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관리 시간이었을게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일수'가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 자기네 아버지가 영세자영업자였던 학생이라면 알법도 했지만, 뽀송뽀송한 아해들이 알 턱이 없었다. 학생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내게 교수의 시선이 돌아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고, 난 당연히 교수의 의도와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다.
'보증이나 담보가 없는 영세 자영업자들이 주로 돈을 끌어쓰는 방법이죠. 서민들이 목돈이 필요할 때 자주 손 벌리기도 하고요'
물론 교수가 바라는 답은 그게 아니다. 일수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매월'이 아닌 '매일' 이자가 복리로 붙는 것이 바로 그 '일수'다.
고등학교 미적분이 지나가면 가장 골 아픈 게 바로 저 '복리' 계산이었다. - 물론 며칠 고생 후엔 별 것 아닌 걸 알게 되지만 - 시그마 기호 하나 붙이고 그걸 공식에 넣어 계산하던 그 '복리'도 '월리'를 따졌다.
그런데 그게 '일리'가 된다고 생각해 봐라.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미 자신이 갚아야 할 금액이 빌린 금액의 두 배가 된다.
그런데도 '쩐의 전쟁' 독고 영감 말마따나. 일수는 서민 경제에 없으면 '큰일' 날 존재다.
민주노동당 말을 빌리자면 이건 순전히 '공공의 기능'을 개무시한 은행의 더러운 욕망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불평등한 요소인 '태어날 때 주어지는 자본의 규모'는 서민들에게 '담보'를 쥐어주지 않으며, 인간의 본성은 성선도 성악도 아니기에 도무지 '보증'을 설 사람도 얻기 어렵다.
'농협'은 농민을 위한 은행이 아니라 농민의 피빨아 먹는 은행이라고 공공연히 회자되는 만큼 - 주변의 농협 관계자 여러분에겐 미안하지만, 솔직하게 살자 - 은행은 그저 '이윤을 추구하는' 집단일 뿐, 서민을 위해 손해의 가능성을 '감수'하면서 융자해주지 않는다.
아무 것도 없는데. 목돈이 필요하면.
서민은 어쩌겠는가?
복리를 따져 계산하면 엄청 손해다.
그러나 당장 들어갈 목돈이 있고, 매일 몇 천원에서 1~2만원 정도는 갚을 능력이 되는 서민들 - 아마도 하루 품삯의 절반이 넘겠지만 - 은 그렇게라도 끌어 쓸 수 있는 곳에 감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결혼을 하건 자식을 몇 낳던 첫사랑- 그건 존재 자체만으로도 내 인생에 큰 위안이자 에너지원이 된다는 사실을 살아갈 수록 뼈져리게 느끼거든요. 상처따위는 자연치유되고 이제는 내 좋을대로 해석하는 뻔뻔함이 늘어 누군가를 흠뻑 사랑할 수 있었다는게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양대 경영대에서 지정 복장을 금지시켰다고 하죠? '금지'라는 단어를 써놓고 뭐 강제하진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복장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얘기가 있어요. 일례로 예비군복만 입으면 개가 되시는 우리 예비역 장병 여러분과, 평소에 품행이 방정맞다가 ROTC복장만 입으면 목청 높여 경례를 붙이면서 - 거 좀 선진화된 군에서는 실례에서 경례 구호 안 붙입니다만? - 11자 걸음 잘 걸어주시는 애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정장만 입어도 몸가짐, 마음가짐이 달라지죠.
뭐 경영학을 배우는 학우들이라 좀 깔쌈하게 입혀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가끔 비즈니스 프리젠테이션도 아닌데 정장입고 발표하라고 하는 교수나 학생들 스스로 자원해서 그러는 모습을 보면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물론 다양성의 하나라면 박수칠 일이겠지만 - 복장 규정이라는 게 왜 생기는지 뒤져보면 참 거슬리는 일이거든요.
