시대의 '주류'로 존재하고 있는 '상식'의 선을 넘지 않는다면 '진보'란 이어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아무리 애니메이션이라지만.... 일본 것이 아니라고 저렇게 영국의 템즈강 주변을 완전 박살내어도 되는건가?

Posted by 함장

2005/09/03 14:18 2005/09/03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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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포스터만 봤을 땐, 그저 차승원과 신하균의 두뇌게임 정도로 생각을 했었다. 원작인 장진 감독이 연출한 연극을 본적이 없어서 자세한 내막을 몰랐기도 하지만 말이다.

나름대로의 특이한 설정, 실소를 머금게 하는 '좋은 나라 운동 본부'의 방송 전파는 현실의 좋은 나라 운동 본부 방송과 맞물려, 과연 그저 관심의 '양의 탈을 쓴 늑대의 만행'이 폭로 되면서 그런 '악질적' 인간과 자신을 비교하여 도덕적 우위를 보고 있는지, '올바른 공동체 생활'을 깨닫기 위해 설정된 프로그램인지. 그 가늠쇠의 끝망울에 걸린 것을 비웃는 듯. 미디어의 음지를 맹공하기도 한다.


사실 궁금했던 것은 과연 범인이 누굴까였다. 범죄스릴러나, 미스테리물들이 늘 그러하듯, 그 유명한 '유쥬얼 서스펙트'도 결국 안쪽으로 굽어있던 발끝이 정상걸음으로 바뀜으로 인해 사람들의 뒤통수를 날리는 것이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용의자도 잡혔고, 용의선상에 있는 사람들의 신원도 확보되어있고, 자백이냐 새로운 범인이냐. 그런 구도속에서의 스릴감을 맛볼지 알았다. 물론 맛봤지만. 이 영화는 '누가 죽였는가'를 보여주기 보다 '왜 죽었는가'를 보게 된다.

인기리에 공중파와, 케이블에서 방영중인 CSI의 스토리를 보게되면, 사실 범죄 수사에서 과학수사가 도입된 이유는 '범인'을 찾아내기 위함이지만, CSI 요원들의 '수사 행각'은 범인이 누구였다를 알아맞추기 보다 '왜? 어떻게 하다가?' 죽었는지를 찾아감으로써, 용의선상에 있는 사람들을 추려내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건의 물증들, 예컨데 총이라거나, 칼, 그 밖의 것에서 추출된 지문, DNA 따위로 '범인'을 골라내는, 어찌보면 식상한 단계를 넘어서서 죽어있는 현장을 통해, 당시의 정황부터 시작하여 결국 개인의 인간관계, 그 속에 숨은 의도등을 토해내게 만드는 증거들을 확보함으로써 '왜 죽였는가?' 혹은 '왜 죽었는가?'를 따져내는 그 논리정연함 속엔 예상치 않은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눈에 띈다.


장진 감독의 영화는 '킬러들의 수다'에서도 그랬고, '아는 여자'에도 그러했듯이, '사랑'이란 관념을 넘어선 남성 중심의 일관화된 행태를 보여주게 된다. '킬수'에선 좋아하는 여성이 시킨일이라는 이유로 호랑이 굴로 들어가고, '아는 여자'를 통해선 야구공도 관중석으로 던져버리는 행태가 이젠 '살인'이라는 형태로 다가옴으로써, 사람이라는 것이 맺고 끊음이 칼같을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속에 얼마나 맹목적이고 퇴화적 두뇌사고를 보여주는가를 빚어낸다.

더군다나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미디어와 결합되면서 '믿지 않고 이용하는 자'들 속에서, 그 속의 군중 심리를 일관되게 관찰할 수 있는 설정들은 감독 특유의 감수성과 맞물려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수 가지의 다른 시선들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다.

너무 많은 것을 시사하는 복선으로 인해 뻔한 반전과 결과가 인지됨에도 불구하고, '미스테리 수사물'이라는 쟝르에서 한 걸음 물러나, 감독이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지 진지하게 관찰해보기 시작하자, 더 이상 이 영화는 차승원과 신하균의 투맨쇼가 아닌, 스페셜 게스트들의 잔치가 되어버리는 놀라운 연기파들의 깔끔한 군중 구성을 보여준다.


신경쇠약으로 의심되는 결말임에도 불구하고, 무당이 어쩝네, 미신이 어쩝네 하는 관람기들을 보며 다시금 영화를 관찰해보길 권하고 싶다.

영화의 곳곳에 배치된 주인공의 배경을 알 수 있는 설정들 속에서, 미신따위가 주는 어처구니 없는 종결이 아닌 감독의 설정이 얼마나 매끄러웠는지 그 섬뜩함에 소름이 돋을게다.

정동환과 신구, 두 늙은 배우의 연륜을 넘어서는 연기를 보면서. 감히 별 다섯개로 랭크시키고 싶다.

