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홍보 기획과 전략이라는 것은 곧 그 기업이 상품화하고 있는 것을 얼마나 예쁘게 포장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한 기업의 ‘이미지’라는 것을 어떻게 포장하고 널리 알릴지, 혹은 숨길지에 대한 고찰도 해야 한다. 여기에는 어디까지를 진실로 할지, 그리고 어디까지를 거짓으로 할지도 포함이 된다.

법이라는 테두리는 늘 최소를 준수하려 노력하기에, 그 법이란 것을 교묘히 피해가는 것은 발상의 전환에서 가져오는, 악마와 하는 거래와도 동일하다. 지식층이 목에 힘줄을 내 튕기며 ‘공중파’라는 매스 미디어의 영향력에 제지를 가하려 여론 운동을 펴는 이유는 그 파급의 힘이 가진 횡포가 무섭기 때문이고, 그것을 이겨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일반 대중의 지식 기반에 대한 우려도 섞여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광고를 통해서 기업의 홍보를 맡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뒤에 서 있는 ‘자본’을 이용하고, 또 그에 과대포장을 해서 일반인에게 지속적인 노출을 하면서 이미지를 ‘세뇌’시키려 드는 것이고, 그로 인해 일어날 일상의 피폐를 막기 위해서 전파를 통해 일어나는, 혹은 신문 지면을 통해 일어나는 ‘광고’라는 것에 대한 ‘규제’를 행하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팬택 계열은 SKY라는 브랜드를 가진 휴대폰 제조업체를 인수하고, 업계에서 이미지 강화를 위해 ‘MUST HAVE’라는 강압적 카피를 통해 사람들에게 ‘세뇌’를 시도했으나 ‘뉴욕과 동남아’라는 시대적 트렌드를 아무런 생각 없이 – 혹은 노이즈 마케팅을 노렸을지도 모르지만 – ‘공중파’에 노출시킨 죄값을 달게 받아야 한다.

물론 우리 모두 이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공중파’를 통하는 TV 개그 프로에서는 ‘동남아’사람들을 희화화 함으로써 국민 전반에게 구시대적 산물인 ‘문화 차별론자’들을 일깨워 냈으며, 교과서에서 ‘인권’과 ‘평등’을 배운 사람들의 허위 의식 속에 깊숙이 박힌 ‘코카서스-유럽인종 우월 주의’를 이젠 아주 당당히 ‘광고’에 쓸 수 있도록 허용한 죄가 더 크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하인이다. 자본을 포장하고, 자본의 더러움을 감추며, 자본의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대한민국 국민 정서에 대단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천민 자본주의’의 물꼬를 연일 터뜨리고 있는, 그리고 그것을 부추기고 있는 ‘광고’들을 보면 볼수록, 과연 그런 ‘광고’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자본의 하위에 있는 사람인지, 기업의 하위에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만민의 상위에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돈’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노출시켜야 하는 거대 ‘기업 광고’는 자신들이 소비자에게서 취해가는 득만큼의 ‘윤리적 책임’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짧은 기억 주기를 가지고 있는 대중에게 나쁜 이미지는 ‘돈’을 통해 쉽게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분명 지성인들은 그 감시의 눈초리를 쉬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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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함장

2006/10/30 09:09 2006/10/3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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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현-꿈에, 그 애틋함의 재 발견


가사를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정현은 참 애틋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가수다.

군대에서 데뷔 앨범을 들으며 얼굴이 참 궁금했던. - 내무실에 TV 따위가 있는 현대와 다르단 말이다 - 도대체 어떻게 생겼으면 이런 목소리가 나올까 했으니 말이다.

대중가요치고, 그리고 멋진 작사가 옆에 끼고 애절하지 않은 노래 없겠지만. 가수의 목소리란 것은 그걸 얼마나 잘 나타내는가가 관건이 아닐까?

2002년 6월. 월드컵으로 정신 없고, 몸뚱아리 하나로 서울로 올라와서 정신 없던 그때. 이 곡이 나왔나보다.

그래서 이런 곡을 놓쳤나 보다.



며칠 전 회사 직원 생일이라 술자리를 갖고 노래방을 갔다가 그 직원이 선택한 이 곡을 듣게 되었다. 그렇게 듣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다.

노래방의 묘미랄까? 가사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듣고 있다보니 새삼 '작사'라는 것이 가지는 힘이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



꿈에라도. 그래 꿈에라도.



아직도 평생 결혼해서 함께 살아갈 사람은 친구처럼 편안하고, 사랑하겠다는 의지와 함께 공유하는 희망을 벗 삼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진리라고 느낀다.

그런데도.

이런 박정현의 목소리를 빌어.

그 애틋함을 느끼며.

잠시나마 공유했던 우리의 사랑과.

그 지나가지 못한 사랑이 아직도 가슴에 박혀 아련한 그리움을 자아내는.

그래서 사랑하지 못하는.



맨 마지막 노랫말처럼.