구글에서 '복장 규정'을 검색해보면 나오는 것이 죄다 '교복'을 입히는 학교들이거나 '제복'과 관련된 기관들이 쏟아져 나오죠. 강단에서 서 본 사람일 경우 이런 경험이 있을 텐데, 학생들의 복장이 통일되어 있으면 수업이 훨씬 편리합니다. 선생이 집중하기 좋죠.
똑같습니다. 교수들 눈에는 반바지에 쓰레빠 질질 끌고 오는 학생이 눈에 거슬리는 겁니다. 실제 수업 진행에 거슬리든, 교수 개인의 권위 의식에 의해 거슬리든 거슬리니 규제를 하려는 거죠.
돈 엄청 들여 박사학위 따서, 그 멋드러진 강의를 펼치는데 감히 반바지에 쓰레빠라니. 짜증나지 않겠습니까?
최근 미국 드라마 'Heroes' 1시즌을 봤는데, 거기서 주인공인 히로 나까무라 - 누가 피터 페트렐리가 주인공이라고 우기는데, 이건 암만 봐도 히로가 주인공인 드라마예요. 혼또 카와이 히로!! - 가 검성의 도를 결국 앤도에게 넘겨주면서 '중요한 건 사람'이라고 얘기합니다.
사실 복장이 의식을 규정하는 건 아니죠. 그 복장을 하면서 인간은 자신 스스로에게 어느 정도의 행동에 대한 허용치를 부여하는 것일 뿐. 그 잣대는 또 서로 다른 겁니다. 어떤 사람은 예비군복을 입을 때도 칼같이 다려 입고, 현역으로 돌아간 듯 열심이죠. 결국 의식을 규정하는 건 사람이지 복장이 아니죠.
위의 복장을 통한 교육 공급자의 태도를 봐도 그러해요. 사실 중고등학교 때 교복을 입히죠. 초등학교는 일부 비싼 명문 사립초등학교를 제외하곤 입히지도 않아요. 가장 산만한 게 초등학생인데 왜 복장으로 통일성과 획일성을 갖추지 않을까요?
중고등학생 때 '감수성'이 예민해서 빈부격차의 임팩트를 줄이기 위해서 '옷'을 통일시킬까요? 나는 길거리 리어카 표 티셔츠 입고, 쟤는 나이키 입어서? 어차피 같은 교복 입고 쟤는 아이팟, 쟤는 PSP, 쟤는 닌텐도, 갖가지 것으로 빈부차이는 확연할 텐데?
초중고 교사든, 대학 교수든, 아마 '히로 나까무라'처럼 득도(?)를 했다면 복장 따윈 신경도 안 썼을 거예요. 그러나 그 속에 숨은 '통제' - 그 통제의 이면에 자본의 힘도 분명히 숨어 있겠지만 - 의 혀를 끊어버리지 않으면 계속 나불댈 겁니다.
대학 교육 결과의 질적 저하는 학생들의 복장과 태도, 그 산만함에서 오는 게 아니에요. 입시 위주의 초중등교육과 마찬가지로, 고등교육도 결국 '취업위주'로 전락해버린, 대학 스스로가 걷는 자괴의 길입니다.
대학도 살아남아야겠죠. 그래서 경영대를 앞 다퉈 내세우죠.
어떤 교수들은 이런 어중이 떠중이 중에 정말 공부할 놈만 하나 찾아내도 다행이라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그 외의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는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죠.
기본적인 소양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나라. 그런데도 학력은 고학력인 나라.
이런 나라에서 고등교육 하시는 분들도 참 힘들겠죠.
그러나 어쩝니까? 일렬로 늘어서서 앞으로 갈 수만 있는 길에, 징검다리 끊기면 앞에 간 사람들이 뒤로 돌을 놓아 줘야죠.