Posted by 함장

2005/09/02 15:40 2005/09/02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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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9.11 테러 이후, 물론 그 이전에도 그러하긴 했지만, 미국의 '방위 산업'에 대한 투자는 훨씬 신중하되 확장되었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이젠 '대량학살'을 기획하는 무기체계보다는 추적하여 세밀하게 골라낸 후 척살하는 방식을 택하는 완전 '킬러'들을 위한 살육 기계를 선사하려는 욕심이 우선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가지는 한계로 인해서 최대한 '적'으로 부터의 공포심을 줄이고 자신들이 '피해' 받는 확율이 적어지는 방향으로 몰입해 나감으로써 전투력을 증강시키는 효과를 보려하고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제작한 이 '21세기 비밀병기'라는 다큐멘터리는 그런 면에서 '자연'이 과연 '인간들'의 전쟁에 필요한 물품들에 어떤 모델을 보여주는가를 단계별로 보여주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으로 투입된 해병들을 적의 총탄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방탄복은 무려 7Kg에 달하는 무게로 미해병을 괴롭히고 있으며, 몸 전체를 커버해 주지도 못하고 있다.

참으로 미국인들의 시각이란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라 하지만, 자신들이 감행하는 공격 속에서, 스스로의 위협을 줄이고 그 반사이익으로 상대에 대한 타격력을 높이려드는 행동은 이해할 수 있지만, 자신들이 생명유지 우위를 점하기 위해 7Kg의 무게가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그 개량품을 개선하여 '전투력'을 증강시킨다는 생각은 평화주의자인 내 입장에선 코웃음 치기에 충분한 요소이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 방패만 두텁게 하고 공격을 아니한다면 나도 충분히 동의하겠지만 말이다.

어쨋든, 탄성이 높고, 강한 섬유인 '거미줄'을 이용한다는 현재의 개발단계를 소개하면서 대량 생산을 위해 염소젖을 사용하는 '분자생물학'의 발전을 보면서 씁쓸해지는 이유는 분명 '방탄복'이라는 것이 생명을 '구하기'위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전쟁물자의 하나로 인식되는 연출을 보며 결국은 '총탄'이 발사되는 형태가 존재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슬프기 때문이다.

인터뷰로 등장하는 미 해병 헬기 조종사의 이야기는 물론 이런 걱정을 현실성 있게 짚어내고 있다. '야간 장비'를 우리가 개발하지 않으면 '적'이 먼저 개발할 거라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세계 정세에선 그런 '비효율적'인 개발경쟁을 평화주의적 입장에서 비판하기만 할 순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다큐는 지속적으로 인간이 자연으로 부터 얻어온 지식들을 적용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야간 장비의 보조를 위해 '비단벌레'의 10km 밖의 열을 감지하는 기관을 연구하여 열영상 혹은 열추적 기능의 방향으로 군 장비를 개량시켜나가려는 연구를 보여준다.

대학이라는 곳이 인류평화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평화'를 위해 '무력'을 사용해야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볼 때, 대학교수들의 무기산업쪽 연구개발에 대한 도덕성에 비난을 날리는 일은 쓸데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비의 날개의 구조가 85% 이상의 '반사율'을 보이며 화려하고 현란한 색을 나타내는 점을 들며 헬기나 전차의 '위장술'에 적용시킬 수 있는 신 기술을 연구하는 것을 보면서 제 2의 물리적 스텔스 체제를 꿈꾸는 미국의 모습을 보면서, 창과 방패를 동시에 만드는, 열 영상 장비를 개발하면서, 열을 반사시키는 재질을 연구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금전'이 가지는 국력이란 것이 타국에겐 속수무책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강대함이란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위의 사진에 있는 거미줄에 달린 물방울들이 보이는 표면장력은 실제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개미' 한마리도 실제로 표면장력이 있는 물방울에 갇히게 되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으니까 말이다. 이런 표면장력은 '탄저균'과 같은 공기중에 퍼질 수 있는 미립분자를 담아낼 수도 있으며, 담아낸 후 전기적 연동을 통해 그 성분을 분석해낼 수 있는 회로와도 연결 시킬 수 있도록 연구중에 있다.

미국이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곳곳에 '센서'를 설치하려는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기도 한 이 연구는 생화학 무기로 부터 테러가 발생될 경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뿐, 절대로 '방지'할 수는 없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감시체계'가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도달하게 되는데, 인공 근육과 바퀴벌레의 관절, 벌의 비행방법, 잠자리의 날개짓 등을 통합하여 '곤충 로봇'을 만들어 테러의 준동을 사전에 감시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 보겠다는 '연구자'들의 의도는 '인권'과도 거리가 너무나 멀어보인다.