이제 다시 '사랑'에 눈을 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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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함장

2006/10/24 21:37 2006/10/24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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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얼굴 - 자본을 대하는 태도


크리에이티브 단평을 몇 개쓰면서 듣는 얘기가 뭔 놈의 '자본'에 대한 얘기가 그렇게 많냐는 것과 '자본' 아니면 할 얘기가 없냐는 것이죠.

이 노래는 김광석 때문에 알게 된 겁니다. 이 냥반이 이 곡을 부르면서 울었다고 해서. 어린 날에 찾아 듣고 저도 울었던.

사진은 군대 있을 때 제 모습입니다. 노래가 '못생긴 얼굴'이라는 거라 저 사진을 고른 것이지만 사실 저 사진에는 상당히 많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자본에 휘둘려 제가 어떻게 짓이겨졌는지. 그리고 그 자본을 어떻게 초월해 냈는지.

모든 게 자본 탓이라는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노랫말을 곱씹으며 얘기해 보죠.

못생긴 얼굴이라는 것은, 그것도 열 사람 중에 아홉 사람이 못생겼다고 얘기하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그렇게 '태어난' 모습을 의미하지요. 이건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거라 어쩔 수 없어요. 가난이라는 것도 이와 같은데,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처음에 주어지는 '자본'이 동등하지 않다는 걸 간과합니다. 그런데 사회는 '돈 없는 사람'이 죄인인 마냥 구조를 만들어가지요.

꼭 그렇게만 볼 게 아니냐고 반박을 하는 사람들 - 사실 반박이라고 급을 매겨 주는 것도 웃깁니다만 - 이 불쌍한 이유는 이미 자본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에 접근하기 편리한 구조가 되고, 그게 계속 이어지다보면 고착화가 되는 겁니다.

자본주의의 '자'자는 재물 資, '본'은 으뜸(근본) 本자를 씁니다. 돈이 으뜸이 되는 사회지요. 주로 경제 체제를 자본주의로, 정치 체제를 민주주의로 결합시키면 이상적이라고 저 같은 우파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가끔 '정치 체제'를 무시하고 경제 체제를 사회 전체의 '체제'로 삼아 사람보다 '돈'이 으뜸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자본의 노예이자, 민주공화국의 적이며 우리가 지속적으로 경계해야할 부분인데 그런 '경계'를 위한 구조를 만들 수 있는 권력에 접근하기는 어렵습니다. '자본가'들이 훨씬 쉽게 접근하지요.



우리나라는 땅도 좁은 주제에 부동산 부자는 대박을 쳐 왔습니다. 노랫말에 '너 네는 큰 집에서 네 명이 살지, 우리는 작은 집에 일곱이 산다, 그것도 모자라서 집을 또 사니, 너 네는 집 많아서 좋겠다' 라는 부분이 있죠.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도 사람이 살면서 필요한 것이 '의식주'라고 가르치면서 정작 '주'는 인생의 황혼기에나 자기 것을 얻어볼 수 있습니다.

공급을 늘이면 뭐 합니까. 결국 사는 사람들은 프리미엄까지 얹어가며 사는 땅부자들이며, 꼴에 서민을 가장한 중산층이 재태크랍시고 배운 것이 분양 받아서 프리미엄 받고 더 부자인 사람들에게 팔며 차익을 챙깁니다. '진짜 서민'은 분양. 꿈도 못 꾸죠. 중도금 10년 상환하다가 도태되기도 쉽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개입할 건 개입해야지, 아니하면 죽어나는 게 서민인 겁니다.



노래에서 가장 '강렬한'. '개새끼'가 연발되는 강제 철거 상황. 재개발한다고 TV에서 보여주는 '강제 철거민' 이야기. 실제로 현 정부 들어서서 보상 기준과 보상액은 기존 정부에 비해 나아졌습니다. 그런데도 용역 깡패는 여전히 나타나고, 헌법에서 보장된 주거 자유의 권리 따위, 개무시되는 사회는 결국 '사람보다 자본이 위인 사회'. 재개발을 통한 부가가치를 먹는 사람들은 기존에 살던 사람이 아니라 투자를 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감출 수 없는 현실이지요.

제 아버지가 손수 해머를 들고 우리 집을 헐며. 울분을 감추지 못해 벽면에 빨간 페인트로 쓴 장문의 억울함은 자본가와 그 수호자인 공무원들의 비열함에 대한 증오심보다 가슴에 칼을 갈며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서릿발 어린 눈의 기억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강금실이 며칠 전에 이너뷰를 하면서 이런 무식한 얘기를 했지요. '서민들은 부자들을 규제하기 보다 부자들이 돈을 쓰게 풀어주길 원하더라'는. 정말 철학없는 이야기 아니더이까?

편법 증여에, 자본을 앞세워 온갖 횡포를 부리는 사람들이 돈을 푸는 게 서민에게 돈을 쥐어줄까요?