근 1년간 글을 자주 쓰지 못 했다. 평일 하루 4시간씩 자가며 회사랑 학교를 오다녀야 하는 신세는 하루에 원고지 수십 매 분량의 글을 토해내던 나의 열정도 쉽게 사라지게 만들었다. 방학 때는 오히려 야간에 일을 하는 생활 주기 덕분에 글을 잘 못 쓴다. 확실히 회사를 다니며 점심시간 틈을 내어 글을 써내던 시기가 가장 많은 글을 토해내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미디어작문은 꽤 재미난 훈련이었다. 90년대 말 입시와 함께 논술 열풍이 불었지만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논술 대비 글쓰기 한 번 하지 않았던 나였다. 매 시간마다 한 시간 남짓, 짧은 시간 동안 2,000字라는 분량을 써내려가는 것은 마치 놀이를 하는 듯한 스릴이 있었다.
볼테르의 ‘말을 하듯 글을 쓰라’는 가르침은 내게 글쓰기에 대한 거부감을 없게 하였으나, 나의 ‘틀린’ 말하기는 곧 나의 ‘틀린’ 글쓰기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지독하게 듣는 ‘현학적’이라는 소리는 내 글에서 나타나는 어휘의 어려움으로 명확하게 나타난다. 더불어 말투가 정갈하지 못 하니 대화 속에 숨어 있는 군더더기 조사와 표현, 어투가 글에 그대로 드러남으로 인해 못생긴 글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역시 내 글이 ‘타인의 시선’으로 감독된다는 의식과 함께, 제한된 시간, 제한된 글자라는 묘한 압박감은 내가 쓰는 ‘어투’가 글이 되어가면서 어떻게 다듬어져야 하는지 스스로의 규율을 쌓게 만들었다. 문장 하나하나를 쓰고, 마침표를 찍은 후엔 속으로 다시 읽으며 어색한 접속사나 조사를 고치고, 말에서 나타나는 나쁜 습관들을 고치고, 어려운 단어를 고쳤다.
그렇다. 나는 글을 고치면서 나의 말투도 고쳤던 것이다. 이런 훈련은 어느새 머리 속 습관이 되어 문장을 내뱉을 때도 쓸데없는 조사나 일본식 표현, 번역체를 걸러내려고 노력하게되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토록 많은 글을 써오면서도 의식만 했지 몸에 익지 않은 것이, 고작 1주일에 한 편의 글을 쓰는 훈련을 한 학기 동안 했을 뿐인데 몸에 익어버렸다.
‘的’이라는 표현을 소유격 ‘~의’로 바꿔쓰고, 그것을 넘어서서 쓸데 없는 소유격을 배제하고. 이런 연습이 오히려 글쓰는 재미를 부추겼다. 얼마나 더 간단명료하게 쓸 수 있는지 스스로 조금씩 늘어가는 문장력에 뿌듯해진다. 한 술 더 떠서 문장이 너무 길어서 읽기 힘든 내 글을 짧게 만들려는 시도도 조금씩 한다.
물론 아직도 필요한 연습이 많다. 우리 말에는 없는 수동형을 무의식 중에 계속 쓰거니와, 한자가 아닌 좋은 우리말 표현은 어휘력이 떨어져서 쓰지 못 하고 있다. 차츰 더 나아지겠다는 희망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언가 자극이 되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
글을 어딘가에 기고하고 돈을 받는 사람들은 참 좋겠다. 시간의 촉박함이 있고, 글을 마감해서 보냈을 때 돈을 받았기 때문에 글이 좋지 않으면 비판도 받을 수 있지 않는가? 물론 글쟁이들은 그런 삶이 괴로운 창작의 고통과 함께 시간에 쫓기는 괴로움일 터. 그래도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를 하고, 그렇게 자신의 ‘말(言)’을 타인의 시각을 통해 다듬어갈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즐거움의 하나일 것이다.
좋은 작문법을 습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같은 경우에는 블로그에 글을 쓸 때,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어요. 글을 다 쓰고 나서 다시 읽어보면 허접해 보이기도 하고, 생각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말과 생각을 글로써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군요. 글 잘 쓰시는 함장님께서 노하우 좀 알려주세요.