미국이란 국가. 테러를 일으킬만한 짓을 제 3세계 국가에 '자행'하면서도, 자신들의 저지른 일들에 대한 보복을 막겠다는 신념하나로, '자국민' 보호의 일원으로 무기체계를 개량해나가는 그들. 가진 국력만큼, 연구에 대한 지원도 전폭적으로 하면서, 결국 그렇게 '창과 방패'를 만들어서 생산해낸 비용의 감당은 자국민이 아닌 타국으로부터 앗아가는 어처구니 없는 폭압자들.

아무리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자연'과 닿아있는 다큐멘터리였지만, 세상의 '무기'들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서로 죽이고, 죽고, 차별하고, 감시하는 세상이 끝나고 '평화적인' 세상이 오길 바라는 사람에겐 그 '자연'을 인간세상에 적용시키는 발상의 전환과 신기함 보다는 씁쓸함이 남는 그런 다큐였다.

더욱 더 '곤충 로봇'따위의 스파이로봇 개발을 반대하고 싶다.

Posted by 함장

2005/09/02 12:49 2005/09/02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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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전문 히스토리 채널에서 제작한 얼티메이트 오토스(명차열전) 시리즈는 '자동차 매니아'라면 누구나 봤을 법한 명작 중의 하나이다. 물론 현대의 그랜드 밸류를 가지고 있는 BMW나 일본의 혼다나 도요타 자동차가 등장하진 않지만 자동차의 '역사'속으로 들어가 보기엔 충분한 재미를 안겨주고 있다.

얼티메이트 오토스는 크게 4부로 나뉘는데 개인적으로 Volume 3인 독일의 '벤츠'와 '아우디'의 전신이 되는 'Silver Arrow' 전설을 관심있게 보게 되었는데, 과연 '독일의 명차'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감탄할 만한 스토리였다.

독일의 자동차는 '히틀러'가 빠질 수가 없다. '폭스 바겐'이 독어로 Volks Wagen, 앞의 폭스는 국민을, 바겐은 웨건, 마차 즉, 국민자동차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며 '자동차'의 대중화를 이끌게 만드는 정책을 펼치고, 그 이용을 위한 '아우토반'을 건설해내며 독일 공업화의 주도적 역할을 이루어낸 통치자였으니까 말이다.

물론 전 세계의 평화를 생각해 볼 때, 참으로 악인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지만 그가 펼친 과업이 '조명'받는 것도 분명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이젠 독일 국민을 넘어서 전 세계인이 인정하는 명차로 오기까지의 이야기를 관찰해 본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히틀러가 과연 똑똑했는가라고 생각되는가는 각자의 판단이겠지만 흔히 얘기하는 정치로 부터 국민의 관심을 돌려대고, 국민을 '비겁하게' 통합시키는 방법은 적절하게 굴려댔다. 흔히 얘기하는 3S, Sex, Screen, Sports 중에서 히틀러는 Sports, 그것도 '레이싱'이라는 스포츠에 국민적 관심사를 돌려놓고, 그 세계적인 레이싱에서 '독일'의 독주를 보여주며 1차 세계대전 패전국의 이미지를 부숴버리고 국민에게 '독일인'의 의식을 심어주려 했던 것이다.

자동차 쪽 산업을 주력으로 잡고 있던 독일이 세계적 무대를 통해 독일 국민에게 스스로의 자긍심을 심고 국민적 통합을 이루게 만드는 방법으로 '레이싱', 즉 '포뮬러 그랑프리 대회'에 출전시키기 위해, 참여하는 자동차 메이커에게 국가적 '보조'를 진행하기로 했다.

메르세데스 벤츠로 유명한 '다임러 벤츠'와 패전을 통해 경영난에 빠져 아우디, 데카벨, 포르히, 반데르 4개의 회사가 합병한 '아우토 유니언(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아우디가 되며, 아우디의 심볼인 동그라미 4개는 최초 합병된 4회사를 의미한다)'. 이렇게 두 개의 회사가 참여하게 되는 '경쟁' 구도는 전 세계 '포뮬러 그랑프리 대회'에 '독일 신드롬'을 낳게한다.

아우토 유니언은 병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포뮬러'에 참가할 금전적 여유가 없었으나 그들에게는 천재적 '포르쉐' 박사가 디자인한 엔진이 존재했기에 히틀러를 잘 구슬러 '지원'을 받아 포뮬러에 참가할 수 있었다.