돈이라는 건 돌고 돌아야 합니다. 가진자 끼리 돈을 돌리면 그건 돌리는 게 아니라 폐쇄된 겁니다. 부자들이 돈을 내어놓지 않으면 세금으로 '뺏아'서 강제로 돌려야죠. '뺏기기'싫으면 법에서 정한 '기부금'이라던가, 자신들이 가진 돈을 돌리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죠.

기업 문화가 재벌 문화로, 복지 사회로 나아가는 발판 조차 갖추지 못한 전근대적 사고를 갖춘 사회에서. 저런 소신과 철학이 없는 정치인이 우먼파워로 나서는 모습은 너무나 아쉽습니다.



전 '수정 자본주의자'입니다. 수정 자본주의나, 자본주의나 무어가 다르냐고 요즘 자본주의가 어디 자본주의냐고, 모든 걸 수정하는 수정 자본주의 아니냐고 얘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적어도 자본이 사람위에 서는 사회는 '수정'되어야. 그게 수정 자본주의 사회죠.

못생긴 사람도 내 아버지의 노동을 자랑스러워 하며 살 수 있는. '인본주의'사회가 되어야죠.

그렇기에 더욱. 노동운동이 대한민국에서 '사람답게 사는' 희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대부분이 노동자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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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함장

2006/10/16 16:58 2006/10/16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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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티브 단평 – 임영근

1930년대 경제 대 공황이 생긴 이유는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서 이루어진 결과인데, 현대사회에서는 사실 소비자의 ‘Needs’로 인해 공급이 이루어진다기 보다 기업의 ‘자본’이 시장을 형성하고 그 시장에 편입된 소비자에게 자신들이 생산한 것을 공급하기 때문에 과거에 이루어졌던 ‘과대 공급’이 가져오는 실패는 드물다. 그런데도 자본들이 불나방처럼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뛰어드는 이유는 ‘고부가 가치’라는 허울 좋은 로또 때문인지도 모른다.

FTA로 인해 스크린 쿼터가 축소되는, 그리고 몇몇 사람들에 의해 ‘영화는 문화가 아니라 산업’이라고 부추겨지며, 한국 영화도 경쟁력이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과연 이 사람들이 영화 산업의 자본 구도를 알고나 하는 소리인가 의구심이 들 때도 많다. 연간 30,000편이 넘는 시나리오가 충무로에 공급되고 그 중 100편 정도가 간택되어 제작이 되며, 그 100편의 총 제작비는 3,000억 원 정도인 국내 시장. 100편이 3,000억 원을 죄다 말아먹고 100편 중 6편 정도만 손익분기를 넘어 2,500억 원 정도의 수익을 벌어들인다. 잘하면 400억이 남는 장사. 잘못되면 1 원 한푼 안 남는 시장.

3,000억 원이면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한 편 제작비다. 세계를 시장으로 하는 산업과 국내 기반을 잡고도 늘 적자만 내는 – 물론 헐리우드 영화 산업도 늘 적자이다. 영화뿐만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하나의 소스로 여러 부가 가치를 팔아 먹지 않는 한 적자로 유지될 뿐이다 – 시장에게 개방을 내어 준다면 이는 자본에 농락될 뿐, 미래는 없다.

반면, 영화 <가문의 부활>을 제작한 태원엔터테인먼트 대표가 ‘오락영화의 존재 필요’를 역설하며 국내 평단에 대한 불만을 서슴없이 토로했는데, 이런 상황을 보면 영화산업의 수익구조가 가진 의의를 돌이켜 볼 필요도 있다. 온 국민 중 복권을 즐기는 국민이 한 건당 1,000원이 들어가는 로또를 사서 매주 어떤 국민에게 확률적으로 몰아주는 시스템과, 온 국민 중 영화를 즐기는 국민이 한 영화 당 7,000원이 되는 – 물론 이 중 3,000원은 극장이 먹고, 1,000원은 영화진흥기금과 세금으로 나가며, 3,000원이 제작사에 떨어져 일반적으로 그 수익은 투자사와 제작사가 6:4 정도로 나눈다 – 극장 표를 사서 재미 있을지, 어떨 지 확인 조차 안된 영화에 비용을 던지는 것은 ‘도박’과 다름없다. 그나마 로또는 천문학적인 확률이라도 존재하지만, 영화를 보고 느끼는 만족감과 ‘7,000’원에 대한 기회 비용의 비교로 얻어지는 결과들은 예측하기 어렵다.

쟝르의 다양성이 존재해야 한다는 핑계로 ‘저질’영화를 양산해내는 시스템을 ‘문화 보호’라는 명목으로 지켜야 할지, 아니면 자본의 논리로 시장 경쟁을 시켜야 할지는 여전히 논쟁 거리다. 하지만 이런 취약한 구조의 영화 산업을 너무 서둘러 개방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 중요한 것은 ‘자유’라는 이름의 뒤에 숨어있는 ‘지배 자본력’의 존재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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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매주, A4 한 장씩. 날로 먹는 근영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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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함장

2006/10/16 11:03 2006/10/1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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