가끔 무슨 재미로 살아가고 있을까란 생각을 합니다. 사람이 어차피 태어나서 죽지 못해 사는 거고, 종교인이 만든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게 곧 지옥이라는 생각으로 비참하게 연명하는 것이 현실이라 생각하지요.
왜 비참하냐 하면 우리는 모순 덩어리의 허술한 '국가'라는 단위 속에서 짐짓 선한 표정의 마스크를 쓰고 살아가야 하거든요.
아시다시피 전 노빠이자 유빠죠. 그래서 사실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갈수록 슬펐습니다. 커다란 희망 하나가 서서히 죽어가는 기분이랄까요? 실망감이 아닙니다. 내 생에 - 비록 길지 않은, 이제 곧 서른을 바라보는 웃긴 나이지만 - 이런 정치적 희망이 벌써 사라져간다는 아쉬움. 그런 거죠.
저는 과거만을 보고 자랐습니다. 당연히 미래를 볼 수 없으니까요. 머리가 굵어져가면서 어릴 당시에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재조합하면서. 그 과거는 제게 삶의 길을 던져주듯 스승이 되어 버리죠. 역사란 그런 겁니다.
노무현 정권은 모자란 게 많아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에 있어서 아직도 우리네 나라에서 '집회'가 '허가제'인 것처럼 다루어지고 있죠. 헌법에 보장한 권리기에 '신고'만 하면 되는데 말이죠. 그런데도 과거보다 '무척' 나은 정권이라서 박수를 치고 있습니다. 물론 노무현 정권이 독재 정권이랑 뭐가 다르냐고 윽박지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 비해서 저는 어느새 '왕창' 보수적인 사람이 된지도 모르죠.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보수적이 되어가면서. 차츰 다음에 들어서는 정권들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처럼, 저도 다음 정권이 마음에 안 드는. 그런 보수가 되어버린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중요한 다른 점이 있더군요.
과거로 돌아가긴 죽어도 싫다는 거죠. 구관이 명관인 것도 없고, 늘 부족한 점이 아쉬울 뿐인 겁니다. 그런 부족한 점은 현존 세력이 절대 '정책적'으로 보완할 수 없는 점들이에요. 당연히 민주노동당도 마찬가지죠.
이런데 '보수'라는 단어가 어울릴 수가 없죠. 지킬 게 없어요.
늘 더 나은 삶을 이야기합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이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삶 말이죠.
가볍게 이루어지는 차별. 그 속에 숨은 날카로운 폭력을 볼 때마다 심장이 펄떡펄떡 뜁니다.
젊은 혈기라고요?
이미 제 젊음은 국가라는 폭력 앞에서 무참히 살해된 지 오래입니다.
사람들이 치기 어린 열정으로 치부하는 내 숨 속에 꿈틀대는 분노는 그냥 기분에 따라 흔들리는 불꽃춤사위가 아니라 노도처럼 녹여내며 흐르고픈 용암이고 싶은 겁니다.
빌어먹든 벌어먹든 몸뚱아리 하나 굴려 밥 굶지 않는 법을 알게 된 이후로, 굶는 게 두려워지지 않게 되면서 결국 늘어간 건 건방짐입니다.
원칙에 어긋나고,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고, 최소한의 기본적 소양에 어긋나는 억압에는 직급, 지위 따지지 않고 들이밀고 봅니다. 욕을 바가지로 먹더라도 아닌 건 아니거든요. 좇도 모른다며 구박하는 사람한테는 좇대가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물어봐야 하는 겁니다.
사는 게 참 복잡하고 어렵다고요? 전 이렇게 사는 게 훨씬 쉽습니다. 내 맘대로 지껄여서요? 절대 아니죠.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어서죠. 타인에게 날이선 비수 같은 말로 찔러대서요? 아니죠. 제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어서죠.
존경하는 분과 대화하면서 '다음 선거에서는 결국 한나라당이 되지 않겠냐'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께서는 지나가는 말로 '그렇구나, 이미 한나라당의 집권이 당연시 되는구나'라며 읊조리셨죠.