아우토 유니언의 첫 포뮬러용 차였던 Type A는 엔진을 차의 후미에 둔다는 '독창적' 발명을 하였는데 이는 주행중에 차의 중심이 후미에 집중됨으로 인해 뒤가 밀리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오토바이를 타본 사람은 알겠지만, 차체의 무게 중심이 후미에 있는 데다가 그 엔진의 추진력이 전달되는 부분마저 후미에 있게되면 제동이나, 커브에서 무게 중심이 높은 부분이 '밀려나는' 슬립의 경험을 하게된다. 물론 차체에 익숙해지면 그런 무게중심의 이동도 쉽게 컨트롤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지만 엄청난 마력을 자랑하는 '포뮬러'용 자동차에게는 상당히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어쨋든, 두 제작사가 결국 '포뮬러'에 출전하게 되면서 얻은 별명은 '실버 애로우'의 의미도 무척이나 흥미롭다. 아우토 유니언의 경우, 아예 차체에 '도색'을 하지 않아서 은색이었는데다가 다임러 벤츠의 경우엔 백색으로 도색을 한 경주용 차량이 750Kg 으로 경기차량 한계무게인 748Kg 보다 2Kg 이 많은 이유로 '도색'을 벗겨내어 중량테스트를 통과함으로 인해 두 대의 차량이 모두 '도색'없이 철제 색깔 그대로 '은색'을 유지한채 '최고 속도'로 1,2위를 다투게 됨으로 인하여 생겨난 별칭인 것이다.

그들이 '쏜살같이' 달려나가며 독일국민들과 세계의 '자동차 애호가'들을 열광시키며 둘의 '차량 개발 경쟁'에 대한 열의를 이끌어 낸것은 어쩌면 예측하지 않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허나 그런 '불같은' 경쟁도 사고를 부르니, 아우토반에서 열린 '최고속 경신대회'는 안전벨트도, 안전헬멧도, 그 어떤 보호장치도 없이 시속 400km를 넘나드는 속도로 질주하는 차량의 결과를 보여주듯, 어떤 악천후 속에서도 부동의 1위를 지키던 국민적 영웅 드라이버 한 명의 죽음으로 '과잉경쟁'을 억제하게 되는 슬픈 역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역시 인간이란 '피'를 봐야 하는걸까?

과잉되었던 독일 국민의 축제도 한 국민적 영웅의 죽음과 2차세계대전의 시작으로 마감되었지만, 그들이 전세계에서 독보적인 자동차 설계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의 열의와 관심을 '자동차'로 모은 히틀러의 '혀'와 그 기회를 빌어 치열한 경쟁을 해나간 제작사에 있을 것이다.

아직도 메르세데스 벤츠와 아우디는 분명 뛰어난 명차가 아니던가?

Posted by 함장

2005/09/01 17:57 2005/09/0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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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말, 로이터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스페인에서는 길이가 10미터는 족히 넘는 죽은 대왕오징어를 또 발견했다. 지금까지 성체가 된 대왕오징어가 '살아서' 발견된 적이 없는데다가, 그 크기도 가히 가공할만 하고, 심해에서만 사는 '미지의 생물'로 생각되기에 공포적인 모습으로 다가온 것이 사실이다.

많이 알려진대로, 소설 '백경'에서 고래와 싸우던 그 오징어. 해저 2만리에서도 등장하는 이 '괴물'은 영화 '스피어'를 통해서도 심해에 있는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을 표출시키며, 소나(음향 레이더)에 거대한 오징어로 표시되고, 그 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채, 거대한 오징어 알만을 보여줌으로써 그 '크기'와 관련된 공포감이 얼마나 사람을 얼어붙게 만드는가를 보여준 적도 있다.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상식이 얼마나 미약한가를 뒤져보자면 영화 '코어'라는 것이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 내부 지각을 정확하게 탐사할 수 없을 뿐더러, 심해저의 지형도도 아직 완성하지 못한, 그래서 300 미터 아래에 어떤 것들이 살고 있는지 '실물'로 모두 확인조차 하지 못하는. 그런 과학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누구 말마따나, 우주로 로켓을 쏘아올릴 수 있을 지언정 심해 몇 백미터를 탐사할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의 과학력이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KBS HD 다큐멘터리 '신비의 해저 괴물 대왕오징어'는 인류가 가진 한계를 인정하고 그 한계점을 이용하여 '인간다운' 관점으로 연구에 열정을 바치는 한 과학자를 조명해준다.

대왕오징어의 성체가 살아서 발견된 적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면, 결국 대왕오징어의 성체가 활동하는 심해 200미터에서 생의 죽음까지 완료함으로써 인간들에게 노출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는 지금까지 나타난 대왕오징어들의 사체가 죽은 후 해안가로 떠밀려 오거나, 심해에 그물을 놓는 어선들에 의해 포획되는 경우들로 분류되기 때문에 이런 지적은 올바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과학자는 자신의 '생각'을 역발상으로 전환하여 이 대왕오징어의 '유생'을 포획하여 '키워 보겠다'는 의지를 내비춘다.

아! 얼마나 인간중심의 사고인가!

야생의 대왕오징어를 어릴 때 잡아다 키운다는 생각을 하다니!

물론 생물학을 전공한다면 자주 있는 일이겠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왕'이라는 단어에 집착함으로 인해 그 '유생'이 몇 미리 정도의 작은 크기로 태어날 것이라는 점을 쉽게 간과하고 있는 경우를 가볍게 비웃어버릴 수 있는 과학자 다운 발상의 전환이 아니던가?

이 다큐멘터리는 결국 그 과학자의 '대왕오징어'의 유생을 잡기위한 노력을 진중하게 비춰준다.

오징어의 번식은 숫컷의 만행(?)으로 시작되는데 이리 저리 어슬렁 거리면서 마음에 드는 암컷들에게 굵은 실 같은 정자주머니를 삽입하고 도망가는 것으로 진행된다. 이후 암컷은 그 정자주머니를 보관하다가 알주머니 같은 것을 생성하며 그안에 배란을 하고 알과 함께 수정시킴으로 인해 번식이완료 되는데, 그 수많은 알 중에서 살아남는 것이 극히 적은 수로 남는 이유는 유생으로 작은 모습을 하고 있을때, 또 다른 어류들의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어쨋든, 그 살아있을지 죽어있을지 확실치 않은 유생들을 포획하려는 '무모한' 계획은 착착 진행되어 갔다. 대왕오징어가 수심 200미터에서 활동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수심 200미터로 그물을 깊숙히 흘려두고 끌어올리기를 몇 십회.

첫 탐사에서 결국 2 마리의 대왕오징어 유생을 발견했으나, 하나는 죽은 채로 발견되었고, 다른 한마리도 이내 죽음을 맞았다. 이로써 이제 또 다른 과제인 '유생을 어떻게 살려두는가'도 생겨나게 되고, 과학자의 험로는 계속 될 것으로 보였다.

과학시간에 자주 봐왔던, 가설 제시, 종속 변인, 통제 변인, 변인 통제 등등의 과정을 거쳐가며 대왕오징어 유생을 찾아가고 그 생태를 연구해나가는 과학자의 의지는 눈여겨 볼만하다, 심지어 대왕오징어 유생의 죽음에 이르러 눈시울을 붉히며 자신의 험난한 연구과정에 북받치는 설움을 잠깐 내비치는 모습에선 그의 '의지'를 실감할 수도 있었다.

결국 과학자는 대왕오징어 유생을 '살려두는 데'는 실패한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유생'은 대왕오징어의 그것이 확실하다는 DNA 판명결과로 하나의 '업적'으로 남는다.

과학자는 한 연구에 평생을 쏟아부어도 모자라는 직업으로 알고 있다. 우리네 황우석 박사도 죽을 때까지 연구한다고 줄기세포 분야가 혁신적 완성을 거둔다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집요한' 연구와 추적이 이토록 위대해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생의 열정'을 모두 쏟아붓는 그 노고를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인간이 가져야 할 덕목 중의 하나로 부러워 할 수 있기 때문일것이다.

Posted by 함장

2005/09/01 13:03 2005/09/01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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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hannel 의 익스트림 미스테리란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 세상에는 '별난' 일도 많고, 그 속에 그 별난일에 대해 탐구하고, 그 '논리적인' 근거를 찾아 헤매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 지구촌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어릴 때 부터 무수히 들어온 버뮤다 삼각지대. 1945년 이후로도 1000여 건의 실종이 있었을 정도로 '속수무책'인 이곳은 사실 '공포'의 대상이라기 보단 '휴양지'로서 각광을 받는 곳이다. 좌측의 지도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의 휴양도시 마이애미의 남동쪽 해안인데다가, 서인도 제도의 군도(群島)들은 부자들의 휴양지가 된지 오래인 곳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삼각지 위로 그려진 비행기와 선박들은 그곳에서 '실종'이 일어난 모습들을 담고 있으며, 그토록 많은 선박과 군함, 전투기와 민간기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그 '파편' 조각들 조차도 발견하지 못한 기이한 현상은 이야기를 전해듣는 사람들에게 오싹함을 줄만하다.

데이빗 카퍼필드가 버뮤다 삼각지에서 '사라지는' 쇼를 우리에게 보여준지도 벌써 몇 해가 지나갔지만, 여전히 지구 반대편에서 버뮤다를 지나칠 확률이 극히 적은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그저 달동네 뒷집 강아지 짖어대듯 그다지 깊이있게 와닿는 이야기가 되진 않고 신기한 이야기로 치부될 뿐이지만, 버뮤다 삼각지대와 같이 일본의 동남쪽에 있는 '악마의 바다'라는 곳이 연관지어지면서 그 두 곳이 지구에서 유일하게 나침반이 '자북'이 아닌 '진북'을 가르친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온다.