충격이었습니다.
이건 완전 패배주의예요. 저 스스로 어떻게 그렇게 나락까지 떨어질 수 있었던 걸까요?
희망이 사그러지는 모습은 그렇게 내면의 열정도 잊게 만드나 봅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더 지독한 지옥에 살아보지 못 해서 망각하고 있던, 아예 근원조차 존재하지 않는 기억을 불러낼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들리는 소문에 너의 오만함이 하늘을 찔러 눈에 뵈는 것이 없다고 한다. 이 어찌 된 일이냐, 내 너에게 겸손을 잃지 말라 그리 가르쳤거늘, 어떻게 그리 기고만장할 수 있는 것이냐.
너도 알다시피 네 그런 건방짐은 중고등학교시절부터 계속 지적된 것이렸다. 그만큼 자신감과 자만감을 구분하라 일렀거늘 어찌 그리 우매하게 알아듣지 못할꼬?
예부터 사람은 늘 겸손해야 하고, 많이 알수록 짐짓 모르는 척하고 살아야 순조롭게 어울려 살 수 있거늘, 잘난 것 하나 없으면서 왜 그리 잘난 척으로 사람들의 경멸을 사는 것이냐?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아는 게 많더냐, 아니면 현명하길 하더냐? 그렇다고 더 배운 게 있더냐?
모름지기 사람이란 어울려 살줄 알아야 하는 법. 남보다 잘나지도 않은 주제에 잘났다고 설쳐대면 그 꼴이 우습기가 꼴뚜기질 당하는 것보다 더 우스운 것이다.
건방지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너의 태도와 교만이 문제인 것. 네 스스로 그것을 잘 알면서도 이행하지 않는 것은 독선과 아집으로 가득찬 네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타인을 대할 때 공손함이 첫째로 중요하거늘 네 어찌 자기 스스로에겐 관용만 베풀고 타인에게는 질타만 하느냐? 그러고도 네가 다른 사람들과 더부살이하는 ‘人間’이라 할 수 있느냐?
네가 부정하는 권위주의를 몸으로 이행하려 한다고 타인을 무시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네게도 존중이 다가가며, 그것으로써 권위주의를 타파해야 하거늘, 사람이 모두 평등한 것과 네가 사람을 막 대할 수 있다는 것은 사뭇 다른 이야기다.
물론 네가 타인의 권위주의를 부정하기 위해 비꼬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로 인해 네게 생겨난 부정적 권위는 또 다른 권위주의가 아니더냐? 그것을 비평이라고 부를 거냐? 타인이 쌓아온 가치를 그렇게 쉽게 치부할 수 있느냐? 네 스스로 갖춘 권위도 없으면서 남의 권위를 비웃을 자격이라도 생긴 거냐?
사람은 결국 죽지 못해서 끼니로 연명하며 삶을 살아간다. 그 삶의 길이에는 그만큼의 이유가 있고, 나름의 생각 깊이가 있는 게다. 그런 것을 존중하지 않고, 오로지 이성에만 매달려 타인의 경험의 깊이를 무가치한 것으로 몰고, 몰이해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면. 세상엔 너와 같은 족속만 살아야 하는 것이냐?
차근차근 대화한다고 어떤 사람이 살아온 삶의 무게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이성적이라 하더라도, 삶의 무게는 그것을 이겨버릴 수 있는 한 인간의 처절한 생존 의식이 깔려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 도리어 핏대를 세우고 달려들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타인을 논쟁으로 이길 수 있다는 지독한 아집이며 독선이다.
타인은 바뀌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외부의 영향력에 스스로 바꿀 의지를 가지고 있을 뿐, 그 도화선에 불을 당겨 준다 하더라도 자신들 스스로 도화선을 잘라버릴 능력이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냥 타인을 설득하려 들지 말거라.
그리고 너의 오만방자함은 네 스스로 가진 고유의 영역에서만 펼쳐라.
건방을 떨되, 타인을 불쾌하게 하지 말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