고등학교 한국지리 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지도를 펴고 '자북'과 '진북', '도북'의 개념을 구분할 수 있는 기본 상식을 갖추고 있을게다. 자북은 나침반이 가리키는 북쪽, 진북은 북극성이 가리키는, 정확히 북극점을 향한 북쪽, 도북은 지도의 북쪽. 횡축 메르카토르 도법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도북은 서쪽과 동쪽의 위치에서 진북과 도북의 차이가 서로 상반되는 결과가 나온다.

뭐 어쨋든, 캐나다 북쪽의 천연 자력지대를 가리켜야 할 나침반의 침이 진북을 가리킨다는 것은 '과학'의 입장에서 볼때, 어처구니 없는 현상이 아니던가?

이 다큐멘터리에서 꽤나 많은 사람들이 미 해군의 군사시설이라던가, UFO, 아틀란티스 등등 관련 있을 법한 이야기를 주장하고 있다. 그 중에 그나마 '과학'에 가까운 'Micro worm-hole'에 대한 이야기는 10분의 절대시간을 잃어버린 민항기의 이야기와 맞물려 가장 솔깃해 할만한 '꺼리'가 될 수도 있었으나, 말그대로 'micro'한 크기에 민항기의 거대한 몸집을 쑤셔넣을 수는 없는 꼴이니 참으로 미스테리 하다 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 아인슈타인 박사님의 상대성이론을 굳이 적용하지 않더라도 여러 시계 톱니 이빨이 동시에 같은 단위로 부러지지 않는한 절대시간이 10분이나 늦춰지는 경우는 우리네의 일상생활에서 생겨날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녹색 안개' 부터 시작하여 꽤나 많은 증언들이 '비슷한' 경우를 이야기 하고 있음은 마치 'UFO'를 본 사람들의 증언이 '비슷한'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UFO' 목격자들 중 상당수가 '접시'형태의 것을 봤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찌되었건,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는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미스테리' 물 답게 꽤나 많은 주장을 소개하고는 이내 그 결론은 마치 'X-File' 처럼, 진실은 저 너머에를 외치고 조용히 클로징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현실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는 이야기는 저 멀리 '외계'에서 온 사람들의 소행보다는 인간 내면속에 본연적으로 숨겨진 '같은 종'에 대한 두려움을 인식해내듯이, '음모 이론'을 갖춘 '같은 인간'을 의심하는 형태가 되어버리는 것을 더 선호하게 되어버리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네가 그 숱한 미국정부의 음모에 대한 헐리우드 영화들에 찌들어버려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Posted by 함장

2005/09/01 12:02 2005/09/01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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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말이 많던 영화를 이제야 본 것은 그 평이 너무나 노골적인 비판의 수준이었던데다가 사소한 문제까지 겹침으로 인해 잊혀져갈 즈음, 밤을 지세우는 머릿속의 공백속에 아련하게 떠오르는 이야기 꺼리의 발견으로 집어들게 된 이유가 있어서 입니다.

보신 분들 중 다수가 '직장내 성폭력'에 대해서만 언급했던 터라 과연 어느 정도일까 궁금하기도 했었지요.

사실 초반내내 영화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지요. 홍상수 방식도 아닌, 보통 남자들이 흔한 속내음을 넘어서서 그런 '노골적인' 접근은 당연히 '모범인간'으로 살아가고픈 충동을 느끼는 제겐 너무나도 먼 당신이 아닌가 반문하며 눈살을 찌푸렸더랬지요.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사실 인간의 내면 속에 있는 인물의 묘사가 아니라 이미 영화속 그 버러지 같은 행동을 벌이는 박해일에게서 '저'를 발견해버린 겁니다.

네, 그 사람이나 나나 다를게 없던 것이었죠. 직장 내에서 상사 위치의 권력 따위가 아니라 '남성 주도의 데이트'라던가 뭐 그딴 사회의 통념 아닌 통념속에서 그가 했던 행동이 내게도 낯설지 않은 일로 다가온 겁니다.

참 강혜정의 캐릭터 같은 여성은 접근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만, 그 숨은 진정성이 폭발하기 시작하면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것은 사실이죠. 아마 모든 여성이 그런다면 그건 또 거짓말이 될지도 모르지만요.

테이프 녹음을 듣는 장면과 그 뒤로 이어지며 강혜정과의 실갱이 속에선 전율이 돌 정도의 모습입니다. 두 사람이 부딪히는 결계부분의 접촉이 '임계치'에 다다른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네, 결국 연애의 목적은 팔베게입니다. '삶의 공포'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편안한 밤. 그 품이 얼마나 편안한지.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제 모습을 발견한 박해일의 캐릭터는 '과거'를 알면서 극도로 확장됩니다. 과거란 늘 '진실'이어야 하며, 그 '진실'은 결국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도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랑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죠.

강혜정의 과거사 이야기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박해일의 동분서주는 분명 합리적입니다. 강혜정과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는 착각속에서 이루어진 영리한 행위니까요.

그러나 결국 피해자는 강혜정이 되어버리는, 여성이 되어버리는 이 우스꽝스러운 현실이 개탄되어질 때쯤. 어느새 보호받는 강혜정과 그에 대한 분노보다, '믿었던 사람'에 대한 허탈감 속에 '대화'를 요구하는 박해일을 보면서. 어느새 성장한 두 사람을 봅니다.

다시 상처입지 않을 방어기제를 착용한 여성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남성.



강혜정과 박해일의 마지막 술집 장면에선 내내 울어버렸습니다. 박해일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 깊숙히 맺혀있던 나의 죄의식이 강혜정의 달콤한 한마디 한마디에 눈 녹듯이 녹아내립니다.



타인에겐 그저 재밌게 볼 수 있을 영화이언정. 나는 가슴 아프도록 감사해하며. 저는 최고의 로맨스 영화를 통해 제 삶을 구원 받았습니다.

밝아오는 새벽녘에. 영화의 끝자락에 눈물을 펑펑 흘려대는 내 초라한 모습에 작은 위안과, 스스로에 대한 용서를 주며....

Posted by 함장

2005/08/31 15:46 2005/08/3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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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 이론의 결집체 - X-Files

우리는 참 많은 음모 이론들을 봐온다. 대부분이 '정부'의 '거대한 음모'를 밝혀내는 이야기고 늘 그 뒤엔, 무기 밀거래라던가, 전쟁, 혹은 정보부와 관련된 정치인의 추문 등등, '권력'과 관계된 것들이 늘상 놓여있다. 그러나 엑스파일 시리즈가 출발한 것은 약간 다른 이야기인데, '외계인'과 관련된 정보를 '정부'가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 하나. 도대체 '왜?', 국민들에게 알려지면 공포로 다가와서?

이십세기 폭스, 아 이젠 이십일세기 폭스던가? 암튼 폭스사가 다루는 드라마 이야기 거리는 주로 미국의 정치권 중 '공화당'에게 편애적인 드라마가 꽤나 많다. 물론 '공화당'을 대놓고 지지하는 드라마는 아니지만, 뭐랄까, 개인의 권익보다 '공권력'이 우선인 경우가 많다고나 할까? 최근의 '24'라 흥행되는 드라마만 보더라도 '테러의 방지'라던가 그 어떤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인권은 무차별적으로 무시하고 공권력을 남용해대는 꼴이란 한편으로는 통쾌할 수 있어도 어처구니 없는 요소들이 많이 비춰지는 것도 사실이니까 말이다.

어쨋든, 우리네 시청자들은 그런 '올바른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기에 폭스 시리즈가 행하는 무참한 인종차별이나 뭐 그런 비 상식적인 이야기들이 그저 '극적 요소'라 생각하고 알아서 필터링해서 보실 줄 아리라 믿어의심치 않으니 계속 해보자.


이 드라마가 1시즌을 계속하면서도 늘 '외계인에 대한 결론'은 유보지은채 끝나는데, 이는 '멀더(데이빗 듀코브니)'의 시각으로 외계인 혹은, 심령의 세계를 노출시킨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길이 없는 '스컬리(질리안 앤더슨)'의 입장을 보여주면서 '확실한' 것이 없는, 진실은 저 너머에를 외치게 만든다. 물론 엑스파일 1시즌의 마지막에 스컬리에게 외계인의 아기가 냉동된 상태를 보게 하는 '셧'을 넣지만, 좀더 확실한 '껀'은 극장판이 등장하면서 확실하게 우주인은 존재하는 것으로 결론을 짓게 되지만 말이다.


멀더와 스컬리의 케릭터의 상호 보완성은 시청자들에게 중도의 길을 벗어나지 않게 해주는 점도 있다. 멀더는 '외계인이 존재한다'라는 가정하에서 늘 출발하고, 스컬리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모든 것은 과학적 사실이 증명해준다'라는 가정하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물론 좀 더 자세하게 관찰할 경우, '멀더'는 늘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 나가는 존재로, '스컬리'는 자신이 알고 있던 과학적 사실이 지속적인 '케이스'를 겪으면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지만 뭐 어쩌겠는가? 폭스 비디오 시리즈인데.

어쨋든, 그런 묘한 '미증유적' 사건들에 대해 접근해가는 과정에서 smoking man을 비롯해 지속적으로 이들을 방해하고 정보에 대한 접근을 막으려는 모습을 '거대한 음모'로 보는데 전혀 무리가 없을 모호한 미스테리 설정은 드라마 시즌 내내 지속되는 긴장을 맛보게 하기도 한다. 어떨 때는 공포를 다루기도, 어떨 때는 '외계와 관련없는'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룸으로 지루하지 않은 흥미진진한 전개를 맛 볼 수도 있다.

묵묵히 담배만 피워대는 smoking man에 대한, 그리고 우리 영화 '실미도'에서도 써먹었던, 거대한 '비밀 자료' 보관창고의 모습은 '음모이론'이 가지는 위력. 더욱 더 파내고 싶고, 그 '이유'를 알고싶어하는 욕망을 무척 자극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이 드라마가 너무나 유명해진 이유를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길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은 과연 왜, 이 둘의 이런 '콤비'의 모습이 매니아 팬들에게 즐겁게 다가오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함장

2005/08/29 11:32 2005/08/2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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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를 보다보면 참 화딱지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중 하나는 왜 그렇게 '빈부의 차'를 극심하게 내는지도 모르겠고, 둘째는 그런 '극심한' 빈부의 차를 깨고 사랑을 억지로 이루게 만드는 경우인데, 왜 그리 그런 이야기가 잘 팔리는지도 참으로 알쏭달쏭하다.

실제로 여론조사를 해보면 자신의 결혼 상대는 '비슷한 경제력'의 집안을 선호하는 경향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서로 커온 환경이 다를 경우나, 양쪽 집안의 빈부의 차가 격심하면 그로 인해 생겨나는 삶속의 트러블이 많아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 때문일까? '운명적 만남'?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는 사랑? 무슨 중세시대 영화 찍나 신분차이내게?

실제 삶의 환경은 결코 그 '부자'들과 '서민'들이 마주칠 수 있는 공간이 희박하다. 부자집 자식들이 잘 드나드는 펍이나 바에 서민층이 가볼수도 없거니와, 살아가는 주거환경도 극히 다르다. 기껏해야 그 자녀들이 얼굴이라도 마주쳐볼 수 있는 공간이랑 '대학' 정도?

이런 로또 복권보다 힘든 경우의 수가 존재하는 '만남의 장'을 이루지도 못하는데 도대체 뭔놈의 신데렐라 이야기는 그리도 판을 치는지 아니꼽다 못해 껄끄럽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좋다하니 암만봐도 이건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전 국민 중 시청자들에게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뿐이다.

각설하고.

인정옥 작가의 이전 작품인 '네 멋대로 해라'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삶에서 '빈부'를 떠나 '살아간다는 것' 그것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는 실로 아름답기만 하다. 사람이 독고다이식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결국 '추억'에 기대고, 사람에 기대고, 가족에 기대고, 연인에 기대고. 그렇게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듯이. 이 '아일랜드'는 차분하게 4명의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기대어 가는 과정, 그 속에서 생겨나는 애틋한 감정들과 모호하고 씁쓸한 삶의 향기속에서 지쳐가는 영혼들을 따스하게 이끄는 묘미도 들어있다.

호텔 사장 경호원질 하다가 쫓겨나 경호업체 사장을 하는 현빈도 결코 '돈이 넘쳐나는' 부자가 아닌, 그저 얹혀 살지 않을 정도의 약간 부자. 맨 주먹으로 아일랜드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이나영, 가난은 둘째치고 돈도 못벌어오는 백수 김민준, 부자였다 몰락하고 집안을 먹여살리는 에로배우 김민정. 이 네명의 케릭터가 가지는 강렬한 인상들은 벌써 그들이 가진 '경제적'배경을 인지하더라도 이내 그 '차이'는 사라져 버린다.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마치 어느 만화 처럼 금화 동전 풀에서 헤엄치는 정도의 부자도 없는. 그저 특이한 직업을 가졌을 뿐인 우리 주위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그들이 '마주치고', '다시보고', 서로의 존재감을 느끼고, 깨달아가고, 다시 보고싶고, 보면 설레고, 같이 있으면 즐겁고.

일상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토록 아련하게 나타낼 수 있을까?

현빈의 발에 있는 굳은 살을 보며, 현빈의 마음속에 이나영 스스로가 굳은 살 처럼 박혀있을 거란, 떼어내면 아플거란. 서로의 마음을 읽으면서도 다른 곳을 봐야하는 슬픔. 그 슬픔 속에서도 사랑을 이어나가는 그들의 '기대어 가는 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평생 지나쳐가야 하는 삶의 리얼스토리가 아닐까?

신데렐라가 없어도, 그토록 잘생기고, 그토록 아리따운 배우들이기에 더욱 아름다워 보였을 그 '지겨운' 삶이 비춰주는 모습은 슬픔의 선율에서만 노니는 바이올린의 현은 아닐게다.

삶이 우연속에서 발전해가는 것이기에, 그들의 만남이 가지는 우연으로부터 가져오는 '운명'이란 것이 그들을 속박하고, 삶의 굴레에 틀어박히게 하더라도 결국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